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레일

이름이 세 번 불리면

공미포 12,064자

Rusty Sky by 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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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 05. 29 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입니다.

* 포스타입 #크리에이터n제 [이름이 세 번 불리면] + 제가 전에 풀었던 썰을 적당히 섞었습니다

* 단항카일 단항남척

* 공식과 다른 설정 주의

* 퇴고x 


"……그래서는 짠물에 대가리를 박더니, 아니 글쎄 가족도 못 알아보지 뭔가?"

"가족을 못 알아봐요?"

듣던 이의 놀란 표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노인은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더니 말을 이었다. 

"그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야. 내가 자네만 한 나이었을 때는 또 어땠느냐면……."

그 뒤로도 비슷한 내용이 이어졌다. 바다에 빠진 이들이 헛것을 보더니 며칠을 지독하게 앓았다던가, 기억을 잃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비슷비슷한 이야기를 흘려듣던 그는 어떤 사람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용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는 마을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바다에 빠진 걸 건졌더니 물속에서 용을 봤다지 뭐예요?"

"에이, 요즘 세상에 용이 어디 있어요? 그네들은 까마득한 옛날에 다 승천했다던데?"

"그래, 바다뱀을 용이라고 착각한 거겠지."

"맞아요. 이젠 그 바다에 살던 괴수도 씨가 말랐을 텐데. 여기 애들은 바다 괴수가 뭔지도 모를걸? 서펀트라고 들어나 봤을까 몰라?"

"세상에 뿔 달린 바다뱀이 어디 있어요? 분명 용이었다니까요?"

"헤엄치다가 머리에 산호라도 붙은 모양이죠, 뭐."

"제가 지금 거짓말을 한다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전 용이 아직도 그 밑에 있다고 봅니다. 거기에만 빠졌다 하면 기억이 싹 날아가거나 헛소리하면서 앓는데, 그게 용의 저주가 아니면 뭐겠습니까?"

케케묵은 기억과 구전설화, 전설 따위를 마구잡이로 끄집어내는가 싶더니,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육지보다 바다 위가 더 익숙하다고 자신하는 사람들마저 그곳에 대해 말할 때는 거부감을 감추지 못하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거부감, 두려움, 분노……. 바다에 얽힌 이야기를 큰 목소리로 떠들고 헛소문이라고 깎아내리며 욕한다. 그렇게 하면 해묵은 감정을 털어낼 수 있을 것처럼. 이미 일어난 일들이 없었던 일이 되리라 믿는 것처럼. 

청년은 곤란한 표정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용이 있다는 소문을 따라 도착한 곳에서 드디어 실마리를 찾았나 했더니, 실마리는커녕 싸움이 나게 생겼다. 다들 오랫동안 뱃일을 해왔다고 하니, 억센 손으로 드잡이질했다가는 누군가 크게 다칠지도 몰랐다. 과열되려는 분위기를 슬슬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제가 '기억의 무덤'에 가면 그게 진짜 용인지, 아니면 머리에 산호가 붙은 바다뱀인지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요?"  

소리를 높이지 않았음에도, 청년의 입에서 '기억의 무덤'이라는 말이 나오자 사방이 쥐죽은 듯이 고요해진다. 예상대로 이곳 사람들은 그 불길한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렸다. 누군가 헛기침을 하자, 그게 신호라도 된 양 곳곳에서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재수 없는 말을……. 겁도 없나? 외지인이잖아요, 어쩔 수 없죠. 대체 누가 여기까지 데려왔대요? 몰라요. 선주님이 데려온 손님 아니신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있던 이가 주변을 둘러보며 으름장을 놓더니 청년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 멀리서 와서 잘 모르겠지만 그 이름은 없는 셈 치십쇼. 이 근방에서는 그렇게 말하면 다들 치를 떠니까."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던데요? 그렇게 대꾸하는 대신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사람이 거기, 그곳, 그 바다, 정도로 에둘러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는 없겠지. 이른 저녁을 먹으며 떠드는 자리는 그렇게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마무리되었다.

***

"형, 나 창 보여줘요!"

"'랜스'거든? 바―보."

"창이나 랜스나 그게 그거지!"

야, 너 방금 나보고 바보라고 했지? 뭐? 야? 너 야라고 했냐? 내가 누나거든? 남매가 본격적으로 다투기 전에, 그는 서둘러 인벤토리에서 덮개를 씌운 무기를 내주었다. 싸울 때와 달리 번쩍이지도 않고, 덮개 때문에 둔기에 가까울 정도로 투박한 모양새였으나 아이들은 만족한 눈치였다. 한참을 랜스를 들어본다(못 들었다), 덮개를 벗겨본다(못 벗겼다), 소란을 피우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오빠 내일 진짜 거기 가요?"

