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기차

[블레경원] 첫눈

Ate a Wright by 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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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붕 있음

*공허 운명의 길 선동과 날조

*미래 스토리 선동과 날조

*사망 요소가 존재합니다...

*경원 과거 날조


"그래서, 경원은 좀 어때?"

"어떠고 자시고 할 것도 없어. 아직도 열이 나."

"해열제는?"

"이 정도는 기합으로 나아야지."

"아직 어린애거든?"

"그 어린애도 너보다 나이가 많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약이랑 죽 사왔어. 백주는?"

"따뜻한 거 사오겠다고 별뗏목 몰고 나갔지. 그러는 단풍은? 맨날 붙어다니더니."

"날아올 것처럼 굴더니 군사들한테 잡혔어. 운음술로 감기도 낫게 할 수 있는 것 같던데."

"편리하군…. … 웬 전서가?"

"운기군 문양 아냐?"

"쯧. 다녀온다."

"그래, 다 끝내고 와라. … 그래서, 우리 아원이는 어쩌다가 이렇게 아픈가."

경원은 가물가물한 눈을 떴다. 열이 펄펄 끓는 이마 위로 큰 손이 닿는 감각이 생경했다. 응성은 매일같이 철을 붙잡고 용광로 옆에 박혀서 안 나오길래 손이 뜨거울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차가웠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자 응성이 나직하게 웃곤 그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일어날 생각하지 말고 누워있어. 죽은 못 먹겠네."

"…… 바쁘다고 했잖아."

"요."

"… 했잖아요."

"그럼 애가 아프다는데 매정하게 일하리? 경류 성격에 간호도 잘 못할 것 같고."

"응….

"경류가 빙공을 쓰는데 추위에 약할 줄은 몰랐네. 눈은 처음인가?"

응성은 제대로 된 대답이 없어도 제 스스로 대화를 잇는 것에 능한 사람이었다. 경원은 까슬한 목구멍을 넘어오려는 말을 꾸욱 삼키고 마른 혀를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을 가늠하려는듯 손으로 경원의 이마를 짚어보던 응성이 문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경류의 사택은 창호지문 하나만 열어도 툇마루가 바로 보이는 형태였다.

"경류가 정원 관리는 안 했구만."

"……."

"뭐, 그 성격에 이런 건 못 하겠지. 단풍이 나중에 다 꾸며주지 않겠어? 그래도 소나무라도 있으니 운치가 사네. 이거 봐봐. 예쁘지?"

응성이 몸을 비켰다. 머리맡 쪽으로 자리를 옮긴 것 같았다. 흐릿한 시선을 굴려 툇마루 쪽을 바라보자 아무렇게나 자란 노송의 솔잎 위로 새하얀 것이 소복히 쌓여있었다. 열로 발개진 얼굴이 풀리는 것을 확인한 응성이 다시 낮게 웃었다. 아직 어려서 눈을 좋아한다느니 같은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경원은 이불 속에 묻혀있던 손을 바깥으로 슬금슬금 빼 툇마루 쪽으로 뻗어보았다. 선주의 날씨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편이었으나 때때로 항행 과정에서 태양풍 따위의 플라즈마 폭풍을 맞으면 날씨 시스템 일부가 다운되는 현상이 있다는 것은 책으로만 봤었지 실제로 겪은 건 처음이었다.

응성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쌓일 정도로 오면 다음엔 이쪽으로 안 오겠는걸." 항행 과정에서 시스템이 다운될 정도의 항로를 지나게 되면 과부하 문제를 피하기 위해 다른 항로를 모색한다는 것도 책에서 봤었다. 경원은 소복히 쌓이는 눈을 바라보다 손을 말아쥐었다. 경류의 검끝에서 피어나는 눈꽃과 사뭇 다른 것이 신기했을 뿐인데 -하물며 나가서 눈을 맞지도 않았는데- 이렇게까지 아플 줄 몰라서 솔직히 조금 억울했다.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응성은 차가운 손으로 경원의 이마를 살살 쓸어주다가, 손만 꼼지락대는 경원을 힐끗 내려다보곤 몸을 일으켰다. 툇마루로 나가 오른쪽으로 꺾는 걸 보니 광에 가는 것 같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돌아온 응성의 손엔 괴상한 집게가 들려있었다. 그는 그걸로 눈을 한 웅큼 집어 경원의 손 위에 올려줬다.

