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레일: 글

[청작부현] 졸업 축하해요, 선배

현대AU 고등학교 배경

리트머스 by 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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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바람이 버려진 플라스틱 컵 속으로 들어가 소리를 냈다. 희미한 연보라색 버블티 냄새가 공기중을 맴돌았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학교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축구를 하고 있었다.

스텔레! 너무 멀리 찼잖아! 제레가 서둘러 공을 쫓았다. 스텔레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다가 이내 공을 따라갔다. 공을 되찾은 스텔레가 골대 앞에 섰다. 골키퍼 루카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루카와 스텔레 사이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쟤네들은 춥지도 않나? 운동장 스탠드에 서있던 Mar.7th가 양팔을 감싼 채 몸을 떨며 말했다. 단항은 눈을 감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학교 정문에서 왼쪽으로 몸을 틀면, 운동장 구석에 있는 강당이 바로 보였다. 체육관 겸용으로도 쓰이는 태복관은 꽤 넓었다. 돔 모양으로 지어진 천장은 높았고, 양쪽에 놓인 농구골대가 천장을 향해 뻣뻣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높은 창에서 내려오는 겨울 햇볕에 원목 마룻바닥이 따스하게 빛났다. 파란 레인을 따라 플라스틱 접시콘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2학기 기말고사와 수행평가가 모두 끝나고, 방학식과 졸업식만을 앞둔 여유로운 시기였다. 자습이라는 명목 하에 매교시마다 주어지는 자유시간을 학생들은 먹거나 자거나 놀면서 보냈다. 브로냐는 제레의 외투를 가져다준다며 나간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반디는 선생님 몰래 숨겨온 롤케이크빵을 입에 물고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양손에는 매점에서 사온 빵이 한가득이었다. 소상과 계네빈은 히터 앞에 스포츠매트를 쌓아두고 앉아서 유튜버 이야기를 했다. 히터바람이 웃음꽃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체육선생님을 도와 접시콘 정리를 마친 부현이 양손을 털며 무대 쪽으로 갔다. 무대 머리막에 미리 걸어둔 졸업식 현수막이 소리없이 나부꼈다. 무대 오른쪽에는 마이크 달린 강단이, 왼쪽에는 검정색 그랜드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부현이 피아노 쪽으로 다가가 피아노를 둘러싼 붉은 커튼을 걷어냈다.

 “…청작?”

“우와아악, 부현 선배!”

피아노 의자에 앉아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던 청작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얼대 땡땡이가 아니라요. 아니, 수업 진도도 안 나가고 매일 영화만 보는 게 지겨워서, 아니, 이게 아니라.”

부현은 아무 말없이 청작의 옆에 앉았다. 청작은 눈을 질끈 감고있다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평소 규정에 맞게 칼같이 교복을 입던 부현이라, 편한 체육복 차림의 선배가 낯설었다.

‘…왜 뭐라 안 하시지?’

청작이 막 입학해 학생회 면접을 봤을때, 총무부 면접관이었던 부현을 만난 것으로 둘의 악연은 시작되었다. 겨우 한학기만에 학생회에서 잘리긴 했지만. 그 뒤로 청작은 보건실이나 옥상에서 땡땡이칠 때마다 부현이 오나 안 오나 살펴봐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참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화난 얼굴로 청작, 당장 교실로 돌아가. 라고 말했을 텐데. 오늘은 어딘가 풀죽은 얼굴로 자신의 옆에 앉아있었다. 정확히는 피아노 앞에.

부현은 피아노 건반뚜껑을 열었다. 조심스럽게 도, 레, 미를 눌렀다. 졸업식이 이제 2주도 채 남지 않았다. 부현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부현은 자신의 졸업식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일을 맡았다. 원래는 음악부 학생들이 연주할 예정이었으나, 올해 음대 지망생들이 수시에 다 떨어져, 2월에 있을 정시에 매달려야했다. 지원자가 없자 결국 부현이 나섰다. 부현도 피아노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선생님을 곤란하게 만드는 것도 싫었고, 학생회로서 자신이 기획해온 졸업식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도 싫었다.

“선배, 피아노도 칠 줄 아세요?”

청작이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부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제야 부현은 청작, 당장 교실로 가. 라고 말했지만, 평소보다 약한 말투에 청작은 선배 연주하는 것만 듣고 갈게요~ 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숨을 내쉰 부현은 졸업식 반주곡을 연주했다. 유명가수 로빈의 노래 <러브 썸원>이었다. 졸업 노래는 아니었지만, 모든 걸 추억으로 남기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가사 때문에 졸업식에서 자주 쓰이곤 했다.

청작은 당장이라도 박수를 칠듯 손을 모은 채로 부현의 연주를 들었다. 노래는 슬픈 멜로디로 시작해 서정적인 멜로디로 진행되고, 희망을 담은 멜로디로 끝이 났다. 부현이 손을 떼자마자 청작은 부리나케 박수를 쳤다.


“선배 진짜 멋져요.”

청작의 박수에 고맙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부현의 얼굴은 밝지 못했다.


“선배, 왜 그러세요?”

“…자꾸 틀려. 아무리 연습해도, 똑같은 데서, 항상.”


