[카일츄린] 별무리 기행
척자츄린 카일츄린 / 전문 10265자
*2.2 메인스토리 완결 이후, 스톤하트 자리에서 내려온 어벤츄린이 열차의 무명객으로 합류했다는 가상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많이 날조했습니다…. 열차 교량 문제라던가
*결제칸 아래는 후기입니다. 별 건 없고 비정기적으로 뭔가 할 말이 생길 때마다 추가됩니다.
*퇴고 안 함… 펜슬은 맞춤법 검사기 기능을 추가하라 추가하라
“방이 없다구요?”
“미안해요, 어벤츄린 씨. 제가 항법사직을 맡은 이후로, 카일루스 외에 무명객을 받지 않아서 침실칸의 객실이 부족해요. 만들라면 만들 수 있겠지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런 이야기네요. 맞죠?”
“엣헴, 열차는 아키비리의 유산 같은 거니까! 교량을 자유자재로 늘리고 줄이는 건 가능하지만 내부 구성엔 시간이 꽤 걸려. 아키비리라면 순식간에 했겠지만.”
“그렇군요, 차장님.”
장갑 낀 손이 폼폼의 머리를 복복 쓰다듬었다. 어벤츄린이 열차에 오른 지 사흘 만에 폼폼은 뛰어난 도박사의 현란한 손놀림으로 받는 쓰다듬에 적응하다 못해 반쯤 중독(?) 되어있는 상태였으므로 차장은 민첩하게 모자를 벗고 그의 손바닥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멋쩍게 웃은 히메코가 다시 은하열차의 전개도를 펼쳤다. 어벤츄린의 손 아래에서 녹아내리는 폼폼을 제외하고, 두 쌍의 시선이 전개도 위를 난잡하게 굴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창고 하나 없으려고…. 아, 그래. 교수 양반이 지내던 객실은요? 페나코니에 오기 전에는 여기서 머물렀다던데.”
“머물렀다고 하는 것도 어폐가 있는 게… 레이시오 교수는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헤르타 우주 정거장으로 돌아갔어요. 여기서 주무시진 않았죠.”
“잠자리 가린다니 진짜네. 뭐… 정 자리가 없으시다면, 이건 어때요?”
어벤츄린이 나긋하게 웃었다.
“친구와 방을 같이 쓰게 해 줘요. 제 방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요. 보아하니, 방은 막상 잘 안 쓰는 것 같던데?”
카일루스가 그 말을 전해들은 건 시스템 시간으로 다섯 시간이 지난 후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벤츄린은 카일루스가 부재하던 다섯 시간 동안 히메코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오붓한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카일루스는 단항과 마치 세븐스에게 말을 전해들은 지 삼십 분만에 그가 벨로보그나 선주에서 한 아름 주워 온 온갖 잡동사니와 *쓰레기*를 대형 청소용 봉투에 밀어넣고 나서야 겨우 어벤츄린을 초대할 수 있었다. 화려한 외형과 어울리지 않는 소형 캐리어를 질질 끌고 카일루스의 ‘아무것도 없는’ 방에 들어선 어벤츄린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친구, 예상은 했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네.”
“죄, 죄송해요! 누가 올 거라곤 생각도 못 해서.”
“뭐, 이 정도면 양호하지. 솔직히 친구가 좋아할 법한 게 굴러다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들의 발치로 숭고한 도덕의 찬사가 회전초마냥 굴러왔다. 굴러올 수 있는 형태의 것이 아닌데….
“음, 됐어! 여기보다 더 엉망인 숙소에서도 자 봤으니까. 친구, 여기서 자?”
“네?”
“여기서 잘 안 자지?”
“네…. 그런데 그건 왜요?”
“아, 너는 잘 때 누가 옆에 있는 거 안 불편해 하나? 그래도 평소처럼 다른 방에 놀러가서 자도 된다고. 별 거 아니야.”
카일루스는 멍청하게 두 눈을 깜박였다. 불편한가? 사람에 대한 적의를 느껴본 적이 거의 없는 어린 아이로서는 결정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가 고개를 내젓자 어벤츄린이 나직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꼭 새의 울음소리 같았다. 공작새 수컷은 울지 않는다고 봤던 것 같은데도.
