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림梅霖
공미포 7,821자
* 2023. 07. 09 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입니다
* 단항카일 (음월카일)
* 퇴고x
* 공식과 다른 설정 주의. 뒷골목에 살던 카일이 어느날 비 맞던 단항을 줍는 거 보고싶다... 에서 시작한 글입니다 + 느슨한 현대판타지 au
거기 혹은 그 동네, 정도로 불리는 곳은 온갖 범죄의 온상이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현재는 질서와 무법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기 때문으로, 악명이 자자하던 때와 비교하면 썩 온건해진 편이다. 선량한 소시민이라면 그곳에 대해 차마 입에 담기조차 꺼리며 두려워하던 때가 있었지만, 그것도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비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초상능력자가 사는, '초상능력자의 요람'으로 불리고는 한다.
'요람'의 전신이었던 그곳의 과거 청산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갑작스러운 괴수 발생.
괴물이 왜 나타났는지, 어디에서 왔는지는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러나 괴수에 대해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었던 시절에도 단 하나는 단정 지어 말할 수 있었다. 인간을 살려둘 생각이 없다는 것. 눈앞에서 움직이기만 하면 뭐든 물어뜯고 할퀴고 으깨려 한다는 사실은 좀 더 나중에 밝혀지게 된다. 놈들에게는 동족애조차도 없었다.
어쨌든, 공간을 찢고 사방에서 괴수 무리가 들이닥치면 제아무리 날고 긴다는 범죄자라 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뒷골목을 주름잡는 조직의 우두머리도, 날파리보다도 많았던 깡패와 도둑, 시정잡배 따위도 괴수의 이빨과 발톱에 갈려 나갔다.
피칠갑을 하고 달아나던 깡패와 도둑과 우두머리와 시정잡배는 몸을 숨기고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저들이 이런저런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던 소년ㆍ소녀 가장, 노인네, 이민자, 고아, 외국인 등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행방불명 처리되었다. 그들이 문을 열고 마주한 것은 언제까지고 등쳐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약자가 아니라, 불완전한 각성으로 이성을 잃은 초상능력자들이었기에.
괴수의 공간이동 과정에서 발생한 특수한 파장에 노출된 인간은 빠르든 늦든, 언젠가는 초상능력자로 변한다. 막 일이 터졌을 때는 특수한 파장을 차단하는 설비도 없었고, 괴물의 워프 위치를 짐작하는 기술도 없었다. 놈들은 그저 천재지변처럼, 저 높은 곳에서부터 시궁쥐가 뛰노는 지하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이빨과 발톱을 들이밀었다.
계속된 신체적ㆍ정신적 폭력, 열악한 환경, 영양실조, 극심한 스트레스, 괴수의 공간이동 과정에서 발생한 특수한 파장.
'요람'의 전신이었던 그 동네는 성인군자라 해도 정상적으로 능력을 꽃피우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혹자는 말한다. 거기, 혹은 그 동네라 불렸던 곳에서 가장 많은 불완전 각성자가 발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개개인의 선악과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 각성과 불완전 각성이 곳곳에서 진행되었다.
누구 것인지 모를 피와 살점이 폭우처럼 쏟아졌다고 했다. 지상에 흩뿌려진 것 중에는 괴수의 것도 물론 있었겠지만, 인간도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을 거라는 게 그 난리 통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의 의견이었다.
붉은 장마가 한 차례 휩쓸고 가자, 범죄의 온상이었던 땅은 가진 것 없는 이와 갈데없는 초상능력자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지상낙원까지는 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옛날보다 낫다는 게 중론이었다. 물론, 괴물과 초상능력이 들끓어 지도가 바뀌네 마네 하는 형국에도 악인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요람'은 무법 지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법의 수호를 바라기도 어려운 곳이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곳이기 때문에 종일 비를 맞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카일루스는 머리를 쥐어뜯을 것처럼 헝클었다. 한 시간 전쯤에 보았던 인영은 여전히 광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카일루스의 보금자리인 낡은 빌라는 낮은 언덕 위에 있어서 건물이 그다지 높지 않음에도(4층짜리인데 그는 3층에서 지내고 있다) 광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관찰하기 좋은 위치였다. 생각지도 않은 조망권까지 갖췄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그 조망권이 지금 그의 고민을 부풀리는 중이었다.
