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웰트
유료

사람의 겨울

사랑의 거울

HONKAI by 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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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키워드로 #VOIDWELT 연성하기」 작업물입니다.

- KEYWORD: 죄, 겨울, 상해, 거울, 춤

- 대략적 스토리 라인은 친구인 '허공만(이렇게 적기로 했습니다…)'씨와 논의하며 짠 것입니다.

Summary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요한일서 2:9-10)」

#0.

요정은 눈 내리는 날 우리를 찾아옵니다.

순백의 그 새하얀 날에, 깨끗한 몸을 빛나는 얼음 위에 누입니다. 그들은 반드시 달빛을 찬란히 담아내는, 파편 가득한 얼음만을 고른다 합니다. 유리만큼이나 날카로운 얼음 조각에 제 몸을 뉘고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환하게 미소 짓습니다. 우리가 그들이 아름답다 여기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서늘히도 날카로운 파편 위에서 어떤 피도 흘려내지 않습니다.

죄 없기 때문입니다.

아주 오래된 데이터베이스엔 요정들이 눈송이처럼 휘날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눈송이와 아주 달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고도요. 우리는 순결한 요정들의 옆에서 춤추고, 발바닥의 더운 피로 얼음을 수놓으며 함께 죄를 씻어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우리 곁을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 지 한참이 지났습니다. 저도, 제 어머니도, 제 어머니의 아버지도, 제 할아버지의 증조할머니의 삼촌까지도 요정을 본 적 없다 합니다.

물론 인연은 그리 쉽게 끊기는 것이 아니지요. 비록 요정은 없을지언정 그들의 흔적인 ‘우리의 전통’만은 첫눈마다 축제의 형태가 되어 매 겨울 곁을 함께합니다.

―이번 겨울엔 요정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 죄 없는 순백의 존재를?


――제3762회 「순백의 축제」 개회사

#1.

도시가 동그랗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정말 '동그랗'다. 거리를 노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대화와 미소, 환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 푸르고도 높은 하늘까지. 그 모든 것들이 동그란 렌즈에 잘려 담긴다.

─더하자면 허공만장까지도.

허공만장을 피해 망원경을 이리저리 돌려 봐도, 어느 각도에서든 결국 그의 손과 얼굴로 렌즈가 가득 찬다. 흔들리는 손, 환한 미소, 재보는 눈빛.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웰트는 이 도시의 수많은 작은 것들을 눈에 담기 위해 망원경을 사용한 것이다. 그렇건마는 허공만장은 그 범주에 속하기엔 너무나 큰 존재다.

“비켜.” 단호하다. 익숙한 명령형 어조가 튀어나온다. 옅은 짜증도 담겼다. “앞이 보이지 않잖나.”

“앞이라, 안타깝군. 미래 계획 상담이라도 해드려야 할까.”

이까지 드러낸 미소에 침묵으로 답을 대신한 웰트가 망원경의 렌즈를 고쳐 닦는다. 하지만 깨끗한 렌즈로 맑은 시야를 확보한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다. 문제는 렌즈가 아니라 ‘저 녀석’이니까.

“눈도 좋으면서 굳이 망원경으로 살피는 건 왜인가? 멋지다는 이유로 쓴 안경과 같은 맥락인지?”

말도 답도 없이 시선만으로 허공만장에게 이 방해에의 설명을 요구한다. 허공만장 역시 어깨만 으쓱여 답을 대신하고. 둘 사이에 오가는 것은 겨울바람뿐이다. 서늘한 바람에 저 너머 재잘거리는 연인들의 속삭임이 실려 온다. 물론 연인들의 온기가 둘 사이의 냉랭함을 데우진 못한다. 애초에 거리도 너무 멀지 않나.

현지인들의 축제를 볼 수 있는 귀한 기회가 오늘뿐 없다 말해도 허공만장은 요지부동이다. ‘허공만장’에 새 지식을 새겨넣을 기회라는 주장에도 콧방귀만 뀐다.

5분여간을 실랑이로 보내다가, 허공만장이 저라는 도서관에서 지식을 빼 든다. 이번 서적의 제목은 「비윤리적 쾌감으로서의 도착적 숭고」. 인간의 공포를 다룬 책이다. 지혜롭지 못한 행동을 하는 건 두려움 가진 자들이다. 대충 적용할 수 있지 않겠나?

“그렇다면 더욱 그런 망원경 따윈 접어 두고, 가까이서 그들을 봐야 하네. 오늘 있을 축제는 죄에 대한 것이었지. 자네의 스스로 찔리는 구석 있지 않고서야 이럴 필요가 없어.”

주변에 늘어선 나무들이 답하듯 흔들린다.

“……그럴 리가. 하지만 모호한 인간성과는 달리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은 도서관과 다르다. 수많은 책 중 하나를 꺼내 드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끌어안고 있던 책을 펼쳐 정해진 구절을 찾는다. 그리고 그 책엔,

“네겐 죄가 없다는 것. 그러니 걱정치 마라.” 드디어 허공만장이 아마 바랐을 것처럼, 망원경을 집어넣고 허공만장을 바라보던 그가 눈 감는다.

“죄는 인간의 전유물이므로.”

#2.

허공만장의 입꼬리가 비뚤게 올라간다.

그는 손에 들린 현지 기념품을 찬찬히 돌려가며 살피고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길거리 가판대 위의 한 소녀가 초롱이는 눈으로 지켜본다. 이 조각은 분석할 것도 없다. 나무를 조각해 만든 아마추어의 작품이다. 자투리 시간마다 소일거리로 만들었을 퀄리티. 일정하지 않은 나뭇결에 흠까지 났다.

고작 이런 불완전성으로 ‘완벽’의 요정을 조각하려 한 것인가? 허공만장은 생각한다.

“날개도 조각하긴 했었거든요. 그런데 그, 제가 손이 삐끗해 연결부위가 약해졌지 뭐예요.” 소녀가 뒷머리를 벅벅 긁는다. 조각상의 등엔 ‘날개였던 것’의 흔적조차 제대로 뜯겨나가지 않은 채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리고 아차, 하며 한 번 떨어뜨리고 났는데요. 날개 한쪽이 부서져서 지금은 아예 반대 날개까지 떼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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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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