그는 멍하게 서 있는 카일루스를 지나쳐 널찍한 침대에 풀썩 앉았다. 스프링이 기울어지며 미묘한 불협화음을 냈다. 그게 어벤츄린의 심기를 거스를까봐 카일루스가 미간을 좁혔다. 어벤츄린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그의 시선이 방 곳곳에 닿을 때마다 꼭 잘못을 추궁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토파즈 앞에 섰었던 브로냐의 심정이 이랬을까? 카일루스는 새삼스러운 감정에 휩싸였다….
“무서워?”
“네?”
“화 안 내. 이 정도면 준수한 편이지. 인테리어 같은 세세한 건 지내면서 고치면 될 거고.”
“그러고보니까, 방 만드는 덴 얼마나 걸린대요?”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 폼폼 차장의 기력이 좋으면 더 짧게 걸린다고도 했고.”
“진짜요?”
“열차 주인은 그 쪼끄만 차장님인 것 같으니까.”
겉감이 까만 이불을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느릿느릿했다. 어벤츄린은 두어 번 눈을 깜박이다, 매트리스의 탄력이라도 측정해보려는지 몸을 기울여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새까만 천 위로 밀빛 머리카락이 가느다랗게 퍼졌다. 카일루스도 따라 바닥에 앉았다. 그가 어벤츄린보다 키가 큰 탓에 바닥에 앉아있는데도 침대에 모로 누운 어벤츄린과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그제야 카일루스는, 온갖 화려한 장신구와 그의 일천한 식견으로는 가격을 가늠할 수도 없는 옷감으로 지어 만든 양복을 걸친 어벤츄린 대신 싸구려 천으로 만든 사복과 그 흔한 은반지 하나 없는 카카바샤를 본다.
페나코니의 일이 일단락된 이후, 스타피스 컴퍼니에선 10인의 스톤하트 중 ‘어벤츄린’의 자리를 공석으로 내걸었다. 그는 당당하게 경쟁에 다시 참가해 다이아몬드 부장의 눈에 드는 길 대신 별무리 한가운데를 걷는 길을 택했다. “잘 아시겠지만, 히메코 씨. 이것도 제게는 도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컴퍼니가 과연 저를 가치있게 여길지, 아닐지에 대한 도박 말이에요. 저를 가치있게 여긴다면 컴퍼니가 저를 아직 값비싼 보석으로 여긴단 뜻이고, 아니라면 그건 드디어 제가 자유를 얻는단 뜻이겠죠….”
히메코는 다정하게 웃으며 은하열차의 상투적인 환영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요, 어벤츄린 씨. 은하열차는 무명객을 내치지 않는답니다. 잘 부탁드려요.” 같은 말들.
어벤츄린이 은하열차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진 않았다. 그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스타피스 컴퍼니가 넘겨준 어벤츄린의 업무 실적 보고서, 그리고 토파즈와 베리타스 레이시오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아카이브에 싣기도 어려운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그가 불량 자산을 청산할 때 얼마나 냉정했는지 따위의 업무 평가 보고서를 보다보면, 레이시오와 토파즈는 입을 모아 그를 *불안한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히메코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듯했다. 행운의 여신이 언제나 손을 들어주는 사내였기 때문에 자기파괴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거라는 웰트의 말이 귓가에서 맴돌았다.
그를 연민하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연민이라는 단어는 토파즈에게서는 동정, 레이시오에게서는 위로가 되어 카일루스에게 들어왔다. 하지만 어떻게, 이렇게 지쳐보이는 사람을 연민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손을 뻗어 거뭇한 기가 내려앉은 어벤츄린의 눈가를 매만졌다. 그의 낯에서 색이 진한 것이라곤 삼중안 뿐이라 새까만 장갑을 낀 카일루스의 손이 닿으면 눈을 제외하고는 무서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직.”
“하러 가실래요? 곧 소등하긴 할 텐데.”
“별로 고프진 않아. 친구는? 한창 잘 먹어야 할 나이 아닌가.”
“전 아까 간식 먹고 들어왔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 드셔도 괜찮아요?”
“그럼, 그럼. 걱정하지 마. 잔소리는 더더욱 하지 말고. 설마 너도 교수 양반처럼 나한테 잔소리 할 건 아니지?”
“제가 레이시오 교수님만큼 박학다식하진 않는데….”
“아하하, 그건 그렇지.”
