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만이
공미포 8,053자
* 2023. 07. 23 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입니다
* 1.2 스포일러 주의! 1.2 메인스토리를 끝까지 진행한 뒤에 열람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 공식과 다른 설정 주의
* 단항카일
* 글 제목은 4성 광추에서 따왔습니다
* 1.2 스토리 다 보고나서 그 장면이 자꾸 생각나서 급하게 썼습니다. 지금 안쓰면 서서히 1.2 뽕이 식으면서 영원히 안쓸 것 같아서 진짜 급하게 썼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이번에도 급하게 쓰느라 퇴고를...안했기 때문입니다.... 날 밝고 시간 여유가 된다면 다시 한번 확인해보겠습니다....
"……헉, 허억……."
몸을 일으켜 앉은 것이 먼저였는지, 정신을 차린 것이 먼저였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눈을 뜨고 있는데도 사방이 어둡다. 각성은 갑작스러웠고, 그는 자신이 여전히 무저갱에 고개를 처박고 있는지, 아니면 마침내 깨어난 건지 얼른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이런 적은 없었는데―
눈을 문지르는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차가운데다 덜덜 떨리고 있어서 제 몸이 아닌 양 낯설었다. 손을 적신 게 전부 다 식은땀인 줄 알았는데, 조금 늦게 눈물도 섞였다는 걸 알았다. 어둠 너머까지 꿰뚫어보았던 눈은 여전히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자료실에 설치된 다양한 설비가 내는 낮은 동작음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썼다. 작게 우웅, 하는 소리로 자신이 꿈에서 깨어났음을 실감하자, 어찌할 도리도 없이 눈물이 쏟아진다. 꿈에서 뭘 봤더라? 생각은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하고 눈물에 떠밀려 흘러내린다.
몸을 웅크리고 어떻게든 숨을 고르려고,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눈은 괜찮을 것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만 해도 멀쩡했으니, 아마 금방 다시 보일 테지. 별일 아니야. 그 무엇도 잘못되지 않았다―
쓰으윽, 하고 무언가 길게 끄는 듯한 소리가 그의 주의를 끌었다.
"……단항."
이름을 부르고는 싸늘한 어깨를 끌어안는다. 닿아오는 것은 늘 그렇듯 따스한 몸이다. 지독히도 추웠고, 단항은 머뭇거리면서도 동료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맞닿은 몸에서는 인간의 것보다 조금 느린 박동이 느껴진다. 스텔라론도 전신으로 피를 보내는 걸까? 심장처럼? 단항은 파멸의 씨앗이 어떻게 한 사람을 살게 하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스텔라론의 느릿한 울림이 목숨줄 같았다.
"……."
"……."
얼음장같은 몸이 충분히 따뜻해졌는데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좀 더 이렇게 있었으면 좋겠는데. 조금만, 조금만 더. 동료의 허리를 감은 팔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있다는 걸, 상대가 슬슬 불편해하는 걸 알았다. 스텔라론의 박동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으윽, 단항, 날 쥐어짤 셈이야?"
부러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면서도,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퍽 상냥하다. 두어 번 더 쓸어내린 뒤에는 가볍게 툭툭 두들긴다. 이제는 정말로 놓아주어야 했다. 단항은 팔을 풀어내고는 천천히 물러났다. 자료실은 어두웠지만 곳곳에 놓인 이런저런 설비가 희미하게 빛을 뿜어내서, 사물의 윤곽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다. 남들보다 눈이 밝은 단항에게는 이 정도 광량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상대의 조금 당황한듯한 웃는 얼굴을 보고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얼굴을 붉히기에 충분했다는 뜻이다.
"음, 아직 안 잘 거지? 잠깐만."
