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

同一한 것의 永遠回歸

붕괴3rd/붕괴: 스타레일 기반 허공만장×웰트 양

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

同一한 것의 永遠回歸

츠타(@tsutaamazing) 씀. 표지 햄(@Hawaiian_ham) 님.

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 2023. 일판 일차 인쇄, 2023년 10월 18일

글쓴이 | 츠타@tsutaamazing 편집 | 츠타@tsutaamazing

표지 디자인 | 햄@Hawaiian_ham

표지 사진 원작자 | 픽사 베이 무료 이미지 인쇄소 |

http://프린트매니아www.print-mania.co.kr

문의 이메일 |

mailto:tsutaivy1@gmail.com

본 창작물은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금합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저작권자와 서면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r sagte: “Ich liebe dich.”

침대라는 형태를 갖춘 문명은 꽤 오랜만이다. 웰트 양은 이불까지 덮자 완벽하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공만장이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함께 있는 데에도 긴장이 풀린다니, 일 여년 전의 자신에게 얘기하면 절 대로 믿지 못할, 믿지 않을 소리였다.

불을 끄고 잠드는 문화권이다. 그는 여러 문화권을 경험했지만 경험을 하면 할수록 수면도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걸 확인할 뿐이었고, 그로 인해 불 끄고 자는 문명을 발견할 때마다 뛸 듯이 기뻤다. 우연히도 침대가 있었고 우연히도 불을 끈다. 기쁜 우연의 일치였다.

허공만장은 벌써 누워서 기지개까지 쭉 펴고 있었다. 잠시, 그는 허공만장이 입고 있는 육체를 바라보다가, 노려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행성의 언어는 배우기 쉬웠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하기 쉬웠다.

“그러고 보니…….”

웰트 양이 자기 전에 먼저 운을 떼는 것은 드문 일이다. 허공만장은 이쪽으 로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가운데, 녹색 눈이 보인다.

“자네는 그 자와 함께 있을 때 여러 언어를 배웠겠군.”

“그 말은 조금 이상하군. 나는 배운다기보다 습득했지. 이해하고, 분해하고, 씹어 삼키고. 자네도 아는 감각일 텐데, 웰트.”

“…….”

웰트는 잠시 침묵을 고수한다. 그렇긴 했다. 그들의 본질은 어느 면에서 같으니까.

“하지만 오토 아포칼립스는 달랐지. 아, 이런. 그의 이름을 꺼내서 불쾌했나? 그는 꾸준히 배우는 걸 선호했어. 물론 나를 이용한 적도 꽤 있지만, 그래도 직접 배우는 것에서 재미를 느끼던 괴짜라서 말이야.”

“그랬던가.”

“불필요할 정도로 성실한 면이 그에게 있었단 건 자네도 인정하겠지? 그는 늘 같은 말로 언어를 시작했지. 그럴 만한 인간이었고.”

그는 잠시 그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언어를 열어 젖히는 말은 대개 비 슷하다. 예를 들자면, 내 이름은 ‘무엇’입니다. 이런 말들.

“‘나는 널 사랑해.’”

잠시, 들려온 말에 웰트 양은 안경이 눌리는 걸 느끼며 시선을 허공만장을 향해 고정한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틀림없는 현재형의 문장이다.

“항상 현재형이지. 그리고 이 말을 늘 그녀에게 바쳤고. 그녀가 누군진 이름 을 안 꺼내도 알겠지? 그런 남자였으니까.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군.”

“이 문장으로 동사변형을 외우곤 했지. 그럼, 잘 자게, 내 친애하는 이여.” 마침내 웰트 양은 안경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옆으로 한 번 크게 돌고 잠을 청했다.

完.

Despite Everything

“아하, 그렇게 이지적인 이치의 율자라서, 그래서 자네의 ‘아들’을 자네는 조이스라고 부른 거군? 천하의 오토 아포칼립스도 제 ‘손녀’와 거리두기는 끔찍하 게 했지. 오토 아포칼립스의 움직임이 얼마나 매번 발악에 가까웠는지 자네는 모르지? 테레사 아포칼립스를 만들어내고, 이름을 주고, 그녀를 키우고, 감시하 고, 자유를 주고, 의무를 주었지만 죄악은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 애를 썼지. 하지만 자네는 뭔가.”

히메코는 그들 사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고향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열차 내에서 간간이 허공만장과 웰트 양의 불협화음이 들리면 대개 원인은 고향 때문이었다. 그녀는 감히 그곳에 끼어들 수 없었다. 특히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게 아니야……! 자네는 지금 나를 오토 아포칼립스와 나란히 놓는 건가?”