샛노란 속눈썹 아래로 삼색의 짙은 자줏빛 눈동자가 사라졌다. 어벤츄린이 웃은 탓이다. 어깨를 옹송그리고 떨며 웃는 탓에 눈가에 닿은 손가락으로도 진동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게 꼭, 심장 박동과 비슷한 것 같았다. 카일루스는 단항의 아카이브에서 본 수컷 공작새의 구애 행동을 떠올렸다. 복잡하게 짜올린 깃털이 서로 부딪히며 마른 천이 부딪히는 소리를 냈었다. 공작새의 구애 행동은 사람의 심박 수와 비슷할까? 그렇지 않을 거라는 건 어벤츄린이 증명했다. 공작새처럼 화려한 옷과 장신구로 몸을 부풀렸던 페나코니의 어벤츄린은 이렇게 웃지 않았으니까.
카일루스는 무어라 말을 덧붙이는 대신 손을 거두곤 침대 위로 슬쩍 기어올라갔다. 침대가 넓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까지 올라가니 제법 비좁았다.
“그럼 좀 잘까요?”
“벌써 자려고?”
“어벤츄린 씨도 피곤해보이는데요.”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그럼 같이 자요. 어차피 내일 아침이 되면 폼폼이 깨워줄거에요.”
“오, 차장님이 바쁘네. 내일 아침 메뉴는 뭐야?”
“어… 프렌치 토스트에 구운 베이컨과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아마 히메코 씨의 커피도 있을 거구요.”
“그건 마음에 드네. 잘 거지?”
대답 없이 시간을 끌고 있으니 어벤츄린이 의아한 낯으로 올려다보았다. 어벤츄린을 비유할 새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카일루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그는 더 이상 공작새가 아닐테니까….
“네. 잘 자요, 어벤츄린 씨.”
“잘 자, 친구.”
이내 정갈한 숨소리만이 남았다.
히메코와 웰트의 걱정이 무색하게 어벤츄린은 무명객의 일상에 쉽게 적응했다. 종종 튀어나오는 컴퍼니만의 용어가 아니었으면 히메코보다 더 오래 열차에 있던 무명객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가끔 그가 내뱉었다가 정정하는 단어의 뜻을 물어보면 의뭉스러운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넘어간 탓에 마치 세븐스와 카일루스는 매일 같이 아카이브실에 틀어박혀 단항의 얄팍한 경험을 탈탈 털어댔다. 그럴 때마다 단항은 말단직에서 일해서 P15 이상의 암구호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런 일이 있었노라고 잠들 준비를 하는 어벤츄린에게 털어놓으면 그는 또 웃으면서 알 거 없다고 대답을 피하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카일루스는 그가 잠결에 무언가 끌어안는 -물론 카일루스였다- 버릇이 있노라고 말해주려다가 그만두었다. 이런 걸로 흔들릴 사람이었으면 페나코니에서 본인 목숨을 칩으로 걸진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말하는 대부분의 속어가 도박판 용어였다는 건 아주 나중에 레이시오를 통해 알았다.
“어벤츄린 씨는 열차에서 뭐 해요?”
“응?”
“도박은 안 하잖아요.”
“여기서 판을 벌려서 뭐 해? 재미도 없는데.”
“그럼 우주 정거장은요?”
“글쎄, 지니어스 클럽 소속의 정거장을 칩으로 걸고 하면 조금 스릴 있을지도.”
어벤츄린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일루스가 멍청하게 눈을 깜박이자 잘 준비를 하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 친구?” 하고 웃는 소리가 매력적이었다. 카일루스는 그 언젠가, 페나코니에서 어벤츄린이 웃을 때마다 같이 흔들리던 공작석 귀걸이의 소리를 떠올렸다. 그때 어벤츄린이 어떻게 웃었더라? 기억을 되짚다보면,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이 가볍게 카일루스의 이마를 밀어냈다.
“날 앞에 두고 다른 생각을 하다니, 맹랑하네.”
“… 여기가 카지노였으면 뭐라고 해요?”
“노 리밋 게임*인데도 정신이 없어서야 쓰나.”
*베팅의 제한이나 상한선이 없는 게임
“어벤츄린 씨는 제한 같은 거 신경 안 쓰잖아요.”
“보통은 스트레이트 플러시라도 받았냐고 묻지.”
다음엔 포커를 가르쳐달라고 할까. 카일루스는 잡다한 생각을 하며 어벤츄린의 잠옷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어벤츄린이 스타피스 컴퍼니의 숙소에서 가져온 것 중 가장 귀한 것이었다. 어벤츄린 자리는 아직도 공석이었다. 그러니 그의 사무실과 숙소는 여전히 카카바샤의 귀한 것들로 치장되어 있을 것이다.