동료는 재차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는 자료실을 나섰다. 혼자 남은 단항은 시뻘게진 얼굴로 독서등을 꺼내 불을 켰다. 깊은 잠을 못 잔다는 것, 가끔 꿈자리가 사납다는 것 정도는 룸메이트도 잘 알고 있다. 제가 먼저 말을 꺼내기도 했고, 자다 깨는 모습을 몇 번 보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을 보인 것도 모자라 그 품에 안겨서 떨어지기 싫다고 고집을 부렸다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무저갱에 얼굴을 처박고 있을 때의 두려움 같은 건 이미 잊어버렸다. 싸늘하게 식은 몸에서는 이제 열기마저 오르는 것 같다.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 이젠 너무 잘 보여서 부담스러울 정도다.
적어도 이삼 일간은 놀림거리가 될 만한 행동을 한 게 정말 제 의지였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동료가 돌아오면 뭐라고 말해야 그 입을 막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데, 자료실 문이 열리더니 평소와 완전히 똑같은 표정(희미한 미소 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으로 들어온다. 양손에 각각 하나씩 머그잔을 들고서.
"따뜻한 게 좋아? 아니면 찬물?"
온기가 오르는 쪽에서는 익숙한 향이 났다. 자신이 즐겨 마시는 차였다. 평상시였다면 고를 것도 없이 따끈한 김이 오르는 차를 받아들었겠지만, 지금은 정신을 좀 차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단항은 찬물이 담긴 머그잔을 청했다.
"폼폼한테 혼났어. 밤에 자꾸 뭐 먹지 말라고."
그러더니 차를 한모금 맛보고는 투덜거린다. 물 마시러 나온 것뿐이라고 말했는데 안 믿더라니까?
그야 네가 밤늦게까지 게임하다가 간식 가지러 갔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니까,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카일루스가 가져온 간식은 그도 가끔 얻어먹었으니까. 아카이브를 정리하다가, 입가에 대어주는 걸 아무 생각 없이 받아먹고 나서는 조금 당황했는데, 같은 일이 반복되자 룸메이트가 무언가를 먹여주는데 그다지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습관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이제는 남들 앞에서도 먹여주는 걸 받아먹지 않을까 주의해야 할 판이다. 다행히 동료도 보는 눈이 있을 때는 그나마 점잖게 구는 편이라 아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고마워."
따스한 포옹과 머그잔에 대한 감사나 눈물로 축축해졌을 어깻죽지에 대한 미안함, 아무것도 묻지 않는 배려심에 대한 걸 전부 다 늘어놓기에는 말주변이 부족했다. 결국 세 음절로 뭉뚱그릴 수밖에 없었는데도 동료는 알아들었다는 듯, 소리없이 웃더니 차를 한 모금 삼킨다.
"좀 떫다. 이걸 대체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맛보다는 향에 집중해봐."
"으음."
"……."
"그래도 맛 없어."
이번에는 단항이 소리 없이 웃을 차례였다. 기분이 상당히 나아졌기에, 해야 할 말을 꺼내는 데도 주저하지 않을 수 있었다.
"미안해. 아깐 놀랐지."
그러자 카일루스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눈동자를 굴리다가 조금, 이라고 대답했다. 그의 룸메이트는 속마음을 능숙하게 숨기질 못하다 보니 되려 솔직하게 굴고는 한다.
"오늘 일은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해줬으면 해. 다들 걱정할 테니까."
시력에 문제가 있지는 않은듯하니, 막 깨어났을 때 눈이 보이지 않아 당황했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리고 꿈에 관한 것도. 단항은 카일루스가 어떤 꿈을 꿨는지 이후에도 캐묻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게 궁금했다면 이미 몇 번이고 물었을 테니. 기억나는 건 빛 한 줌 없는 무저갱에 머리를 욱여넣고 있는 것뿐이었다고, 그리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동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침묵만이
단항 × 카일루스(남개척자)
비밀 (祕密)
[명사]
1. 숨기어 남에게 드러내거나 알리지 말아야 할 일.
2. 밝혀지지 않았거나 알려지지 않은 내용.
3.