"눈오리."

"... 제가 이런 거 좋아할 것 같아요?"

"귀엽잖아."

"그렇, 콜록, 긴 한데."

"눈사람은 못 만들잖아. 대신 이런 거라도 만져봐."

눈코입 없는 오리 형태의 눈뭉치가 경원의 손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경원은 가물가물한 눈에 힘을 꾹 주고 눈오리를 쳐다봤다. 응성은 그새 물수건이 담겨있던 대야의 물을 손으로 떠서 눈오리의 형태를 다듬어 얼리고 있었다. 매일같이 쇠와 불을 다루는 자의 손 안에서 하얗고 작고 연약한 눈오리가 데굴데굴 구르는 게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라 경원은 그만 바람 빠지게 웃었다. 제 하는 것이 우습냐며 응성이 따라 나직하게 웃곤 그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 그리고 어떻게 되었더라? 경원은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천박사에서 보낸 보고서를 주워들었다. 공허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를 궁관진으로 연산해 변수를 계산한 보고서였다. 나부 거함에는 비상 전력 발전기 다섯 개가 구비되어있었고 그 대부분을 대피용 별뗏목 생산 라인과 유폐옥의 보안 시스템 강화에 사용했다는 보고서를 봤던 것 같다. 그가 명령을 내린 것 같기도 하고.

운기군 원수와 다른 선주의 장군들이 결정해 내린 교지에는 공허에 같이 던져버릴 죄인과 다른 선주의 유폐옥으로 이감할 죄인이 나뉘어있었다. 찰나는 주명 선주로 옮겨지고 호뢰는 요청 쪽에서 맡다가 허릉으로 보내기로 했었나. 기원 장수자도 허릉으로 보내고…. 원수와 장군들 사이의 보고서가 이리 간결한 적은 또 처음이라, 경원은 눈앞을 하얗게 흐리는 입김을 손으로 대충 쳐 낸 뒤 태복사 직통 통신을 열었다. 부현이 뚱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뭔가요 또.

"우리 부 태복이 왜 또 삐졌는지 몰라."

-방금까지 방호 선주에 파월고해의 물을 퍼다 날라서 그런거잖아요. 이 일을 누가 시켰는데?

"하하, 미안하네. 그래도 한 번에 그만큼의 물을 나를 수 있는 건 부 태복밖에 없지 않나….“

-하느라 고생 좀 했습니다. 그래서, 뭐가 또 필요하신가요.

"…….“

-미리 말씀드리자면, 궁관진은 석 달 전부터 한 가지 결과만 내주고 있어요. 제가 전달드린 건 피가 가장 적게 흐르는 길입니다.

"그런 건 아니고. 거기도 눈이 오나?"

-안 오겠어요?

"좀 걸을까?"

-안 바쁘신가요.

"신책부가 이렇게 조용한 것도 오랜만인걸. 태복은 아직 바쁜가?"

-… 연산 결과를 정리 중입니다. 그러고보니, 신책부는 동천의 날개 때문에 눈이 안 쌓이겠군요.

경원이 나직하게 웃었다. 신책부 동천의 유지 전력도 생산 라인에 돌린지 조금 되었다. 궁관진을 통해 항로를 수없이 연산하는 건 태복의 기억력 및 판단력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으므로, 경원은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능숙하게 말을 돌렸다.

"요원에 가서 위령제를 지내주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3일 전에 조타수가 직접 올려준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개인적으로 올려주는건?"

-그건 장군님 자유, 앗, 잠시만, 저기요!

"… 부현?"

-…….