기억의 무덤을 말하는 거겠지. "응. 거기 가서 바다뱀이나 괴수가 있는지 확인만 하고 올 거야."

바다 괴수와 마주친다면 아마 사냥까지 하겠지만,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는 편이 나을듯했다. 낮의 전투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다 보니, 대피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해 살육이 벌어지는 현장이 민간인에게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그 자리에 어린아이들도 있었다고 했다. 사람들은 괴수가 자리를 벗어나기 전에 잡아주어 고맙다고 말했지만, 만일 그 자리에 제가 아닌 다른 이가 있었다면……. 청년은 가벼운 한숨으로 상념을 몰아냈다. 그래도 사상자는 없었다고 하니까.  

"형, 가서 용 잡을 거예요?"

"아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없는 걸 사냥하지는 못해. 아까 어르신이 용은 없다고 말씀하시던데?"

대답을 들은 소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커다란 눈이 데굴데굴 구른다. 소녀도 비슷한 얼굴이었는데, 양쪽으로 땋은 머리칼을 잡아당기고, 꼬고, 하여튼 못살게 구는 게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입 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혹시 남매가 용에 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걸까? 

"야, 가서 엄마아빠 오시나 망 좀 봐봐."

아씨, 만날 나만 시켜! 소년은 툴툴대면서도 슬그머니 문 앞으로 가 귀를 기울이고, 문을 열어 바깥을 둘러보더니 조용히 문을 닫았다. 이어 걸쇠 걸리는 소리가 나더니, 창가에서도 비슷한 행동을 반복한다. 그런 뒤에는 문을 등지고 서는데, 그 모습이 꼭 자신의 몸으로 문을 막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오빠, 오빤 용이 진짜로 기억을 먹는다고 생각해요?"

소녀의 태도는 제법 진지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아이들이 뭔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준다면, 그렇다면 기억의 무덤에서 뭔가를 건져내는 데 도움이 될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이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는 사람이랑 같이 밥도 먹고, 책도 읽었다는 말, 들어본 적 있니?"

용이 승천하기 전의 이야기는 제법 남아있고, 개중에는 어렵지 않은 내용도 있었다. 부모님께서 매일밤 동화책을 읽어준다고 했으니 아마 남매도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믿고 건넨 말이었다. 아이는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기세에 땋은 머리가 팔랑거릴 정도였다. 이걸로 한고비 넘었군. 그는 최대한 무해한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며 덧붙였다.

"난 용이 기억을 먹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 친구들이 저기 위로 이사 가기 전까지(그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천장을 슬쩍 올려다보았고, 남매도 그를 따라서 고개를 움직였다)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는 이야기가 사방에 남아있으니까."

"그럼요, 만약에 거기서 용을 만나면 어떻게 할 거예요?"

이야기가 점점 용의 실존을 전제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정말로 기억의 무덤에 용이 있는 걸까? 아니면 용에 준하는 크기의 바다 괴수라도 있나? 사람들이 했던 말과 남매가 끄집어내려는 비밀이 점점 형체를 띄는듯했다. 

"머리에 산호를 쓰고 다니는 바다뱀이 있는지 물어봐야지. 나 바다 수영은 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직접 바닷속을 수색할 수는 없거든."

"……네?"

"형, 우리 말 하나도 안 믿는 거죠! 그쵸!"

"야, 넌 가서 망보라니까?" "아, 알았어!"

"농담이야. 물론 그것도 물어보면 좋겠지만……."

소녀가 입술을 비죽거린다. "좋겠지만?"

"난 그냥 용이 진짜로 존재하는 종족인지 궁금한 것뿐이야. 너희만 할 때 어른들이 용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해줬었거든. 용은 여의주를 가지고 있으니까, 만난 김에 그 귀하다는 여의주 구경도 해보고.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아름답다던데."

"용이 여의주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하면 어쩔 거예요? 아까 그 랜스로 사냥할 거예요?"

"아니, 설득해야지. 그건 내 물건이 아니라 용이 가지고 있는 거니까."

너희, 혹시 친구가 가진 장난감이 탐난다고 막 때리고 빼앗고 그러는 거 아니지? 장난삼아 묻자 둘 다 아니라며 펄쩍 뛴다. 그는 작게 소리내에 웃은 뒤에 말을 이었다. 