청작은 갸우뚱, 고개를 흔들었다. 


“선배, 악보 좀 보여줄 수 있어요?”

“악보? 그래.”


부현은 보면대에서 악보를 내려 청작에게 보여주었다. 계속 틀리는 데가 어디인데요? 부현이 악보의 특정 마디를 짚었다. 여기. 슬펐다가, 희망을 주는 느낌으로 가야하는데, 그게 잘 안 돼.


청작은 한손으로 턱을 괴고 한동안 악보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아, 하고 악보를 다시 보면대에 걸었다. 제가 한번 연주해볼게요. 괜찮나 봐주세요, 선배.


청작의 손끝을 바라보던 부현은 무심코 청작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평소의 장난기가 하나도 없는, 진지한 얼굴이었다. 청작이 연주를 시작했다. 슬픈 멜로디에서 서정적인 멜로디로, 그러다가 희망적인 멜로디로… 청작의 연주를 듣던 부현이 눈을 크게 떴다. C단조에서 G장조로 넘어갈 때 청작은 피아니시모를 무시했다. 오히려 쉬지 않고 빠른 음을 넣어 연주를 이어갔다. 처음에 부현은 청작이 틀린 음이 신경쓰였다. 그러나 청작은 다른 부분에서는 틀리지 않았다. 돌아오는 마디에서 아까와 똑같은 방식으로 틀리는 것을 듣고 청작이 변주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땠어요, 선배?”


이윽고 연주를 마친 청작이 부현을 돌아봤다.


“음이 다 틀렸잖아.”

“윽, 그건 저도 알아요. 음 말고 느낌이요. 괜찮았죠? 희망적인 느낌. 선배, 음표 하나하나 다 지키지 않아도 돼요. 무시 좀 해도 돼요.”

“피아노 배운 적 있어?”

“어렸을 때요. 일곱 살 때인가, 너무 지겨워서 그만뒀는데, 대신 어머니가 수학 학원에 보내셨어요. 가보니까, 수학이 더 지겨운 거예요. 문제도 다 풀어야 하고. 피아노 학원에서는 좁은 방에 숨어서 과일만 몇 개 칠하면 그냥 끝났거든요. 그래서, 다시 피아노 학원에 가겠다고 했죠.”


볼멘소리 가득한 청작의 수다가 이어졌다.


 *


부현은 열심히 살아왔다. 가족들의 지지와 지원으로 부현은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었다. 자수, 다도, 꽃꽂이, 회화, 골프, 발레, 바이올린 등등, 영어나 수학 외에도,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어느 날은 유명 음대 교수가 피아노 방문교사로 왔다. 넌 피아노가 좋아서 치는 게 아니구나. 교수는 그 말을 남기고 떠났다. 존경했던 스승이 떠나고, 부현은 피아노 앞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부현의 능력을 재능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본인의 재능, 가족의 지지. 좋아하지도 않는 걸 열심히, 잘해내는 것을 보아, 확실히 부현에게는 재능이 있었고 운도 있었다. 어떤 것을 잘하게 될 때마다 부현은 피아노 교수의 말을 떠올렸다. 넌 피아노가 좋아서 치는 게 아니구나.


*


“부현 선배!”

“청작, 왜 또 여기에 있어?”

“윽! 그치만, 지금 교실엔 아무도 없을 걸요.”


부현은 청작을 흘겨보았다. 피아노를 연주한 이후, 어쩐지 부현은 청작을 자주 마주쳤다. 강당 커튼을 젖히면,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는 청작이 눈에 들어왔다. 옥상엔 자물쇠가 걸렸고 보건실엔 하도 많이 가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모양이었다. 선배, 여기에선 연타소리가 더 경쾌해야 할 것 같지 않아요? 그럼 더 희망찰 것 같은데. 자신의 일인양 진지하게 함께 고민해주는 청작에게 부현은 더이상 뭐라고 할 수 없었다.


남의 일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도 그렇고,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청작은 참 이상한 아이였다. 성적도 보통, 지원서도 보통, 면접을 그렇게 열심히 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뽑았지. 부현은 종종 청작을 처음 만난 그날을 떠올렸다. 청작을 뽑은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아니다, 그래도 청작은 꽤 괜찮은 학생회 학생이었다. 아아─ 안 된다니까요. 자신보다 세 배는 큰 학생에게도 어김없이 벌점을 주었다. 그 불량학생과 함께 농땡이를 부리긴 했지만. 아아─ 안 된다니까요. 회의에서 다른 부서와 의견이 다를 때, 지지않고 결판을 내기도 했다. 지각을 너무 자주 해서 잘리기는 했지만. 


피아노 연주가 끝나고 부현이 악보를 챙겼다.  

“청작, 지금은 어디 부서에 있어? 도서부에서도 못 본 것 같은데.”

“지금은 마작... 아니 보드게임부요. 선배도 해보실래요? 제원경옥이라는 건데, 진짜 재밌다니까요.”

청작은 신이 나서 핸드폰 게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지...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제발, 제발! 을 외치며 액정을 누르는 청작의 모습이 우스웠다.