검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선명했다. 경원은 저린 눈가를 꾹꾹 누르며 통신기를 들고 신책부의 문을 밀어 열었다. 장군의 무기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석화몽신은 일전 유폐옥 이감 때 주명의 회염 장군이 수거해갔으니, 경원이 그 자를 순수 무력으로 이길 확률은 거의 없긴 했지만, 어린 여자애 한 명 정도는 쉽게 빼돌릴 수 있지 않겠나.

'… 제가 이런 거 좋아할 것 같아요?"

'귀엽잖아.'

뭐, 그 자가 아직 어린 부 태복을 귀엽게 여겨 봐주고 있다면 더 좋고.

경원이 다소 조급한 발걸음으로 태복사에 도착했을 때 부현은 블레이드의 손을 잡아 끌고 다니며 궁관진을 구성하는 세 가지 소형 진을 부수느라 여념이 없었다. 용케 작은 몸에서 천 근짜리 검을 휘두르는 남자를 끌고 다닐 힘이 나는구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별자리가 눈앞에서 산산히 비산했다. "걱정이 무색했군." 하며 웃자 부현이 뚱한 표정으로 블레이드를 제 앞에 세웠다. 뚱한 표정이 둘이나 됐다.

"둘 다 같은 표정으로 날 보고 있으니 좀 무서운데."

"제가 관여할 건 아닌 것 같네요. 여력이 되신다면 신군을 꺼내드릴까 부탁하려고 했는데."

"내 지금 자네에게 장군 직위를 넘겨줄테니 소환해보겠나?"

"원수의 인장도 받지 않고 위임하시겠다고요?"

"농담일세. 어찌, 할 수 있는 건?"

"다 했죠. 저장소와 연산 논리 회로도 부술 수 있는 건 다 부쉈고, 메인 컨트롤 시스템도 과부하로 무너진 지 좀 됐습니다. 전지천군께서 복원하시겠다 하면 그렇게 되겠지만요."

"태복이 고생이 많네. 그래서…. 자네는 왜 여기에 있나?"

블레이드는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경원은 부현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천외의 연산기관이 삽입됐다는 이마를 꾹꾹 누르던 부현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장군과 같은 용건이라더군요."

"위령제?"

"아니다."

"유원에 제사 물품을 다 두고 왔다고 들었어요. 연도 별뗏목도 다 유원에 있을겁니다."

"음, 조언 고맙네. 자네는 이제 나랑 가지."

"유원에 가려는 건 아냐."

"어디서 거짓말이죠? 얼른 가세요."

블레이드는 경원이 잡아끌 땐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더니 부현이 밀자 힘없이 밀려났다….


나부가 항행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을 -항로 유지라던가 엔진이라던가- 제외하곤 전부 별뗏목 생산 라인에 보탠 탓에 유원으로 가는 내내 곳곳에는 눈이 쌓여있다가, 풀이 바싹 메말라있다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애초에 그런 기후에서 기름을 먹여 만든 지우산이 소용이 있을리가 없었으므로 경원은 미련 없이 장낙천에 마련되어있는 보급용 우산 거치대를 발로 밀어 치우곤 폭우 속으로 발을 디뎠다. 장낙천 항구에 정차해둔 신책부 동천에 여전히 눈이 쌓이는 걸 보면 근처 공허 때문에 무언가에 오류가 난 것이 분명했다. 경원은 그런 생각을 하다 몸을 홱 돌려 여전히 지형사 건물의 처마 아래에 있는 블레이드를 바라봤다. 축축하게 젖은 앞머리가 시야를 가리며 늘어졌지만 표정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으므로 경원은 그러려니 했다. 장낙천의 연꽃 무늬 광장 위로 발을 디디고 있자니 지우산을 펼친 블레이드가 그의 머리 위에 우산을 기울였다. "감기 걸려." 그러는 목소리가 꼭 본인이 걸린 것처럼 거칠었다.

"걸리면 뭐 어떤가."

"열이 펄펄 나는 성인을 업고 돌아다니고 싶진 않은데."

"그럼 버리고 가게. 자네 도움은 필요 없으니."

"등효처럼 구는군."

"아직 기억하나? 의왼데."

"……."