이렇게 빗줄기가 거셀 때는 평소보다 손님이 줄어서, 일찍 문을 닫는 가게가 더러 있다. 날이 맑을 때와 비교하면 괴수도 덜 나타나는 편이고. 그러니 가게 주인 눈치 볼 것 없이 차양 밑에라도 들어가 있으면 되는데.
최근 주목할만한 사건이라고 하면 비가 쏟아질 때마다 나타나는 초상능력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신원미상의 초상능력자가 지나가던 행인을 습격하는 일이 수 개월간 반복되고 있었는데,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건 발생 초기에는 자경단도 관심을 보였지만 결국 이 사건은 그들의 손을 떠났는데, 첫째로는 습격당한 행인이 질 나쁜 놈들이었고, 둘째로는 상대가 워낙에 신출귀몰해 추적자 무리를 몇 번이고 따돌렸으며, 마지막으로는 자경단은 물론이고 '요람'에서 그 초상능력자를 쓰러트릴 수 있는 인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경단원 중 적지 않은 수가 인간이 덜된 놈들 따위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든 초상능력을 맞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고수했지만, 비교적 온건하며 남을 해치지 않고 살아온 초상능력자들마저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판단을 거쳐 자경단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란 소식이 들려오자 질 나쁜 놈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숨어들었고, 그러자 정체불명의 초상능력자에 의한 습격도 멈췄다.
자경단이 다시 평소처럼 자경단 업무에 매진하자 물 밑으로 숨어들었던 놈들이 사고를 쳐댔는데, 한 차례 장대비가 지나간 뒤 빨랫줄이며 지붕 위에 대롱대롱 매달린 꼴로 뭇사람의 비웃음을 샀다. 빨랫줄에 걸려 있던 놈들은 뼈 몇 대가 나갔고, 피도 좀 흘렸으며, 겁에 질린 건지 초상능력에 잘못 당한 후유증인지 헛소리를 하기는 했지만, 숨은 붙어있었고 치명상을 입은 사람도 없었다. 일전의 습격과 마찬가지로.
결국 자경단은 이 정체불명의 초상능력자를 체포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 초상능력자를 잡는데 모든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에는 '요람'에 그들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너무 많았다. 사건ㆍ사고는 또 얼마나 잦은지. 나쁜 놈들이야 뭐, 자업자득 아닙니까? 할 수만 있으면 그 초상능력자를 돈 주고 고용하고 싶다니까요? 바빠 죽겠어. 단원들은 저들끼리 속닥거렸고, 그렇게 신원미상의 초상능력자는 비와 함께 나타나는 또 다른 자경단 정도의 취급을 받게 되었다.
습격당한 쪽에서 현상금을 걸었으나(하지만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수배지가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소소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수배지를 떼서 버리는 작업은 그도 거들었다.
물론, '요람'에서 터지는 사건ㆍ사고가 그것뿐이라는 건 아니다. 비와 함께 나타나는 악몽 같은 존재 외에도 위험은 곳곳에 산재해있다. 정신을 잃으면 주머니를 털리거나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갇힌 채 눈뜰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동전 하나까지 싹싹 털리고 버려지겠지. 쓸만한 능력을 가진 걸 들켰다가는 갇힌 채 평생 햇빛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었다. 과거의 악명이 힘을 잃었다고 해도 그때나 지금이나, 아무 데서 픽픽 쓰러지기 좋은 동네는 아니다.
