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요

[레이츄린] 부디 나아가

. by 마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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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오!"

레이시오는 참았던 숨을 토하며 눈을 떴다. 멀어졌던 감각이 일시에 돌아오며 지독하게도 혼란스러웠다. 헐떡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물거리는 시야가 분명해지며 희미하게나마 정신이 돌아왔다. 뒤늦게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았고, 전신을 뒤덮은 한기와 갈비뼈의 통증 또한 자각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누워 있을까. 레이시오는 몸을 곧게 펼친 채 몸 상태를 점검했다. 상체를 세우고 싶었지만 육체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목을 가눌 수 없다. 손가락을 구부려 진흙을 긁어내는 게 전부다.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 말단부위부터 서서히 감각이 돌아왔다. 시야도 뚜렷해지고 인지도 명확해졌다. 가슴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으나 아주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레이시오!"

레이시오는 가까이서 이름을 부르는 사내를 발견했다. 밀빛 머리카락에 기이한 눈동자. 화려한 옷차림과 그보다 더 아름다운 얼굴.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일그러졌다. 너는 분명…….

쏟아지는 빗줄기에 묻힌 목소리가 선명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벤츄린."

"정신이 들었어?"

어벤츄린은 어깨를 떨어뜨렸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깊이 안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열린 입가로 빗줄기가 밀려들었다. 빗물이 기도로 넘어가며 폐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레이시오는 몸을 들썩이며 기침을 토했다. 상체가 흔들릴 때마다 견디기 어려운 통증이 밀려왔다. 결국 제 몸을 끌어안은 채 한참 숨을 가다듬어서야 가까스로 기침이 멈췄다.

레이시오는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짙은 한숨을 눌러 삼키고 사내의 상태를 살폈다.

"다친 데는 없나?"

"지금 날 걱정할 때야?"

어벤츄린은 들끓는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얼마전 스타피스 컴퍼니는 멀리 떨어진 우주에서 새로운 행성을 발견했다. 지적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 광활한 토지에는 다량의 에너지가 축적돼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발견에 들뜬 컴퍼니는 행성의 가치를 면밀히 측정하길 원했다. 지식학회는 그들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며 전략투자부와 면식이 있는 직원을 차출했다. 그게 바로 레이시오였다.

우주선은 지식학회의 일원과 전략투자부의 간부를 싣고 우주를 헤엄쳤다. 언제나 해왔던 업무였고 까다로울 것 없는 임무였다.

이상현상은 전조 없이 발생했다. 갑작스레 함선이 동력을 잃은 것이다. 기체의 커다란 구동음이 갑작스럽게 멈추자 기이한 적막이 선내를 감쌌다. 연이어 조명이 꺼지고 부유하는 몸을 보호하는 안전장치가 전부 해제되었다. 함선은 패닉에 휩싸였다. 뒤늦게 비상전력이 들어왔지만 이미 늦었다. 거대한 충격이 함선을 덮쳤고 사람들은 볼링핀처럼 튕겨 나갔다. 이후의 광경은 마치 지옥과도 같았다.

튕겨나가 벽면에 부딪친 레이시오는 표표히 함선 내를 떠돌았다. 충돌 직전에 몸을 작게 웅크려 머리를 끌어안았으나 목과 머리를 다쳐 움직일 수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이하다니.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레이시오!" 비통한 울음이 들렸다.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두운 시야 사이로 손을 뻗은 어벤츄린이 보였다. 이윽고 기억이 끊겼다.

"여긴 어디지?"

"나도 몰라. 가까운 행성으로 탈출하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끔찍한 상황에서도 레이시오를 보호하여 비상 탈출한 어벤츄린이 눈물 나도록 기특했다. 부축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주변에 떨어진 치료제가 보였다. 체내에 주입하여 망가진 장기를 수복하고 찢어진 살을 메꾸는 꿈의 약물. 내부가 전부 비어있으니 자신에게 사용한 게 분명했다. 치료제를 사용할 만큼 큰 부상이었나. 사고 직후 의식불명이었던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생존자가 있나?"

