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033

2033.12.12

전국이 대체로 맑겠습니다. 아침 최저기온은 영하 5도에서 영상 6도, 낮 최고기온은··· (2015년 12월 12일, 경향신문 "오늘의 날씨")

2차 by 사단장

2022년 07월 30일에 포스타입에 올렸던 글을 옮겼습니다.


하늘에서 하얀 눈송이가 떨어졌다.

날짜를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남자가 옥상에서 담배를 피던 그날은 12월이었다. 그의 날짜 계산이 틀리지 않았다면 말이다.

그가 몰랐던 정확한 날짜는 2033년 12월 12일이었다.

2033년의 서울에서 시의적절한 계절이란 존재하기 힘들었다.

분명히 지금은 꽃잎처럼 떨어지는 눈송이가 조금만 지나면 칼날 같은 눈보라가 될 수도 있었다.

남자는 바람이 거세져 그의 몸을 찢어버리기 전에 실내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리고 옥상으로 올라온 그의 상관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날이 추워. 그렇지 않나? 하늘은 눈발이 성성해서 말이야."

젊은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입김을 뱉으며 웃었다.

"신동현, 자네는 이런 때에 여기서 뭘 하고 있던 건가? 얼어 죽으려는 건 아닐 테고. 스스로 죽기엔 자네는 아직 젊네, 말뿐이 아니라!"

신동현이라고 불린 남자가 어설피 미소지었다.

자기보다 훨씬 젊다 못해 어린 남자에게 '죽기엔 젊다'는 소리를 듣는 게 우스워서였을지도 모른다. 또 어쩐 일로 저렇게 정복을 차려입은 건지. 자기 것도 아닌 훈장들이 기세 좋게도 달려있었다.

"그러시는 대령님은요? 저는 눈이 내리는 것을 보고 막 내려가려던 차였습니다."

대령이 씩 웃었다. 그리곤 신동현이 든,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보며 말했다.

"자네와 비슷하지. 스스로를 죽이는 일 말일세."

신동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기억하기론, 대령은 담배를 피지 않았다.

혹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건가?

하긴, 요새 초소 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병사들이 많아졌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신동현 자신이야 간부이니 괜찮다 하더라도 터널을 지키는 병사들이 교대하면서 풍기던 담배 냄새는 불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간호장교의 앓는 소리와, 오른손에 담배를 쥔 채 경례하던 병사들에게 지금 이게 뭔 지랄이냐며 고함치던 임호중의 모습이 머릿속에 선하다. 그걸 대령이 어떻게 느낄지는 신동현이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이었지만···.

하지만 그런 것을 차치하고서도, 초소 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군기를 해이해지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던가. 그러다가는 담배라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7경비단이 흐지부지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과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말이 안 되는 것이란 있을 수 없다. 마약도 돌아다니는 이런 세상에서는 특히나···.

그런 불안감에 신동현은 잠깐 눈동자를 굴렸다.

"병사들에게 경고를 하겠습니다. 또한 저도···."

"뭐?" 대령이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 신동현을 올려다봤다. "갑자기 그런 이야기가 나온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겠네만."

"담배를 피우러 오신 것 아니십니까?" 대령은 신동현이 생각한 바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은 아니었으므로, 이 한마디 물음으로 대령도 모든 맥락을 이해했을 것이다.

대령은 신동현을 빤히 쳐다보다니 와하하, 하고 웃었다. 그리곤 이야기하는 내내 뒷짐 지고 있던 양 손을 들어올렸다. 찬 바람을 맞아 붉어진 빈손이 허공에서 흔들거렸다. 담뱃갑이나 라이터 같은 것은 없었다.

"아냐, 틀렸네. 난 담배나 피우러 올라온 것이 아니야." 그렇게 말한 대령이 신동현을 지나쳐 옥상 난간으로 다가갔다.

신동현의 눈에 삐걱이는 난간이 밟혔다.

"혹여나 말씀드리는 거지만 너무 기대지 마십쇼. 아직 위험합니다."

대령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철골로 된 난간에 기대 턱을 괴었다. 가만히 서서 그런 대령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신동현은 어쩔수 없다는 듯 숨을 뱉었다. 

"세지지 않아." 뒷모습 뿐인 대령이 고개를 들었다. "눈발이 처음 내릴 때와 같이 가볍다는 걸세. 최근에 이런 적은 드물었지."

대령이 말하는 최근은 핵이 터진 이후를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웬일로요." 신동현은 아무런 감흥없이 대답했다.

바람을 타고 점점이 불어 흩어지는 눈송이와 함께, 대령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귀가 붉었다.

신동현이 옥상에 올라오기 전에도 날씨가 꽤 쌀쌀했다.

대령은 정복 차림이었다. 얇고 하얀 셔츠와 목을 죄일 듯이 당긴 넥타이, 남의 옷을 입은 듯 널널한 자켓과 그 곳곳에 달린 장식들이 간간히 잘각이는 쇳소리를 냈다. 조금 긴 바지단 아래로는 흙먼지 묻은 구두가 보였다.