열어둔 창문으로 빗물이 들어와서 닫았다.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질 나쁜 놈일 확률은?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요람'에서는 생각해봄 직한 문제다. 여긴 그런 곳이니까. 물론 좋은 사람들도 많다. 저만 해도 무사히 각성할 수 있도록 다른 초상능력자의 보호를 받았고, 각성한 뒤에도 수많은 도움을 받은 끝에 지금의 삶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빗발이 점점 거세지더니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디선가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어둑어둑한 하늘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쾅!
천둥 소리에 놀란 어느 집 아이가 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가 들렸으나 이내 쏟아지는 빗줄기에 파묻혀 잘 들리지 않게 되었다.
젠장, 나도 초상능력자인데 비 맞아서 골골대는 사람한테 맞아 죽지는 않겠지.
그는 현관 입구에 놓인 장우산을 낚아챘다. 신발장 위, 아무렇게나 흩어둔 신문 사이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겉옷 안주머니에 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광장으로 가려면 좁고 어두운 길을 지나야 했다. 큰길로 돌아간다는 방법도 있지만, 그럼 시간이 좀 걸린다. 밖에 서 있던 사람이 그동안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어두컴컴한 골목은 비까지 내리니 뭐라도 나올 것처럼 으스스했다. 어릴 적에는 정말로 무서웠는데, 지금은 쌀쌀하고 축축하고 눅눅하다는 생각뿐이다. 골목길 위로는 빨랫줄과 낡은 차양 따위가 복잡하게 얽혀서, 빗물이 틈새로 흘러내리는 것으로 어딘가에 하늘이 있겠구나, 하고 짐작만 한다. 좁다란 길이 곳곳으로 뻗어 있지만,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아서인지 사방이 답답하게 꽉 막혀있다는 인상을 떨치기 어렵다. 그런 곳을 카일루스는 제집처럼 거닐었다.
초상능력자가 많은 곳이다 보니 길이 하룻밤 새 없어지고, 생겨나는 일도 종종 벌어지곤 했다. 헤매지 않으려면 살아있는 것처럼 자라나고, 다치고, 재생하는 골목골목을 전부 다 꿰고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길을 잃으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곳이니. 자경단이나 그 밖의 세력이 뻗는 구원의 손길이 필요할 때마다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집을 뛰쳐나와 골목을 누비는 이유는……. 카일루스는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털어냈다. 이제부터는 집중력이 필요했다.
속도를 늦추고 걸음을 헤아렸다. 간밤에 별일 없었다면, 스물네 걸음 걸으면 나오는 갈림길에서 한 번 꺾으면 바로 광장으로 갈 수 있다. 누가 거길 광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걸까? 광장이라기보다는 공터가 더 어울리지 않나?
***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말라붙은 분수대에는 모처럼 물이 차 있다. 인영은 빗물이 가득한 분수대를 들여다보다가,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이한 눈이었다.
옅은 녹색 눈동자는 흐릿하게 안개 낀 것처럼 보였다. 홍채만 탁한 것이 아니었다. 동공마저도 부옇게 흐렸다. 눈이 불편한가? 하지만 카일루스는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도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맞닿았던 시선은, 카일루스가 남자의 머리칼로 눈을 돌리는 것으로 어긋났다.
비에 젖어 늘어진 앞머리도, 어깨 위로 쏟아진 머리도 빛을 빨아들일 것처럼 검었다. 허리를 넘어가는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밝은 녹색이 언뜻언뜻 비쳤다. 겉 부분은 검지만 안쪽은 밝은 녹색이라니, 일부러 염색한다고 해도 저런 색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안 추워?"
두서없이 말이 튀어나왔으나, 내뱉고 보니 물어봐야 할 내용이긴 했다.
"……."
머리가 길고 용모가 단정하지만, 머리 길이 때문에 여자로 착각할 일은 없을 만한 생김새였다. 키도 크고 몸도 단단해 보이는 게, 기골이 장대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힘깨나 쓸 것처럼 보인다. 흰옷 위로 빗물처럼 쏟아진 머리카락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갈 데가 없어?"
"……."
