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츄린

Est vir qui adest

Quid est Veritas?

♠️ by 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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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오×어벤츄린입니다. 키워드는 「연애+동거+정신병」.

레이시오, 그리고 레이시오와의 연애/동거 기억을 깡그리 날려먹은 어벤츄린의 이야기입니다.

625846 님의 커미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https://kre.pe/9DwR)

Quid est Veritas?

Est vir qui adest.

:: 각 요한 18:38, 19:5. 그리고 에니어그램입니다.

#1.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커다란 창 너머로부터 따스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것이 집 구석구석을 훑는다. 가장 처음에는 커튼을 흔드나 싶던 바람이 어느새 꽃병의 꽃을, 탁자 위 놓인 서류 몇 장을, 그리고 내 이마에 늘어뜨려진 금빛 머리카락을 흔든다. 요컨대 내가 좋아하는 색의 커튼과, 내가 좋아하는 향의 꽃과, 내가 처리하다 그대로 두고 간 듯한 서류를.

그러나 기억에는 없다.

외면하듯 그 모든 것들로부터 고개를 돌린다. 이번에 바라보는 곳은 부엌이다. 내 키에 정확히 맞춘 찬장과 선반. 그리고 내가 구매했을 법한 식기들을 눈에 담다가 곧 차분한 걸음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 바람이 집을 훑던 것보다도 느리게 집안을 훑는다. 싱크대 구석에 거꾸로 놓여 건조되는 컵, 그리고 서재의 높다란 책장이나 거실 구석을 엉망으로 차지한 책들은 분명 내 것이 아니다.

역시 모두 기억에 없는 것들이다.

다만 온갖 가구와 조명, 심지어는 벽지까지도 내 취향에서 엇나가는 것이 없다. 손끝으로 문질러 꼼꼼히 확인해 보아도 현실이 바뀌는 일도 없다. 그제야 쭈그려 바닥을 살피던 몸을 일으켰다. 눈을 감는다. 따뜻한 분위기가 보다 선명하게 다가온다. 이곳은 평온하고 따스한 곳임이 틀림없다. 그것도 아마 저가 생활했을 ‘집’. 그러나 낯설다.

미간을 꾹 짚으며 깊은 숨을 내쉬고, 다시 앞을 바라본다. 그리고 레이시오의 길게 늘어뜨려진 안경줄 끝자락 즈음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앎에도 그럴 수가 없다. 말을 고르려 침묵하니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확인은 끝이신지.”

금홍빛 시선이 얽혀든다. 이제는 정말 마주해야 한다. 음, 신음을 길게 늘이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린다. 그러니까, 바로 이 집이 나와 레이시오의 동거 장소라는 거지? 스타피스의 상사에게서 가장 먼저 들은 것이니 ‘동거’는 믿을 수밖에 없기야 했다. 물건이야 단순히 가져다 두거나 위조까지도 가능한 것이지만 생활감이란 꾸며내기 어려운 것이지 않나. 게다가 그 ‘닥터 레이시오’가 이런 의미 없는 귀찮은 일을 감수할 성정도 아니고. 애초 그에겐 나를 속여야 할 이유조차 없으므로.

“동거 사실 여부는 확인한 것이 맞지만, 교수 양반.”

“친절을 발휘해 다시 이야기하자면― 사귀던 것도 맞답니다.”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존대라니. 어지간히도 비꼬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러나 이것만큼은 도통 납득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저기, 연인 사이였다는 것 말이다.

“대충 알아들었어. 나 스스로 페나코니 일 직후의 기억을 전부 날려 먹었다더라고. 그래서 이쪽 기억은 전혀, 일절, 하나도 나지 않아. 물론 교수 양반도 컴퍼니에게 전달받아 알고는 있겠지만.”

레이시오의 시선이 곧다. 그 시선을 피해 나는 한쪽 눈가를 찌푸리며 입술을 한번 깨물었다. 이 상황이 매우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다소 희극적인 표현이다. 살짝 벌어진 입 사이로 한숨이 삐져나온다. 그리고 빙글, 한쪽 발꿈치에만 몸무게를 실어 돌린다. 창 너머의 햇살은 역시 환했다. 지나치게 따스하리라 만큼.