마지막 말은 빗소리에 젖어 들리지 않았다. 경원은 축축한 옷자락을 비틀어 물을 짜내며 쾌활하게 웃었다. 우산일랑 버리고 춤이라도 출까, 하니 붉은 눈에 의아함이 드는 게 좋아서 괜히 크게 웃었던 것 같다. 지우산 살이 투둑거리는 소리와 함께 튿어지며 빗방울을 튕겼다. 한숨 소리가 들리기를 잠시, 그늘이 완전히 접히고 블레이드가 경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군용 부츠와 구두가 비에 젖어 철벅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너 좀 이상하군." 블레이드가 그렇게 중얼거렸고 경원은 나직하게 웃기만 했다. 이상했던가? 경원은 항상 블레이드 앞에서 이상하게 굴지 않았던가…. 목을 젖히자 상체가 뒤로 훅 꺾였다. 블레이드의 팔이 제 허리를 감싸는 감각이 선명했다. 푸석한 뺨 위로 흐르는 차가운 물을 느끼던 경원이 중얼거렸다.

"이대로 유원에 가면 얼어죽겠어."

내일 아침엔 사과를 먹겠다고 하는 어투였다.

"당장 얼어죽게 만들 수 있다만."

"하하, 신책부에 던져버리려고? 나쁘지 않지. 눈에 파묻혀 죽고 싶었어…."

"우스운 말을."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봤나?"

"난 눈 안 좋아해."

그랬던가. 눈꺼풀에 물방울이 매달려 흔들렸다. 경원은 눈가에 남은 주름을 타고 흐르는 것이 제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첫눈이 오던 날 눈오리를 만들어주던 응성은 정말 죽었구나, 따위의 생각도 하면서. 경원이 한참 말이 없으니 블레이드는 보채듯 그의 허리를 잡아채 몸을 일으켜세웠다. 시선이 데굴 굴렀다. 그의 머리칼도 축축하게 젖어 뺨에 엉망으로 눌러붙어있었다. 경원은 그의 귓가에 불쑥 고개를 들이밀어 속삭였다.

"거짓말."

"…… 경원."

"신책 장군을 우습게 보는군."

"헛소리나 할 거면 다시 태복사로 데려다주지. 위령제도 안 지낼 셈이었잖아."

"못 가."

"뭐?"

"그래, 뭐…. 내가 아는 건 여우족 특유의 주술 몇 가지 뿐이니. 내가 위령제를 올려봐야 기껏 종이비행기 하나 날리는 꼴 아닌가."

"경원."

"나는 안 가, 블레이드."

"경원."

"신책 장군이 나부를 두고 어디를 가겠나…."

그러니 경원은 미친 척 지내기로 했다. 이제 나부에 그의 행동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장군, 정말 제정신입니까?! 자동항행 기술을 등한시하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난 제정신이야, 부 태복. 지금처럼 정신이 멀쩡한 때가 없었던 것 같군."

"장군!"

"태복은, 눈을 본 적 있나?"

"… 옥궐 선주의 정기 항로에는 겨울 구역이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럼 잘 됐군. 나부의 겨울 대비는 자네에게 맡겨도 되겠지?"

"장군, 말 돌리지 마십시오. 연경이에게는 또 어떻게 말할 셈입니까?"

"나는 겨울에 죽기로 했네, 부현."

"… 장군."

"연경이도 내 스승도 모두 얼음을 다루지. 연경에게 죽던 내 스승에게 죽던, 공허에 빨려들어가 죽던 다를게 무어가 있는가? 내 죽음은 기필코 가장 차갑고, 서늘하고, 어두운 것일테야….“

그런 말을 했던가? 경원은 흐릿한 기억을 되짚었다. 사위가 온통 어두컴컴한 걸 보니 정말 죽었나 싶긴 한데, 천박사가 계산한 자동항행 시간은 대략 서른 네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이 공허의 영향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경원은 가끔 제 시간 감각이 동떨어져있음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나부가 너무 오래 정박해있어서 그런 걸수도 있고. 경원은 힘겨운 소리를 내며 팔에 힘을 주어 상체를 일으켰다. 검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일어났나?"