[불교 ]
불교 참된 의미를 숨기고 가르침을 설하는 것. 언어나 문자 따위의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전할 수 없는 깊은 뜻을 만다라, 인계(印契), 다라니, 의례 따위의 상징적인 방법을 통해서 나타낸다.
[유의어] 기밀2, 기요3, 내밀
간단히 설명하자면 입에 함부로 올려서는 안 되는 것, 정도가 되겠다. 단순히 단어 뜻을 몰라서 찾아본 건 아니었다. 아무리 미지의 손길에 의해 과거가 도려내어 졌다고 해도, 이런 것마저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때 보았던 표정이 머릿속 한구석에 계속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은하열차의 경호원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악몽이란 건 뭘까? 단항이 그렇게까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궁금하기는 했다. 꿈에서 뭘 봤는지 조금도 궁금하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본인이 입에 올리고 싶어하는 기색이 아니었고, 싫다는 걸 억지로 캐묻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아카이브와 단말의 연동을 끊자, 얼마간 빛나던 액정이 캄캄해졌다. 검은 화면을 내려다 보면서 의식도 이렇게 끊을 수는 없는 걸까, 하고 궁리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카일루스는 생각이 멋대로 흘러가게 두었다. 룸메이트는 잠시 자리를 비웠고, 당면한 개척임무도 없어 급할 것도 없었으니.
단항의 두려움은 악몽 그 자체가 아니라 비밀이 탄로 나는 게 아닐까?
은하열차의 경호원이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건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다. 폼폼은 밤에 식당으로 들어오는 저에게는 잔소리하지만, 단항에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차장이 손수 우유를 데워 내놓거나 차를 끓여 내어주는 것을 자신도 몇번 봤고.
하지만 악몽은?
객실 방음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지는 몇 번의 사소한 사고 끝에 입증되었다. 실수로 책상이나 의자 자리를 걷어차거나,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거나, 룸메이트에게 장난치다가 뒤엉킨 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이불 위로 쓰러져도 밖으로는 조금도 새어나가지 않는다. 만일 소리가 새어나갔다면 마치세븐스는 조용히 좀 하라며 투덜거렸을 거고, 웰트 씨나 히메코 씨의 입에서도 너무 늦게까지 깨어있는 건 좋지 않다는 말이 나왔을 테니까.
단항이 주기적으로 악몽에 시달린다는 건, 그것 때문에 울면서 깨어나기도 한다는 건 현재로서는 열차 내에서 저밖에 모르는 일이다. 빈말로도 속내를 숨기거나 거짓말에 능하다고 하기는 어려운 사람인.
단항 입장에서는 타인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들을 깨지기 쉬운 상자 안에 담아둔 기분일지도 몰랐다. 그제야 카일루스는 언젠가 동료가 했었던, "솔직함은 미덕이지만, 그게 언제나 너에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야."라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열차팀이 꺼내는, 불면증에 대한 염려 섞인 말에 조금 딱딱한 표정을 짓고 마는 걸 보면, 단항은 여전히 어쩔 수 없이 나누게 된 비밀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불편한 기색을 감추는데 능숙한 사람이 같은 주제에 매번 같은 반응을(잠깐 얼굴을 굳혔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는) 보이는 걸 보면, 아무리 인간관계에 서툰 카일루스라고 해도 깨닫고 마는 것이다.
그는 최근 룸메이트의 상태를 떠올려보았다. 불면증은 여전하지만 전처럼 심한 악몽에 시달리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일을 언급하기에 적당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비밀을 나눈 데에서 오는 불안함이나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모른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비밀을 꺼내놓고 만 사람에게 믿음을 심어주는 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을 거다. 똑같은 일을 이번에는 이쪽에서 나서서 하면 되는 일이다.
그래서 어느 한적한 날 저녁 단항은 영문도 모른 채 룸메이트에게 불려 가 이부자리 위에 앉게 되었다. 옆구리에는 막 읽으려고 꺼내 들었던 책을 끼고서.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나도 단항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단항도 내 비밀을 알면 공평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너도 덜 불안할 것 아냐."