“왜? 그게 왜 그렇게 꺼려지는가. 강한 혐오는 자기 혐오에서 비롯되는 것 아닌가? 결국은 내가 사실을 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웰트 양은 심지어 씨근덕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안에서 지팡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러나 폭력은 쓰지 않을 것이다. 히메코는 그 패턴을 알았다. 그는 폭력을 쓰는 걸 늘 극도로 저어하니까.

“자네는 그냥 그 불쌍한 기쁨 어린아이, 조이스를 자네의 도구로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아. 자네의 죄악도 의무도 책임도 권력도 물려줄 수 있는 아들이란 이름의 기쁨으로.”

지금 허공만장은 어느 때보다도 서늘하게 굴고 있었다. 허공만장은 마치 시라도 읊듯이 더욱 뜨문뜨문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주변은 다 머리가 좋은데, 왜 자네 주변인들은 말리지 않았을까. 그 네겐트로피가 말이야. 응?

“……우린!”

결국 웰트 양의 목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히메코는 웰트 양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건 차라리 짐승이 우닐고 우짖는 것에 가까운 모양이었다.

“우린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 너는! 너는 그럴 수 있을까?”

그는 울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히메코는 웰트에게서 그의 나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알면서 사랑했어. 알면서.

허공만장은 그 불쌍한 늙은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애롭게 일갈했다.

“그래, 그러나 그 아이만은 모르지 않았나.”

完.

위선자들의 속삭임

웰트 양의 눈동자는 잠시 현실과 격리되어 있었다. 얄팍하기 그지없는 눈꺼풀로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다니. 인간이란 신기할 정도로 간사한 생물이야. 허공만장은 그를 향해 인간의 간사함을 일깨워주는 대신, 웰트의 오른팔을 그의 왼손으로 잡았다. ‘진정해.’ 뜻은 분명하게 전해졌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약간씩 움직이던 지팡이가 이제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었으니까.

그는 역해 보이는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쓰고 있다. 이럴 때마다 허공만장은, 그가 그의 기준으로는 아직 ‘어린’ 편이라는 걸 기억해내곤 했다. 적어도 오토 아포칼립스라면 이런 표정을 풀기 위해서 노력 따위는 하지 않았 을 것이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주도하는 편이라면 주도하는 편이었겠지……. 허공만장은 약간 느슨하게 핏빛 추억에 잠겨 든다. 상념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애썼네.”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났다. 그들은 인적 드문 곳에 자리를 잡았다. 웰트 양은 이제 노골적으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단지 ‘못마땅한’ 것으로 끝날 표정도 아니었다. 이거 또 일이 벌어지겠군. 허공만장은 조용히 웃는다. 마치 그를 향해서 경애가 담기기라도 한 듯이.

“나 보고 그 광경이 어땠냐고 묻지 않는군.”

“굳이 물어야 했나? 표정으로 다 말하고 있는데.”

그들의 옷단은 길었다. 이번에 갈 곳은 꽤 엄격한 곳이라서, 옷을 맞춰 입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웰트는 알겠다고 했다. 허공만장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히메코의 발언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있다면 폼폼 차장 정도일 것이다. 웰트는 모든 옷차림을 바꾸는 데에 동의했지만 안경과 지팡이만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 지팡이를 굳이 고집해야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웰트는 잠시, “자네도 나이가 들어보게.”라는 말을 못하는 것이 꽤나 한스럽다고 생각한다. 허공만장의 나이는 지나칠 정도로 많다. 자아가 온전히 유지되던 기간만 따져도 그보다 한참 연상이다.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것 같은 데 말이지.

“……자네도 그때 당장 뛰어들지 않는다니 많이 유해졌는데?”

“이젠 무명객의 신분이니 그럴 수 없었을 뿐이야.”

“신분이라……! 그래, 이제 우린 그런 걸 신경 써야 하지. 시민권도 국적도 없고, 명예도 없는 몸이니.”

짐짓 팔을 벌려 말하는 그의 모습은 연극 조다. 웰트는 잠시 고개를 돌린다. 사람들은 시장의 행성인 이곳에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엄격한 시장이 행성 하나를 잡아먹고 있는 판국이다. 웰트 양은 여태 스타피스 컴퍼니가 최악의 자본 주의의 현현이라고 생각한 자신의 미숙한 상상력을 비웃기 시작했다. 최악이라니……. 그래도 그건 회사의 이름을 띄고 있었다.