정리하자. 직전의 일은 페나코니에서의 일만큼이나 큰 건이었으며, 기억을 읽어 소통하는 종족을 상대해야 한다는 특수한 조건이 붙어 있었다. 때문에 임무 성공을 위해선 모든 작전과 계략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했다고……. 대충, 과거의 나는 그런 계획을 꾸몄던 것 같다. 그렇지만 임무가 성공한 지금에 와서도 기억이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더라. 그리고 컴퍼니는 나를 이곳으로 보냈다.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의 휴가인 셈 치라던데.

뒤통수 너머로도 레이시오의 시선―위에서 아래로 훑는―이 느껴진다. 다시 뒤돌아 습관적으로 어깨를 편다. 그렇게 굳어 있으니 레이시오가 혼잣말을 닮은 한숨처럼,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은 지키긴 했군. 물리적으로는.”

“……내가 그런 약속을 했었어?”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시오다. 답지 않게도 나는 할 말을 잃어 그를 빤히 바라보기만. 그렇게 음, 어, 끄응, 같은 기묘한 신음만 내던 틈 그가 다가온다. 다가와 내 어깨를 그 굵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지른다. 그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를 더욱 올려 보게 된다.

어색하다. 무려 자상한 미소라니. 지나치게 낯설어 한 걸음 물러서기까지 했다. 그는 말했다. 잘 돌아왔다고, 다만 그것을 굳이 존대로.

“저기. 그런데 말이야. 왜 존대해, 레이시오? 그렇게까지 비꼬지 않아도 뉘앙스로만도 충분…….”

“그러기로 했으니까.”

분명 레이시오는 웃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오한이 끼친다. 낯설어서인지 또 다른 감정 때문인지. 사라진 기억 때문에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함에서 오는 나 자신의 긴장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그가 화가 나 보여서인지.

“에.”

“상호 존대하기로 한 지 오래되었다고요, 어벤츄린 씨.”

이런 미친. 겨우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미세한 경련까지 숨길 수 있던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과거의 나는 대체 뭘, 했던 거지?

작전에 대한 수많던 기록들은 잘 만들어 두었으면서 왜 연인에 대한 건 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단 말이냐. 물론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답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는 이유는 당장 짚이는 구석이 없다. 어쩌면 그저 임무가 이렇게 일찍 끝날 것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일지도 모르지. 여하튼 분명 나 자신의 계략과 맞대결하던 임무는 이미 끝난 줄 알았건만. ……진짜 뭐지?

“적당한 시간만 지나면 기억은 돌아올 테니까요. 함께 지내는 것이 조금쯤은 기억이 돌아오는 것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그러니 믿거나 이해하기 어렵더라도 일단은.”

그는 ‘좋은 사람’이다. 사라진 기억 속에서도 틀림없이 그러했을 것이다. 나는 눈 깜박일 새도 없이 끼어들어,

“믿어.”

이해는 하지 못할지언정 너와, 네가 하는 이야기는 믿는다. 나는 그런 말을 했다. 내가 뱉은 간결한 답에 잠시 굳었던 레이시오가 이번에는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어렴풋이 익숙한 것 같기도 한 감각이다. 아닌가, 실은 잘 모르겠다. 다만 선명한 따스함이 이곳에.

“……요. 저기, 그나저나 존대는 제발 집어치워 주면 안 돼? 소름이 돋아서 가만 못 있겠는데.”

“논리적인 이유를 댄다면.”

레이시오가 하, 고개를 까닥이며 답했다. 화가 난 것인지 짜증이 난 것인지. 다만 단순히 한심해하는 것만은 아니다. 온전한 걱정이라기엔 그것 역시 아니다. 네 이런 표정은 본 적 없다. 그러니까, 이상하다.

“지금, 기분 안 좋은 거지…요?”

레이시오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생각했다. 연인이라는 건 사랑을 함의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네가 나를,

“우리가 사귀던 사이였다면.” 작게 내 주먹을 쥐었다 펴고, “그냥 한 번 안아주면 안 돼? 나름 오래 헤어져 있다가 막 돌아온 거니까…….”