"용이 보석을 좋아한다길래 모아둔 게 좀 있거든. 이거면 구경하는 값은 충분하지 않을까?"

그는 아까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을 하더니 남매를 불렀다. 인벤토리에서 각진 모양으로 다듬어진 녹주석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자 소년이 헉, 하고 소리를 냈다가 누나에게 등을 얻어맞았다. 야, 조용히 안 해? 아, 따가워! 서로 틱틱대더니 얼른 집어넣으라며 손사래를 친다. 남자애가 등을 문지르며 다시 문 앞에 서는 것을 보는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럼 진짜 용 사냥 안 하는 거죠?"

글쎄, 내가 뭘 해보기도 전에 모든 게 끝나지 않을까? 그는 마음속으로만 그리 생각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머뭇거리던 소녀가 말을 이었다. 

"오빠, 잠깐만 귀 좀. 야, 너 빨리 귀 막아."

"알았어."

그가 얼굴을 가까이하자, 아이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낯선 언어를 읊는다. 

"오빠, 이거 외울 수 있죠?"

"특이하네. 그러니까 이렇게 발음하면―"

"아니, 지금 말하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용이랑 만나면 그때 말해야 해요. 자, 다시 말해줄 테니까 잘 들어요?" 

재차 낯선 말을 속삭인 소녀가 발을 동동 구른다. "아참, 이것도 외워야 하는데."

"누나 빨리해, 밖에서 발소리 나는 것 같아!"

이익, 알았으니까 재촉하지 좀 마! 나 지금 헷갈린단 말이야! 쏘아붙이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헷갈린다고 말했던 것이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몇 번 중얼거리더니 잘 들어요? 하고 운을 뗀다.

"한 번 부르면 돌아보고, 두 번 부르면 답하고, 세 번 부르면 곁에 서게 된다."

"이게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서……. 잠깐만 기다려봐요."

"……"

"한 번 부르면 눈앞에 나타나고, 두 번 부르면 소리가 들리고, 세 번 부르면 존재가 묶인다."

"이것도 용을 만나면 말해야 하는 거야?"

"아뇨, 이건, 그러니까……."

소년이 소리 죽여 말한다. "누나, 빨리해! 엄마아빠 목소리 들리는 것 같단 말이야!"

재촉하는 목소리에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세 번 불러요."

"세 번 부르라니?"

"용을 만나면 용의 이름을 세 번 불러야 해요. 한 번은 안 돼요. 보이기만 해서는 안 된댔어요. 두 번도 안 돼요. 모든 말이 서로를 위해 준비된 게 아니라고 했어요. 세 번 불러야 해요. 세 번이요. 꼭 세 번 불러야 해요."

똑똑. 문을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에 남매가 거의 동시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실례합니다. 혹시 저희 아이들이 거기에 있나요? 젊은 부부 중 남편의 목소리였다. 청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에는 가벼운 미소를 매달고, 턱을 매만져보았다. 그렇게 어색한 표정은 아닐 터다. 준비를 끝낸 뒤에 문을 열었다.

"애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더라고요. 밟으면 안 되는 바위 얘기가 특히 인상적이었어요."

곤란해하는 남편의 뒤로 약간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한 아내가 가볍게 한숨을 쉬는 것이 보였다. 

"죄송합니다. 안 그래도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힘드셨을 텐데……"

"아니에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요? 제가 먼저 아이들을 챙겼어야 했는데 실수했네요. 자, 이제 자러 가야지."

젊은 부부는 각자 아이를 한 명씩 안아 올리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오빠를 귀찮게 굴면 어떡하니? 쟤가 먼저 랜스 구경하러 가자고 했어요. 누나도 보고 싶다며? 얘들아, 쉿. 밤에는 큰 소리 내는 거 아니에요.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멀어진다. 그는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린 뒤에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다. 낯선 발음을 입속에서 굴렸다. 이름, 이름이라. 

이름이 세 번 불리면 

단항×카일루스(남성 개척자)  

바람 우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하늘은 어두컴컴했으며, 내리꽂히듯 쏟아지는 빗줄기에 수면은 마치 들끓는 것처럼 떨렸다. 이런 날에는 제아무리 잔뼈가 굵은 뱃사람이라 해도 배를 띄우지 않고 땅에 발을 붙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해안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만일 어떤 두려움 없는(그리고 무모한)이가 거센 비바람을 뚫고 바다로 나왔다면 평생을 두고두고 떠들만한 구경거리를 봤겠지만, 인근 어촌에는 그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없었다. 글자를 익히기도 전에 그물을 만지고 바닷물을 맛본 사람답게, 그들은 태풍에 대한 대비를 단단히 하고 집에 틀어 박힌지 오래였다.   