당연히 이 행성을 잡아먹은 것은 불법적인 시장이다. 무명객으로서 숨어들어 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무명객은 불의를 보고 넘어가지 않았고―허공만장은 “같이 놀아주지.”라고 이야기할 뿐이었지만.―스타피스 컴퍼니는 그런 꼴을 좌시할 수 없었다. 간만에 두 집단은 일시적이지만 목적이 일치했다.

“잠깐, 시선이 있군.”

허공만장은 자연스럽게 몸을 낮췄다. 노예가 없으면 들어오지도 못 하게 하는 행성이다. 둘 중 하나는 노예의 역을 해야 했다. 웰트 양이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이 해도 된다. 히메코와 가겠다……. 등등,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할 때, 허공만장은 제 손으로 나섰다. 그건 내게 적격인 일이지. 안 그런가, 친애하는 웰트?

―나는 자네를 노예로 부릴 생각이 없어.

―하지만 침투는 해야 하는 거잖아? 나는 본디 도구였지. 이번에 도구로써 간만에 움직이겠군. 히메코, 내가 가겠네. 괜히 험한 꼴 보는 건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아. 나도 들은 적이 있는 행성 같거든.

―나는 사람을 노예로 부리고 싶지 않아. 차라리 내가 역할을 수행하면 했지.

―흐음, 사람이라. 사람이라……? 나는 본디 도구로 태어났지. 도구로 제작되었어. 지금 자네는 나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네. 자네는 나의 본질을 잘 알지 않나. 애초에 오백 년쯤 무급 봉사를 하게 됐더니 말이야, 익숙해. 괜찮아.

자 그럼, 같이 연습이라도 해보겠나? 나의 주인님…….

마치 그때와 같이, 허공만장은 자연스럽게 무릎을 꿇고 있었다. 더 낮은 곳에 위치하고, 웰트의 발을 이끌어 제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웰트는 그에게서 오토 아포칼립스의 흔적을 찾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코끼리를 생각하 지 마.’는 늘 통하지 않는 조언이다. 그는 오토 아포칼립스의 육체의 얼굴이 온화하게, 그러나 허공만장인 것을 구분할 수 있도록 비뚜름하게, 그렇게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본다. 머리 위에 발을 올려놓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물론 이렇게 되뇌는 것은 생각 외로 조금이라도 유쾌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나, 인간을, 사람의 인권이 무시되는 환경에 빨리 적응할 수 있는 것이 놀랍다. 사실 그걸 넘어서 경멸스럽다. 자기 자신을 향한 경멸이다.

“처음 온 모양이군. 노예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걸 봤어.”

자연스럽게, 처음으로 마주친 무뢰한은 반말을 쓰고 있었다. 웰트는 평소와 같이 공손한 말투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입을 연다.

“내 노예를 어떻게 부리든 그쪽이 대체 무슨 상관이지?”

“생각보다 아끼는 모양인데?”

“내 질문에 아직 대답하지 않았지, 너는.”

적어도 지구에서 네겐트로피 맹주 웰트 양은 쉽게 무시 받지 않는 존재였다. 무시를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런 불법 암시장에 뛰어들어서 무시를 훅훅 받는 존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납치로 시작된 여행에서 제 자리를 찾는 데에 능숙해졌다.

“안 보이던 얼굴이 나와서 신기했을 뿐이야. 너도 노예 경매를 구경하던 것 같던데, 같이 얘기나 할 생각이었지. 요즘 노예들의 질적 저하에 대해서…… 흥미 있지 않나?”

웰트는 발을 머리 위에 올려둔 채 시선을 나른하게 떨군다. 처음 보는 사람의 뒤쪽에는 노예들이 소대라도 이루듯이 열을 맞추어 서 있었다. 악질이군. 평가는 짧았다. 그러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흥미가 있다마다.”

허공만장은 지팡이를 들어 올려, 바친다. 웰트 양은 가볍게 지팡이를 받아들 었다. 정보를 캐내려면 어떻게든 얘기를 해야 하긴 했다. 원하든 원치 않든 더러운 정보를 들어야 하긴 한다.

그의 충실한 노예는 그가 일어나자마자 그의 옷단을 매만져 준다. 익숙하고도 서늘한 손길이 옷에 머물다가 떠나간다.

‘히메코가 봤으면…….’