그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그런데 그 정도로 티가 났나? 단항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입가를 매만졌다. 감정을 숨기는 건 손바닥 뒤집듯이 쉬운 거라고 생각했는데 간파당했을 줄이야. 의표를 찔린 것과는 별개로, 그날 저는 단지 운이 좀 없었을 뿐이고, 룸메이트는 그런 제 일에 엮었을 뿐이다. 이렇게까지 생각해준다니 솔직히 말하자면 기쁘지만, 동료의 내밀한 사정이 저 때문에 파헤쳐진다고 생각하면 또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온갖 기행을 일삼는 사람이 꼭꼭 감춰둔 비밀이다. 거짓말이나 심리전에 서투른 그가 각고의 노력으로 숨겨두었을.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단항은 카일루스를 만류하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보냈을 뿐.
"이건 비밀인데,"
이어지는 말에는 주저하는 기색이라곤 없었다. "―열차팀 중에서 네가 제일 좋아."
옆구리에 끼고 있었던 책이 이불 위로 툭 떨어졌다. "……뭐?"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란 걸 단번에 알아들었다. 알아들었음에도 얼굴로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우정, 동료애, 한 공간을 공유하는 상대에게 가볍게 할만한 말 아닌가? 단항은 침착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히메코 씨랑 웰트 씨는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고, 마치세븐스는 재미있는 친구야."
네가 마치세븐스를 재미있어하는 것보다는 마치세븐스가 널 흥미롭게 여기는 마음이 훨씬 클걸.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음에도 여전히 얼굴이며 목덜미가 뜨끈뜨끈했다. 얼굴을 식힐만한 생각을 해야 했다.
"폼폼은 혼자서 이렇게 큰 은하열차를 움직이는 걸 보면 아마 전 은하에서 폼폼만큼 열차를 잘 다루는 차장은 없을 거야. 굉장하다고 생각해."
낮에는 개척임무 때문에, 밤에는 자료실에서 함께 잠들다 보니 본의 아니게 종일 붙어있는 때가 많았다.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필연적으로 부딪치기 마련이다. 별것 아닌 걸로 충돌하고, 사소한 일 때문에 웃다 보면 아무래도 상대를 좀 더 친밀하게 느낄 수밖에 없겠지. 그게 아무리 과묵한 경호원이라고 해도.
"그리고 가끔은 발바닥이나 귀도 만지게 해줘."
카일루스에게는 동성의 또래 친구가 없었다. 야릴로에서 만나 연락처까지 교환한 삼포와 게파드는 카일루스보다 연상이었고, 그리 자주 만나는 편도 아니었으니 어쩌면 자신이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생긴 동성의 또래 친구일지도 모른다. 그래, 이런 조건이 겹치면 열차팀 중에서 네가 가장 좋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 동성의 또래 친구의 무릎을 베고 눕거나, 춥다고 하면 온기를 나눠주겠다며 다가오나? 손을 잡거나 몸을 기대는 건? 악몽이 뒷덜미를 잡아채기 직전에 부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깨어나고, 울면서 깨어난 날에는 위로하는 말 대신 가벼운 포옹으로―
그날 일이 떠오르고 말았다. 이젠 귀까지 빨개졌을지도. 단항이 마른 세수를 하든 말든, 룸메이트는 입을 다물 생각이 전혀 없는듯했다.
"좋은 사람들뿐이지만 그중에서도 네가 더 좋아."
정말이지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되었다. 열차팀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뭔가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마치세븐스가 두고두고 놀려먹을 걸 생각하면 조금 아득하지만, 어쨌든) 하여간 엄청난 비밀이다. 너무나도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내밀을 엿본 나머지 아직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하지만 열차팀은 항상 단결해야 하는데, 단결하려면 누구 하나만 더 좋아하면 안 되잖아? 모두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해야겠지?"