안으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우리가 정확히 어떤 사이로 규명되는 관계였는지 나는 모른다. 세상의 모든 연인을 하나의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모르는 우리의 관계에서도 우리 교수님은 여전히 좋은 사람인 동시에 성실한 연인이었을 것이라 감히 예측한다. 나는 그래서.

이번에는 레이시오가 미간을 짚으며 긴 한숨을 한 번. 이게 아닌가? 슬슬 목덜미에 열이 올라와 싫으면 말고, 라 빙그레 웃으며 무마하려던 바로 그때 그가 움직였다. 단단한 팔이 내 등과 어깨에 닿는다.

그것은 따스했다. 그의 품속에서 데굴 눈을 굴렸다. 본래 포옹이라는 것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하는 행위이지 않나.

……어쩌면 말이야, 정말 안아주는 걸 보아하니 연애했다던 그 얼토당토않은 이야기가 사실인 걸까?

#2.

이곳이 내 방이라더라. 나도 몰랐다. 하지만 내 방이란다. 임무를 위해서랍시고 기억을 날린 것도 아마 나 자신일 테니, 그저 이런 경험을 선사한 내게 감탄하면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이라. 지금의 나는 미래의 나임과 동시에 과거의 나이며 현재의 나이기도 하다. 기억이 존재를 규정한다고 주장하는 「후리」의 어떤 파벌에서라면 나를 어떤 존재로 정의할지 조금쯤은 궁금해지기도 하고. ……이거, 레이시오적 사고 아니야? 사라진 기억 속 시간에서 몸에 배었던 건가? 왠지 몸이 떨린다. 이게 무슨. 몸은 기억한다, 도 아니고.

여튼 그리 넓지도 않은 곳을 한참 둘러보다, 침대에 푹 눌러앉아 레이시오가 만들어 준 라떼를 홀짝였다. 밥도 그가 준 것을 먹었고, 차도 그가 준 것을 마셨으며, 이 방에 있으면 된다고 한 것도 그였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얌전히 따랐다. 어쩌면 말 잘 듣는 노예나 애완동물이라도 된 듯하지만, 그리고 정말 그랬다면 뒤편에서 서늘한 안광을 빛내며 계략을 꾸몄을 테지만, 그의 눈에 담긴 나는 ‘사람’이었으므로. 그리고 레이시오는 누군가와는 달리 나를 잘 대해주지 않나.

허리를 내려 보다 편하게 앉는다. 벽지의 작은 흠 몇몇이 보인다. 본래 내가 알던 내 집에는 없었을 작은 흠이나 생활감. 손 잘 닿는 곳에 둔 인형이라든가 조금 구겨진 침대보라든가도.

침대 위, 아마 내 것일 베개와 인형들을 끌어안고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내가 레이시오와 사귈 만한 이유를 찾자면 결코 적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그에게도 나와 사귈 만한 이유가 없지는 않을 테고. 아마 그랬겠지. 대충 그랬을 셈 치도록 하자.

눈을 감아 보이는 것은 새까만 암흑. 고요하다. 기억에 없음에도 내 흔적들이 배여 있어 편안하다. 몸을 뒤척여 이번에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다시 생각한다. 이번에는 눈을 떴다. ‘그런’ 관계. 그것도 같은 세계에서는 결코 살 수 없을 것 같던 우리 두 사람이.

왜 그랬을까, 나는? 그렇다면 왜 그래야만 했을까, 너는? 이해하기 어렵다, 아니, 이해할 수 없다. 역시 이상하다.

돌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 보니 말이다. 가장 쉬운 선택지를 두고 고민할 이유가 있나? 연애란 한 명이 홀로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당사자가 바로 방문 너머에 있는데.

연인이라는 건 어떤 관계일까. 그의 일을 방해할 권리까지나 쥔 관계일 수 있을까.

걸어 나가 내 방문을 열어젖힌다. 당연하지만 거실에는 레이시오가 앉아 있다. 흰 조명이 그의 암청색 머리카락을 비춘다. 내가 그를 부르기도 전에 교수 양반은 내 쪽을 보지도 않고 홀로그램 창을 가리켰다. 대충 논문이나 데이터, 자료겠지.