'요람'에도 저런 옷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선주라는 곳을 떠나온 이들이 저렇게 생긴 옷을 즐겨 입곤 했다. 거기에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 남자의 인생도 그리 평탄하지는 않았다는 거겠지. 선주는 까마득히 먼 곳이니.
"잠깐 우리 집에서 몸 좀 녹이고 갈래?"
"……."
옅은 녹색 눈동자는 잠깐 다른 곳을 보는 일도 없이, 쭉 이쪽을 향한 채였다. 저걸 반응했다고 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떼지 않고 쳐다보고 있다는 건 말을 건 상대에게 최소한의 관심은 있다는 거겠지? 그런데 조금 전에 눈이 좀……. 빛나지 않았나? 하지만 다시 보니 여전히 부옇게 흐린 연녹색 눈으로 저를 물끄러미 볼 뿐이다. 잘못 봤겠지. 짐승도 아니고 사람 눈이 빛날 리가 없는데.
"나 이상한 사람 아니야."
"……."
으음, 어린애라도 안 믿을 말인데. 카일루스는 침음을 흘리고는 턱을 긁적였다. 물음에 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자리를 피하지도 않는 남자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두고 간다는 방법도 있었으나 그런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저기 언덕 위 빌라에 사는데, 그쪽이 한 시간 넘게 계속 비 맞고 있길래."
"……."
빗물이 검은 머리카락을 타고 속눈썹에 맺히더니, 남자가 눈을 깜빡이자 마치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고, 그럴 때마다 빗물이 눈물처럼 흘렀다. 멀리서 우르릉, 소리가 들렸다. 또 한바탕 내리칠 모양이었다. 뭐든 간에 결정을 내려야 할 때였다.
카일루스는 천천히 앞으로 한걸음 전진했다. 남자는 몸을 물리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용기가 솟아났다. 천천히, 위협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를 담아 천천히 다가갔다. 이제 둘 사이의 거리는 네댓 걸음 정도. 너무 가까이 갔나? 하지만 또 한 번 하늘이 으르렁대자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우산을 쥔 손을 앞으로 뻗었다. 옷이 순식간에 젖어든다.
"나 추운 거 별로 안 좋아해."
"……."
"우리집 따뜻한데."
"……."
남자는 천천히 눈을 깜빡여 속눈썹에 매달린 빗물을 흘려보내고는 몸을 움직였다. 카일루스가 접근할 때와 비슷하게 천천히 다가와 우산 밑에 선다. 사람을 상대로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만 야생동물이라도 길들인 기분이다. 아니, 아직 길들인 건 아니니까 잠깐이나마 교감했다는 쪽에 가깝겠지.
커다란 장우산이 잠시 휘청이는가 싶더니,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림梅霖
매실이 익을 무렵에 내리는 비라는 뜻으로, 해마다 초여름인 유월 상순부터 칠월 상순에 걸쳐 계속되는 장마를 이르는 말.
단항×카일루스(남개척자)
남자에게 갈아입을 옷을 들려주곤 욕실을 내어주고 나자, 현관에서 욕실, 그리고 자신의 방까지 점점이 이어진 물방울이 보였다. 그러자 불쑥 현실감이 느껴졌다. 어디서 온 지도 모를(선주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선주 사람처럼 머리를 기르기는 했지만, 선주 출신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은가!) 생면부지의 타인을 집에 들였다.
우르릉, 쾅! 요란한 소리에 걱정거리가 솟구쳤다가 사라지고, 다시 후회하기를 수 번. 카일루스는 일단 엉망이 된 바닥부터 닦기로 했다.
비와 함께 나타난다는 초상능력자가 아직도 체포되지 않은 상황에서 달랑 우산이랑 단검 하나만 챙겨 들고 나간 사람이 할 생각은 아니지만, 순순히 따라온 저 사람도 문제다. 대체 나의 어디를 믿고 그렇게 졸졸 따라온 건데? 내가 나쁜 놈일 가능성 자체를 상정해두지 않았나? 여차하면 멱을 따버리고 자리를 피할 정도의 능력자인가?