군화 속 신동현의 발이 아렸다.

"대령님, 혹시 추우시면 제 옷을···."

"눈 구경하기 참 좋은 날씨이지 않나?" 억지로 힘을 준 듯한 목소리로 말한 대령에게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 구경을 하기 위해 올라왔다는 얘기인가?

아니, 대령은 고작 눈을 구경하겠답시고 이 추운 날 나올 위인이 안 되었다. 그리고 제정신이라면 저 꼴로 눈을 보러 나오진 않겠지. ···그가 제정신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분명 다른 목표가 있을 터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고 눈을 구경한 것은, 18년 전의 12월 12일이었네." 대령이 말하는 너머로 입김이 피어올랐다. "토요일 이른 아침에, 창문 너머로도 이런 눈이 내리고 있었어, 분명."

담배 연기를 닮은 입김이 잿빛 하늘에 녹아 사라진다.

"자네는 뭘 하고 있었나? 그 눈 내리던 토요일에."

18년 전의 기억은 너무 흐릿해서, 신동현은 잠시 기억을 더듬느라 헤매야 했다. 18년 전이라면, 2015년인가? 다른 건 몰라도, 그날 핵이 터졌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떠올리고 싶진 않았지만, 너무나 강렬한 탓인지 그걸 제외한 것은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였겠지. 

"잘 기억이 안 나지? 18년이나 흘렀으니 말일세." 대령이 바로 서 허리에 손을 얹는다. "나는 똑똑히 기억하네. 창문에 서린 김, 휴일의 그 고요한 아침, 서늘한 공기가 내 달아오른 얼굴에 닿아 사그라들던 것을."

신동현이 미간을 좁힌다.

"대령님."

"기다려, 내 말이 아직 안 끝났잖나?" 대령이 숨을 크게 들이쉬며 양팔을 벌린다. "그리고 또···. 기어코 이 위에서 북에서 쏘아 올린 불꽃놀이가 터지는 것을."

대령은 잠깐 머리를 식히려는 듯 말을 멈췄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건 아침이 아니었던 것도 같네만, 무슨 상관이겠나? 갑작스런 섬광에, 적막이 깨지고 사이렌을 대신해 울리던 비명 소리, 겨울이란 것이 믿기지 않도록 후끈하게 끼쳐오던 열기, 그곳에서 나는…." 대령이 다시 난간에 기댄다. "우리는…. 핵이 꼭 땅에서만 터질 거라고 생각했었지…. 착각이었어."

대령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그의 목소리가 마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듯 들렸다. 당장이라도 잡음과 함께 사라질 것같은 목소리다.

"모두의 이상이, 꿈이, 현실이, 악몽으로 바뀌던 그 순간. 그 후로는 기억이 흐릿하네. 안 그래도 심했던 내 병세가 악화되었던 것일 수도 있지. 뭐, 당연하지만, 핵이 터진 도시에서 정신과 의사로 일할 사람이 어디있겠나?" 대령이 기댄 난간이 삐깍이는 소리를 낸다. "그래도 난 거짓말을 잘했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평생 고칠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를 불량품으로 낙인찍었던 그것이 날 도왔다고 볼 수 있지."

"대령님, 기대지 마십쇼. 위험합니다." 신동현은 금세 쌓인 눈을 밟으며 다가간다. 뽀드득하며, 하얀 눈이 짓눌려 검게 물드는 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덕분에 이런 영광까지 누리니 말일세." 대령이 뒤를 돌아본다. 그에 신동현이 걸음을 멈춘다. 

신동현은 대령의 얼굴을 본다. 얼굴 너머의 대령을 본다. 문득 신동현에게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내가 항상 꿈꾸던 이 자리에, 진짜 대령에게 선택받아 내 망상의 디딤대가 생기고, 현실처럼 와닿던 별을 까치발로 따내어 거두는 영광." 대령이 양팔을 난간에 기댄다. "하하···." 경직된 웃음이 퍼졌다.

대령 너머의 하늘은 콘크리트 같은 회색빛이었지만, 높은 고층 건물이 드물었기에 탁 트여있었다. 그 공허한 빈 배경에 하얀 눈꽃이 날렸다.

신동현은 잠시 대령을 살폈다. 방금과는 다르게, 마치 당장이라도 제게 난간에 기대지 말라니, 세상 어느 부하가 상관에게 명령을 하지? 라며 꾸짖을 법한, 무거운 장난끼가 섞인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죽는 것까지 말이야." 대령이 보란듯이 난간에 기댄다.

순간 쇠끼리 스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난간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신동현이 대령의 팔을 붙잡은 것은 순간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대령은 아무 대답도 않고 그저 시원하게 웃었다.

"지금 웃음이 나오십니까?" 제기랄, 신동현은 그 말을 애써 참아냈다. 