“일하는 중이야?”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에게 다가간다. 연인 사이라면 이런 것도 허용되지 않을까. 살살 반응을 살핀다. 물론 티가 나지 않도록. 몇 초 지나지 않아 그가 홀로그램 창을 끄고 소파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나는 잠시 꼼지락거리다 그가 두드린 곳에 앉았고.

“왜 그래, 레이시오? 아직 기분이 안 좋아?”

“기분이 안 좋다는 건 부정하지 않지만, 내가 화가 난 대상은 그 모든 일을 잊기로 결심했던 어벤츄린이지 네가 아니야.”

그러고 보니, “이제 존대 안 하네.”

“네가 집어치우라면서. 그것도 ‘제발’. 덧붙이자면, 냅다 기분이 좋지 않으냐 묻는 것은 좋은 대화법이라고 할 수 없지.”

그가 잘 깎인 사과를 탁자의 내 앞으로 밀어 옮겼다. 먹으라는 건가? 그래도 되나? 망설임은 짧았지만 그 짧은 틈, 레이시오가 사과를 하나 집어 들어 내 입 바로 앞으로 내민다. 차마 낼름 받아먹지는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정말 연애하는 것 같다.”

“벌써 여섯 번째군. 연애 맞아.”

하지만 역시 어색한 것도 아니고 ‘이상하다’. 혀끝이 잘게 떨리는 것을 무시하며, “어쨌든. 그럼 좋은 대화법은 뭔데? 가르쳐 줘, 교수님.”

“평소처럼 내 무릎 위에 앉아 일을 방해하는 것?”

그건 또 뭐야.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니 레이시오가 잽싸게 내 입에 사과를 집어넣었다. 입에 들어온 것이니 어쩌겠나. 뱉을 수도 없고. 일단 아삭아삭 씹으며 그를 바라본다. 사람을 읽는 것엔 능숙한 편이라 자부한다. 그러나 모르겠다. 알 수 있는 것은 그의 눈에 장난기가 담겨 있다는 것뿐.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거대한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처럼이나.

나는 지금의 너를 모른다.

“……교수 양반, 그런데 ‘그 모든 일을 잊기로 한 어벤츄린’에겐 왜 화가 난 거야?”

“글쎄.”

“싸우기라도 했어?”

이번의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그것도 글쎄.”

“알려주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해, 레이시오.”

그가 이번에는 제 무릎을 두드린다. 소파에 앉을 때의, 잠시 왼손의 손끝을 맞대던 그 꼼지락거림과는 달리 이번의 꼼지락거림은 길었다. 그가 두 번 더 그의 무릎을 툭툭 건드리고서야 그 위에 가 걸터앉았다.

어색하게 앉아 있으니 뒤편에서 긴 숨소리가 들린다. 레이시오가 내 허리와 등, 허벅지를 몇 번 만진다. 얌전히 그 손길을 받아들인다. 어느새 편안히 기대는 자세가 된다. 그러고도 그는 몸을 온전히 그에게 기댄 것을 재차 확인한다. 그리고 그렇게 한참을 가만히. 긴장했던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간다. 따뜻하고 배부르니 졸리다. 이래서는 짐승과 별다를 바가 없는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을 하던 즈음.

난데없이 아랫배에 서늘한 감각이 닿았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레이시오의 단단한 팔에 갇혀 그럴 수 없었다. 펜 쥐는 형태로 굳은살이 박인 손가락. 그 손끝이 옷 아래의 맨살을 천천히 더듬어 타고 올라 든다. 손끝으로 내 몸에 선이라도 여럿 긋듯이.

연인이라면 이, 럴 수도 있는 거겠지? 그런 거잖아. 하지만 레이시오가, 그것도 나에게? 몸에서 힘을 빼려 노력한다. 그런데도, 또는 그렇기 때문에, 그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강한 손길은 아니다. 그러나 옅게 스치는 감각이 오히려 덥다.

급히 들이쉬던 숨소리를 미처 감추지도 못하고 있던 때, 그가 제 머리를 내 열 오른 목에 기댄다. 이제 그의 손은 더 움직이지 않는다. 끝난 건가? 조심조심 그의 손을 내 옷 아래에서 빼내려 움직이기 직전, 그가 말했다.