"… 두고갈 줄 알았는데!"

"새삼스러운 소리를 하는군. 유원이다."

"왜?"

"위령제를 올린다며."

"자네는."

"진즉 올렸어."

요괴 퇴치팀이 본부로 삼았던 그 구역인 것 같았다. 경원은 제 위에 덮여진 너덜너덜한 장옷과 바닥에 널브러진 권자본을 쳐다보다가, 블레이드에게로 시선을 올렸다. 묘하게 탄내가 나는게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블레이드는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넘겨두니 어릴 때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더 자."

"블레이드."

"날이 춥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나."

"이미 걸렸다고 하면?"

"달라질 것이 있나?"

언제를 회상하고 있을까. 경원에게는 첫눈이 오던 날? 아니면 그가 첫눈을 맞은 날? 그는 손가락으로 경원의 이마며 눈가의 선을 따라 덧그리더니, 아예 큰 손으로 이마를 덮어 경원을 억지로 눕혔다. 세양의 불이 떠다니던 때는 도깨비불 같아 으스스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지금은 아주 흐린 달빛과 소복하게 내린 눈이 가득했다. 어둑한 유원과 으슬으슬한 제 몸상태와 달리 블레이드의 손은 꽤 뜨거웠다. 넋을 기리는 등불을 손에서 끝까지 태웠는지 붕대 끝이 타들어가 경원의 이마에 짙은 회색 얼룩을 남겼다. 그는 경원이 누워있는 긴 탁자의 옆에 의자를 끌고 와 털썩 앉았다.

둘 사이엔 한참 말이 없었다. 유원은 선주에서도 낮은 곳이었고, 그 탓에 말 없이 귀를 기울이다보면 귀곡성을 닮은 엔진 구동음이 들리곤 했다. 경원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다 문득 내뱉었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아." 블레이드가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정사로 데려다줄까?"

"자네 갑자기 친절해진 이유가 뭔가?"

"하지 말까?"

"언젠 내 허락 맡고 그랬나? 왜 이렇게 다정하게 굴지."

"경원."

"이거 봐, 지금도 검으로 나를 찌를 생각은 안 하고... 콜록. 세상에, 진짜 감기군."

"비를 그렇게 맞았는데 안 걸리겠나?"

"쯧. 태복이 아까 나부를 나갔어. 널 잘 부탁한다고 하던데."

"서른 네 시간 동안 잘 부탁할 게 또 있나. 자네는? 안 가?"

경원은 몸을 모로 눕혔다. 바닥으로 떨어지려는 장옷을 잡아 다시 덮어준 블레이드는 대답 없이 그의 뒤쪽을 힐끗였다. 경원은 제 뒤에 남아있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다가, 제게 남은 란의 조각이라도 그가 거두어갈까 싶어 몸을 웅크렸다. 그건 경원이 아무리 블레이드라도 내어줄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블레이드는 한숨을 내쉬고 의자 등받이에 좀 더 몸을 기댔다.

"필요 없어."

"음."

"내가 수렵의 조각을 가져가서 무엇하나."

"약사를 죽일 때 쓸 줄 알았는데."

"경류 하나면 충분하지."

"스승님을 검 하나로 다루는 건 자네밖에 없을거야…."

"본인이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나."

블레이드는 그렇게 대답하고 검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블레이드, 하고 이름을 부르자 미동도 없는게 정말 기절한 것 같았다. 머리만 대면 잘 수 있는건가, 놀랍군, 따위의 감상을 중얼거리던 경원은 괜히 손을 뻗어 그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가 답잖게 탁자 바로 옆에 앉아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남은 흉터도, 옷으로도 다 안 가려지는 손목도, 이내 그의 어깨를 지나서 뺨까지….

경원은 그즈음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있었다. 블랙홀이 있는 성단으로 향하자는 명령을 내렸을 때부터 몸살 기운이 있었으니 감기가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그는 장옷을 걸친 채 비틀거리며 탁자에서 내려왔다. 유원에서 신책부나 태복사까진 오래 걸리지 않으니 카프카에게 따로 연락을 취할 요량이었다.