……아직 안 끝났어? 이제 되었다고, 충분하다고 만류하고 싶은 마음과 좀 더 듣고 싶다는 마음이 뒤엉킨다. 단항은 입을 열거나 하다못해 손짓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좋아하는 마음을 똑같은 크기로 나누려고 했거든. 다섯개로 나누려고 했는데, 여전히 널 좋아하는 마음이 제일 커."
"이거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다?"
그 말을 굳이 귓가에 속삭일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료는 비밀을 비밀스럽게 다루기로 마음먹은 모양인지, 마지막 말을 단항의 귓가에 속삭이고는 물러났다. 그는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걱정하지 마. 비밀은……. 비밀은 지킬게. 그리고……."
"네가 우리 중 특정 인물을 더 좋아한다고 해서 열차팀이 쌓아온 신뢰가 흔들리는 건 아니니까……."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목소리는 그만 끝맺음 없이 흐려지고 만다. 잠깐, 이거 꼭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편애 부탁드립니다, 하고 말하는 것 같잖아. 하지만 그가 뒤늦게 뱉어낸 말에 후회하는 동안 동료는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
쏴아아, 밀려온 파도가 모래를 한 움큼 갉아내고는 도로 바다로 돌아간다. 파도가 밀려오고, 쓸려나가고, 다시 밀려오며 파헤쳐지고 채워넣는 일이 곳곳에서 반복되었다. 카일루스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부분을 보았다. 노려보았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파도 소리에 인기척이 섞인다.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에도 그는 고집스럽게 흐린 하늘과 탁한 바다가 맞닿는 부분에만 시선을 두었다.
카일루스는 단항이 곁에 서는 것을, 망설이는 기색을 고스란히 느낀 뒤에야 그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나부에 도착한 뒤로 이렇게 마주 보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시 만나게 되면 물어볼 것도, 하고 싶은 말도 많았는데. 하지만 재회의 순간을 침묵으로 보내게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겠지.
"……."
"……."
침묵을 깬 것은 단항이었다. "궁금한 거 없어?"
카일루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그의 입을 열게 할 수 없다. 그게 설령 동료이자 연인이라고 해도.
"……나중에라도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알려줘."
그 말에 카일루스는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왜 숨겼느냐고? 듣고 싶지 않다고? 이제 설명은 필요 없다고? 하지만 카일루스가 그러했듯, 단항 또한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단항이 몸을 돌려 석상 앞으로 걸어가 서는 것을 본 카일루스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흐릿한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을 눈에 담았다. 공기가 흔들리더니 이내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시작되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카일루스는 자료실 한쪽 벽에 걸린 전자시계를 보았다. 이제 막 오후 아홉 시 오십구 분을 지나고 있다. 벽에 시계를 달자고 한 건 저였고, 고르는 건 둘이 같이했었다. 시간이야 단말로도 확인할 수 있지만, 시계를 따로 두면 시간 배분과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말을 지나가듯 들었던 것이 생각나 제안했고, 자료실 주인이 괜찮은 생각이라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길로 끌고 나갔던가.
그는 시계가 걸린 벽의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고, 단항은 이부자리를 펼쳐놓은 위에 앉아 있었다. 카일루스가 찾아왔을 때, 단항은 자기 전에 읽을 요량으로 책을 한 권 빼 들고 이부자리에 누우려던 참이었다. 과연 종이 위의 글씨가 눈에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자료실에는 마땅히 앉을 자리가 없다 보니 앉아서 이야기하려면 이부자리를 펼친 위에 앉을 수밖에 없었었다. 그래서 단항은 제 옆자리를 권했고 단번에 거절당했다. 거절할 거란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칼같이 거절할 줄은 몰랐다. 그런 일련의 흐름 뒤에 한 명은 서서 시계를 노려보고, 한 명은 책 귀퉁이만 갉작이는 광경이 완성된 것이다.
침묵을 흩어놓은 것은 단항의 목소리였다.
"카일루스."
"……."
"카일루스. 난……."
"언제까지 비밀로 할 셈이었어?"