“알려주기 싫어.”

#3.

“연애라는 건 이런 거구나. ‘닥터’의 가르침이네. 나는 모르는 게 아니라 기억을 못 하는 거니까. 교수님의 가르침보다는 닥터의 가르침이 어울리지 않겠어.”

“……그런 셈이지. 하지만 난 다른 누구도 아닌 ‘네’ 의사는 될 수 없다는 것만은 기억해.”

천장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가. 어린이용 놀이기구라도 탄 것처럼 흔들린다. 그러니까, 내 두 다리가 레이시오의 한쪽 팔에, 어깨와 등이 다른 한쪽 팔에 걸쳐졌다는 것이다. 어느새 그에게 안기듯 들어 올려진다. 굳건한 팔은 내 무게에도 꿈쩍 않는다.

“가만 있을 건가? 목에 팔을 걸어.”

이제는 망설이지도 않고 그의 목에 내 팔을 걸며 멍한 눈을 깜박인다.

“어디로 갈 건데?”

“네 방.”

“하지만 내 침대엔 자주 사용한 흔적이 없었어. 내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거나 교수 양반의 방에서 같이 잤거나. 어느 쪽이었을까. 또 알려주기 싫다 하려고?”

“잘 알고 있군. 정 궁금하면 이번 임무 이전의 메세지 기록이라도 보지 그래. 추측은 할 수 있겠지.”

“없어. 하나도. 교수님과의 메세지 기록만 싹 사라졌더라고. 내가 지웠거나, 교수 양반이 지웠을 수도…….”

내 등을 받친 그의 손에 약하게 힘이 들어찬다. 그는 나를 들었던 처음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너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건가?”

“그럼 내가 지운 거구나. 왜 그랬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답해줘서 고마워. 역시 ‘이런 방법’이 빠르긴 하잖아. 이 김에 하나 더 물어봐도 돼?”

목에 걸었던 손을 더욱 끌어당긴다.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는다. 포옹이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본래 포옹은 표정을 숨기기 위해 하는 행위이지 않은가. 이제 레이시오가 말할 때마다 그 낮지만 다정한 울림이 생생하게 닿는다.

“애초 내가 했던 건 ‘답’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를 왜 사랑했어? 또 알려주기 싫다고만 할 거야?”

말을 끝내자마자 목에 걸었던 손을 풀고 그의 품에 더욱 깊숙이 고개를 파묻었다. 그는 그대로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었고. 고요 속 마침내 그의 입이 열린다.

“너는 내가 너를 싫어했으면 좋겠다는 듯이 굴지. 원하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답인 것처럼.”

“그렇게 느껴졌어?” 입도 파묻힌 탓에 웅얼웅얼.

“너는 늘 나를 시험하고 싶어해. 항상 그랬어. 이번 일도 그 일환일지 모르지. 그러나 네가 얻고자 하는 답이 무엇인지, 너 자신은 알까.”

“뭘? 그건 몰라. 그야 나는 ‘그 모든 일을 잊기로 한 어벤츄린’이 아니니까. 물어서 답이 나오지는 않을걸.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나는 베리타스·레이시오가 사랑하는 어벤츄린도 아닌 거겠지.”

등을 받친 손. 그 손의 손가락들을 가지런히 모아 내 등을 토닥인다. 역시, 따스하다. 그의 품도 그의 손도. 어쩌면 그의 모든 것들이 따스하다. 그런데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상하다. 죽어버린 그들 외의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일은 이상하다. 정말이지 ‘이상하다’. 게다가 기억이 없는 나는 네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그 사람도 아니다.

“답지 않은 철학적 질문이군.”

들려온 것은 느닷없이 즐거운 목소리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이상한데. 레이시오의 어깨를 꾸욱 눌러 쥐고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어떤 열정 담은 눈과 함께 웃고 있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했다니.”

머릿속에서 무언가 경종이 울린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 서재로 향한다.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어댄다. 어느새 레이시오의 팔뚝 너머로 다양한 책과 책장이 가득. 잘 관리된 책이 풍기는 특유의 향기가 깊숙이 파고든다. 그렇게 당황한 틈, 내 등을 받치고 있던 그의 손이 위를 타고 올라와 내 뒷목에 닿는다. 그리고는 그가 하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말이.