그가 올 걸 알았다는 듯 -사실 부현은 경원의 행동 하나하나를 다 꿰뚫어보는 편이었다- 태복사 동천에 별뗏목을 대자마자 종이가 하늘에서 팔락팔락 떨어졌다. 경원은 부현의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 가득 늘어진 폐지를 쳐다봤다. 꼭 카펫처럼 늘어져있는게 저를 환영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얼른 일 보고 가라는 재촉처럼 보이기도 했다. 경원은 곧 폐지들이 대부분 잡다한 연산 결과를 인쇄해둔 것임을 깨닫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주우며 걸음을 옮겼다.

스포츠 도박 결과 -이건 금지시켰는데- , 시험 합격 여부, 행사의 성공과 실패, 누군가의 안녕, 재회를 기약하기 위해 연산한 이별 기간, 개인의 행운과 불운 따위의…. 아주 사사롭고 소소한 일들은 나부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날로부터 점차 내용이 무거워졌다. 운기군의 무사귀환 여부, 나부가 파괴되지 않을 확률, 친족의 안녕, 뭐 그런 것들이….

경원은 수많은 연산 더미 중 제 안부를 물었던 점괘에는 웃었고 고향이 없어지지 않을 길을 묻는 점괘에는 침묵하며 터벅터벅 걸었다. 어깨에 걸쳤던 장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가, 경원이 미처 줍지 못한 연산 결과지들과 함께 바람에 날려 동천 아래로 추락했다.

부현이 쓰던 탁자 위에는 간결하게 쓰려다 실패한 문서가 있었다. 부현은 제 지인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이상하게 말이 많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종이에서는 부현의 옷자락에서 나던 짙은 모란향, 아마도 그녀를 데리러 온 운기군 특유의 쇠 향이 났다.

경원은 느릿느릿하게 문서를 읽었다. 불초한 저는 먼저 물러납니다, 은하열차에 연통을 넣었으니 장군도 고집부리지 말고 당장 나오세요, 뭐 그런 것들의…. 천성이 상냥한 태복이 할 법한 말이 가득했다. 경원은 문서를 팔락팔락 넘기며 더 남아있는 말이 없는지 확인하다가 책들 아래에 깔린 그의 연산 결과지를 발견했다. 그는 이렇게 되기 몇 달 전에 부현에게 개인적으로 점괘를 봐달라 청했고 부현은 응했다.

운명은 언제나 외길이었으므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곤 나부가 봐야 할 피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경원은 최소한의 피로 자신을 지정했고 부현은 한껏 짜증을 내다가 마지막엔 억울해서 조금 울었다. 그는 나직하게 웃으며 탁자 위에 있는 통신기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렇게 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제일 최근 통신 목록에는 스텔라론 헌터의 번호가 떠 있었다.

-이걸로 연락 줄 줄은 몰랐는데.

"음, 카프카와 통화하고 싶은데. 자리를 비웠나?"

-카프카는 일하러 갔어. 여긴 지금 나 뿐이야.

"은색 늑대가 반겨줄 줄은 몰랐군. 자네들 동료를 데려가라 하라고 불렀어. 내가 가라고 하면 안 가길래."

-블레이드가 말 안 했어?

"무엇을?"

-블레이드는 안 죽어.

"그건 나도 알고 있네. 공허에 빨려들어가는 감각이 좋진 않을텐데."

-아…. 그거 말고도. 나도 운명의 길이 공허야. 그래서 스텔라론 헌터들은 대부분 그런… 거에 면역이 있어.

"정보 고맙네. 여튼간에, 카프카에게 알려주게. 나는 블레이드와 같이 죽을 생각이 없다고- … 흠."