“무슨 뜻이에요?”
“속설이긴 하지만 그런 패가 뜨면 불행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거든.”
“어벤츄린 씨는요?”
“제일 높게 받은 패가 로얄 스트레이트 플러시라 모르겠네?”
하지만, 그 사무실과 숙소에서 가장 귀한 것은 홀로 남은 에브긴이 아니겠는가…. 지모신의 축복을 받은 아이. 모든 게임에서 승리하는 사람. 모르긴 몰라도 다이아몬드 부장이 그런 인재를 놓칠 것 같진 않단 생각이 들었다. 카일루스는 하얀 줄이 들어간 잠옷을 만지작대는 것을 그만두고 바닥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침대 위에 엎드린 채 턱을 괴자 자연스레 어벤츄린을 올려다보는 자세가 됐다.
“우리 별 보러 가요.”
“은하열차가 아스다나 은하계에 정박해있는 이상은 안 보일텐데.”
“아이, 반대편은 보이죠. 홀로그램으로 보는 방법도 있고.”
“별 읽을 줄 알아?”
“… 대충은?”
“배워 와. 그럼 같이 봐 줄게.”
“진짜요?”
“내기엔 정당한 보상이 있어야 하니까. 단, 기한은 하루야.”
“네?”
어벤츄린이 웃었다.
“말했지? 내기라고.”
종종 카일루스가 늦은 밤에 자신의 방으로 기어들어가면, 어벤츄린은 창틀과 가까운 침대 안쪽에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그런 상태면 카일루스가 옆에 걸터앉아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도 별 반응이 없었다. 금방 본인 방이 생길거라며 짐도 제대로 풀지 않은 탓에 카일루스의 방은 여전히 삭막하고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어벤츄린은 카일루스의 방을 잠만 자는 공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방 주인과의 스몰 토크는 그의 *계약*을 연장시키는 수단이라고 여기면서….
-어벤츄린? 아, 컴퍼니에서도 방에선 잠만 자긴 했어. 매일 밤늦게까지 카지노에 있다가 들어갔으니까?
-그 녀석? 원래 잠 안 자기로 유명했다. 새벽 네 시까지 도박장에 죽치고 있는 걸 친히 배달해준 적만 열 번이 넘지.
불쾌함이 뱃속 깊은 곳에서 들끓는 것 같았다. 그럼 제게 보여준 다정함도 전부 수단이었나? 어벤츄린은 열차에 올라서도 주변을 재고 판단하며 손익을 계산하던가. 그러나 그는 일평생(그래봤자 1년 살았다) 믿어온 직감을 다시 믿기로 했다. 어쩌면 그런 행동들은 그의 삶의 일면이겠거니, 싶은 마음으로 인내하기로 했다. 어벤츄린이 제게 보여주던 웃음마저도 연기로 생각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그 어벤츄린이 신뢰하지 않는 사람의 방에서 그렇게 무방비하게 잠들겠는가?
“… 배우는 게 어렵다고 별자리 지도를 다 뜯으면 안 돼, 카일루스.”
“앗.”
정말 화나지 않았다. 아무렴.
아스타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새 별자리 지도와 망원경을 선물해주었다.
“진짜 하루만에 다 배워왔어?”
“전문적인 수준은 아녜요. 아, 관람칸 추우니까 담요 두르고 계시는 게 좋을텐데.”
“하루만에 하늘에 있는 모든 항성 간 연결 관계를 알 만한 사람은 교수 양반밖에 없을 걸. 너는 안 해?”
“전 추위 안 타죠.”
폼폼과 웰트가 뚝딱뚝딱 고쳐 만들어준 천체 투영기를 켜자 블라인드를 내린 관람칸이 온통 별무리로 물들었다. 그들은 친절하게도 작동자가 서 있는 위치에 아스다나 은하계가 나타나도록 설계해주었다. 발 아래에 있는 페나코니의 이름을 발로 꾸욱 눌러보던 어벤츄린이 고개를 들었다. 뿌듯한 얼굴의 카일루스가 지도를 든 채 어벤츄린을 향해 웃고 있었다.