웰트는 잠깐, 그의 머릿속, 그가 제일 처음 만났던 히메코가 제일 먼저 터져 나오듯 떠오르는 것에 대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야 말았다. 향수병? 그럴 수 있지……. 그를 “교수님.”이라고 부르던 히메코는 어리기 짝이 없었다.

그리고 열차의 히메코가 있다…….

어느 쪽이든 ‘히메코’다. 그는 그렇게 마음먹는다.

매번 마음을 먹는 것은 역시, 매번 되새겨야 하기 때문이리라.

* * *

“노예를 구출하기까지 할 건가? 정말로?”

“무명객의 이름을 걸고 우리는 일을 받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허공만장은 그가 ‘우리’라는 일인칭 복수 대명사를 쓴 것을 썩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노예는 당연히 같은 방에 묵는다. 그들은 호화로운 룸서비스를 깨작깨작 먹고 있었다. 허공만장은 우아하게 칼질을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웰트는 역한 기운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깨작깨작 먹는 모습을 폼폼이 봤다면 기겁했을 것이다.

“스타피스 컴퍼니는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아. 우리는 계약을 맺었을 뿐이야. 기억 좀 했으면 좋겠군.”

“……아까 노예로 취급당했던 아이는 어렸네. 고작 다섯 살이나 됐을까 싶었지.”

“자네보다 오래 살았을 수도 있어. 여긴 우주야. 기억 좀 하지 그러나.”

“그래, 겉보기에 그랬단 소리일세.”

“그래서, 측은지심이라도 들었다…… 이런 소리인가?”

“……나는.”

허공만장은 좀 더 짓궂어지고 싶긴 했다. ‘그 가녀린 것이 묶여 있던 모양새가 자네 아들이 생각나기라도 했나?’ 그러나 이런 말은 지금 그에게 심적 타격을 지나칠 정도로 주겠지. 그는 웰트 양을 잘 알았다. 웰트 양이 설령 거절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었다. 앎이란 본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니, 그의 거절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과…….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은 거야.”

“자네는 지금 자네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소리를 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야.”

허공만장은 포크로 웰트를 가리켰다. 웰트 자신도 알았다. 지구에서조차 모든 사람들이 그런 운명을, 혜택을 누릴 수 있던 건 아니다.

그러나 매번 그는 꿋꿋이 길을 선택한다. 좁은 길을. 언덕과도 같은 길을.

“정말 자네는 변하지 않는군. 대단해.”

“자네도 변하지 않았어.”

웰트 양은 그 순간, 자신이 한 무심한 말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이해는 뒤늦게 찾아온다. 허공만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떠났다. 변하지 않았다고 말한 시점에서 그의 내적 변화는 극심했을 것이다. 매번 한 길 사람 속을 모른다.

그는 그래서 매번 기대하고야 마는 것이다.

“구출 자체는 어렵지 않지. 그래서 그 뒤로 어찌 할 건가?”

“……어떻게든 해야겠지. 우주정거장에 연락을 넣는 것도 방법일 테고.”

“그건 만능의 도구가 아니야. 우주정거장은 엄선된 사람이나 들어갈 수 있지. 노예로써 길러진 사람이 적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자네가 사회학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매번 이런 식으로 낙관적으로 굴 때마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야. 때론 비관주의가 더 많은 것을 낳는 것 아닌가?”

“……자네도 그래서 비관주의로 오백 년을 버텼나?”

“어이쿠, 무섭기도 하지. 그래, 이 이야기는 그만하지. 정 안 되면 스타피스 컴퍼니에게 신용 포인트를 지불하고 그 아이의 삶을 알아보자고. 그럼 안녕히 주무시길 바랍니다, 나의 주인님.”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의사 표명을 확실히 하자, 웰트는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아이는 구출하고 싶다. 그러나 그 뒤는 마련되지 않았다. 매 번 삶을 대신 개척해줄 순 없다. 냉정하지만 현실이 그랬다. 강아지나 고양이 주워 오는 십 대 소년도 아니고 아무나 열차에 태울 수도 없기도 했고.

책임지는 일에 극히 익숙했던 삶을 살았다. 사실 발 디디는 곳마다 책임이 아닌 곳이 없었다. 버릇이 되고야 만 걸까.

그는 룸서비스를 치울 사람을 부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또 노예가 와서 치울 것이다. 그는 노예를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양심이 아파서 실제로 통증이 느껴졌다. 얼른 이 행성을 떠나고 싶다.

‘모든 것을 해결하고 나면…….’