은랑도 어린애로군. 혀를 내민 이모티콘을 받은 경원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렇게 되면 별뗏목 항행 항로를 재설정에서, 블레이드를 태우고 나부 바깥으로 보내는 수밖엔 없지 않겠나. 나부 근처에는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선주 여섯 척 중 요청과 주명 두 척이 와 있었다. 연경은 요청에 가 있고 부현은 주명 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나부 쪽에서 긴급탈출한 것처럼 보이는 별뗏목이 잡힌다면 그들이 구해주지 않겠나. 주명 쪽에서 구해주면 더할나위 없고….

열이 나서 그런지 평소처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경원은 속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했다. 블레이드를 내보내려면 나부가 사건의 지평선 외곽에 접어들기 전에 출발시켜야했다. 중력에 잡히면 아무리 선주의 거함이어도 벗어날 수 없었다. 최소 스무 시간 전에는 내보내야-

"경원."

경원은 느긋한 낯으로 뒤돌았다. 때때로 -사실은 거의 모든 상황에서- 경원은 블레이드의 표정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경원이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수백수천 번을 죽고 살아났던 남자는 꼭 기억과 함께 감정마저 죽은 것처럼 굴곤 했다. 그가 보여주는 감정들을 볼 때마다 경원은 그것마저 카프카가 만들어준건지, 그렇다면 그걸 정말 응성이 허락했는지 따위의 같잖은 질문을 생각하다 답을 얻지 못한 채 그만두는 것이다. 응성은 필요를 위해서라면 정말 최소한의 선을 제외하고 모든 걸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게 블레이드여도 본질은 다르지 않았다. 블레이드는 죽고 싶어했고 경원은 이제, 그의 최소한의 선 밖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화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자네 왜 이렇게… 화났지?"

"……."

"블레이드."

"경류가 그딴 식으로 가르치던가? 네, 목숨따위는, 같잖은 것이니 쉽게 내다버리라고,"

"말 조심해, 블레이드. 아무리 그래도 내 스승이고-"

"스승이 제자에게 목숨은 버려도 된다고 가르치나?"

"블레이드!"

"내가 왜 그 모든 수고를 들여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거지? 경원, 대답해 봐. 내가 고작 네 시체 조각 거둬가서 다른 선주 연맹에게 네가 이렇게 비참하게 죽었노라고 알리려 여기까지 온 것 같았나? 그 영악한 머리로 대답 좀 해보란 말이다."

"… 블레이드, 아무리 나부가 망했다 하더라도 나는 아직 신책 장군이야. 내게 이러는 건, 정말로…."

그리고 한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평소라면 궁관진이 느릿하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려야했는데 그건 이미 부현의 손에 산산조각 나 나부의 가장 깊은 곳으로 사라졌고 태복사는 연산 장치의 고장 문제 때문에 바람도 불지 않는 곳인지라 경원은 괜히 제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블레이드라면 경원은 뭐든 괜찮았다. 나부에 돌아오지 않아도 좋았고 제게 화를 내어도 좋았다. 책망이던 원망이던 뭐든 받아들일테니, 전부 괜찮을거라고. 경원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무력으로라도 블레이드를 데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블레이드." 호명당한 그가 시선을 올린다. 경원이 헛숨을 들이켰다. 그런 건 본 적이 없었다. 응성도 블레이드도 제 앞에서 보여주지 않은 것이었다.

"… 내 죽음엔 경류가 있었어."

"블레이드."

"단풍의 죽음엔 네가 있었지. 백주가 죽었을 땐 나와 단풍이 있었고."

"블레이드, 제발…."

"경류의 죽음엔 연경이 있을텐데. 그럼, 네 죽음 곁에는 누가 있지?"

"……."

경원은 침묵했다. 블레이드가 그의 손목을 붙잡은 채 중얼거렸다.

"내가 네 끝을 볼 수 있게 해 줘, 경원."

…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경원은 멍한 낯으로 별뗏목 바깥 풍경을 바라봤다. 어느 곳에는 비가 오고, 어느 곳에는 눈이 오는데 바닥을 훤히 드러낸 인연경이 낯설어서, 새삼스레 나부가 온통 낯설어진 것만 같아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창틀에 머리를 기댔다. 선주의 항행과 연동시켜둔 별뗏목의 항로 시스템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지평선이 가까워지면서 순식간에 모든 빛이 나부에서 꺼졌다.

