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스텔 -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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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 女척자 설정

※ 토드 리오단의 학술 연구 5일차에서 블레이드를 만나는 이벤트 날조

남자는 서 있었다. 마치 석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석상 같았다. 할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그 속을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개척자가 알아줘야 할 이유도 없다. 그나저나 당신 최고 수배령 아니었어? 어떻게 이렇게 당당하게 나부에 서 있담. 저러다 암살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오지랖을 부렸다 그 생각을 덮었다. 그는 오히려 그것을 바랄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도 죽지 못한 채, 자신의 암살을 실패한 자를 내려다보며 검을 휘두르겠지. 쓸데없는 것을 베게 되었다며.

“……너군.”

“안녕하세요, 블레이디.”

“또 그 이름으로 부르면 검으로 대답해주지.”

농담도 못 받아주긴.

그 이후로 몇 마디 더 하자 그는 드물게 말이 많았다. 하지만 또다시 결론은 자신은 죽지 못한다는 얘기다. 개척자는 문득 지금 토드의 일생이, 블레이드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목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짭짤한 바다 냄새, 발에 스치는 모래, 저 멀리 옅게 퍼지는 오렌지 향 구름.

토드는 점점 어려지는 중이었다. 그의 이야기, 일생, 연구……. 토드는 자신을 동정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개척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긴 인생을 짧은 이야기로 듣는 마지막은 ‘고맙다’였다. 그리고 토드가 아닌 아이는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멍하니 바다만을 바라봤다. 토드는 개척자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어려진 것이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소멸까지 어려지는 것일까? 여기서 더 이상 개척자가 할 일은 없었다. 앞으로만 나아가는 열차가 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뒤로 가는 것이다. 뒤를 바라볼 수는 있지만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그게 개척이니까. 입맛이 쓰다. 쓴 발걸음을 옮겼다.

블레이드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었다. 길고 긴 애도. 토드와 제법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있었다. 신기루같이 어지러이 펴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리자 용존 석상을 바라보던 시선이 개척자에게로 옮겨졌다. 할 말이 남았냐는 눈빛이었다. 개척자는 조용히 양 팔을 펼쳐 보였다.

“안아줄까요?”

“…….”

그의 미간이 미묘하게 우그러졌다.

“포옹을 하면 따뜻하고 혼자가 아닌 것 같대요.”

“…….”

“이건 마치 세븐스의 의견.”

“…….”

“포옹을 하면 촉감으로써 물리적으로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을 받는대요. 그래서 외로움이 사라진대요. 이건 히메코 언니의 의견. 근데 좀 맞는 것 같아요. 히메코 언니를 안을 때마다 커피 향이 나는데 그게 왠지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거든요.”

“…….”

“그리고 어른이 포옹을 해주면 뇌 심박수가 안정되고, 성장이 촉진된대요. 해서 부모들은 아이를 많이 안아주는 게 좋대요. 수면의 질도 높여줘서 어린 아이들이 금방 좋은 꿈을 꾸게 해준대요. 이건 웰트 아저씨의 의견.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나이 먹은 열차 친구들을 자기 전에 다 안아주는 건 좀 그렇지 않아요?”

“…….”

“포옹이라는 건 촉각 구심성이라는 신경다발을 활성화하는데, 긍정적 신호를 입력하게 한대요. 이 결과 특정 호르몬, 신경화학 물질이 촉진되는데, 스트레스와 불안을 낮추는 호르몬인 옥시토……토 뭐시기랑 행복을 느끼게 하는 엔도르핀이 포함되어있어서 기분 좋아지는 건 당연한 거래요. 특히나 따뜻한 온도랑 닿을때, 음, 척수를 통해 뇌에 신호를 보낸다나. 특히 등쪽이. 뇌에도 심박수가 있다던데 알아요? 이건 단…….”

단항의 의견이라 말하려다 개척자는 멈칫했다.

“왜 말을 멈추지?”

“다……, 다른 누군가 유명한 사람의 말.”

다행이 블레이드는 거기서 트집 잡지 않았다. 여전히 벌리고 있는 팔이 슬슬 아파졌다. 하지만 여기서 팔을 내리면 지는 것 같았기에 여전히 개척자는 팔을 내리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는 여전히 1.2미터. 단항의 말로는 이 거리가 적당히 아는 사람과 유지하는 보통의 거리라고 했다.

“그럼 이름은 안 불러줘요? 블레이드?”

“……네 이름을 부를 일은 없다.”