열차로 돌아갈 수 있겠지. 이제 열차는 돌아가야 마땅할 곳이다. 그는 꿈을 청하며 잠에 들었다. 꿈에는 부디 그립고도 반가운 사람들이 나오기를 기원하면서.

* * *

웰트는 숨을 헐떡인다. 갈비뼈가 세 대는 부러졌다. 쑤셔 박힌 쪽은 폐다. 왼쪽, 심장 가까이는 다행히 무사하다. 자신의 몸 상태를 알아차리는 데에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숨결은 이내 차갑게 흐트러진다.

“그만, 둬…….”

손을 뻗는다. 허공만장은 단번에 그 거추장스러운 옷을 집어 던진다. 삽시간 에 그는 늘 입던 옷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금발이 타오르는 불길의 반조反照로 인해 가장자리가 약간은 새하얗게 보인다. 웰트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 지 않았다.

“그만둬……!”

“……아니지, 웰트.”

허공만장은 마침내 손가락을 퉁겼다. 느지막한 움직임으로 보인다. 마치, 슬로우모션처럼 보인다……. 웰트는 자신이 시간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느끼지 못 하고 있는지 깨닫는다. 그렇다면, 시간이 이렇게나 주관적으로만 느껴진다면, 저렇게 앞으로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허공만장을 향해 멈출 시간 또한……. 그 또한 마땅히 길어야만 하는데.

“자네 말이 맞아. 누구나 원하는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어야 하지.”

웰트는 스스로의 힘으로 갈비뼈를 부러트렸다. 차라리 깔끔하게 부러트리는 게 낫다. 타액을 토할 때 혈액이 섞여 나왔다. 상태가 안 좋군. 지팡이를 들 힘조차 없다.

“스스로 불타오르는 삶을 선택할 기회도 있지 않겠나? 안 그런가?”

그는 울고 있었다. 그렇게 내몰려진 삶에 주어진 선택지가 온당한 선택지냐고 되묻고 싶었다. 시장은 불타오르고 있었다. 로마가 그러했듯, 붕괴라는 현상 에 맞선 많은 도시들이 그러했듯, 구문명의 호주가 그러했듯 불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어쩌면 알아차린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경매장에 올라왔던 아이 의 옷이 가연성이라는 것을, 아이의 배가 부자연스럽게 부풀어있던 것을, 아이의 팔에 묶여 있는 것은 부싯돌과 같은 재질이란 것을.

그러니까 하루 빨리, 한 시라도 빨리…….

“허공, 만장…… 그 아이는 아직…….”

“그래, 숨이 붙어 있지. 끔찍한 일 아닌가. 그럼에도 숨이 붙어 있어서 이곳을 태우기 위해 움직인다니. 뭐, 본인의 선택이니 존중해 줘야겠지. 안 그런가?”

“……허, 공…….”

“말하지 말게, 웰트. 눈 깜빡할 힘조차 없으면서 말을 하려 하다니. 그럼 안 되지. 자네는 여기 있게. 내가 일을 끝마치고 오지. 손이 많이 가는 주인님이군 그래.”

제발 죽이지 말아주게.

제발 그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지 말아줘.

그는 말을 하고 싶다. 그러나 말할 필요는 없다. 허공만장은 제 얄팍한 마음 따위 이미 이전에 읽었을 것이다. 허공만장도 웰트 양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그 아이의 써늘한 표정을 읽어냈을 것이다.

“……그들을 죽이는 게 고통이 없을 건 자네도 아는 일이지.”

현악기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곳에 없을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웰트는 지팡이를 빼앗긴다. 허무하고도 무력한 일이었고,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갈비뼈를 찌르고 불타오르기 시작한 노예 아이도, 순식간에 연쇄 ‘방화’가 일어난 것도……. 모두 똑같다. 꽃이 지고 눈이 내리듯 허망할 정도로 쉽게 비극이 도래하고 있다.

“웰트, 자네에게 선택지를 주겠네.”

웰트는 자신의 갈비뼈를 다시 한 번 더 부러트린다. 우악스런 소리가 들린다. 제 귀에도 똑똑하게 들렸다. 그는 어떤 선택도 하고 싶지 않다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다. 하나만 더, 하나만 더 갈비뼈를 제대 로 부러트려서 빼내면…… 그러면 좀 정신이 들 것만 같은데.