경원은 창문 바깥에 고정되어있던 시선을 거두곤 블레이드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공허의 운명 덕분에 이런 곳에선 죽지 않는 스텔라론 헌터, 나부와 함께 익사하는 선주의 장군. 우스운 조합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별뗏목 선실에서 몸을 웅크렸다. 블레이드는 검을 치우고 그를 잡아끌어 누웠다. 체격이 엇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주 안으니 어째 블레이드가 조금 더 큰 것 같아 경원이 눈을 깜박였다.

조종사가 잠에 들었다고 판단했는지 선실 내부의 불이 훅 꺼지고, 나부의 모든 불이 꺼지자 온통 암흑 뿐이었다. 경원은 괜히 블레이드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느리게 뛰는 심장 소리만 들렸다.

"사람은,"

"음."

"이렇게 안고 있으면 심박수가 같아진다던데."

"그런가."

"나부가 핵으로 들어가는데 앞으로 열 시간도 안 남았어…. 내 심장이 멎으면 자네 심장도 멎는건가?"

"내 죽음을 네가 줄 순 없어, 경원."

"하하, 그렇지. 그래도, 나는 자네의 죽음을 지킨 적이 없었으니까….“

"아직도 열이 나는군. 더 자, 경원. 잠들었다 깨나면 모든 것이 끝나있을테니까."

"열 시간이나 자는 건 무리야…. 자네는?"

"같이 자는 걸 바라면 그리 하고."

"그럼 같이 자."

블레이드가 느리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선명했다. 경원은 으슬으슬 떨리는 어깨를 옹송그리며 눈을 감았다. 무어, 죽음에 대한 것 중 절반은 이루지 않았나. 눈이 오는 날 어두운 곳에서 죽고 싶다는 바람은 이루었으니 이제는 정말 미련 남은 것들도 두고 갈 때가 되었다.


-블레이디, 안 자?

"… 잔 적 없어."

-이거 성능 좋네. 스타피스 컴퍼니가 출시를 앞당길 만큼 성능이 좋다더니 진짜였나봐?

"용건은?"

-음~ 우리가 구하러 가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괜찮아?

"……."

-블레이디?

블레이드는 품 안에 남은 것을 내려다봤다. 짙은 붉은색 머리끈이 나풀나풀 움직이는 게 꼭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머리끈 채로 경원의 머리를 좀 더 끌어안으며 귀에 낀 통신기에 짧게 말을 이었다.

"동행자가 있어."

-장군이 아직 살아있어?

"영혼은 죽었을지도 몰라. 육체는 나와 가까이 있어서 형체를 유지하는 것 같은데."

-으흠?

"… 열 시간이 지났는데도 깨어나질 않아서."

숨을 쉬는지 확인하려 손을 조금이라도 떼면 경원이 산산조각 나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는 옹송그린 경원의 어깨를 더듬거리다, 경원의 팔을 제 허리에 두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

-마음대로 해, 샘이 은랑이랑 같이 갈 거야.

"기다리지."

-그래, 조금 이따가 봐.

내 심박수가 너와 같아졌으면 좋았을텐데. 블레이드는 아주 느리게 회상했다. 제 심장이 뛰지 않아서 경원의 심장도 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숨도 심장도 필요하지 않는 사내였지만 한때 그런 것을 갈망한 탓에, 숨도 심장도 필요한 아이의 곁에 있으면 그의 숨과 심장을 잡아먹어버리는 것이다. 블레이드는 제 귓가에서 일정하게 울리는 심장 고동음이 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의 정신 곳곳에서 피어나던 은행나무를 잡아먹어서, 경원이 영생토록 평안했으면 좋겠다고…. 블레이드는 눈을 감았다. 경원이 깨어나고 싶을 때까지 잠들었다면, 저도 그 옆에서 같이 잠들어서, 같은 시간에 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부정한 것이었으므로…. 블레이드는 그의 어깨를 건들이는 은랑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엘리오의 단편극 하나가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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