어벤츄린은 많은 것을 기억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중엔 츠가냐의 별하늘이 있었다. 카카바샤는 그 하늘을 기억하려고 했다. 카티카의 별자리 신화에 어떤 결함이 있는지 따위를 궁금해했었다. 카티카의 신화를 알아서, 에브긴이 카티카를 이기던 날 절벽 위에서 너희의 신화는 비열하고 간사하며 같잖기 짝이 없다고 외치고 싶다는 치기 어린 소망을 품었던 때가 있었다. 츠가냐는 비가 오지 않는 대신 눈이 시릴 정도로 하늘이 맑았기 때문이다….
컴퍼니에 들어가서도 어벤츄린은 종종 위를 올려다봤다. 불량 채무가 있는 행성의 별하늘은 대부분 그때의 츠가냐처럼 시릴 정도로 맑았다. 가난과 낭만은 같은 길을 걸었다. 부호의 이상과 낭만은 동일어가 될 수 없었지만 빈자의 이상은 낭만으로 포장되곤 했다. 어벤츄린은 가끔 그가 채무를 청산한 행성으로 몰래 시찰을 나갔다. 어두컴컴해진 하늘과 바닥에 늘어붙은 낭만을 보고 돌아오는 날엔 포커도 칩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비정기적인 컨디션 난조였다. 그런 날엔 제이드에게 질책을 받는 일이 잦았다. 어벤츄린은 그럼에도 별하늘을 보는 걸 포기할 수가 없었다. 선명한 별하늘이 불행함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도.
“… 어디까지 익혔어?”
“네?”
“정거장에 간 거 아니야? 헤르타 우주 정거장에서 아스다나 은하계는 관측 불가 지역일텐데.”
“헤르타 씨가 그걸 신경쓰진 않을걸요. 그냥, 뭐… 방향 읽는 법이랑, 그런 거 배웠어요. 저기, 저 끝에 있는 게 더 블루잖아요. 저기서 일직선으로 달리면 페나코니가 나와요….”
단어에는 정보가 있다. 그 사람의 배경, 생활 패턴, 버릇, 선입견과 편견 따위가 단어를 주관적으로 규정한다. 카일루스에게 페나코니는 개척 여정의 한 켠, 향락의 도시, 꿈에 부재한 죽음, 뭐 그런 것일테다. 그가 판을 짜고 아케론이 세우고 스텔라론 헌터가 피날레를 장식해 열차가 끝맺은 행성과 그 주변을 설명할 때마다 들떠보이는 것이 아무래도 그의 머릿속 페나코니는 죽음보다는 향락과 즐거움이 더 큰 것 같았다. 어벤츄린이 페나코니를 컴퍼니의 땅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한 것과는 다르게. 컴퍼니의 땅 중에서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긴 하다만은….
어벤츄린은 그의 설명 속에서 헤르타 우주 정거장의 총책임자를 떠올렸다. 답잖게 명료하고 간결한 설명이라더니, 그 똑부러지는 -소비 습관은 전혀 그렇지 않은- 아가씨가 별지도며 지식 따위를 알려준 것이 분명했다.
“카일루스.”
“네?”
“별 좋아해?”
“네, 좋아해요. 예쁘잖아요. 반짝거리고.”
“그럼 내 눈은?”
“… 네? 무, 무슨 소리를, 네??”
그는 눈앞의 어리기만 한 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카바샤는 철이 지나치게 일찍 들었고 주변엔 어린 나이에 성숙해진 사람들만 있었으므로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구김살 없는 자를 보는 것은 또 오랜만이었다.
“좋아하는 것 같길래.”
“네??”
“너 밤마다 내 눈가만 만지작거렸잖아. 별 같았어?”
“그, 그으건.”
눈을 곱게 접어 웃자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는 게 제법 놀려먹기 좋은 상대였다. 어벤츄린이 어깨를 떨며 웃었다. 담요가 미끄러져 매끈한 관람칸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어벤츄린은 한 걸음, 두 걸음 가까이 카일루스 앞으로 바짝 붙어 섰다. 플라네타리움 투영기가 회전하며 그들의 머리 위로 아스다나 은하계를 드리웠다. 이제 그들은 개척 열차가 앞으로 지나가야 할 여로를 밟고 섰다. 어벤츄린이 그 여로에 완벽하게 동행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하, 농담이야. 에브긴 사람의 눈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그것도 씨족이 살아있어야 통용되는 말이지. 눈은 재생하지 않고 신체에서 떨어져나간 건 아름답기는 커녕 소름돋는 것이니까….”
“그, 그런가요.”