“토론으로 귀여워해 주지.”

“재우려던 거 아니었어?”

레이시오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빤―히. 어째서인지 그가 나를 이대로 바닥에 떨어뜨려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몸을 지배한다. 아픈 건 싫어. 그의 등을 힘주어 파고들어 안았다. 그러니까 조금, 식은땀이, 나는 것 같은데?

“그런 눈치는 또 빠르군.”

“잠깐, 일단 내가 잘못했어.”

“두 번째 기회를 주자면, 어떤 점을 사과하는 것인지도 함께 말하는 게 어때.”

모른다기보다는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입 밖으로 내는 것이 정답이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동시에 정답이 아니기를 바라게 되어서.

어떤 시험지는 깨끗한 백지로 제출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지 않나. 무엇이라도 적는 순간 돌아올 평가와 진실이 두렵기 때문에.

“아니, 그러니까, 잘못했어……요.”

“안타깝게도 빵점이야.”

물론 그에게 깨끗한 답안지가 납득되는 일은 없다. 다정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그의 맞은편 의자에 내려진다.

아주 지난한 시간이 이어질 것이라는 건 잘라내어진 기억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이곳에 가만 앉아 있던 것은, 만약, 내가 떠올렸던 그 답이 정답이라면, 나는 그의 ■■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화났어?”

“맞아.”

“그래서 내가 싫어?”

“아니.”

“이상하네.”

“신기해할 것도 이상해할 것도 없어.”

“정말이지 이상하네…….”

“너는 모든 것들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단순히 내가, 너를 좋아해서.”

불 꺼진 침대 위, 모든 것이 어둠 속 어렴풋한 그의 형체가 눈앞에 가득 들어찬다. 자야지, 눈을 감으니 따스한 감촉이 볼에 닿는다.

“그러니 잘 자, 카카바샤.”

닫힌 창문 너머로부터 어떤 바람이 불어온 듯도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제는 쇠사슬도 무엇도 닿지 않은 목이 간지러웠을 리 없으니까. 그러나 역겹지 않았다. 이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만약, 내가 떠올렸던 그 답이 정답이라면.

#4.

일주일이 흘렀다.

되도 않는―적당한 일이라면 레이시오에게 조금은 먹혔던 것도 같다― 애교를 부린다거나, 괜히 옆에서 치댄다거나, 일하는 레이시오의 무릎을 베고 눕는다거나,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조른다거나, 안아 달라고 한다거나, 딱 한 번 일 때문에 외출해야 했던 레이시오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조른다거나.

레이시오는 그 모든 일들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어느 때는 더 해보라는 듯 여지를 남기기도 하고, 익숙하다는 듯 굴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나도, 그게 좋았던 것, 같은데.

――기억이 돌아온 것은 나란히 앉아 빨래를 정리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엔 순간 멈칫해 잘 개고 있던 옷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눈이 마주쳤다. 모르는 척이라도 하려 했지만 그는 짧게 스친 표정만으로도 대강 파악한 듯 한숨을 쉰다. 이제 숨기는 것은 그의 ‘재미’를 더해줄 뿐이다. 그리하여 몰아치듯 떠오른 기억에 내가 가장 처음으로 했던 것은,

“벨, 이 자식…….”

그 상어이빨 갤럭시레인저에게서 배운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혹 같은 일이 다 있나.

내가 속았다고? 진짜로?

“네가 펜고·비요스의 신자라고 해도 믿을 수 있겠어, 벨. 아마 이번 임무 출발 전에 크게 싸워서 그랬던 것 같…….”

검지와 엄지, 두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은 채 쏟아낸다. 그러나 레이시오가 말을 끊는다. 그 또한 빨래를 내려 두고선, 두 손으로 제 몸 뒤의 땅을 짚는다. 다만 그의 어조는 평온하다.

“그런 목적이 전혀 없었다고는 말하지 않겠어.”