"글쎄. 천운이 따른다면 살아남았겠지."

어벤츄린은 시선을 피했다. 어깨를 움켜쥔 손이 떨렸다. 레이시오는 떨리는 손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도닥였다.

시선을 들어 올렸다.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 때문에 시야가 좁았다. 어디를 보아도 나무뿐이라 들어오는 정보가 부족했다. 길게 뻗은 줄기가 하늘을 가린 탓에 밤하늘 읽어 대략적인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어려웠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또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만 울창한 수풀을 헤쳐 무턱대고 움직이기 어려웠다.

"레이시오. 그만 정신 차리고 일어나. 비에 젖어 체온을 빼앗기면 위험할 거야. 게다가…."

"게다가 이 비가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이군."

어벤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바닥에 고인 빗줄기는 먼지를 머금은 듯 짙은 회색빛이었다. 도저히 인체에 무해하다고 볼 수 없는 색이었다. 그들은 비를 피할 장소를 찾기로 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

바닥을 짚고 두 다리에 힘을 넣었다. 악다문 잇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걷지 못해도 걸을 테니 걱정 마."

레이시오는 어벤츄린을 움켜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한쪽 팔을 사내의 어깨에 올리고 완전히 체중을 옮기고서야 겨우 한 발 뗄 수 있었다. 체격 차 때문에 무릎이 구부러져 걷기 힘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끔찍하게도 느리게 이동했다. 다리가 후들거렸고 갈비뼈가 부러진 탓에 허리 부근이 시큰거렸다. 치료제의 진통 효과가 사그라들며 전신에 섬뜩한 통증이 솟았다. 혀 아래에 고인 피가 역겨웠다. 레이시오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기어코 두 발을 내디뎠다.

안쓰러운 꼴을 보다 못한 어벤츄린이 혀를 찼다.

"이런 방식으론 안 되겠어. 벌써 해가 지고 있어"

주위가 아까보다 어두워졌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겨우 수백미터 나아갔을 뿐이었다. 부상자를 부축한 채 무른 진흙 길을 걸으니 속도가 더뎠다. 어둠이 내리면 이동이 더 어려워질 것이다. 그 전에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 했다.

결국 어벤츄린이 레이시오를 업었다. 늘어뜨린 팔이 가슴께에서 흔들렸다. 흘러내리는 몸을 추슬러 올린 어벤츄린은 단단한 걸음을 내디뎠다. 묵직한 무게를 지고 머나먼 길을 걸으며 앓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이 악물고 나아가는 모습에서 살아남겠다는 필사적인 의지가 보였다.

저보다 훨씬 작은 사내에게 업힌 레이시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가능하다면 두 발로 걷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치료제를 맞았지만 약물이 모든 걸 치료할 수는 없었다. 부러진 갈비뼈를 연결할 순 있지만 완전히 치료할 수 없고, 망가진 장기를 원래대로 수복할 수 없다. 레이시오는 체내를 불태우는 열기가 부상으로 인한 발열인지 망가진 장기에서 비롯된 통증인지 알 수 없었다.

"……시오, 레이시오!"

불안한 목소리가 레이시오를 불렀다.

반응이 없자 아예 고개를 꺾고는 레이시오의 상태를 확인했다.

레이시오는 어깨에 묻었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갑작스럽게 몸을 움직인 탓에 아찔한 두통이 밀려왔다. 두 눈을 꾹 감고 통증을 견디며 간신히 대답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으니 목소리 좀 낮춰줘."

"잠들면 안 돼. 뭐든 좋으니까 계속 말해."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다만. 무슨 말을 하라고."

"아무거나 계속 말하라고."

빌어먹을 자식. 쉽게도 말하는군.

레이시오는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연구실 책상을 장식한 화분을 떠올렸다. 얼마 전 변방의 행성에 출장 다녀오며 발견한 꽃이었다. 생명이 자랄 수 없는 메마른 모래 언덕에 소담히 피어난 꽃은 박학다식한 레이시오조차 난생처음 보는 식물이었다. 투명한 잎사귀는 낮에 햇빛을 흡수했다가 밤이 되면 눈부시게 빛났다. 건조한 바람에 흩날리며 찬란하게 빛나는 광경은 레이시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널 떠올렸던 것 같아."

