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텔츄린

온전한 파멸로부터

그것이 속삭였다

HONKAI by 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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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츄린입니다. 페나코니에서의 일 이후 어벤츄린이 무사 귀환했다는 설정입니다. 그가 타로점을 보아주겠다며 열차에 방문합니다.

완두 님의 커미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s://kre.pe/8Nln)

“――당신은 이 세계를 파멸시키고 싶습니까?”

나는 어벤츄린을 빤히 바라본다. 그의 연분홍색 선글라스가 열차 조명의 노란 빛으로 반짝 빛난다. 페나코니에서의 거래를 제안하던 때처럼 진지한 눈과 내리 깐 목소리에, 조금의 장난기를 담고서. 그 뻔뻔한 낯짝을 흘겨보자 잠깐의 침묵을 사이에 두고 덧붙인다.

“이 카드를 해석하려면 그 답이 필요해.”

그야 당연한걸. 점을 봐주겠다며 불쑥 열차에 찾아와 건네는 말이 이런 것이란 말이다. 이곳은 내 방. 앞엔 잘 펼쳐진 타로 더미가 놓여 있다. 칩을 놀리던 현란한 손놀림답게 카드 마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섞어 대더니, 놓인 모양까지 진짜 점술가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다.

나는 뽑은 카드를 생경한 눈으로 들여다본다. 그래도 역시 읽을 수 없다. 블랙 스완 씨가 쓰던, 유리 조각을 기워 만든 듯한 카드와는 아주 다르다. ……무려 아기자기한 곰돌이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들고서 묻는 것이 ‘세계의 파멸’이라니.

그러다 고개 들고,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요?”

“내가 좀 다재다능하잖아.”

“알려주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말해요.”

그는 어깨만 한 번 으쓱이고는 카드를 가져간다. 앞뒤는 왜 굳이 뒤집어 보는 거람. 곧 그의 앞에 툭 두고선 팔짱 낀 채 의자에 깊숙이 기댄다. 시선은 천장으로, 고개는 들고 그렇게 몇 초를. 그런 침묵 속에서 나는 입 연다.

“당신은 마술사를 해도 좋았겠어요.”

“그렇게 생각해?” 그는 눈만 데굴 아래로 굴려 저를 본다. 곱게 눈 접어 웃는 것을 보니 제대로 듣지는 않은 것 같지만. “하지만 친구, 나는 물었어. 이 질문부터 답해 주는 게 어때. 「당신은 이 세계를 파멸시키고 싶습니까?」”

이제는 거래 상대가 아니라 이거지. 젠틀함의 농도가 페나코니에서보다 상당히 낮아진 듯하다. 볼일 끝난 장사꾼이 바꾸어낸 태도에 입을 비죽인다. 되었다, 본래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면 크게 변한다지 않던가. 무명객다운 관대함으로 그런 셈 치자. 페나코니 꿈세계에서의 가짜 죽음도 ‘죽음’임은 같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라 대답할 가치를 못 느꼈을 뿐이에요. 애초에 점을 봐주겠다며 열차를 방문해 제 앞에 나타난 건 당신이라고요. 웰트 아저씨에게도 이렇게 군 건 아니죠? 방금 막 웰트 아저씨 점을 먼저 보고 온 거 아니에요?”

그가 빙글빙글 웃는다. “어떨 것 같아?”

짧은 한숨과 함께 테이블을 탁 소리 나도록 짚으며, “이만 가볼게요.”

“잠깐, 그러지 말고.” 그가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선다. 테이블을 잡고 일어나서인지 테이블보가 그의 앞으로 조금 쏠린다. 카드들도 딱 그만큼 움직였다. 그는 공장에서 그렇게 조형되어 출하된 상품처럼 웃는다. 저가 멈춰 서서 이마를 짚자 그가 제 바로 앞까지 걸어 다가온다. “웰트 씨는 점을 좋아하지 않으신다더라고. 경계를 풀지도 않으셨던 걸 보면 점으로 웰트 씨 자신을 드러내는 게 싫으셨던 걸 수도 있다고 생각해.”

“웰트 아저씨는 신중하시니까요.” 그를 빤히 본다. “……협박이 잘 통하는 타입이라고 들어본 적 많죠?”

“고문이 통하지 않는 타입이라고는 들어본 적 있는데. 아무튼 너무 그러지 말고 이야기 좀 하자아. 페나코니에서 일도 서로 윈윈하는 일이었을 뿐이야.”

“이야기는 좋은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예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정확하게 해요. ‘친구’라면 그런 거잖아요.”

