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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합은 신중하게

단문 공미포 3,551자

Rusty Sky by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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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05. 14 포스타입에 올린 글을 옮겨왔습니다.

* 단항카일 단항남척 

* 퇴고× 이것도 손 풀려고 썼던 건데... 1천자 넘어갈 줄 몰랐는데 넘어가서 따로 올립니다...

* 스포주의. 야릴로 엔딩 이후의 후일담같은 느낌으로 썼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단항은 격운을 틀어쥔 손에 힘을 주며 생각했다. 장병기 특유의 묵직함이 손안에 들어차자 가벼운 긴장감으로 온몸이 조여든다. 

시작은 실버메인 철위대 측에서 보내온 공문이었다. 

은하열차팀 귀하. …무명객 여러분의 열계 침식 그리고 반물질군단에 대한 고견을…모월 모일 모시에 제537회 실버메인 철위대 대경합에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신다면…….  

파도처럼 밀려드는 온갖 미사여구에 가장 먼저 나가떨어진 것은 Mar. 7th였다. 그러니까, 연습상대 해달라는 뜻이죠? 근데 왜 이렇게 말이 길어요? 실버메인 철위대 방위관 게파드ㆍ랜도는 종알거리는 목소리를 향해 가벼운 미소를 보냈다. 

"대경합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격식을 차려야 하는 자리는 아니야. 아직 나쁜 버릇을 못 버린 신병들을 정신 차리게 만드는 연례행사 같은 거지. 원래대로라면 벨로보그에서 이름난 검술사범을 모시는 자리였겠지만,"

방위관은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번에는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벨로보그 하층과 상층에서 이어진 모든 전투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상황의 특수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축소된 부분이 있다고는 하나, 은하열차팀의 행적은 대외적으로 밝힐 수 있는 것만 해도 상당한 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공문에서 언급했던 대로 허졸을 효과적으로 쓰러트리는 법이나 열계 침식이 진행 중인 공간에서 누적되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에 대해 알려주십사, 하는 거겠지. 겸사겸사 병사들과 가볍게 손도 좀 섞어보고.

그리하여 은하열차 삼인방이 실버메인 철위대 앞에 서게 된 것이다. 가장 먼저 나선 Mar. 7th는 자신과 똑같이 활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병사와 붙겠다고 선언했고,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모의전투는 서로 적당히 체면을 유지하는 선에서 무사히 종료되었다. 대련을 끝마친 후, Mar. 7th와 맞붙었던 병사는 정중한 태도로 활을 한번 들어봐도 되느냐고 물었고, 흔쾌히 넘겨주는 무기를 받아든 뒤에는 좀 질린 얼굴로 돌려주었다. 활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웠던 탓이다. 

"아~재밌었다! 너네하고 연습할 때랑은 또 다르더라!"

그렇게 말한 Mar. 7th는 관중석을(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 투박하게 생긴 의자가 줄지어 놓였지만, 어쨌든) 주의 깊게 살피더니, 이내 찾던 사람을 찾았는지 팔랑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웃음소리, 칭찬, 그런 것들로 얼마간 소란스럽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Mar. 7th와 병사의 경합 뒤는 은하열차팀끼리 겨룰 차례였다. 야릴로-Ⅵ 개척임무에 참여하지 않았던 히메코와 웰트는 삼인방의 보호자 자격으로 관중석에 앉아 있었고, Mar. 7th는 방금 얼음화살을 쏟아내어 관중의 환호를 얻어냈으니 남은 건 둘이었다.  

경합은 신중하게 

단항×카일루스(남개척자)    

단항은 한 손으로 격운을 쥐고 상체를 반듯하게 세웠다. 좀 떨어진 곳에서는 카일루스가 예의 그 야구배트를 들고 이쪽을 보고 있다. 철위대 측이 창을 빌려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고 들었다. 장병기와 짤막한 둔기, 게다가 한쪽은 은하열차팀의 경호임무를 맡은 사람이랬다. 병사들이 조용히 의견을 나누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린다. 경험의 차이를 무시하기 어렵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길이가 긴 장병기가 유리할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단항도 무기의 길이 차이에 따른 이점에 대해서는 마음속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카일루스의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가 떠 있었다. 그도 병사들이 승리를 점쳐보는 말을 들었을 텐데, 자신의 패배를 예견하는 목소리에 주눅이 들지도, 불안해 보이지도 않았다. 눈이 마주치자 입 모양으로만 말을 건다. 

할까? 

무언으로 의사를 묻더니 씩 웃는다. 저 머릿속에서 어떤 기상천외한 계획이 도사리고 있을지 읽어내기 어려웠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저를 쓰러트리려고 달려들 거란 점. 단항은 빈손으로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런 뒤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기 시작의 신호를 주고받는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렸다. 속전속결로 끝낼 생각이었다. 보통 선두로 달리는 건 카일루스였고 그 뒤를 Mar. 7th와 단항이, 후미는 전투경험이 많은 히메코와 웰트가 담당하는 게 은하열차팀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전투원을 후방 배치해 연속으로 공격을 퍼부을 수 있게끔 하는 게 이득일 때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러니 제가 탐색하지도 않고 달려들 거라 예상하지는 못했겠지. 단항은 격운을 넓게 휘둘렀다. 