바닷물 아래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날이 맑을 때는 그 무엇보다도 투명했던 바닷물이 지금은 어둑어둑한 아가리를 벌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주둥이를 크게 벌리고, 가까이 떠밀려온 배를 집어삼키려는 것처럼 혀를 날름거린다. 이미 반파되어 배의 원형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파도가 덮치기 전에, 모든 것이 멈추었다. 

성난 파도도, 쏟아지는 빗줄기도 마치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부글거리며 끓는 것처럼 요동치던 바닷물만이 가볍게 흔들렸는데, 저 깊은 곳에서 잠잠해진 물결을 헤치고 그림자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바다뱀도 아니었고, 뱃사람을 집어삼키고 배를 망가트린다는 서펀트도 아니었다. 서펀트 중에 오래 묵은 놈은 섬만큼이나 커진다는 말이 있지만, 아무리 오래 살 수 있다고 해도 서펀트의 본질은 뱀이 변이한 괴수다. 뿔이나 갈기, 발톱 달린 다리 따위가 생기는 일은, 글쎄, 놈이 세상의 마지막 날까지 살아남는다 해도 요원한 일일 터다. 

수면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배와 인간을 산산조각내지 않으려면 슬슬 속도를 늦춰야 했다. 용은 적당한 시점에 제동을 걸었고, 콧잔등 위에 인간을 얹을 수 있었다. 용의 몸집과 기상악화, 주변을 떠도는 배의 잔해 등을 고려하면 거의 신기에 가까운 재주를 부린 셈이었으나, 이 놀라운 곡예에 박수갈채 대신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박제된 것처럼 멈추었던 비와 파도가 다시 사방으로 쏟아진다. 

용은 코 위에 얹은 인간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비를 피할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다행히 동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제 몸집을 줄인다면 인간 한 명과 용 한 마리쯤은 충분히 들어갈 만한 크기였다. 용은 우선 동굴 입구에 인간을 내려놓고 비늘을 집어넣는 작업에 들어갔다. 인간 모습을 취하는 것은 오랜만이라 어색했지만, 어쨌든 늘어진 인간을 안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다. 걸어가는 동안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것은 제가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좌우로 가볍게 흔들리는 꼬리까지 동굴 속으로 사라지자, 빗줄기가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다.

***

 

"뭐해? 별 잡으려고?"

그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손을 거두었다. 내가 왜 손을 뻗었지? 의문은 이어지는 목소리에 사라졌다. 

"예쁘다, 그치?"

그러더니 그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창 밖을 가리키며 설명을 늘어놓는다. 저건 우리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우주정거장이야. 우주정거장-헤르타라고 부르기도 해. 저기 보이는 빛은 우주정거장에서 보유한 방어 시스템인데……. 작은 새처럼 종알대더니,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디론가 달려간다. 그리고, 쿵! 

곧 워프가 시작됩니다. 자리에 앉으세요! 뛰지 마세요, Mar. 7th! 

앗, 차장님 미안! 카메라만 가지고 나올게요!

그는 작은 태풍처럼 순식간에 저와 '차장님'을(잠깐, 토끼가 어떻게 말을 하지?) 휩쓸고 간 소녀의 뒷모습에서 눈을 돌렸다. 우주정거장을 떠나기로 한 것에 후회는 없었지만, 좀 얼떨떨하기는 했다. 과거는 송두리째 잘려나갔고, 현재는 불투명하고, 미래는 막막하다. 그는 자신이 생각 이상으로 긴장한 상태였다는 것을 겨우 깨달았다. 가볍게 쥔 주먹 안이 식은땀으로 축축했으니까. 

눈을 뜨면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눈을 뜨고, 반물질군단이라는 괴수 무리의 습격을 받고, 어쩌다 은하열차팀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았고, 지금은 그들을 따라 열차에 올랐다. 우주정거장에 남는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남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거길 떠나고 싶다는 의지는 확고했고,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열차를 타고 우주를 달리며 개척임무를 해낸다니. 우주여행이라는 게 가능한 일이었던가? 인간이 열차를 타고 별과 별 사이를 달릴 수 있었던가? 머릿속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정보를 뒤적였으나 쓸만한 게 없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괜찮니? 혹시 속이 울렁거리지는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손바닥만 한 책을 들여다보던 여자가 말을 붙인다. 그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은하열차의 워프시스템은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쾌적하다네. 혹시 우주여행을 해본 적이 있나?"