투명한 꽃잎의 섬세한 생김새와 은은하게 풍기는 마른 모래 냄새. 환경이 바뀌면 금세 시드는 예민한 성정까지. 투명한 꽃잎의 찬란함은 필사적으로 살아가는 사내를 떠올리게 했다.

"…하하. 그게 뭐야."

어벤츄린이 마른 목소리로 웃었다.

수마에 몸을 맡겼으나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레이시오는 끝없이 넋두리를 이어가다가 얕은 잠이 들고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머리와 얼굴을 때리는 무거운 빗줄기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아 눈을 떴다. 어둡고 불규칙한 벽면이 보였다. 동굴이었다.

레이시오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혀 끝에서 비릿한 피 맛 대신 달큰한 과즙의 맛이 느껴졌다. 입안에서 짓뭉갠 과육 알갱이가 씹혔다. 레이시오가 정신을 잃은 사이 어벤츄린이 먹인 것 같았다. 그도 빈속을 채웠을까. 레이시오는 자리에 누운 채 눈동자를 굴려 어벤츄린을 응시했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사내는 손바닥에 무언가를 굴렸다. 손가락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건 스타피스 컴퍼니의 증표였다. 억지로 뜯어낸 듯한 실밥 붙은 상징이 어벤츄린의 손에서 장난스럽게 굴러갔다. 그러나 손장난 치는 사내의 얼굴은 침울했다.

군데군데 피로 물든 증표는 어벤츄린의 부하직원들의 것이었다. 레이시오는 그들이 어떤 죽음을 맞이했는지 모르지만, 사내가 어떤 심정으로 죽은 직원들의 증표를 뜯어냈을지 처참할 정도로 가슴 깊이 이해했다.

어벤츄린은 제 사람들을 아꼈고 위험한 상황을 앞두면 부하 대신 저 자신을 내던졌다. 자학적인 성향은 상실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더 이상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표명이었다. 그러나 다정한 마음을 지고 살아가는 사내에게 세상은 잔혹했다. 사람의 목숨을 저울에 올리기를 강요했다.

함선이 붕괴하기 직전, 어벤츄린은 부하들과 레이시오의 목숨을 저울에 올렸다. 생명에 가치 구분이 없지만 그가 속한 세상에서는 그 기준이 명확했기 때문에 더 무거운 쪽을 골라 보호했다. 어벤츄린은 저울이 기울어지는 모습을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그토록 처절한 결정을 내려 구원받은 목숨인데 자꾸만 의식이 흐려졌다. 감정이 벅차올라 호흡이 난잡해졌다.

어벤츄린이 무릎 걸음으로 다가와 레이시오의 고개를 짚고 모로 기울였다. 혈관을 살피고는 또 다시 치료제를 투여하려고 했다.

"소용없다는 거 알잖아."

사내는 조용한 얼굴로 내려보았다.

"아무리 약을 투여해도 망가진 내부를 수복할 수 없어."

"약을 맞으면 적어도 아프지는 않을 거 아냐."

"필요 없어. 너한테나 사용해. 다리 다쳤잖아."

"별거 아냐."

어벤츄린은 끝없이 핏물이 흘러내리는 다리를 시야에서 숨겼다. 너덜거리는 살점 사이로 희게 뼈가 드러났는데 통증을 내색조차 안 한다.

"어벤츄린. 이 약은 필요한 환자에게 사용해. 우리 둘 중에 누가 살아 남을지는 명확하지 않나."

"그런 말 하지 마!"

괜찮아. 우리는 함께 살아남을 테니. 어벤츄린은 자신을 설득하듯 중얼거렸다. 레이시오의 손을 맞잡고 몸을 웅크렸다. 두 눈을 감고 손을 맞잡은 모습이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것 같았다.

어벤츄린. 부디 나아가. 전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그게 서러워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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