“하지만 이름을 듣는 것도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진대요.”

“난 그런 거 없어.”

대화가 이어진다. 상대는 존재한다. 신기루가 아니다.

“불만 있어요?”

“……그런 거 없대도.”

“불만을 털어놓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된대요.”

“없어.”

“난 있는데.

유물 좀 잘 나와주면 안 돼요? 하, 내가 지금 당신에게 내 개척력을 얼마나 쏟아붓는데 종결이 안 났다는 게 말이 돼? 체력 세팅에 치치 줘요! 특히 에너지 충전 끈, 그거 좀 나오게 해달라고요!

그리고 솔직히 치료 해 줄 때마다 ‘부질없어(블레이드 톤)’하는 거 좀 어이없어요. 그리고 맨날 이번에 못 죽었대. 당신 죽으면 스테이지 못 깨요.”

“……네가 하는 게임 이야기인가?”

블레이드는 도무지 상대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안아줄까요, 라고 하더니 뜬금없이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어댄다. 은랑이 하는 게임 이야기인가. 그러고 보면 개척자도 게임을 좋아했던 것 같다. 허구한날 은랑이 심심하면 은하 열차로 놀러 가는 것도 이해가 될지도 모른다.

무대의 빛처럼 구름을 가르고 한 줄기의 빛이 들어온다. 빛을 따라 개척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포커페이스였다. 지금은 말이 많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고자 할 때는 한마디도 없었다. 얼굴이 보이는 이 거리에서, 딱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녀는 팔을 벌리고 있었다. 여전히도, 끈질기게도.

끝으로 갈수록 엷어지는 머리톤, 동그란 얼굴형. 멍한 듯 툴툴대는 얼굴, 빛을 받아 볼 위로 늘어지는 속눈썹의 그림자. 짭짤한 바닷바람이 흔드는 코트의 노란 끈, 팔이 저린지 미묘하게 떨리는 손끝, 파도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 조그마한 숨. 웃기지도 않게 저를 흉내 냈던 중간의 말투까지. 기분이 나쁘다. 기시감. 이 기분은 기분이 나빴다.

“진짜 불만 없어요?”

“……죽지 못하는 거.”

“음……. 고생이 많습니다?”

비꼰다고 생각했는지 블레이드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생각해봐요. 내 몸에 스텔라론이 있다는데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단 그 행성은 ‘쾅’이에요. 제 목숨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달려있다고요.”

혼자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살아있으면 그 자체로 흉성인 남자와 죽으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여자. 참으로 이상한 조합이었다. 그러고 보니 줄게 있었다.

휙하고 천 하나가 날아들었다. 개척자는 무의식중에 펼친 팔을 접고 그걸 잡고 말았다. 분명 여성용 상의인데, 작은 자수가 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시장에서 파는 물건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 직접 만든 것 같은……. 시선이 저절로 블레이드에게 향했다.

“손재주는 나쁘지 않아.”

저번에 옷을 찢었다고 보상해주는 건가보다. 고쳐준다더니 이런 의미였나. 확실히 손재주가 좋았다. 하지만 이미 은랑이 계좌에 넣어줬는데 그것도 모르고. 하지만 이런 사소한 게 기뻤다. 상대가 자신을 기억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 마음이다.

“……지금 웃은 건가?”

“음, 그랬나요?”

개척자가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리고는 받은 옷을 품에 안았다. 

드디어 내려진 팔과 몸이 뒤돌았다. 여자의 윤곽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개척자의 발소리가 작아진다. 남자의 긴 한숨. 그도 뒤돌아 다시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혼자 있게 되었다는 안도와…….

와락.

“회사 동료와는 1.2미터, 친구와는 46센티미터, 가족과는 20센티미터, 그조차도 넘어버린 0센티미터의 옥시토와 엔도르핀의 포옹. 내가 하고 싶었어요. 기분이 좀 그래서.”

개척자가 고개를 빠끔 들고 자기 할 말만 했다. 그리고 힘을 줘 블레이드의 단단한 등을 꾹 한번 안았다.

“잘 가요.”

그리고 일말의 후회도 남기지 않은 채 앞을 향해 걸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0센티미터의 포옹보다 더한 것까지 했건만.

누구보다도 유능한 암살자는 지금 블레이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아릿한 심장. 만일 내게 죽음이 있다면, 그게 너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마지막에는 네 이름을 불러주며 나도 웃을 수 있겠지. 붉은 피안화가 필 것이다. 이번엔 그 절경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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