고개를 가로젓자, 쟁반에 받쳐 든 컵을 여자에게 건넨 남자가 저를 돌아본다. 한잔 마실 텐가? 커피 말고 다른 것도 있는데. 그는 데운 우유를 한잔 받았다. 남자는 탁자 위에 쟁반을 내려놓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앉더니, 남아있던 머그잔 중에서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약간 어지러울 수도 있겠군. 하지만 걱정 말게. 누구처럼 워프할 때 서 있지만 않는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테니까."

"아저씨, 저 다 들었거든요?"

언제 돌아온 건지, Mar. 7th라 불린 소녀가 다가와 쟁반 위에 남아있는 컵을 쥐고는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남자는 허허 웃더니 머그잔을 들어 올려 입가를 감춘다. 

"곧 워프가 시작됩니다! 어라, Mar. 7th도 앉아있네?"

"차장님도 얼른 와서 앉아요. 여기 앉을래요?"

그렇게 말한 소녀는 자신의 무릎을 두어 번 두들겼고, 차장은 한쪽 귀를 홱 올렸다가 늘어트렸다. 어이없어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말문이 막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내 자그마한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다시 입을 열어 외친다. 

"곧 워프가 시작됩니다! 자리에 앉아주세요! 다음 목적지는―"

"앗, 카일루스, 저기 좀 봐!"

뭐? 어디를?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열차 안에 빛이 차오르기 시작해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감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이상함을 느끼고 눈을 떴다. 눈을 감고 있었던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는데, 무슨 일이지? 의아함은 곧 깨달음으로 변했다. 

꿈 속에서는 익숙했던 모습들이 눈꺼풀 뒤로 사라지자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현실은 어두컴컴한 천장이군. 그 천장에서 차가운 물이 떨어져 이마를 톡, 치고 지나간다. 자리에서 일어나볼까? 움직일 수 있으려나. 다행히 몸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여주었다.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지만, 그 난리가 났었던 걸 생각해보면 어디 한군데 부러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욱씬거리고 당기는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여보았다. 상체를 일으켜 앉자 벗은 몸을 덮은 겉옷이 줄줄 흘러내린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잠깐 놀랐으나, 금방 진정했다. 바다에 빠졌었지. 끔찍한 날씨였다. 저를 발견하고 건져낸 누군가가 젖은 옷을 벗기고 몸을 덮어주는 친절을 발휘한 모양이다. 

제가 담요처럼 덮은 옷은 물 한 방울 묻지 않아 보송보송했으며, 약간의 온기가 느껴졌다. 꼭 누군가 조금 전까지 걸치고 있었던 것처럼. 주변을 둘러본 그는 온기의 근원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마도 저를 구한 사람이 피워뒀을 것이 분명한 모닥불이 보였다. 불이 불그스름하지 않고 푸르스름한 것을 보니 자신을 구한 익명의 구조자 또한 괴수 사냥꾼인듯했다. 능력으로 불을 피웠거나, 아니면 휴대용 발화 아이템을 사용했겠지. 불 앞에서 몸과 옷을 데우고, 적당히 따끈따끈해진 외투를 벗어 덮어주었을 것이다. 

그는 흘러내린 웃옷을 추켜올렸다. 팔을 꿰입으니 허벅지까지 가려진다. 따뜻한 불을 쬐고 있으려니 어쨌든 살았다는 실감에 마음이 놓인다. 조금 투덜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꿈자리 한 번 사납네."

"그런 것 같더군. 깨워야 했나?"

"……." 

대답이 돌아올 것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인기척도 없었는데? 그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고, 기이한 모습을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동굴에 기대선 모습은 잠시 비라도 피하는 것처럼 느긋해 보인다. 그는 남자의 평상시 모습을(저를 바다에서 건져내기 전을)어렵지 않게 그려볼 수 있었다. 검은 상의와 회색 바지를 입었는데, 아마 그 위에 흰 겉옷을 입고 있었을 것이다. 단정하지만 어딘가 서늘한 구석이 있는 젊은이, 정도 되겠다. 머리 위에 돋은 한 쌍의 뿔만 아니라면 제법 평범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옆에 기대어둔 창이나 허벅지에 찬 단검 같은 건 괴수 사냥을 업으로 삼은 이들 사이에서는 흔한 모습이니까.  

쓰으으윽.