캉! 기다란 길이를 십분 활용해 길게 휘둘러진 창끝을 야구배트가 막아섰다. 키기긱,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창이 뒤로 물러서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거세게 찔러들어온다. 카일루스는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리려고 했지만, 경기 시작과 동시에 달려든 상대에게 이미 충분한 공간을 내어준 뒤었다. 그는 제 예상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단항이라면 이렇게 급하게 뛰어들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단단히 잘못 짚었다. 설마 시작하자 마자 몰아붙일 줄은 몰랐지!

뒤로 몸을 날리고, 발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상체를 숙였다. 머리 위로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바람이 일어 뒷목이 선뜩했다.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카일루스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 창끝을 고개를 틀어 겨우 피했다. 창날이 콱, 하고 박히는 소리에 관중석에서 누군가가 놀라 밭은 숨을 내뱉는 것이 들렸다. 제각기 다른 의견으로 두 사람의 승리를 예측하던 병사들의 목소리도 언제부터인가 멈춘 뒤였다. 

바짝 낮추었던 몸을 일으키다 넘어지지 않은 건 천운에 가깝다고 생각하면서, 바닥에 박힌 격운을 겨냥해 발을 휘둘렀다. 이대로 아예 바닥에 못박을 셈이었다. 그러나 카일루스의 운은 실패할 거라 여겼던 회피동작에 성공하는 것에서 바닥났는데, 발아래에서 엄청난 저항감이 느껴지더니 창이 어이없을 정도로 가볍게 뽑혀 나왔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꽂힌 창을 발로 밟아 무기를 못 쓰게 할 셈이었는데, 하마터면 격운이 뽑히는 서슬에 나동그라질 뻔했다. 

얼른 창을 짓누르던 발을 거두었지만, 그가 또 한 번 넘어질 위기에 처하는 것으로 승패가 갈렸다. 장병기 대신 매섭게 뻗어나온 손이 멱살을 틀어쥐었다. 멱살이 잡힌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넘어지지 않은 대신 어정쩡한 자세로 서게 된 카일루스는 제법 가까워진 거리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옅은 밀빛 피부는 가볍게 달아올라 있고, 눈빛은 잘 벼려진 쇠붙이처럼 날카로웠다. 한쪽 눈가에만 칠한 붉은 화장이 조금 번져서……. 입안이 바싹 마르는 것 같다. 카일루스는 조금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꼭 키스하고 난 다음 같다."

말 한 마디에 매섭게 갈린 투쟁심은 눈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약간의 당혹스러움만이 남았다. 단항은 처음에는 조금 의아한 표정을 했다가, 뒤늦게 이해하고서는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기 그득한 샛노란 눈동자를 마주하자, 경합에서는 이겼지만 정신적으로는 급소를 깊게 찔린 기분이었다.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이 빠지자, 손은 상대의 멱살을 잡기보다는 거기에 엉성하게 매달린 것 같은 신세가 되었다. 가까이에 있었던지라 카일루스의 눈에는 점차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단항의 귀 끝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너, 무슨 소리를……!"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커지기 전에, 카일루스는 얼른 야구배트를 떨어트리고 양손을 적당한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런 뒤에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항복! 내가 졌어."

그 목소리로, 단항은 끊어질 것처럼 사방에서 잡아당겨 졌던 신경줄이 불시에 놓이는 느낌을 받았다. 뻣뻣한 손가락을 움직여 그때까지 붙들려 있었던 카일루스를 놓아주었다. 평소대로라면 구겨진 옷매무새까지 제 손으로 직접 정돈해주었겠지만, 이번에는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런 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옆에서 천연덕스럽게 말을 붙여온다. 자, 악수해야지? 그는 겨우 내밀어 진 손을 맞잡을 수 있었다. 카일루스는 맞잡은 손을 두어 번 흔들더니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 뒤로는 병사들 간의 대련과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신 은하열차팀에게 바치는 헌사, 마치는 인사 따위의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단항은 행사에 집중할 수 없었다. 

"…너,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저도 모르게 말미에 한숨이 묻어난다. 옆자리에 앉은 카일루스가 숨죽여 웃는지, 어깨에 기댄 몸이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괜찮아, 아무도 못 들었을걸. 들었어도 내가 또 이상한 장난이나 치는 줄 알겠지."

그간 함께하며 두 눈으로 목격해온 그의 기행을 생각하면 퍽 적절한 답변이었다. 더 따질 기력도 없어서, 단항은 두 손으로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

"앗, 잠깐만, 단항! 따가워! 잠깐만!"

단항은 만류하는 목소리를 순순히 따르는 대신 몸을 바짝 붙였다. 연신 꿈틀거리는 걸 제 몸으로 덮어 누르자 밑에서 으으윽, 하는 소리가 들린다. 카일루스는 다리를 두어 번 흔들어보았으나,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곧 그만두었다. 대신 귀걸이를 슬쩍 당겨보았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을 잘근잘근 씹던 단항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댄다. 카일루스는 단호하게 제 의사를 말하려 했지만, 한쪽 눈가만 붉게 물들인 화장이 조금 번진 것이 보이자 결심이 흐려질 것만 같았다. 그래도 목에 자국이 남는 것만은 안 된다. 제가 가진 옷으로는 목을 가릴 수가 없었고, 그렇다고 단항의 옷을 빌려 입으면 열차 식구들한테 설명할 거리가 곤궁하다. 그는 목은 안된다고 몇 번이고 되새기며 입을 열었다.

"따가워, 단항."

"흐음."

"흐음, 이 아니라 따갑다고."

"……."

"아, 잠깐만, 그거 간지러워, 앗, 간지럽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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