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레일: 글

[스텔반디] 지나가다

스텔레의 기억

리트머스 by 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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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내 비밀기지에 있어. 언젠가 너를 데려오고 싶었는데. 반디, 너의 비밀기지도 참 멋지지만 은하열차도 참 멋진 곳이야. 하루종일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걸 올려다볼 수 있어. 시계를 보지 않는다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지. 학교를 다녀본 기억은 없지만, 방학한 친구들이 말하는 '밤낮없는' 시간이 이럴 때 쓰는 말일까? 반디 너는 학교에 다녀봤을까?

또, 열차엔 멋진 폼폼 차장도 있고─귀엽다는 말보다 멋지다는 말을 좋아하거든─, 그림을 잘 그리는 웰트 아저씨, 커피를 좋아하는 히메코 씨같은 선배들도 있고─히메코 씨의 커피는 추천하지 않지만─, 동료들도 많이 있지.

단항이라는 애는 아카이브실을 객실 칸으로 써. 우리가 다녀온 곳은 물론이고 은하의 다양한 행성, 인물, 지형, 생물, 문명, 역사 데이터가 가득 쌓여있는 곳이야. 단항이 정리를 꾸준히 해놔서, 오래된 데이터는 아래로 쌓이고 최신 데이터는 위로 올라가. 최근에는 반딧불이에 대한 아카이브도 봤어. 너를 닮았더라. 단항의 방도 단항의 고향을 닮았어. 그리운 걸까. 돌아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했다는 게, 너를 닮았네.

Mar.7th라는 애는 사진을 좋아해. 우리가 다녀간 곳들을 찍어서 방 곳곳에 붙여놓지. 벽면 모니터에는 우리가 찍은 사진들이 파노라마처럼 재생돼. 단항의 아카이브와는 다르게 시간순이 아니라 무작위로 모든 사진이 떴다가 사라졌다가 다시 떴다가 하곤 해. Mar.7th는 모든 걸 기억하고 싶은 걸까. Mar.7th의 방에는 폼폼 인형도 있고, 푹신한 쿠션과 침대가 있어서 단항의 방보다는 훨씬 아늑해. Mar.7th와 닮은 것 같아. 이곳도, 그애의 고향과 닮았을까? 참, 너랑 찍은 사진도 붙여놓을게.

  

너를 만나기 전에 다른 행성에서 만난 친구들도 가끔 오곤 해. 나부와 우주정거장을 천체라고 볼 수 있다면. 우주정거장에는 별을 사랑하는 학자들과 그 학자들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모여있어. 얼어붙은 세계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친구들도 있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면서도 바른 길을 가려고 노력하는 친구들도 있지. 물론 내가 멋진 은하열차 방망이 협객이긴 하지만, 그 친구들 스스로의 노력이 없었다면, 관람 칸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멋진 행성들은 볼 수 없었을 거야. 

네가 여기 있었다면, 너의 모성(母星)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을까. 네가 여기 없으니까, 나는 내 기억 속의 너에게 말을 걸 수밖에 없고, 그 반디는 너랑 같아서 대답을 해주지 않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까? 나는 모성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나는 말이 많은 편이 아니라는데─단항도 그런 편이라서 Mar.7th가 외롭대. Mar.7th는 너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나답지 않게 말을 많이 걸게 되네.

이 열차에 오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게, 일단─들도 있어. 와리가리 씨나 올레그 씨 같은… 나에게 잘해주셨던 분들이 많이 떠올라.

너처럼 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요즘은 통 잠을 못 자. 스텔라론은 잠잠한데, 왜일까. 마음의 안정을 얻으려고 관람 칸 쓰레기통 옆에 있다보면, 차장 폼폼이 다가와서 오래 있지는 못해. 폼폼은 대체 언제 자는 걸까? 지금도 봐,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올려다보고 있잖아. 내가 쓰레기통의 비밀을 파헤칠까봐 걱정이 되나봐. 너의 비밀을 알게 되면, 나도 너에게 쓰레기통의 비밀을 알려줄게.

그날 너는 뭘… 하려던 걸까. 뭐가 그렇게 미안했을까? 뭘 지키려고 했을까? 함께 지킬 순 없었던 걸까? 나도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세상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은 것 같아. 언젠가 우리는 페나코니를 떠나 다음 행성으로 워프를 할 거고, 새로운 사람과 모험을 만나게 될 거야. 처음 워프할 때는 그저 즐거운 마음뿐이었는데, 다음 행성으로 가면 갈수록 조금씩… 두려운 마음이 커지는 것 같아. 너도 이렇게 두려웠어? 그렇게 가까이 있었는데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네가 남겨준 톱니바퀴와 너의 비밀기지는 꼭 지켜낼 거야. 내 비밀기지도. 열차의 경호원은 단항이지만, 나도 밥값은 해야겠지? 쓰레기통을 걸고서라도.

열차 차창밖으로 하루에도 수십억개씩 많은 별빛이 지나가. 정차해있는 동안에도 말이야. 은하열차는 처음 운행하는 게 아니라는데, 얼마나 많은 곳을 지나고 얼마나 많은 빛을 지나갔던 걸까? 언젠가 웰트 아저씨가, 저 별빛들은 아주 오랜 시간 전부터 우리에게 달려온 거라고 설명해주신 적이 있어. ─음, 뒤에 뭐라고 또 설명해주셨었는데, 이상한 천재들을 많이 만난 이후로 더이상 과학은 알고싶지 않아─그래놓고 또 빠른 속도로 지나가버려.

그날 너와의 하루도 참 빠르게 지나간 것 같아. 순식간에 결과가 나오는 게임들도 그랬고, 입안에서 사르르 녹아내리던 롤케이크도 그랬어. 너와 본 유성우도, 너랑 같이 들은 로빈 씨의 노래도 그랬어. 언제든지 다시 틀 수 있고 다시 볼 수 있지만 너와 보고 들은 건 사라지지 않는 하나뿐인 기억이니까. 

기억 속의 너도, 앞으로 쌓여갈 기억들에 덮여 아카이브처럼 아래로 내려가버릴까?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아래로 내려간다는 건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뜻이잖아. 반대로 너의 마지막 최신 기억은 나였으니까, 핵심과는 멀어도 아마 너에게 가장 생생한 현재의 기억이겠지? 지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너도 마치 현재와 같아. 언제나 현재에 머무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현재를 오래 기억하고 싶어. 현재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일 테니까. 그런 순간들을 나와 함께 보내줘서 고마워. 

아, 폼폼이 청소기를 들고 오고 있어. 폼폼은 말하겠지, 「스텔레 승객, 지금 관람 칸을 청소할 테니까 자리를 비워줘. 아니! 스텔레 승객도 어서 청소에 참여해!」.

아무래도… 슬슬 자러 가야할 것 같아. 오래 뒤척이다보면, 또 언젠가는 잠이 올 테니까. 꿈은 꾸지 않았으면 좋겠어. 꿈으로 지나갈 일은 아니니까.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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