그는 소리가 난 곳으로 눈을 돌렸고, 회색 바지 옆에서 흔들리며 동굴 벽을 쓸어내리는 꼬리를 발견했다. 꼬리는 시선을 닿은 것에 놀랐는지 슬그머니 남자의 다리 뒤로 숨는다. 뿔과 꼬리가 달린 인간이라.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그때까지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남자와 다시 한번 마주 보게 되었다. 

세상 모든 것에 무감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한쪽 눈가만 유달리 붉었는데 아마 무언가를 칠한 것 같았다. 왜 한쪽 눈가만 덧그린 거지? 독특한 화장으로 둘러싸인 눈동자는 옅은 녹색이었는데, 동공이 칼날처럼 뾰족했다. 남자의 눈을 들여다볼수록 어쩐지 시선을 돌리기가 어려웠다. 세상에 둘도 없을 만치 아름다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아니, 미추를 따지자면 보기 좋은 편이기는 한데……. 몸이 조금씩 떨려온다. 가슴이, 조금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옅은 녹색에 둘러싸인 쇠붙이가 번뜩인다. 광량이 변변치 않은 동굴 속에서, 단순히 모닥불 빛에 번들거린다고 하기에는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고 날카롭게 빛난다. 그는 뒤늦게 자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눈을 감아야 했다. 아니면 고개를 돌리던가. 하지만 떨림이 강해질 뿐, 몸은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남자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뿔과 꼬리도, 날카로운 동공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이제 완벽하게 평범한 인간처럼 보였다. 아주 짧은 시간에 눈 한번 깜빡이는 것만으로도 겉모습이 바뀌다니. 괴수 사냥꾼 중에는 기이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적지 않았으나, 순식간에 다른 존재로 변신하거나 정신을 마비시킬 수 있는 이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괴수의 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고들 하지. 왜 그런지 알고 있나?"

괴수사냥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사냥을 업으로 하지 않는 사람도 알고 있는 상식 중의 상식이기도 했고. 여전히 잘게 떨리는 몸을 움직여 팔짱을 꼈다. 그는 모닥불이 전하는 온기에만 집중하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몸이 굳어버리니까."

"인간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이야기하는 걸 예의 바르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난 그렇게 할 수 없어. 이유는……. 조금 전의 일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겠지."

으음, 성의 없는 대답을 하며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렸다. 아직도 몸에서 한기와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다. 바다뱀이나 일개 괴수따위가 저렇듯 인간의 모습을 모사하거나 형언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앞세워 군림할 수는 없다. 그런 게 있었다면 일대가 이미 엉망이 되었겠지. 

그러면, 진짜로?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그는 어쨌든 말을 붙이기 위해 고개를 들었고, 이쪽을 보던 남자가 얼른 시선을 돌리는 것을 발견했다. 인간 모습일 때도 눈을 마주치면 아까처럼 되는 건가? 남자는 동굴 밖을 내다보며 말을 걸었다. 

"언령사, 이름은?"

"언령사?"

"아, 시간이 꽤 흘렀으니 명칭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어."

"아냐, 언령사는 지금도 있기는 해. 수가 적기도 하고, 일단 나는 아니라서."

"그렇군. 그러면……. 계약자, 정도면 적당할까?"

"언령이니 계약이니, 꼭 내가 말로 무슨 짓을 했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남자가 이쪽을 똑바로 보더니 미간을 찌푸린다. 했잖은가? 라고 말하는듯한 얼굴이다. 그러니까 뭘? 어째 말이 빙빙 도는 것 같다는 생각에, 제 미간도 덩달아 찌그러졌다. 

"계약자. 이름은?"

아차, 이름을 물었지. 이름, 이름이라. 이름도 없이 떠도는 사냥꾼한테는 어려운 질문인데. 그는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러댔다. 잠깐만, 생각 중이야. 그렇게 말하자 남자의 얼굴 위로 무언가 흐릿한 표정이 지나갔으나, 그는 이미 제 생각에 골몰한 탓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괴수 퇴치 의뢰를 받을 때는 동종업계 종사자들이 붙인 별명을 대기도 했고, 무기 이름을 대기도 했다. 이름이야 어쨌든 놈들의 숨통을 끊을 수만 있다면, 그래서 치른 값이 아쉽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그걸로 충분했으니. 괴수 사냥꾼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적당히 붙일만한 거 뭐 없나? 고민은 찾아왔던 것만큼이나 갑작스럽게 해결되었다. 

그 꿈. 

열차를 타고 우주를 달리던 꿈이 떠올랐다. 그들이 나를―

"……카일루스, 라고 불렸던 것 같아." 

