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기성명
블레경원 단문 / 안 쓰던 형식으로 써봤는데 재밌네요 간지나고
빛은 사람의 심리를 조절할 수 있다. 나부 뒷골목에 의도적으로 운기군의 정복 색과 비슷한 조명을 달아둔 이유기도 하다. 경원이 집권하고 나서부터 추진했다는 정책을 어렴풋이 떠올린 블레이드의 시선이 앞서 걸어가는 시왕사의 판관에 가 닿았다. 목 언저리에서 비녀로 묶어 단정히 정리한 회백색 머리카락이 걸을 때마다 앞뒤로 흔들렸다. 그 위로 채도가 낮은 백열등의 불빛이 내렸다. 극명한 명암의 대비는 사람을 위축시키고 긴장하게 만든다. 유폐옥은 선주에서 그 원칙을 가장 잘 사용하는 장소였다.
“불러온 이유는?”
“이미 전달해 드린 것으로 압니다만.”
“자세한 설명 없이 당장 나부로 오란 말뿐이었잖나.”
“그럼 수배자에게 많은 설명을 해드릴까요?”
호갑투를 낀 손가락이 벽면 어딘가를 누르자 기계음과 함께 먼지 내음이 한가득 밀려왔다. 블레이드는 이 장소를 알았다. 백야 작위를 박탈당하던 날, 그가 나부에 바쳤던 많은 발명품의 제작자명을 지울 때 여기로 끌려왔었다. 그가 지금 자의로 이 자리에 서 있다는 것, 경계를 서는 운기군이 없다는 것, 눈앞의 판관이 비무장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달라진 것이 없었다.
판관은 성큼성큼 걸어가 거대한 서고 한가운데에 홀로 빛을 받는 죽간을 집어 들었다. 블레이드는 멀찍이 떨어진 채 죽간 겉면에 쓰인 줄글을 읽어내렸다. 대체로 칠백 년 동안 경원이 추진한 정책이나 전쟁 따위가 한 줄로 요약되어 적혀있었다.
“가까이 오세요.”
“이젠 명령질까지 하는군.”
“명령을 안 들을 것도 아니면서 그런 말을 하는 것까지 장군의 예상을 빗나가지 않으시군요.”
“경원이 그러던가?”
“읽어드릴까요?” 판관은 변화 없는 낯으로 죽간 옆에 놓여있던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추신. 블레이드는 아마 하기 싫어할 거야. 명령하지 말라고 할 테고. 나는 시왕사의 판단을 믿겠네. 그러니….’”
“그만, 거기까지.”
경원의 말을 다른 이가 전하는 것은 불유쾌한 감각이었다. 어느 날 카프카의 입에서 흘러나온 백야의 직위 복권 따위가 그러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판관을 향해 걸어갔다. 초점 없는 회백색 눈동자가 블레이드의 눈동자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다, 이내 눈꺼풀 뒤로 사라졌다.
“제 소개를 하죠. 시왕사의 네 판관 중 심문을 담당하는 한아입니다. 이번에는 전임 장군의 기록 말소를 위해 스텔라론 헌터인 당신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미리 안내해 드린 내용에 따라 시왕사를 벗어나는 순간, 이 공간에 대한 기억은 기억의 정원과 선주 연맹이 맺은 협약에 따라 광추의 형태로 정원 측에 넘어갑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한아는 무덤덤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럼 다시금 여기서 영겁의 찰나를 보내셔야죠.”
블레이드는 대답 없이 한아가 건네는 명참천필을 받아들었다. 서고 가운데에 우뚝 솟은 기둥 위로 연적이며 벼루 따위가 빙글빙글 돌았다. 시왕사는 선주 중에서도 가장 불가사의한 곳이었다. 옥조를 통한 신경 네트워크 교감 없이 움직이는 물건 따위는 시왕사에선 같잖은 것일테다.
한아의 호갑투가 죽간을 스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흘렸다. 경원의 업적을 적은 죽간이 공중에 뜬 채 빙글빙글 돌았다. 블레이드의 시선은 자연히 마지막 줄로 향했다. 성력 11xx년, -- 장군의 마각 폭주. 효위 연경과 태복 부현의 대립. 효위 연경이 적을 섬멸하며 상황 종료…. 이 줄글의 이름을 지운 사람은 그 어린 검수였을 것이다. 글을 거슬러 올라가자 이미 군데군데 먹칠이 되어있었다. 어느 것엔 하얀 눈서리가 내려있었고 어느 것은 물이 덜 말라 아직도 먹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었다.
블레이드는 명참천필을 든 채 한참 못 박히듯 서 있었다. 그의 묵적墨跡은 잿더미를 남길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끝난다. 경원은 제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나부의 역적이 될 것이며 칠백 년 전 음월의 난 때 모든 것을 방관한 죄를 짊어질 것이다. 그건 여태껏 블레이드가 바라오던 것 중 하나였다. 이 점 하나만 찍으면, 이제 그는 그의 죽음 외에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헌터?”
“… 내가 잊는 것을 경원이 바라진 않을 것 같은데.”
“전임 장군의 명입니다. 부 장군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일이기도 하고요.”
“연경은?”
“연경은 잊지 않습니다.”
“어째서?”
“이유가 필요합니까?”
블레이드가 경원을 잊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했단 뜻이었다. 그는 답잖은 불안감과 초조함에 휩싸인 채 죽간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묵으로 쓴 글씨가 공중을 날아다니는 것 같았다. 눈앞의 판관이 작성했을 경원의 실록 중 경원의 함자만이 홀로 그를 닮아 둥글둥글하게 반짝였다.
“헌터.”
한아가 다시금 그를 부른다. 재촉하듯 호갑투로 기둥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블레이드는 긴 숨을 내뱉었다. 그래, 좋을 것 하나 없는 사이지 않았나. 이렇게 영영 남이 되는 것도 경원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명참천필이 직각으로 곧게 떨어졌다. 그어 내린 필적 위로 이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서는 그 이름과 성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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