잠시간 입 꾹 다물었던 그는 다시 잘 조형된 미소를 짓는다. 입꼬리의 각도에서부터 시선의 움직임과 목의 기울임까지. “나는 충분히 솔직해.”

저는 그저 이마를 다시 한번 짚었을 뿐이다. 어느새 그의 손이 제 가슴 위에 놓인다. 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의 체온이 닿는 일은 없다. 제 옷과 어벤츄린의 장갑이 전하는 것은 각자 그 자신의 체온뿐이다. 품을 수 있는 것도 딱 그 온기뿐. 이제 선글라스는 없다. 세 개의 색이 가지런히 쌓인 눈만이 이곳에.

그리고 그는 속삭이듯, “네겐 스텔라론이 있지.”

“정보의 출처는 모르겠지만, 페나코니에서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죠.”

부정하지 않는다. 제겐 스텔라론이 있다. 행성 하나쯤은 손쉽게 멸망으로 이끈다는 바로 그 물건을 품고도 저는 살아 숨 쉰다. 그렇게 여러 행성을 거치며 개척에 참여한다. 마땅히 가슴을 편다. 그가 어떤 협박을 하려는 것이라 해도 주눅들 이유는 없다. 열차팀 식구들도 그것을 바랄 것이다.

“그 대단한 파멸을 몸에 품고서도 언제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뿐이라니.”

“그게 궁금한 거였어요? 그냥 별생각이 없는 건데.”

부루퉁한 눈으로 어벤츄린을 바라본다. 그가 놀리는 것인지 감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첫 만남을 떠올린다. 그때처럼 휘어잡은 분위기로 무언가를 강권하려는 것일까. 다음으로는 아마 제 몸의 스텔라론은 컴퍼니에서 관리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정도의 말이 이어질…….

“그래도 된다는 거잖아.”

그러나 그는 그저 눈을 깜박였을 뿐이다. 주조된 듯했던 미소가 진해진다. 오히려 보다 사람의 것 같다.

“생각할 거리가 없는 거죠. 기억이 없으니까요.”

“그건 그래. 하지만 어때? 네가 원한다면 행성 하나쯤은 날려버릴 선택권을 쥔 소감은?”

다이아몬드 동공이 유난히 선명하다. 선글라스가 없음에도, 아니, 선글라스가 없기 때문인가. 스텔라론을 폭발시키는 방법을 모른다는 둥의 말은 약점일 뿐이다. 단순하게 그가 원하던 답을 한다.

“세계를 파멸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왜? 이건 「파멸」이잖아.” 그가 다시 한번 내 가슴을 살짝 힘주어 누른다. 저는 한쪽 눈썹을 삐뚜름히 올리고선 제 손을 그의 손에 덧대어 올린다. 나 역시 힘주어 그의 손을 떼어낸다. 저항은 없었다. 그는 옅게 웃으며 손목 터는 시늉을 한다. “너무하네. 아파.”

“「파멸」의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결국 추측뿐이니까요. 스텔라론의 진실에 정확히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죠. 설령 그 말마따나의 그것이라 해도 괜찮아요.”

“왜? 무엇을 믿고?”

“이건 카프카가 준 거예요. 그녀가, 제게 해가 되는 것을 했을 리 없다고…….”

“그런 얄팍한 믿음을?”

“그런 믿음을. 나는 스텔라론을 품은 것이지 스텔라론이 아니라고.”

그는 이리저리 돌려보던 손목을 멈추고,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등 돌리고서야, 작은 목소리로,

“너는 너를 믿는구나.”

속삭였다.


“당신이 점을 본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정말 볼 줄은 아는 것 맞아요?”

“물론이지.”

다시 테이블 앞이다. 그의 어조엔 여전히 장난기가 담겨 있다만 나는 이전보다 진지하다. 어벤츄린의 자리 앞에 놓였던 카드를 다시 가져왔다. 전과 다를 것 없는 카드를 이번에는 조금 더 들여다본다. 봇짐 지고 떠나는 초록 곰이 그려진 카드. 이번에 그 카드를 앞뒤로 뒤집어 보는 것은 나다. 어느새 그가 테이블을 툭툭 두드려 자신을 보게 한다.

“아까 그 질문에 뒤늦게나마 답하자면, 가족들에게 배운 거야. 츠가냐 사람들이 그렇듯 에브긴도 점을 수단으로 쓸 때가 있었거든.”

“네에,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해했어요.”

“이제 내가 사용하지 않으면 사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저기, 너무 대충 듣는 거 아니야?”

“어벤츄린 씨가 먼저 그랬잖아요. 그리고 제 두뇌는 여자에게만 쓰인다는 점을 지금이라도 기억해 두도록 하세요.”

