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기차

블레경류 습작

캐해연습용 / 그냥 보고 싶은 거 다 때려넣은거라 기승전결이 없음...

글러먹음 by 호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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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응성은 경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있어봐야, 뭐, 백주의 친구? 백주의 행동 하나에 죽고 못 사는 여자? 검수대인? 뭐 그런 것들. 장수종과 단명종의 차이는 하늘과 땅보다 컸으며 경류의 행동 하나하나를 응성이 이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나,

"일어나."

원죄와 속죄 앞에선 모든 것이 공평해진다. 응성은 새까맣게 죽은 피를 목구멍으로 뱉어내며 끌어올려지는 대로 고개를 쳐들었다. 여자가 새까맣게 죽은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응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주 오래 전, 여자의 전백에 찢겨 나간 기억 조각을 더듬었다. 섬망이었다. 눈앞이 까맣고 하얗게 점멸하고 귀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들렸다. 사방에 검은 옷을 입은 것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경보음처럼 울리는 소음 속에서 여자의 말 한마디만이 비수처럼 날카롭고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네 첫 번째 죽음이다."

빌어먹게도, 그 말이 옳았다.


아키비리의 열차는 마음만 먹으면 교량이 끝도 없이 늘어지는 무한의 기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지 않는 건 더 블루의 헤르타 우주정거장 규격에 맞추기 위해서 외관의 교량을 제한한 거라고, 그를 안내하던 스텔레가 말해주었던 것 같다. 블레이드는 손을 뻗어 검은 기관차의 외곽에 양각되어있는 금장식들을 쓸었다. 도색한 장식들 위에도 복잡한 무늬를 음각한 것이 굳은 살 아래로 미미하게 스쳐 지나갔다. 응성이라면 이 무늬가 어떤 의미인지, 또 무엇을 기원하는지 눈을 감고도 읊을 수 있었지만 블레이드는 많은 걸 잊었다.

이젠 검이 아닌 것을 잡으면 손을 떠는 신세였다. 그런 손으로 아키비리와 항법사의 오래된 소원과 개척 운명의 길의 기원을 파악하는 건 모독적인 일에 가까웠다. 헤르타가 플랫폼 천장의 절반을 다이아몬드를 갈아 만든 유리로 채운 탓에 더 블루의 물결 빛이 이리저리 반사되어 그의 발밑에도 바다를 드리웠다.

"블레이드."

"… 경류."

낯익은 목소리. 그가 기억하는 몇 안 되는 것 중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이 바다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블레이드는 경류가 단풍과 응성이 있었던 시절의 인연경을 기억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경류 역시도 많은 것을 잊었을테다. 마각은 아직 증상이 오지 않은 자에게도, 증상이 온 자에게도 공평하게 그들의 기억을 가져갔다.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열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 아니었나?"

"이쪽에서 반물질 군단의 괴수가 나왔다기에."

아, 그 여운인가 뭔가 하는. 에이언즈의 가호를 받는 -헤르타 우주 정거장은 스타피스 컴퍼니의 보호 아래에 있었다- 장소 곳곳에는 과거의 잔예가 남아있었다. 블레이드는 안대를 낀 경류를 가만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개척의 비호를 받지 않았고, 마음만 먹으면 아키비리를 모독할 수 있었다. 그런 치들이 아키비리의 유산 옆에 있어 무엇 하겠는가? 하물며, 별을 베어 떨어트리는 것이 목표고 그럴 기량이 있는 존재는 더더욱. 발을 돌리자 소리 없는 발걸음이 따라 붙었다. 더 블루가 드리운 바다색 그림자가 조금씩 얼어붙고 있었다.

"여기선 안 돼."

"내가 뭘 할 줄 알고?"

"죽여달라 청하지도 않을거야. 여긴… 그 애의 장소니까."

"단항을 그 애라고 부르는 건 아닐테고."

"어린 애야. 추억이 있는 곳을 망가트리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지."

"언제부터 그렇게 상냥했다고."

"우리가 더 할 대화가 남았나, 경류?"

그럼 얼음이 멈춘다. 블레이드는 앞서나가던 걸음을 돌렸다. 안대 때문에 경류의 시선이 어디로 가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으나 살갗에 닿는 한기만은 선명했다. 달의 변화를 그린 소매가 제 움직임에 따라 나풀거리고 있었다. 경류는 대답이 없었고, 대답을 바란 질문도 아니었으므로 그는 열차의 난간을 붙잡고 훌쩍 뛰어올랐다. 그제야 경류가 고개를 따라 올렸다. 안대 한 장에 가려져 있는 붉은 시선이 잠시간 공중에서 얽히며 서로를 가늠하는 듯 굴었고, 먼저 물러난 것은 경류였다. 블레이드는 열차칸의 문을 밀어 열었다. 경험상 뒷문은 안 쓰는 창고로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칼, 을 닮았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말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기백 년 전의 날짜가 찍힌 나무상자에서 담배 잎을 꺼낸 경류는 익숙하게 장죽 안에 잎을 재어 넣었다. 제 몸이 곧 검이었고 검이 곧 저였으니 얇은 손가락 위에서 바싹 마른 이파리가 가루가 되어 바스라졌다. 붉은 시선이 흐린 연기에 자욱하게 가려지자 큰 손이 부류연을 헤치고 경류의 뺨을 건들였다. 그는 얼음을 다루는 저보다 유독 손이 더 차가웠다. 그러면 경류는 문득, 저 차가운 손이 온통 뜨겁던 때를 떠올리는 것이다. 그때 그는 흰 머리였고 손끝엔 화상 흉터가 가득했다. 또 어느 때는 손이 온통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로 새빨갰다. 어느 때는……. “이상한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텐데.” 그의 손으로 넘어간 장죽에서 담뱃재가 쏟아졌다. 블레이드는 개의치 않고 물부리를 물었다가 긴 연기를 내뱉었다. 미지근한 혈향이 났다.

