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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가 인형이 되어버린 건에 관하여

공미포 4,018자

Rusty Sky by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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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06. 27 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입니다

* 웹이벤트 카일이 귀여워서 신나게 날조해봤습니다

https://twitter.com/train_0503/status/1673626804828135424?s=20 

* 어떻게든 오늘안에 써서 올리고 싶었기 때문에 좀 급하게 썼습니다. 오늘 안에 안끝내면 영원히 손 안댈 것 같아서.. 대충 퇴고안했다는 뜻입니다 

* 동료(겸 애인)가 인형이 되어버리는 적폐날조 설정 주의 

* 단항카일 단항남척


이변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기도 한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준비할 여유 따위는 주어지지 않고, 손 놓고 있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러가 버린다. 지금 당장은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어쨌든, 뭐라도 해봐야 하는 법. 때로는 적당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기에, 단항은 잠시 생각하는 걸 멈추고 눈앞에서 움직이는 인형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어림잡아 30cm 정도는 될 것 같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인형이었다. 손안에서 심장박동과 비슷한 것이 느껴졌으나, 그는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이 인형이 스스로 말했듯이 정말로 제 동료라면,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박동하는 스텔라론이 느껴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그래서, 눈을 떠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었다?"

손안의 인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 손만으로 간단히 들어 올려졌다거나, 전신의 피와 살이 천과 솜뭉치로 바뀌었다는 점에 대해 우려를 표하지도, 두려워하는 기색을 내비치지도 않는다는 점이 정말 그다웠다. 태평한 동료를 대신해, 단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변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그렇지만…….

"단항."

그는 빈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일단 히메코 씨와 웰트 씨에게 알리고……. 토끼 인형을 닮은 차장에게 생각이 닿는다. 폼폼에게 뭔가 수가 있을까? 

"……."

"단항, 단항."

"……."

우주정거장-헤르타에 잠시 들를 수 있을까? 불행 중 다행으로 당분간은 개척임무가 없어 우주정거장에 방문할 시간은 있다. 얼마 전에 선주 나부를 떠나왔기에 우주정거장과는 멀리 떨어진 곳을 달리고 있으며, 원래 일정은 다른 선주를 방문하는 거였다. 은하열차의 운행은 차장이 결정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잠시 원래 일정을 취소하고 우주정거장에 들르자는 의견에 동의할 터다.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가득한 곳이니 완벽한 해결책까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도움은 기대할 수 있겠지.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것이 그의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 인형은……. 정말로 무른 재질로 만들어졌구나. 그는 약간 자제심을 잃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단항, 전화 온 거 아냐? 네 단말기에서 소리 나."

베개 근처에 둔 단말기가 우웅, 하고 몸을 떨어댄다. 검게 변한 화면을 건드려 보니 전화가 아니라 문자가 연달아 오는 중이다. 단항은 메신저 창을 확인하고, 카일루스에게도 보여주었다. 아무래도 저 몸으로는 단말기를 사용하기 어려울 것 같으니까. 

Mar. 7th : 좋은 아침!

Mar. 7th : 뭐야, 아직도 안 일어났어? 잠꾸러기들 같으니.

Mar. 7th : 카일루스라면 모를까, 단항 너도? 별일이네. 

Mar. 7th : 아침 안 먹을 거야? 그럼 이 주스 내가 다 마신다? 무려 차장님 특제 오렌지 주스인데?

"어떡할래, 지금 가서 말할래, 아니면 좀 더 준비가 필요해?"

"무슨 준비?"

마음의 준비, 라고 말하려던 그는 입을 다물었다. 하루아침에 몸이 인형으로 변해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사람에게 마음의 준비가 필요할까? 단항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 신경 쓰지 마, 정도의 뜻을 담아서. 그는 한 손으로는 자신의 단말기를, 다른 손으로는 인형을 품에 안고는 방을 나섰다. 

"네 단말기도 챙길까?"

"아니, 아까 네 단말기 만지는데 터치가 안 되더라. 손이 이러니까 챙겨봤자 짐만 될걸."

"……그래."