머릿속에서 굴려볼 때만 해도 영 어색했던 이름은, 막상 입 밖으로 끄집어내자 오래전부터 제 것이었던듯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다시 한번 소리 내어 말했다. 

"카일루스. 날 카일루스라고 부르면 돼." 

"카일루스……. 여기 사람이 쓸만한 이름은 아니군."

"그렇게 튀는 이름이야? 여기까지 오는데 좀 걸리긴 했어."

"내 이름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 입에 올릴 필요는 없겠군. 아니면 소개가 필요한가?"

아까 인간의 예의 운운하더니, 용치곤 제법 사람답게 행동하려 애쓰는 것 같다. 하지만 왜 내가 저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지? 카일루스는 아까 전부터 신경 쓰였던 점을 묻기 위해 입을 열었다. 

"용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처음 만나면 통성명이라는 걸 하거든. 그리고 나 네 이름 뭔지 몰라. 왜 내가 네 이름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남자는 잠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는데, 아마 똑바로 바라보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용이 다른 종족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사소한 불편이 뒤따르는 일이구나. 나도 좀 거들어야 하나? 카일루스는 푸르스름한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있으려니 남자가 하는 말이 꼭 모닥불이 하는 말처럼 들렸다.  

"우선 내 정체……. 종족에 관한 이야기부터 할까. 눈치챘겠지만 나는 용이고, 이젠 네 바다뱀이지. 이무기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네가 원한다면 뭐든 내 이름이 되겠지. 물론 새로운 이름을 쓰게 되면 옛 이름에 쌓인 힘은 사라지고 나는 약해지겠지만," 

남자는 힘주어 말했다. "모든 것은 언령사의 말대로." 

카일루스는 턱을 매만지다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해도 돼?"

"좋을 대로 해."

"네가 하는 말……. 좀 이상하게 들려. 내가 말 한마디로 네가 그간 쌓아온 모든 걸 망쳐버릴 수 있다는 것 같잖아. 무슨 계약이 이래? 그리고 나 아직 네 이름 못 들었어."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난 네가 불러서 여기에 있는 거야."

카일루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아니, 모르는데?"

"넌 내 이름을 불렀어. 세 번이나. 온 힘을 다해서. 한 번 부르면 돌아보고, 두 번 부르면 답하고, 세 번 부르면 곁에 서게 된다.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서 설마 언령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겠지."

"내가 널 불렀다고? 하지만 나는……."

"한 번 부르면 눈앞에 나타나고, 두 번 부르면 소리가 들리고, 세 번 부르면 존재가 묶인다. 들어본 적이 있을 텐데."

"아니, 들어본 적 없어." 

그때까지 동굴 벽에 기대어 선 자세를 고수하고 있었던 남자가 몸을 움직였다. 옆에 세워둔 창으로 손을 뻗는가 싶더니 도로 거둔다. 카일루스가 계속 모닥불을 보고 있었기에, 그는 저를 향해 다가오는 검은색 신발 한 켤레를 볼 수 있었다. 발목 위까지 올라와 종아리 아래를 덮는 검은 부츠 비슷한 모양새였는데 이 또한 사냥꾼들이 흔하게 신는 종류였다. 

검은 것이 소리도 없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너, 왜 바다에 들어갔지?" 

"……."

"왜 무덤에 들어갔지?"

"……."

"기억의 무덤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분명 말리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들어갈 생각은 없었어. 그냥, 그냥 보고 오기만 하려고 했는데……."

기억의 무덤이 제가 빠졌던 바다를 이르는 말이라는 건 알았다. 알았는데, 제게 바다 이름을 알려준 이가 있었던가? 누가 용의 이름을, 비밀스러운 언령을 속삭였지? 어릴 적 용에 얽힌 온갖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사람은? 그는 어디로 가고 나 혼자 여기에 있지? 

모닥불의 온기도, 걸치고 있는 옷의 안온함도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푸르스름한 불꽃을 곁에 두고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따뜻함을 느끼기 어려웠다.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더니 몸을 낮춘다. 

"진정해."

그러더니 천천히 오른손을 뻗는다. 완갑으로 둘러싸인 손이 제 어깨에 가볍게 얹히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것 같았다. 그만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카일루스는 남자의 손이 어깨에 닿은 뒤에야 제가 떨고 있음을 알았다. 귓가에서 파도가 치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웅웅 울리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온다. 가슴이, 조금 답답한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의 무덤. 그곳에 발을 들이면 무언가 하나는 두고 와야 한다고 했었다. 어떤 때는 모든 걸 내려놓아도 부족하다고 했다. 살아 뭍으로 돌아온 이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웃었고, 그의 가족은 상복을 차려입고 제문을 준비했다. 제문을 낭독하고, 태우고, 그런 뒤에는 바다에 가 읍소하는 것이다. 