어째서인지, 짤그랑거리는 훈장들 사이 자수로 새겨진 안수근이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신동현은 거의 옥상 바닥에 엎드린 채였다. 

"이 손 놓게. 어차피 여긴 딱히 높은 옥상도 아니지 않나. 응? 게다가 이 아래는 사람도 없어서, 떨어진다 한들 아무도 모를 거야. 발견된다고해도 그 공범이 자네라곤 아무도 생각 안 할걸세."

끌어올려진 작은 몸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조용히 침묵하던 안수근은 고개를 푹 떨구곤 떨리는 목소리로 뭐라 중얼거렸다.

"크게 말씀하십쇼, 안 들립니다."

안수근이 이러는 것은 처음이었다. 신동현으로서도 당황스러웠지만, 일단은 상황파악을 해야했다.

"춥다고 말했네. 바람이 세진 것 같아. 안 그런가? 몸이… 으슬으슬 떨리는구만 그래." 정말로 안수근은 몸을 떨고 있었지만, 바람은 안수근이 떨어지던 순간부터 멎었다. 마치 그를 데려갈 생각이 없다는 의사를 표명하듯이, 순풍도 역풍도 아닌 정체만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왜 그러신 겁니까?" 신동현이 안수근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여전히 안수근은 고개를 숙인 채로,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방금의 그 기세는 거짓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추워서인지,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신동현은 이게 정말 자신이 알던 대령님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기를 쓰며 문장을 뱉으려하는 그 모습이, 너무도 평범한 어린 청년의 모습이라서. 아니면 그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던가.

"저번에 내 직접 다녀왔지. 그렇지? 맞지?"

"네, 맞습니다."

설마 그때 그 일 때문인가?

"그때, 나에게 가짜라고, 그랬었지. 내 자네 상관 안대령이다, 해도 믿질 않았어. 만약 거기서…." 안수근이 잠시 말을 멈춘다. "그녀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었겠지. …나는 가짜니까. 안 그런가?"

신동현이 안수근을 싸늘하게 쳐다봤다.

"어느 누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이들보다 대령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으십쇼." 신동현이 안수근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저희가 저희 좋자고 이럽니까? 다 서울을 위해서, 저희 조국을 위해서 희생하는 거지요. 안 그렇습니까?"

"나는 이러고싶지 않았어. 이러고 싶은 게 아니었어. 하, 하지만… 그렇지 않나? 어쩔 수 없었던 걸세. 내 살갗에 현실과 같은 망상이 스쳐도, 그게 방사능 섞인 칼 같은 눈보라보다는 나았어."

"네, 아무렴요…." 신동현은 안수근 너머의 잿빛 하늘을 봤다. 마치 둘 외엔 그 누구도 남지 않은 것처럼 고요하고 숨통을 죄이는 듯한 하늘이었다. 방금까지 안수근이 보고있던 하늘도 이런 색이었겠지. 

"아린 것이 몸이 아니고 마음인 편이… 나는 더…" 안수근이 고개를 든다. "그때, 18년 전의 오늘, 핵이 터지고, 모든 게 뒤바뀐 순간, 김 서린 창밖엔 피가 튀었어. 분명 멀리였지만, 그건 마치 내 눈앞에서 도륙 난 것처럼, 창문을 넘어 내 눈동자에 피를 튀겼지. 자네도 그걸 느꼈나?"

그때가 왜 이제 와 떠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몇주인지 몇달인지, 하여튼간 꽤 전의 일이었다. 

안수근이 창문 가까이에 붙었다. 입에서 나온 숨결이 창문에 김을 서렸다. 그날처럼, 창밖에서 튄 피가 안수근의 눈에 비쳤다. 

그리고 18년 전보다 빠르게 번지는 피가 보였다.

뒤에서 동시에 두 발의 총성이 울렸다.

두꺼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피 냄새와 탄 내가 훅 끼쳤다. 어릴적부터 맡아온 익숙한 향이었지만, 그닥 다시 맡고 싶은 향은 아니었다.

그날처럼, 최대한 화려한 훈장을 갖춘 자켓을 만지작거렸다. 거슬리던 잘그락거리는 소리도, 마지막으로 듣게될 소리라고 생각하면 퍽 나쁘지도 않았다. 

그날처럼 말이다.

그날과 다르게 난간이 없어서, 묵직한 홀스터에 권총이 아슬하게 걸려있었다. 빠르게 꺼낼 수 있도록.

"전세가 기울었군." 안수근이 기세 좋게 입을 연다. "현대전은 보병 수십만이 죽는 것보다 지휘관 목이 따이는 게 가장 치명적이지." 그 목은 안수근 본인이 딸 것이었다.

절대, 누구에게도 넘길 수 없다. 이 막중한 임무를!

어떻게 감히 지휘관이 되어 적에게 쉽게 목을 넘겨주겠는가?

그저 지휘관으로서 해야할 일을 하는 것이니까. 그런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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