처음 테이블에 앉았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어깨를 으쓱이는 어벤츄린이다. 그가 고개를 살짝 뒤로 빼고 낮은 목소리로 가볍게, “이봐.”

나는 부러 눈을 동그랗게 뜬다. “협박하는 거예요?”

“아니. 애초에 이 테이블이 협상 테이블인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렇게 싸가지가 없어졌어요? 음, 정성이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그가 고개를 젓는 틈 말한다. “이제 내가 점을 봐줄게요.” 상대가 말할 시간을 주지 않는 그의 화법을 어설프게 흉내 냈다. 아직 점의 결과는 전하지도 않았다는 말은 무시하고 카드를 하나로 뭉쳐 다시 섞는다.

“저기.”

“당신도 했으니 나도 해야죠. 거래를 중시하는 어벤츄린 씨라면 거절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장갑 낀 손이 뻔뻔하게 내밀어진다. 제 손짓은 엉성하다. 어설프게 흉내 낸 화법만큼이나 엉성하다. 그러나, 저가 어벤츄린의 손을 피하지 않았듯 그도 피하지 않는다. ‘그’만큼 능숙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주먹을 쥐었다 편다는 단순한 행위조차 갓난아기 시절부터의 연습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벤츄린’과 ‘스텔레’는 다르다. 해야 하는 일도, 해야 했던 일도, 하는 일도 다르다.

그러나 페나코니에서의 일과 이번 질문을 떠올린다. 세계를 진정으로 파멸시키고 싶어 하는 자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결코 하지 않는 일만은 비슷하다. 카드를 늘어놓자 어벤츄린이 한 장을 뽑는다. 그는 시선에 옅은 불만을 담고서 확인하지도 않고 제게 건넨다. 

“대충 보기로는요.”

“대충 말고는 안 되는 거야?”

“얼핏 보기로는요.”

“똑같잖아.”

“……일단 빨간 곰이 물을 줄줄 붓고 있고요, 노란 별이 떠 있네요. 하얀 별들이 그 주위를 채웠어요.”

진지한 제 말에 그가 대충 고개를 끄덕인다. 나름 최선을 다해 해석하고 있는데 말이다. 보라, 대충 답한다며 서운해할 것은 그가 아니라 나다.

“별빛의 색이 따스해요. 노란빛이잖아요. 그리고 또… ”

“또?”

고민에 잠긴다. 별이 하얗고, 물은 푸른 빛이고, 대조적이게도 곰은 붉고, 하얀 별과…, 아. 팔짱 낀 그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향해 속삭인다.

“곰이 웃고 있어요. 손에 든 제 것들을 쏟아내면서도 행복해 보이네요. 어벤츄린 씨도 행복한 거죠?”

“에, 지금 그걸 해석이라고 한 거야?” 어느새 그가 테이블에 턱 괴고 저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그럼 뭐가 더 있겠어요. 카드에 뜬 노란 별이 제 눈을 닮았다고라도 해야 하나요. 이래 봬도 ‘스텔레’라는 이름은 별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카드를 그에게 건네고, “역시 점이라는 걸 잘은 모르겠지만요. 행복이라도 빌어줄게요.”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는 받아 든 카드를 빤히 들여본다. 의식적으로 긴 숨을 내뱉은 그는, “글쎄, 최근엔 다들 행운을 빌어주더라고. 행복이라. 상투적인 말이지만 도리어 오랜만이네.”

“당신은, 좋은 사람은 아니에요. 저를 대하는 것만 봐도 그렇죠. 컴퍼니에서 하는 일을 봐도요.”

“맞아.” 그는 부정하지 않고 생글 웃는다. 카드를 받아 드는 것처럼이나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저는 기억이 없고도 행복하니, 기억이 있는 어벤츄린 씨라면 더욱 그럴 거예요.”

“손쉬운 말이네, 친구. 무책임하기도 하고.”

열차의 서늘한 공기가 우리 둘 사이를 맴돈다. 창문 너머에서 다가오는 별빛과, 노란 조명과, 그리고 모든 빛의 칼날이 그와 저를 향해 내리 쬔다. 눈이라도 부신 것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선글라스를 쓴다. 나는 노란 눈에 그를 담는다.

“내게조차 그러하니, 행복에는 자격이 필요 없어요. 그러니 당신에게 또한 온전한 파멸은 주어지지 않아.”

잠시 침묵한 그가 늘어져 있던 몸을 고쳐 모아 맑게 웃고, 선글라스 너머의 붉고도 노란 시야로 차창 너머를 바라본다.

별이 가득한 그곳을, “친구는 꽤 바보 같네.” 그저 가만히, “하지만 부정은 않겠어.” 끄덕이며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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