"그건……."
영원히 비밀에 부칠 생각은 없었다고 말해야 했는데,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나한테는 말해줄 수 있었잖아."
"……."
"내가 못미더웠어?"
"그렇지 않아."
"그럼 왜 말 안 했어?"
"그는 내가 아니니까. 너와는 영원히 만날 일이 없는 타인이었으니까."
단항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덧붙였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
카일루스는 입을 다물었지만, 그건 더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말을 듣겠다는 제스처에 가까웠다. 어디서부터, 뭘 설명해야 그가 납득할까. 단항은 조급한 마음으로 말을 이었다.
"환생을 위해 알로 돌아간 비디아다라 족과 알을 깨고 나온 비디아다라 족은 동일인물이 아니야. 그들은 서로 다른 이름과 기억을 갖고 살아가지."
"……."
"다만 나의 경우는 좀 특수해서……. 비디아다라 용존인 단풍은 그가 벌인 어떠한 일 때문에 벌을 받았고, 환생체인 나 또한 그의 죄를 이어받아 어릴 때 고향에서 추방당했지. 죄를 이어받았다고는 해도, 그 모든 일은 나와 그를 갈라놓았어. 나는 단풍이 아니야. 내가 용존의 모습으로 용존의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건 단풍의 힘이 현임 용존에게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이지, 내가 그와 동일인물이기 때문인 건 아니야."
"……."
"내가 아직도 용존의 모습을 한 건, 방금 말했듯이 용존의 힘이 후대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서 내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야. 그걸 블레이드, 그자가 건드려서 억지로 각성한 후유증인 거지."
건강에 문제는 없지만 한동안은 그 모습으로 생활해야 한다고 말하는 걸 옆에서 듣기는 했다. 카일루스는 입을 다물고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나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봤는데, 잘 안 됐어."
"그리고?"
갑자기 던져진 물음에 그는 카일루스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뭐 더 할 말 없어?"
단항은 눈을 두어 번 깜빡였고, 그런 뒤에는 더 생각하고 재볼 것도 없이 말이 튀어 나갔다.
"미안해."
그때까지도 벽에 걸린 시계만 쳐다보던 카일루스가 입속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러댄다. 손을 뗀 얼굴은 이마를 덮은 머리칼이 이리저리 흩어져 엉망이었지만, 표정은 자료실에 막 들어왔을 때보다는 한결 느슨해져 있었다.
"너한테는 말했어야 했어. 미안해."
카일루스는 벽에서 등을 떼고는 걸음을 옮겼다.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동료의 옆자리에 주저앉은 그는 여전히 시선을 주지는 않았지만, 확연히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때 일 아직도 입에 올린 적 없는데.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그때?"
"악몽 말이야."
"아."
체온을 나누고,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매달렸던 순간이 방금 겪은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온기를 놓고 싶지 않아서 매달렸던 것까지도. 끔찍이도 추웠고, 괴로웠고, 당장 무언가를 붙들지 않으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지금도 무언가를 붙들고 싶은 마음은 그때와 같았고, 그래서 그는 손을 뻗었다.
카일루스는 피하지 않았다.
단항은 악몽에서 깨어났던 그때처럼 따뜻한 몸을 힘껏 껴안았다. 스텔라론이 전신으로 피를 보내며 마치 심장이 뛰듯 가슴을 울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스텔라론의 박동이 서서히 빨라지기 시작하는 것마저도, 그때를 떠올리게 했다.
카일루스는 제게 쏟아지는 긴 검은 머리카락을 한 줌 쥐고 매만졌다. 손가락에 매끄럽게 감기는 감촉에, 결국 마음이 풀리고 만다. 소리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으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에 고개를 파묻은 애인에게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웃느라 몸이 흔들리는 걸로 눈치챌지도 모르지만. 카일루스는 기다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꼬면서 장난을 쳐댔다. 다른 손으로는 너른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것도 잊지 않고서.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자, 자료실은 안온한 침묵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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