우스운 일이다. 검에서 어찌 혈향이 난단 말인가. 눈앞의 남자는 정진정명하게 살아있는 치였다. 짙은 혈향, 화약의 매캐한 연기, 싸구려 향수와 그걸 덮는 피안화 향을 온몸에 묻힌 채로.

“별 생각 안 했어.”

“전장에서 생각하지 않는 것만큼 멍청한 것은 없다며?”

“그건 다수전일 때지…. 일대일 상황에서 생각할 겨를이나 있나?”

“나는 종종 있었다만.”

“그러니 네가 항상 지는 거야.”

“우스운 소리를.”

블레이드는 연기를 몇 모금 더 마시더니 미련없이 장죽을 돌려뒀다. 경류는 안에 남은 불꽃을 가늠해보았다. 이십 분은 더 피울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쩐지 그럴 흥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경류는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곤 장죽을 엎고, 블레이드의 어깨를 잡아 끌어와 입술을 겹쳤다. 내뱉지 않은 연기가 입술 틈 사이로 지난하게 흘러내렸다.

담뱃잎 중에서도 상등품일 것이다. 나무 상자에 박힌 채 기백 년이 지났는데도 매캐한 탄내 뒤로 옅은 목향이 나는 것을 보면. 눈썹을 찡그려 미간을 좁힌 블레이드가 몸을 기울였다. 이유를 묻는 눈에 경류는 어깨를 으쓱였다. 경류에게 많은 것은 필요하지 않았고 이유도 그 중 하나였다. 구태여 단어를 찾아 붙인다면, 검수대인은 제 검을 차갑게 내어둔 적이 없으므로. 그뿐이었다.


블레이드는 종종 경류의 심장 소리로 시간을 재었다. 애초에 아키비리의 열차 창고 칸은 바깥으로 난 창문이 없었으며, 설령 창문이 나 있더라도 더 블루의 위성과 비슷한 궤도로 공전하는 우주정거장의 플랫폼은 항성이 아니라 더 블루 쪽으로 창을 터 놓았기 때문에 시간을 알기가 어려웠다. 블레이드의 심장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느리게 뛰었으니, 그나마 오전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일정한 박자를 유지해오고 있는 경류의 심박이 현 상황에서 그의 유일한 시계가 되었다. 굳은 살이 박힌 손 아래에서 여린 맥박이 일정하게 두근거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경류는 일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초식도, 보법도, 검법도, 말하는 어조와 속도도. 심장도 그러했다. 블레이드는 경류가 그 날도 이렇게 심장이 뛰었을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렇게 뛰지 않았을 거란 건 블레이드가 가장 잘 알았다.

창고에서 방까지 옮겨오는 내내 경류는 죽은 듯이 잠들어있었다. 그게 경류의 마각을 잠재우는 방법일 것이란 생각을 했다. 블레이드는 경류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고 -응성 때와 마찬가지로- 그나마 얼추 기억하고 있는 것은 월하미인을 좋아했다는 것 뿐이었다. 백주의 생일에 언제나 월하미인이 만개했다는 이유였을 것이다. 항법사가 내어준 방의 침대에 눕혀놓자 경류가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새하얗게 질린 뺨 위로 겨울 하늘을 잘라놓은 것 같은 머리칼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뺨을 살살 쓸어 잔머리를 정리하다, 손을 내려 훤히 드러난 목에 손을 갖다댔다. 그러나 블레이드는 자신이 경류를 죽일 수 없음을 알았다. 그의 유일한 속죄 방법은 경류 뿐이었으므로. 그리고 경류의 유일한 원망 상대도 블레이드일 것이었다.

속죄와 원죄 앞에서는 모든 것이 공평했다. 장죽에 불을 붙여 부류연이 피어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그는 그날 인연경을 가르고 하늘을 찢던 것의 자태를 떠올렸다. 죽음으로 하여금 도망갈 수 있었던 자는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도망갈 수 없는 치들의 몸에서는 언제나 악룡이 하늘을 가르던 날의 연기 향이 났다. 악룡을 직접 베어 죽인 경류는 더욱 그랬다. 뜨거운 피에 녹은 얼음의 물비린내, 화약의 매캐한 연기, 월하미인의 옅은 향과 그걸 덮는 백화의 진한 향…. 그는 귀한 것을 매만지듯 -아키비리의 열차 외벽에 새겨진 금색 양각을 매만질 때처럼- 손목을 따라 팔 안쪽까지 이어지는 푸른 맥을 손으로 따라 그렸다. 경류는 피부가 창백해서 조금만 열이 올라도 혈맥이 도드라져 보이곤 했다. 검을 쥘 때는 손등이 바깥을 향하게, 그러지 못할 땐 칼날의 면이 손목 안 혈맥을 가리도록. 첫 번째 죽음이라고 선고하던 목소리와 자세를 교정하는 목소리가 똑같았다. 사방에서 빠르게 점멸하던 까만 것들이 경류의 목소리를 흉내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어쩌면 경류가 마각에게 내어준 것은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블레이드는 막연한 상상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항법사가 내어준 손님용 방의 이불은 부드러웠으니 그런 이불에 담뱃재 자국이 남는 것은 곤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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