용이시여, 부디 저희가 기억의 무덤에 들어설 수 있도록 굽어살피소서. 

그 무덤은 인간이 몸을 누일 곳이 아닌바, 썩을 수 있는 육신은 사람의 무덤에 누이고자 하니,  

당신의 무덤을 파헤치고 거기 누운 기억을 품에 안고 돌아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소서.

어떤 기억이 무덤 안에 누웠나. 바닥 없는 곳을 기억과 육신과 파편으로 메우면서 어떤 노래를 불렀나. 

전해내려오는 이야기 속에서, 바다는 기억의 무덤이고 뱃사람을 위한 관이었다. 묻힐 곳 없는 이가 가게 되는 마지막 종착지였다. 이름 없는 용이 관을 지키며 승천의 때를 기다린다고 했었다. 혹자는 그 용이 깨진 여의주를 붙이기 위해 주인 잃은 기억을 삼킨다고 말했다. 여의주가 망가지면 승천할 수가 없었기에. ……뱃사람들은 기억의 무덤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조차 꺼려서, 그는 그걸 이용해서― 

뭘 할 셈이었지? 

"카일루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첫째로는 부르는 목소리에 어쩐지 저항하기 어려웠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남자의 오른손이 제 어깨를 떠나 턱을 감싸 쥘 것처럼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 젠장, 이런 꼴을 보이는 건 어릴 때 다 끝낸 줄 알았는데. 기억나지도 않는 어린 시절을 들먹이며 어떻게든 참아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자의 오른손이 기어이 눈물로 축축해진 뺨에 닿았다.  

"모든 것은 언령사가 말하는 대로 되어야 하지만…….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닌 것 같군."

엄지로 눈가를 닦아내려 했던 것 같은데, 손을 움직이는 것이 영 서툴다. 하긴, 살면서 우는 인간을 달래줘야 했었던 적이 얼마나 있었으려고. 함께한 시간이 길지 않지만, 행동거지를 보면 인간이랑 이렇게 오래 이야기해본 적도 손에 꼽을 것 같다. 

남자는 눈물을 닦는다기보다는 눈 주변을 문지르는 것에 더 가깝게 손을 놀린다. 눈물을 여기저기 펴 바를 셈이야? 하고 실없는 소리라도 싶었지만 지금 입을 열었다가는 엉망으로 갈라진 목소리밖에 나오지 않을 게 뻔했다. 그때, 마음을 읽은 것처럼 남자의 오른손이 떨어져 나가서 카일루스는 조금 놀랐다. 남자는 단지 자세를 바꾸려 했던 것 같았지만, 어쨌든 좀 놀랐다.

"당분간은 내 이름을 계속 쓰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

"새 이름을 받으면 이런 건 하기 어려울 테니까."

이런 거? 뭘 하려고? 의문에 대한 답은 금방 얻을 수 있었다. 남자는 카일루스와 눈을 맞추더니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옅은 녹색 눈동자 안에서 칼날처럼 날카로운 동공이 기이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 이거, 추워서 싫은데. 그런 말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온 모양이다. 남자가 왼팔로 카일루스의 어깨를 안았으니까. 

"물론 네가 원한다면 당장에라도 새로운 이름을 쓰겠지만."

팔을 두르는 것조차 서툴러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웃음 대신 눈물이 또 한 번 흘러넘쳤다. 카일루스는 남자가 가볍게 당기는 대로 몸을 맡겼다. 모닥불과 떨어진 곳에서 바닷바람을 맞은 탓인지, 남자의 몸은 서늘했다. 단단한 어깨에 턱을 얹자 남자가 오른손을 머리 위에 얹는다. 손가락으로 이마에 드리운 머리칼을 흩더니, 엄지손가락으로 드러난 부분을 가볍게 누른다. 엄지로 이마를 누를 때마다 눈앞도 따라서 깜빡거렸다. 의식이 점점 멀어진다. 정신에 두른 방어막을 해제하고 잠들게 하는 비술이라. 불면증 있는 사람이 좋아하겠네. 

"우선 지금은……."

눈꺼풀이 무겁다. 그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조금이라도 버티려고 애썼다. 

"나를 단항이라고 불러."

남자의 말에 무어라 대꾸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도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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