동료가 인형이 되어버린 건에 관하여

단항×카일루스(남개척자)


웰트는 침음을 흘렸다. "흐음."

그는 인형의 머리를 조심조심 쓸어보더니, 고개를 가로젓고는 옆에서 손을 뻗는 히메코에게 넘겼다. 카일루스는 이 사람의 손에서 저 사람의 손으로 옮겨가면서도 크게 불안해하거나 불편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여유가 넘친다고 해야 할지, 태평하다고 해야 할지. 평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느꼈지만, 지금은 더더욱 모르겠다. 단항은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지는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평범한 인형이지만, 안에서 스텔라론이 느껴져. 아무래도 우리 동료가 틀림없는 모양인데."

말을 마친 히메코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다가, 결국 탁자 위에 인형을 내려놓았다. 의자에 내려놓으면 서로 보이지도 않을 테니,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이게 나을성싶었다. 

"근데 이 디자인…….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요?"

그렇게 말한 Mar. 7th는 카메라를 조작해 사진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대화 사이에 찾아오고는 하는 자연스러운 침묵 속에서, 각자 커피와 차, 오렌지 주스 따위로 입을 적시며 생각에 잠겼다. 

아, 찾았다! Mar. 7th가 카메라를 가리켰다. 

"우리 나부에서 얼마 전에 열차 식당이라고 잠깐 했었잖아요. 그때 누가 선물로 준 인형이랑 똑같지 않아요?"

여기, 이쪽이요. 열차팀은 머리를 맞대고 Mar. 7th가 가리키는 사진을 들여다봤다. 나부에서의 일이 일단락된 뒤, 퀘스트 때문에 잠깐 간이 식당을 운영했었다. 그때 누군가가 선물이라며 주었던 인형을 찍은 사진이었다. 

인형을 들고 있는 손과 인형만 찍힌 사진이었는데, 지금 보니 사진 속 인형은 카일루스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와 흡사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머리도, 눈도, 하다못해 걸친 코트마저도 카일루스와 닮았다. 그때는 왜 몰랐지? 그리고 왜 이렇게까지 닮게 만든 거지? 

너도 볼래? Mar. 7th가 인형이 된 동료에게 카메라를 보여주었다. 동그란 손이 카메라를 가만가만 매만진다. 

"우연일까?"

"알기 어렵군."

그 말을 끝으로 히메코와 웰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점쳐보는, 집중하는 사람 특유의 표정 없는 얼굴이 찻물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의자에 앉은 폼폼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회색 머리를 살살 쓰다듬자, 인형이 킥킥 웃는 소리를 낸다. 위로하기 위해서였으나, 그에게는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모습에 굳은 표정이었던 웰트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번 일은 열차 내에서는 해결할 도리가 없겠군. 우주정거장-헤르타에 들러 도움을 요청하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나은 방법이라는 단항 네 생각에 동의한다."

차장님의 의견은? 웰트가 묻자 막 인형을 품에 안으려던 폼폼이 들고 있던 것을 얼른 내려놓더니 자세를 바로 했다. 폼폼은 차장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믿음직한 모습을 보이는 데 신경 쓰고는 했다. 하지만 인형 하나쯤 품에 안고 있다고 해서 아키비리의 유산을 관리하는 이의 위상에 금이 가지는 않을 텐데. 

"탑승객의 불편 해소를 위해, 은하열차의 차장은 다음 행선지를 우주정거장-헤르타로 수정하는 데 동의합니다. 경로 수정 확정 전 항법사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나도 동의해. 덧붙여서, 우주정거장에 있는 우리 괴짜들이라면 아마 쌍수 들고 환영할걸?" 

"나도 찬성!"

Mar. 7th의 목소리를 끝으로 탁자 위에 옅게 깔린 불안함, 우려 따위가 걷히면서 이내 평소와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은하열차팀은 식어서 미지근해진 아침을 먹으며 우주정거장-헤르타에 가면 어떻게 할지, 인형이 된 사람이 뭘 먹을 수 있는지, 물에 빠지면 인형이 몇 배나 더 무거워질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

기기묘묘한 사건과 함께 아침을 시작한 탓인지, 약간 피곤했다. 식사를 끝마치고 자료실로 돌아온 단항은 평소와 같이 불필요한 자료를 걸러내는 작업을 하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액정 위에 떠오른 글자들이 제 눈을 피해 달아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단항, 피곤해?"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눈치가 빠른 편이기도 하고. 그래서 솔직하게 답했다. "조금."