선주 사람은 외부인과는 다른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고유능력에 초상능력까지 합쳐져서 하나하나가 무슨 괴수 수준으로 싸울 수 있다던데, 진짜일까? 나 괜찮은 건가? 그는 바닥을 닦으면서 온갖 잡생각을 다했다.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지만, 꼬리에 꼬리를 물던 고민은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모든 일이 비 때문에 일어났다는, 억지에 가까운 생각으로.
어린 카일루스를 '요람'의 어르신이 주워다 보살핀 것이 꼭 오늘처럼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이렇게 비가 오는 데 그런 곳에서 혼자 있는 걸 보면 그날이 떠오르고 만다. 그에게는 불가항력에 가까웠다. 제가 지독히도 운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저 남자가 운이 좋은 건지.
바닥을 정리하고, 부엌에서 손을 씻고 먹을만한 게 있나 찾아봤다. 냉장고 사정은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남이 주는 음식을 순순히 받아먹을까? 뭔가 들어있을 거라고 의심한다면? 그는 조금 고민한 끝에 뚜껑도 따지 않은 생수 하나와 음료수 한 캔, 즉석식품을 꺼냈다. 즉석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버튼을 누른 뒤에는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내용물을 보면서 손님의 이후 거취에 대해 고민했다.
적어도 하룻밤 정도는 재워줘야 할지도 모른다. 이 빌라의 내부 구조는 모두 동일한데, 거실과 부엌, 욕실 하나, 그리고 방 두 개로 이루어져 있다. 좀 좁긴 하지만 방이 두 개나 딸려 있어서, 그는 방 하나는 침실로, 나머지 하나에는 이런저런 장비를 늘어놓고 사용 중이었다. 무기와 방어구, 괴수 퇴치에 쓰이는 온갖 아이템 등이 있는 방에 외부인을 들일 수는 없다. 분실의 위험도 있지만, 이런저런 장비와 아이템 때문에 편히 누워서 잘만한 상태도 아니고.
아무래도 남자에게 침실을 내줘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이쪽이 나서서 끌고 왔는데 거실에서 재우기는 좀 그렇다. 내가 거실에서 자면 되겠지.
거실과 부엌, 욕실 하나, 그리고 작은 방 두 개로 구성된 빌라는 그 크기에 비하면 집세가 놀랄 정도로 저렴했지만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었다. 빌라 주인은 건물을 가능한 한 오래오래 보존하길 원했고,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초상능력자 중에서도 어느 정도 전투능력이 입증된 사람만을 받아들였다.
아직까지도 종종 괴수가 나타나는 동네이다 보니 놈들 때문에 건물이 무너질 위험성이 있지만, 내부에 싸울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살기 위해서라도 맞서 싸울 테니 건물이 그나마 덜 망가지지 않겠느냐는 거였다. 하긴, 지내던 곳이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면 거기 살던 입장에서는 새 보금자리를 찾기까지 온갖 불편을 다 겪어야 하니, 빌라 주인의 결정은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기는 했다.
그런데 괴수 퇴치 도중에 건물에 흠집을 내면?
빌라 주인 왈, 그건 그때 가서 이야기할 문제라고.
어쨌든, 그런 조건 덕분에 카일루스는 약간 낡은 것만 빼면 꽤 괜찮은 보금자리를 얻게 되었다. 물론 어릴 적부터 그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물심양면으로 보살핀 두 어르신의 덕도 빼놓을 수 없다. 아마 따로 연락하지 않아도, 1~2일 뒤에는 룸메이트에 관해 지나가듯 물을지도 모른다. '요람'에서 두 어르신의 정보망을 피해 가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전자레인지 속 내용물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슬슬 꺼낼 때가 되었다는 듯 포장지가 서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포장지 위로 흰색이 겹쳐지며― 잠깐, 흰색?
