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레일

그 가족의 비밀

공미포 3,625자 단문

Rusty Sky by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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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5. 9 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입니다.

* 포스타입 메인에 걸려있는 [크리에이터 N제 - 그 가족의 비밀] 을 보고 쓴 글입니다.

* 공식과 다른 설정 주의. 스포일러는 없습니다.  

* 웰트+히메와 웰트×히메 사이 그 어딘가 + 약 단항카일

* 모브 등장 있음 분량도 있음 주의 (하지만 열차팀과 성애적으로 얽히지 않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 퇴고x 사실 손풀려고 썼던건데 이렇게 길어질 줄은 몰라서... 아 모르겠다 일단 올립니다



3지구는 오늘도 떠들썩했다. 

도로에는 마차와 자동차, 전동스쿠터, 1인용 드론 따위가 뒤엉켜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인도에는 앞뒤 없이 내달리는 아이와 행인의 지갑을 노리는 좀도둑과 한눈에 봐도 3지구는 처음이라는 얼굴을 한 가족 단위 여행객까지. A씨는 눈만 굴려 갈색 짐가방의 손잡이를 꼭 쥔 숙녀와 지팡이를 든 신사, 그리고 그들의 세 자녀를 훑어보았다. 젊은 부부와 밝고 건강한 자식들이라. A씨는 다시 제가 보던 신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오른쪽 눈, 그러니까 의안은 여전히 낯선 풍경을 둘러보는 이들에게 고정된 채였다. 

먼저 부인. 타들어 가는 듯한 적발이 굽이치며 이마와 귓가를 지난다. 흰 이마는 잘 구운 도자기처럼 매끄러웠으며 드러난 피부의 그 어디에도 흉터 하나 없었다. 검은 장갑을 낀 손으로는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의 짐가방을 쥐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물 흐르듯 흐르던 A씨의 생각이 잠시 멈추었다. 왜 남편이 대신 가방을 들어주지 않지?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는데, 지팡이를 쥔 신사가 잠시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남편이 어디가 불편한 모양이군. A씨의 생각이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외출용 흰 드레스 차림이었는데, 뒤로 갈수록 길게 늘어지는 치맛단은 끝부분까지 눈부시도록 희었다. A씨는 이 낯선 가족 단위 여행객이 대놓고 부를 과시하지는 않으나, 지금 3지구를 거니는 사람 중에서는 손꼽히는 재력가 집안일 거라는데 제 의안을 걸 수 있었다. 부인은 보석으로 치장한 차림새는 아니었으나, 저렇게 흰옷을 입고 다니려면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 게다가 3지구는 좋게 봐줘도 길이 잘 포장되었다 뿐이지, 깨끗한 거리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이런 곳에서 저렇게 희고 긴 옷이라니. 드레스 한두 벌 쯤은 더러워져도 상관없는 거겠지.  

다음은 남편. 허리는 반듯하고 키도 훤칠해 얼핏 보면 젊은이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가의 주름이나 이마를 덮은 희끗희끗한 머리가 이 점잖게 생긴 신사의 나이를 짐작게 했다. 불편한 부위는 다리일까? A씨는 의안을 데굴데굴 굴렸지만 지팡이를 짚은 신사는 다리를 절뚝거리거나 아까처럼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지팡이가 있으면 혼자서 거동할 정도는 되나 보군. 부인이 무어라 말하자 조금 뒤에 인자한 얼굴로 웃는다. 

신사의 손에 들린 지팡이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보석이나 세공으로 치장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아주 단단해 보였다. 조금 의아한 점은 지팡이가 떠돌이나 마술사들이 즐겨 쓸법한 디자인이라는 건데... 하긴, 부자들 생각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A씨는 가볍게 조소하고서는 관찰작업을 재개했다. 회색 코트 안으로 조끼와 셔츠를 받쳐입은 차림새는, 3지구뿐만이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조합이었다. 하지만 옷감은 필시 튼튼하고 매끄러울 것이다.

그다음은 딸과 아들들. 키가 큰 사내애 둘과 여자아이 하나. 부부와 마찬가지로 나이를 쉽사리 짐작하기 어려운 모습들이었다. 표정이나 얼굴 각도에 따라서는 십대 중후반에서 스물로 보이기도 했다. 보송보송한 꽃잎 같은 분홍빛 머리칼과 동그란 눈 때문에 사내애들보다는 어려 보였으나, 누나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여자애 쪽이 맏이인듯했다. 과묵해 보이는 검은 머리가 둘째, 어딘가 맹한 인상의 회색 머리가 막내라. 저들끼리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다 이내 웃음이 터진다. 여행에 들뜬 모습이 평범해 보인다. 

동생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차남이 고개를 틀어 이쪽을 바라봤다. A씨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수많은 인파와 이동 수단이 시야를 가리며 지나고 있음에도 녹색 눈이 조금도 헤매지 않고 이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의안을. A씨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제 의안을 보았다고. 은하열차라는 명성과는 영 동떨어진, 연약한 일반인 무리처럼 보였는데 소문이 어느 정도는 맞는 듯했다. A씨는 녹색 눈을 한 젊은이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상대는 이렇다 할 행동대신 의안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의안으로도 쫓기 어려울 정도로 거리가 벌어진 것을 확인하고서, A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문은 대충 접어 옆구리에 끼고 자리를 뜨려는데 테이블 위에 놓인 사탕 바구니가 눈에 걸린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애들이니까 단 걸 좋아하겠지, 정도의 단순한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생각과 동시에 손이 움직였다. 레몬 맛, 딸기 맛, 커피 맛…….