"나 때문에?"

생각하기도 전에 대답이 튀어 나갔다. "아니."

품에 안겨있던 인형이 벗어나려는 것처럼 꿈틀거리기에 부러 팔에 힘을 주었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해서 끌어안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폼폼이 왜 그렇게 품에 안고 있으려고 했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하지만 뜻밖에 고지식한 면이 있는 차장은 탑승객을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직업의식 때문에 카일루스를 순순히 놔주었고, 그 뒤부터는 쭉 제 차지였다. 

평소대로라면 조금 불편해하는 기색만 비쳐도 얼른 놓아주던 것과 달랐다. 카일루스는 몸을 크게 흔들고, 팔뚝을 몇 번 두들기고, 그의 이름을 몇 번은 부른 뒤에야 책상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 당사자가 그렇게 태평하니까 걱정할 마음도 안 들어."

"진짜로?"

"……그래."

말랑말랑한 얼굴이 웃는다.

"너무 걱정하지 마."

노란색 단추 같은 것을 붙여 표현한 눈이 따스한 눈빛을 보낸다. 

"이건 다 꿈이니까."

"그래, 이건 다 꿈……. 뭐?"

"단항, 언제까지 잘 거야? 오늘 식사 당번 우리인 거, 잊어버렸어?"

***

주방이 고소한 냄새로 가득 찼다. 팬에 기름을 두르고, 약간의 소금과 손질한 채소, 적정량의 소스와(어디에서 식료품을 보급했는지에 따라 매번 달라진다) 살짝 익힌 쌀을 함께 넣어 볶는다. 이 쌀은 어느 우주정거장에 정차했을 때 사들인 것으로, 다른 품종보다 저렴하게 들여왔다. 아직 개발단계인 품종이라 따로 가열해 두었다가 사용해야 떪은맛을 뺄 수 있는 점은 조금 귀찮지만, 비용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수고로운 축에 들지도 않는다. 

단항은 카일루스가 건네는 그릇을(달걀 푼 것이 들어있는) 받아 들고는 팬 위에 내용물을 조금씩 부었다. 품종과는 무관하게, 쌀을 사용하는 요리는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단항, 혹시 인형 좋아해?"

"인형?"

설마 잠꼬대라도 했나? 얼굴이 조금 달아오를 것 같아서, 그는 어떻게든 손을 놀리는 데만 집중하려 애썼다. 

"저번 열차 식당 때 신용포인트랑 같이 받은 인형이 있는데, 그거 자료실에 둬도 돼?"

"……좋을 대로 해."

허락이 떨어지자, 카일루스는 옆에서 그 인형이 얼마나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우며 폭신폭신한지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껴안으면 따끈따끈하겠지. 품에 안고 뒹굴기 좋은 크기였다. 열차 식당을 운영할 때는 한편에 놓인 인형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주변을 정리할 때 잠깐 들어서 옮긴 적은 있다. 그것도 만져본 거라고 치자면, 꿈에서 느낀 감촉은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재구성된 거겠지. 

"음, 좀 싱거운 것 같은데."

"싱겁다고?"

카일루스는 따로 덜어둔 볶음밥을 한술 떴다. 자, 아―. 숟가락을 빼앗으려는 시도는 시간 낭비가 될 것이고, 결국 저는 얌전히 떠먹이는 대로 받아먹게 될 것이다. 그간의 숱한 경험을 바탕으로, 단항은 숟가락을 이리 달라고 말하는 대신 순순히 입을 벌렸다. 떫은맛은 완벽히 빠졌지만 싱겁기는 했다. 소스를 조금 더 넣을까, 하고 생각하는데 입가에서 숟가락이 까딱거린다. 받아먹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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