카일루스는 고개를 틀어 뒤를 보았고, "우왓!"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언제 온 건지, 남자가 식탁 옆에 서서 그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발소리도, 인기척도 없어서 가까이에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전자레인지에 비친 흰색은 갈아입으라고 내어줬던 티셔츠였다. 카일루스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앉아. 뭐라도 먹을래?"
"……."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착석했다. 그러더니 희뿌연 눈으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뭐, 예상은 했지만. 카일루스는 전자레인지를 열어 내용물을 끄집어냈다. 물과 음료를 따를 컵을 집어들고, 젓가락과 포크를 놓고 고민하는 동안에도 남자의 시선이 제 움직임을 따라다니는 게 느껴졌다. 쳐다보고 있다는 걸 감출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감출 줄을 모르는 건지. 식탁 위에 젓가락과 포크를 내려놓는 것으로 식사 준비가 끝났다.
"나도 씻을 테니까, 먼저 먹고 있어."
"……."
"보는 대로 즉석식품이고, 아직 안 뜯었고,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뭔가를 넣기는 어렵겠지?"
"……."
"배 안 고파?"
"……."
"음, 혹시 피곤해?"
"……."
순순히 따라왔고, 지금도 이쪽을 보고 있는 걸 보면 말을 알아듣는 것 같기는 한데……. 하다못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젓기라도 하면 남자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여전히 어떠한 의사도 내비치지 않는다. 카일루스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피곤하면 저기, 문 열린 방 보여? 저기서 눈 좀 붙이고. 그 옆방은 들어가면 안 돼."
어차피 잠겼지만, 그 말을 끝으로 부엌을 떠나는 뒷모습을 희뿌연 눈이 뒤쫓는다.
***
식탁 위에 놓인 즉석식품도, 플라스틱병 안의 내용물도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채였다. 그래도 물 정도는 마시지 않을까 했는데. 그는 식탁 위를 대충 치우고는 거실로 향했다. 창 밖은 여전히 어둡고 하늘은 흐릿했다. 앞으로 며칠은 더 쏟아지겠군. 문과 창문을 다시 한 번 단속한 뒤에는 침실 쪽을 흘끗 봤다.
침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이 각도에서는 안이 전부 다 보이지는 않는다. 그는 좀 망설이다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남자는 침대에 앉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카일루스는 열린 문에 대고 노크했다.
"비 좋아해? 그래도 창문은 열지 마. 얼굴로 들이칠 테니까."
"……."
표정 없는 얼굴로 눈을 깜빡이기만 한다. 혼자 떠드는 것도 이젠 익숙해질 지경이다. 대답은 없지만 어쨌든 이쪽이 하는 말을 듣는 것 같기는 하니까. 카일루스는 머리 위에 얹은 수건을 매만지다가 툭 뱉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아직 통성명도 안 했던가?"
"난 카일루스. 성은 없어. 그쪽이 살던 곳은 어떨지 몰라도, '요람'에서는 흔해. 뒤에 붙일 가문 명이 없는 거."
"그쪽은? 내가 뭐라고 부르면 될까? 본명을 알려주기 곤란하다면 가명이라도 상관없는데."
남자의 얼굴 위로 아주 희미한 표정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감정이었는지 말하기에는 지나치게 옅었고, 또 순식간에 사라져 버려서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보여준 반응 중에서는 가장 눈에 띄는 변화였다. 말을 더 걸어볼까? 하지만 입을 열지 않는 걸 보면 지금으로서는 더 캐물어 봤자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
"그래, 나중에 말하고 싶어지면 알려줘."
그런 뒤에는 최대한 무해한(해를 끼칠 생각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다는 의미를 담아) 얼굴로 웃으며 덧붙였다. "잘 자."
카일루스가 돌아서고, 문이 소리 없이 닫히는 그 순간까지도 남자는 물끄러미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닫힌 문 너머에서 서성이던 인기척이 이내 움직인다. 문 앞에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 들자, 남자는 다시 창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으며 하늘은 흐릿했다.
'요람'의 장마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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