그가 은하열차팀의 위치를 파악하고, 테이블 위에 있는 사탕 한 주먹을 챙겨 코트 주머니에 쑤셔 넣고, 인파에 섞여 사라지기까지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누가 떠나든, 어떤 시선이 오가든 3지구는 여전히 떠들썩하다. 



그 가족의 비밀



 우주 어딘가, 은하열차 안.

"가족으로 위장해야 한댔죠? 그럼 히메코 언니는 엄마고, 웰트 아저씨가 아빠가 되는 거예요?"

"그런 셈이지." 

"평소대로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 서류상으로 우린 너희의 후원자로 되어 있으니."

그리 말하며 웰트는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위조서류를 검지로 가볍게 두들겼다. 

"다들 아까 보낸 자료는 읽어봤겠지만, 다시 한번 설명할게. 나와 웰트는 너희 셋이 어릴 때부터 후원해 왔어. 입양할까도 생각해봤지만 너희가 언젠가는 피로 이어진 가족을 찾아 함께 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양은 미루고 있지. 하지만 시간을 내어 아이들과 자주 여행을 다닐 정도로 돈독하고, 호칭이나 핏줄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가족, 이라는 설정이야."

말을 마친 히메코는 입가로 찻잔을 기울였다. 그녀가 목을 축이는 동안 웰트가 말을 이었다.

"이런 설정이 필요한 이유는, 물론 자료를 통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접근해야 하는 단체가 '가족애'를 중시하는 사이비교단이기 때문이네."

테이블에 턱을 대고 엎드려 있던 Mar. 7th가 입을 열었다. 

"최근 그 사이비교단이 수상쩍을 정도로 거침없이 세를 확장하고 있고, 그 추진력은 교단이 숨겨둔 스텔라론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맞죠?"

웰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벼운 미소 띤 얼굴에 약간 놀라워하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한 줄도 안 읽었다고 생각하셨죠? 소녀는 으스대며 말을 이어 나간다. 

"헤헤, 가족처럼 행동해야 한다길래 열심히 읽어봤거든요. 난 그런 거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니까."

그러더니 포크로 케이크를 쿡 찌른다. 와앙, 입을 벌려 큰 조각을 삼키는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차장이 특별히 공수한, 싱싱한 딸기와 생크림을 쓴 케이크라고 했다. 보존식품에 질린 탑승객들을 위해 마련했다는 케이크가 또 한 번 포크 밑에서 작게 조각난다. Mar. 7th의 낯빛을 살피던 웰트는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을 열었다가, 대신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한동안 테이블 위로 찻잔과 포크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침묵을 깬 것은 Mar. 7th였다.

"그럼 나 누나 할래요!"

히메코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웰트는 입가로 가져가려던 찻잔을 애매한 높이로 든 채로 Mar. 7th를 바라보았다. "누나?" 

"가족처럼 보여야 한댔잖아요? 차장님이랑 히메코 언니, 웰트 아저씨 다음으로 열차에 탄 사람은 나니까, 순서를 따지자면 내가 얘네보다 누나죠."

풋, 하고 웃은 히메코가 물었다. 

"여동생도 아니고, 남동생이 둘이나 있으면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을 텐데, 그래도 누나가 하고 싶니?"

"네!"

찻잔을 매만지던 웰트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너희도 정해야겠구나." 단항과 카일루스를 번갈아 보는 얼굴은 여전히 가벼운 미소 띤 그대로였지만……. 단항은 안경 너머의 눈에서 짓궂은 기색을 읽었다. 

"못 정하겠으면 이 '누나'가 정해줄까?"

"…Mar. 7th……."

"왜? 내가 너희보다 먼저 열차에 탄 건 맞잖아. 순서대로 정하는 게 공평하지 않아? 아니면 오빠 소리가 듣고 싶어?" 

단항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을 대로 해."

"그러면 공평하게 우리 중에서 가장 먼저 열차에 탄 내가 첫째, 단항이 둘째, 맨 마지막으로 탄 카일루스가 막내 하자!" 

Mar. 7th의 목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던 카일루스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좋은 주제라, 단항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동의했다. 오빠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도 했고.   

"그러면 자, 단항, 카일루스. 누나라고 불러봐."

……그렇다고 Mar. 7th를 누나라고 부르는 동생 역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반듯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모습에 Mar. 7th가 키득거렸다. 

"Mar. 7th누나?"

"옳지 잘한다~"

단항은 Mar. 7th가 손을 뻗어 카일루스의 머리를 엉망으로 흩어놓는 것을 가만히 보았다. 죽이 잘 맞는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얌전히 머리를 대주던 카일루스가 고개를 틀었다. 눈이 마주쳤다. 샛노란 눈은 무감한 것처럼 보인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이 입을 열었다. 

"단항 형?"

덜컹!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흔들리고, 위에 놓인 찻잔과 포크 따위가 들썩였다. 단항은 한 박자 늦게, 그 소리가 자신이 테이블 다리를 무릎으로 걷어차서 낸 소리임을 알았다.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쏠리는 것이 느껴지자 얼굴로 열이 몰리기 시작했다. 단항은 침착하게 약간 기울어진 테이블을 양손으로 잡아 균형을 맞췄다. 다행히 위에 놓인 것들이 쏟아지는 불상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난 됐어. 형이라고 부를 필요는……. 호칭이나 핏줄 따위에 얽매이지 않는 가족이라면서요."  

히메코는 답지 않게 당황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그녀에게는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항에게 빙긋 웃어주었다. 

"그건 그렇지. 세상 모든 형제자매가 정답게 지내는 건 아니니까. 너무 어색하게 보이지만 않으면 돼." 

덧붙이며 모두를 둘러본다. "평소대로, 알지?"

단항은 조금 뻣뻣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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