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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없음)

[레이츄린] 별을 깎는 방법 上

리트머스 by 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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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피렌체.

어벤츄린은 탑햇을 벗어 행거에 두었다. 여기가 앞으로 내가 지낼 곳.

 

둘이 지내기엔 방이 넓지는 않았지만, 뭐 나쁘지 않았다. 석고처럼 온통 하얀 벽면이 네 개, 그중 하나엔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걸려있었다. 바닥에 깔린 큰 카펫과 어벤츄린의 작은 신발이 만나 끌리는 소리를 냈다. 손에 캔버스를 든 레이시오가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야?"

"네, 네, 가요, 주인님."

 

어벤츄린은 갈색 짐가방을 내려놓고 레이시오를 따라나섰다. 집과 대문을 연결한 하얀 디딤돌을 지나며 어벤츄린은 무심코 레이시오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ㄱ자 모양의 단정한 피렌체식 복층집이었다. 오렌지색 지붕 밑 풍판에 커다란 시계가 달려있었다. 앞뜰에서는 이름 모를 새가 잠시 머물다 삐쭉대며 날아갔다. 하늘엔 구름 한점 보이지 않았다. 바다 냄새는 없지만, 그나마 하늘만큼은 자신의 고향인 리보르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벤츄린은 잿빛으로 가득한 대장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장장이였고, 어머니는 노예 출신이었다는데, 어벤츄린은 어머니를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형제들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노예의 피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재와 함께 태어난 아이답게, 어벤츄린은 이것저것을 부수며 자라났다. 곰팡이 핀 빵, 새까맣게 탄 돌, 부스러지는 사금. 아무도 어벤츄린을 말리지 않았고, 아무도 어벤츄린과 놀아주지 않았다. 그는 혼자였다.

 

지겨워진 어벤츄린은 리보르노의 바다로 갔다. 바다는 낮에는 하늘과 별다른 차이없이 일렁이다가, 밤이 되면 무엇이든 삼켜버리는 괴물처럼 변했다. 어벤츄린은 멀리 고기잡이 배의 불빛이 바다에게 먹히는 것을 보며 대장간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침이 되면 어벤츄린은 바다에서 가져온 불가사리를 다듬기 시작했다. 좀더 완벽한 별 모양이 되었으면 했다. 또래답지 않은 거친 손으로 대장간 끌을 들고 깎고 깎고 깎다보면 불가사리는 아주아주 작아졌다.

 

하얀 불가사리에 재가 묻는 것이 싫어서, 어벤츄린은 별을 놓아주기로 했다. 그동안 깎아온 별들을 들고 바다로 가는 길이었다. 보라색 머리칼의 소년이 턱을 괴고 자신의 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너, 재능이 있구나. 나와 같이 가지 않을래?“

 

아버지를 설득하는 것은 쉬웠다. 없던 자식이 진짜 없는 자식이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었다. 자신을 레이시오라고 소개한 소년의 돈과 말, 그거면 충분했다. 레이시오는 밀라노에 있는 학교를 다니다가, 방학을 해서 바다에 왔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피렌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어벤츄린은 레이시오의 나이를 알게 되었다. 열여섯살, 동갑이었다.

 

*

 

탁자 위에 르네상스의 석고상들이 가득 쌓여있었다. 대략 열 명 남짓의 훈련생들이 붓을 들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레이시오님!"

"방해 안 할 테니 하던 거 마저들 해. 아버지는?"

"재료를 구하신다고 밀라노에 가셨습니다.“

 

레이시오는 이 공방 주인의 아들이었다.

 

어벤츄린은 훈련생들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둥글린 납작붓으로 투명한 보존제를 바르자, 창문을 닦은 것처럼 유화의 색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새로 짠 물감의 냄새, 햇볕에 마른 물감의 냄새, 보존제의 냄새가 뒤섞여서 났다.

 

가자. 레이시오는 다른 방으로 어벤츄린을 데려갔다.

 

"코를 조각할 땐 삼각형이 아니라 우선 원을 생각하고 다듬는 거야.“

 

석고상을 덮은 흰 보를 걷어내며 레이시오가 말했다. 어벤츄린은 석고상에 망치와 끌을 대고 원 모양으로 깎았다. 그런 다음 네모난 콧등을 내고 세모난 양쪽 콧볼을 만들었다.

 

"잘하네. 넌 사물보다 사람 깎는 걸 잘하는구나. 나랑 반대야.”

 

레이시오는 건축가가 될 거라고 했다. 되고싶다, 가 아닌 될 것이다, 라고 말이다.

 

밤이 되자 사용인들이 돌아왔으나, 레이시오는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자는 것이 익숙한 어벤츄린은 벽에 걸린 <별이 빛나는 밤에>를 보며 잠들었다.

 

다음날 어벤츄린이 세수를 하고 있을 때 레이시오가 돌아왔다. 전혀 피곤해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가자.”

 

그래, 하며 어벤츄린은 레이시오를 따라나섰다.

 

"레이시오.“

 

복도에 울려퍼지는 낮은 목소리가 소년들을 막아섰다.

 

"아버지."

"그 아이는 누구냐?"

"제 조수입니다.“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의 손을 꼭 잡았다.

 

"밀라노에서 들었다.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며."

"네."

"왜?"

"그곳에서 배우는 것들이 무용합니다."

"그곳에서 받을 학위는 유용하지."

"아버지."

"자퇴 신청은 취소하고 왔다. 이번 학기는 휴학을 해도 좋아. 그럼, 이만 가보마."

 

계단을 내려가는 지팡이 소리가 멀어지자, 레이시오가 어벤츄린을 잡은 손을 놓았다. 가자. 그래.

 

흰 디딤돌을 함께 건너간 소년들은 공방으로 가지 않았다. 몇 블록을 더 건너 도착한 곳은 공동묘지였다. 레이시오가 어느 무덤 앞에 꽃을 두는 걸 보고, 어벤츄린은 지난밤 혼자 보았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떠올렸다.

 

어벤츄린은 묘지를 둘러보았다. 모든 묘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어디에 계실까. 어쩌면 아무 흔적도 없이 그저 땅 속에 있을지도, 어쩌면 땅이 아닌 짐승의 가죽 속에 있을 수도 있었다.

 

"장티푸스였어.“

 

어벤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의사가 되고 싶지 않아. 건축가가 될 거야."

어벤츄린은 또 고개를 끄덕였다. 어벤츄린은 손을 내밀어 레이시오의 손을 잡아주었다.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거칠고 굳은살이 많이 박인 손이었다.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의 굳은살이 앞으로 어떤 모양으로 변화할지 궁금해졌다.

아침을 먹지 않은 두 소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두 소년은 멋쩍게 마주웃었다. 어머니의 묘에 인사를 하고 서로의 손을 잡은 채 묘지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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