청작은 참 밝고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였다. 친구들과 잘 어울려 놀았고, 맛있는 걸 잘 사먹었다. 농땡이를 잘 피웠고, 그 에너지를 공부에 쏟지 않기는 했지만, 급식실에서, 혹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청작은 항상 즐거워보였다.

청작과 헤어져 집에 돌아와서도 부현은 피아노 연습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어째서인지, 부현을 위해 마련된 값비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 피아노 앞에선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연주가 끝나고도 부현은 마지막 연타음을 누르고 있었다. 건반을 치는 것과 동시에, 건반과 연결된 현을 때린 해머는 곧장 제자리로 돌아갔을 것이다. 생성되면서도 동시에 곧바로 죽는 음. 부현은 죽은 음을 오래 누르고 있었다. 건반을 놓자 빠르게 튀어올랐다.  

 *

“벌써 내일이 졸업식이네요, 선배.”

이미 방학을 한 청작은 사복 차림이었다. 

“내일은 가족 분들이랑 바쁘실 테니까 오늘은 저랑 놀아요, 선배. 제원경옥 가르쳐드릴게요.”

부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연습을 더 해야할 것 같아. 자꾸 틀려서.”

“좀 쉬실 줄도 알아야죠~. 쉬는 것도 연습이라니까요.”

약간 실망한 기색의 청작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러나 곧 “좋아요, 선배, 파이팅!”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부현은 피식 웃으며 청작의 옆,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선배, 혹시 졸업하는 게 무서우세요?”

어느 때보다 무거운 연주가 끝나고, 청작이 입을 열었다.  

“…….”

졸업이 무섭냐고? 계획한 대로 잘 흘러갈 텐데, 무서울 리가.

…그럴 리가. 

뛰어난 성적으로 좋은 대학에 붙었고, 선택한 전공을 잘해낼 자신이 부현에게는 있었다.

부현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본인의 재능, 가족의 지지, 운. 그리고 노력 역시 재능의 일부였다. 재능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시도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좋아하지도 않는 걸 열심히, 잘해낼 부현의 능력은 고갈되고 있었다. 부현은 자신이 선택한 대학과 전공을 좋아할 자신이 없었다.

넌 피아노가 좋아서 치는 게 아니구나. 

 

부현은 피아노를 칠 때마다 공허감에 빠졌다. 무의미한 손가락의 움직임. 알림없는 휴대폰 액정을 괜히 터치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무의미한 멜로디는 부현의 귀를 점점 더 자기중심적인 귀로 도태시켰다. 슬픈 멜로디든 희망찬 멜로디든, 부현에게는 그저 무의미한 멜로디일 뿐이었다. 

“그게 아니면, 피아노 치는 게 즐겁지 않으세요?”

청작의 연두색 눈과 마주한 부현은 왠지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래, 맞아.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내일 피아노를 쳐야하고, 어차피 피아노 말고도 즐거운 건 없었어. 그냥, 책임에 따라 미래로 나아가는 거지."

청작이 부현의 손을 잡았다.

“맞아요, 선배. 인생의 모든 일이 즐거울 순 없어요. 저도 그렇고요. 저도 뭘 할 때 제일 즐거운지 모르겠고, 내년에 대학은 어디로 가야하나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우리 아직 고등학교 졸업도 안 했잖아요. 저는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노는 게 즐겁고, 옥상이나 보건실에서 땡땡이치는 게 즐거워요. 제원경옥도요. 저는 제가 좋아하는 걸 찾고 있어요. 선배도 분명 선배가 좋아하는 걸 찾으려고 노력했을 거예요. 하지만 지친 거죠? 이해한다는 말은 안 해요. 그냥, 조금 쉬어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선배, 음표 하나쯤 생략해도, 그 연주가 망친 연주가 되지는 않잖아요. 선배는 선배만의 도화지를, 악보를 지금까지 열심히 채워왔잖아요.”

청작이 부현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선배, 저는 선배와 함께 피아노 앞에 있는 시간이 즐거웠어요. 선배가 연주하는 노래를 듣는 것도 좋았고요. 선배에게도, 저랑 함께한 시간이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부현은 청작의 눈을 마주보았다.

“…나도, 즐거워. 너랑 있는 거.”

그래, 즐거웠다.

즐거웠으므로 부현은 음악실에 피아노 자리가 나도 굳이 시끄럽고 복잡한 강당 피아노 앞으로 왔다. 같이 있는 게 즐거웠으므로 농땡이를 부리는 청작을 교실로 돌려보내지 못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입을 맞추었다. 사랑과 상처를 나누게 되었다거나 서로의 세계를 엿본 것 같다거나 그런 거창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부현은 청작의 숨결에서 전해오는 버블티의 향이 달다고 느꼈을 뿐이다. 그 단 숨결이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에 부현은 입술을 떼지 못했다. 함께라서 즐거웠던 입맞춤은 아쉽게도 금세 끝났다. 청작의 뺨은 복숭아빛으로 물들어있었다. 청작의 입술과 눈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청작, 내일 내 졸업식 와줄 거니?”

 

청작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랑 제원경옥 해주신다면요.”

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청작과 함께라면, 즐거운 졸업식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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