“눈을 깜빡여서 의사를 표시하게. 어떤가. 자네는 저 아이들의 삶을 원하나? 전신 화상을 입고, 다 죽어가는 마지막 여생을? 아니면 죽음을 원하나? 어차피 스타피스 컴퍼니는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안 쓰지 않나. 나는 자네의 선택을 존중하겠네. 눈을 뜰지 말지는 평소의 우리가 사용하던 것과 같은 방법이야. 자네는…… 잘 알고 있지?”

그는 눈을 부릅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눈을 감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눈을 뜨고 똑똑히 바라볼 것이다. 그는 지팡이를 향해 손을 뻗는 다. 허공만장은 웃는다. 그 웃음은 마치…….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서.

고통으로 인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그는 무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허공만장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니 말했잖은가. 앞으로 나설 필요 없다고. 나는 자네가 진심으로 다치지 않길 원했는데 말일세.

불타는 아이들이 저곳에 있다. 그는 자유를 위한 시위를, 아이들이 자발적으 로 문자 그대로 타오르는 시위를 지켜봐야만 한다고 다짐한다. 허공만장은 손을 뻗는다. 불 가까이 있어서 뜨겁기 짝이 없는 손이다.

“그럼, 푹 자게, 나의 친애하는 벗이여.”

그는 눈이 강제로 닫히는 걸 느낀다. 중력에 순응하듯이 모든 것이 가라앉는 다. 무겁기 짝이 없는 몸이 이제는 정말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는 허공만 장의 발뒤꿈치를 바라본다.

가볍게 춤을 신청하듯이 아이를 향해 손을 뻗는 그 손이 붙어 있는 육체를.

그는 오직 감긴 눈 틈 사이로.

바늘과도 같은 그 가느다란 틈 사이로 바라본다……. 고통이 선득하게 연주되는 밤이었다.

* * *

웰트는 제 입술에 무언가가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의 신체 기관이 부드럽게 파고들고, 또 목 뒤로 무언가를 넘겨준 것을 느꼈다. 손 하나 꼼짝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핑계를 대고 있다. 남아있는 힘을 사용한다면 강제로 몸을 못 움직일 것도 없건만.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다.

그는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흐느끼고 또 조용하게 울음소리를 자아냈다. 죄 없는 아이들의 자유의지가 그렇게 행성을 불태웠단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미 이해는 완료되었다. 그 이치는 타당했다. 다만 그 선택을…….

“웰트, 치료는 끝났어. 애썼네.”

그 선택에 자신이 기여하지 않았다고 믿고 싶었다. 웰트는 안경조차 쓰지 않은 나안裸眼으로 제 머리맡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가붓한 미소였다. 마치, 떨어진 깃털처럼.

“……허공만장.”

갈라진 목소리가 났다. 그의 눈물은 여전히 관자놀이까지 타고 흐르고 있었다. 허공만장은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네는, 내 선택을 존중해줄 거지?”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나온다. 그는 안경을 꼈다. 세상이 바로 들어왔다. 갈비뼈의 고통이 남아있었다.

完.

후기

정신을 차려 보니 중철본 회지가 뚝딱 나왔네요. 안녕하세요. 츠타입니다. 붕괴 관련으로 내는 회지가 키메브젤 백합도 아니고 무려 비엘 씨피라니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만…….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쓴 부분이 많습니다. 어떻게든 이해하고 오해하며 읽어 주시면 감사합니다. 작가는 개념적으로 죽은 존재니까요? 여러분의 이해를 믿습니다.

이게 다 만장웰트가 맛있어서 벌어진 일입니다……. 나는 모르겠다. 얘네 둘이 알아서 사귀고 있었다.

그나저나 한국어로 된 첫 만장웰트 회지인가요? 만일 그렇다면 더없는 영광입니다.

표지를 만들어 주신 햄님, 감사합니다.

이 회지의 총 제목은 <영원회귀>라는 뜻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동일한 것 의 영원회귀>입니다.

두 번째 글의 제목 <Despite Everything>은 박찬욱의 <올드보이>의 명대사 “누나하고 난 다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너희도 그럴 수 있을까?”의 공식 영문 번역, “My sister and I loved each other, despite everything. Can you two do the same?”에서 따왔으며, 그 글에 인용된 웰트의 대사도 마찬가지입 니다.

만장웰트로 떠들 게 많을 거 같은데 또 막상…… 후기를 쓰려니까 없네요. 공식이 다 했다고 생각하고 겸허히 패배를 인정하겠습니다.

그럼, 부디 좋은 시간 되셨길.

Vade Retro.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