“그렇겠지. 너무하네. 상호 존대도, 공주님 안기를 닮은 그런… 그것도 거짓말이었고, 무릎에 앉아 네 일을 방해했던 적도 없고, 나는. 애초에 우리 관계는 이런…… 무언가라기보다는 명확히 선을 지키는 쪽이었잖아.” 숨을 한 번 멈추었다가, “수치심으로 복수하겠다니. 치사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벨의 그 통제욕을 이런 식으로 발현하는 것도 나쁘…….”

“나는, 네가 좋아서.”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고작 ‘너는 내가 너를 싫어했으면 좋겠다는 것처럼 군다’는 말에 보였던 말랑한 반응이나, 함께 자자며 품을 파고들었던 것이나, 그러니까, 내가 했던 그 모든 일들이.

“나는 내 이름, 알려준 적도 없는데.”

“네 본명은 에기하조 사건 때부터 알고 있었어.”

“나는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준 것 때문에 더 믿었단 말이야.”

레이시오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곧 닿을 따스한 숨결도, 이마에 닿을 입술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기억을 되찾기 전에 몇 번이고 겪었던 일이므로. 하지만 나는 몸을 뒤로 물렸다. 기억을 잃고 이 집에 들어온 첫날보다도 더. 내가 그렇게 아직 당황을 채 숨기지 못하고 있던 때에 그는,

“나는 좋았어.”

“벨, 취미가 이상하네.”

“앞으로도 계속 그래도 돼. 나는 그편이 더 좋거든.”

“내가 정신줄 놓은 애새끼처럼 굴던 게?”

그는 단호하게, “애착 대상을 의지하는 것처럼, 이라고 정정하지. 하나 묻겠어. 그렇다면 너는 내가 보였던 태도와 정보를 왜 믿었나?”

“……네가 나를 위해 연기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그냥 네 그 모든 다정이 나를 위한 거라고 생각했거든. 너 자신을 위해 ‘그런’ 연기를 할 거라고는 어떻게 내가.”

“네가 한 가지 이유로만 판단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우리 교수님이 이렇게나 연기를 잘 할 줄도 몰랐고.”

“그리고, 또?”

나도 그냥 그게 좋아서 그렇게 믿고 싶었어. 그렇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입만 몇 번 달싹이다 내 이마를 짚는다.

그가 몸을 더 가까이 기울인다. 가까워진 거리 탓에 그가 유난히 거대해 보인다. 다만 이제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투명한 눈을 응시한다. 기억을 잃었던 때 보았던 그의 눈과 다름이 없다. 바로 1시간 전의 나처럼 순진한 생각을 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사실 그 모든 것들이 연기가 아니었다면, 하고…….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나는 너를 위했던 거다, 카카바샤.”


“재회는 마쳤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올까.”

적막한 집을 옅은 조명만이 채우고 있던 때, 그의 입이 열린다. 큰 담요를 함께 두르고 잘 데운 우유와 코코아를 홀짝이던 때이기도 했다.

음? 하며 갸웃하니 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간다. “네가 이렇게 될 것은 몰랐을 리가 없지. 일부러 기억을 잃은 채 집에 온 거잖나. 덧붙이자면 싸웠다는 이유로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장기 임무로 사라진 것도. 또 너는 나를 시험하고 싶었던 건가?”

그냥 행운이었던 거야. 일을 일찍 마쳐 다치지 않은 것도, 너와 이런 일을 겪은 것도, 그래서 우리의 보다 가까워진 관계도. 하지만,

“응.”

나는 웃었다. 네가 나를 속였으니 나도 너를 속여야 하지 않겠나. 무릇 사막의 유목민이란 은원을 잊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너라면 진리 너머의 진실을 꿰뚫어 볼지도 모른다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나도 본론으로 돌아올게. 시간이 지났다고 그때의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니까. 다시 말할게. 책은 규칙을 정해서 꽂아. 애초에 왜 내 책장에 네 책을 꽂는 건데? 게다가 벨, 네가 학자라 해서 내 전문성을 무시해도 되는 건 아니거든?”

그러니까, 평소처럼의 하루가. 그러나 보다 다정한 ■■, 즉 애정을 담아…….

쉬지 않는 입과 함께, 이번에는 내가 그를 끌어안았다.

――Quid est Veritas?

Est vir qui ad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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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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