“한쪽 정도는 내어줄 수 있어.”
“네?!”
“이래보여도 에브긴의 유일한 생존자의 눈이야. 소름돋긴 해도 암시장에선 억을 호가하는 사치품일걸.”
“그런 말 마세요….”
“농담이야. 눈을 사느니 별을 사는 게 더 낫지. 적어도 그건 하늘에서 반짝거리긴 하잖아.”
어깨를 가볍게 밀어내자 카일루스는 쉽게 두어 걸음 물러났다. 어벤츄린의 머리 위로 별들이 반짝이다 그림자를 드리웠다. 투영기의 배터리가 거의 다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는 시선을 올려 카일루스가 합류한 이래 지나온 행성들을 헤아렸다. 헤르타 우주 정거장, 야릴로-XI, 선주 나부…. 그가 엉망진창인 여정을 겪었더래도 그 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건 그 과정에서 맺은 인간 관계에 애정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어벤츄린의 여정 내내 없던 것이 카일루스에게는 있었다. 그러니 열차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겠나…. 만일 그가 카일루스였다면 그러지 못 했을 것이다.
“어벤츄린 씨.”
“응.”
“전 어벤츄린 씨가 더 예쁘다고 생각해요.”
“… 응?”
카일루스는 거짓말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본인이 선의나 악의를 꾸며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가끔 레버리 호텔의 밝은 빛을 등지고 침대에 앉은 어벤츄린을 볼 때마다, 남자의 밀빛 머리카락 위로 흩어지는 빛을 볼 때마다 그 잔상이 별 같다고 생각했다. 어벤츄린은 빛을 받으면 별처럼 반짝이는 사내였다. 그건 천체 투영기 아래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명제였다. 카일루스는 바닥에 떨어진 담요를 주워 어벤츄린의 어깨에 다시 둘러주었다.
“진짠데.”
“그래?”
“아니었으면 제가 맨날 어벤츄린 씨랑 같은 방에서 안 잤겠죠.”
“오, 이제 다른 열차 친구들은 안 예쁘단 뜻이야?”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제가 애정을 주고 싶었어요. 저는 원래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
“그렇게 안 하면 어벤츄린 씨가 또 어딘가로 갈 것 같았어요.”
사실, 카일루스의 삶은 상실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이유에선지 카일루스는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전부 모으고 보관해야 하는 성격으로 자랐다. 제 방에 들어온 이상 그건 제 소유물로 기능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열차 사람들은 카일루스의 엉망인 방을 보고 나서도 엉망인 정리정돈을 나무랄지언정 그런 버릇이 나쁜 거라곤 하지 않았다. 카일루스의 애정은 무기물과 유기체를 구분하지 않았다. 어떨 땐 그게 마치 세븐스가 쥐여준 폼폼 인형이 되기도 했고, 처음 제 방에 놀러와 어떻게 해야 *소장품*을 좀 더 매력적으로 진열할 수 있는 지 알려준 단항이 되기도 했으며, 망가진 강아지 모양 장난감이나 유독 카일루스만 따르던 작은 새가 되기도 했다(그 새는 아젠티를 따라갔다).
카일루스의 애정은 대체로 그런 식이었다. 그는 그의 품에 들어온 것에 제 존재를 새겨넣는 식으로 애정을 전했다. 언젠가 그것이 제 품을 떠나더라도, 그를 생각할 수 있게. 카프카의 아래에서 자란 탓인지 그의 사랑 방식은 스텔라론 헌터를 쏙 빼닮았다.
“카일루스.”
“그러니까, 음…. 그냥 그렇다구요. 어벤츄린 씨가 불편하다면 안 하겠지만.”
그러나 명민한 개척자는 알고 있다. 영악한 도박사도 알고 있다. 어벤츄린은 별이 쏟아지는 관람칸 아래에서 웃던 카일루스를 잊지 못하리라. 불행을 뜻하지 않는 별하늘이 어벤츄린에게는 얼마나 반갑겠는가? 그가 은하열차에 내려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나간다고 해도, 어벤츄린이 고개를 들어 검푸른 비단에 촘촘하게 박힌 새하얀 별을 볼 때마다 카일루스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달갑진 않았지만 못 미더워할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어벤츄린은 손을 뻗어 카일루스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온기가 맞닿았다.
일생 중 가장 기꺼운 행운이었다.
-결제칸 아래는 후기와 잡설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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