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033

마지막 인간

중사소위(아마도 cp)

2차 by 사단장

임 소위님, 아직 퇴근 안하셨습니까?”

행정실에 들어가자마자 신동현 중…? 상? 중사가 방긋 웃으며 나를 반겼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달리 밝은 낯이었다.

“아, 맞아. 임 소위님, 관사 샤워실 수도관에 문제가 생겨서 말이죠, 모레까진 샤워실 사용 금지입니다. 아까 전파 드린 것 확인하셨지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작위적인 웃음을 지었다.

“퇴근하고 샤워할 생각이 있으셨다면 부대 안에서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어째선지 속이 쓰렸다. 관사 수도관 같은 게 문제가 아니라 공급할 물이 떨어져서 단수를 했을 뿐임을, 나도 알고 그도 알았다. 이것들은 전부 그럴싸한 차림새에 불과했고, 그 속은 단단히 썩어 문드러져 있다는 걸 우리 둘은 최선을 다해 은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와, 나, 그리고 우리 옆에 얼빠진 얼굴로 앉아있는 당직 부사관을 위해서.

“저, 신동현 중…사님, 임 소위님과 말씀 나누시려면, 저는 나가있는 게……….”

당직 부사관은 누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나가기를 자처했다. 중사는 눈썹을 들어올리고 괜히 고민하듯 한 번 음, 하고 뜸을 들였다.

“그래? 그럼 이야기가 끝나면 부를테니 귀관은 잠시 밖에서 쉬고 있도록 해.”

“예, 충성.”

당직 부사관은 조금 불안한 눈빛으로 나와 그를 번갈아 본 뒤 행정실을 나갔다. 그럼에도 나는 재깍 하고싶은 말을 뱉을 수 없었다.

“아, 저, 신 중사님. 그게, 몇 주 전에 저희 소대에 있었던 작전에 대한 건데……….”

입가에는 어느새 내 의도와는 관계없이 비굴한 웃음이 지어졌다. 순간 그것을 자각하자 그런 자신이 참을 수가 없어져서, 나는 또 입술을 몇 번 씹고 웃음을 거두며 물었다.

“그거, 신 중사님 지시였습니까?”

“예, 제가 그리하라 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 망설임이 무색하게도 그는 내가 그것을 묻는 게 새삼스럽기라도 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선이, 아주 공손하게 뒷짐을 진 내 손에 가 멈췄다.

“임 소위님. 여긴 저희 둘 뿐인데 편하게 계시지……….”

마치 궁지에 몰린 쥐새끼라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 궁색한 모양새를 알아차리곤, 황급히 손에 난 땀을 바짓단에 닦으며 팔짱을 꼈다.

“본론으로 돌아가자구요. 몇 주 전의 작전, 그게 뭐가 어쨌길래 임 소위님께서 여기까지 귀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저는 그게 중대장님 지시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제 작전 후에 경과 보고차 중대장님에게 가서 물었더니, 그건 작전 전 주에 신 중사님 명령으로 급하게 계획된 것이라고………. 그리해서, 뭔가 물으려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신 중사님께… 아니, 신 중사님에게 직접……….”

내 말꼬리가 길어지는 만큼 그의 얼굴이 조금씩 찌푸려지다가, 급기야 내가 아, 그게, 그러니까, 하고 횡설수설하던 부분에서 그는 내 말을 끊고야 말았다.

“임 소위님. 1중대장은 임 소위님의 이런 말을 끝까지 들어줬다는 말입니까?”

“…죄송합니다.”

“요즘은 육사에서 말 하는 법도 안 가르치덥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대체?”

나는 대답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내 발치만 쳐다봤다. 지적받은 부끄러움보다 곧 물을 질문에 대한 답이 두려워서. 그런 내 반응을 뭐라고 생각한 건지, 그는 옅은 한숨을 폭 내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그러면 뭐라도 마시면서 하시겠습니까?”

“알고 계셨죠?”

“예?”

감사합니다, 라고 대답하려던 것에, 머릿속을 쉼없이 메우던 그 말이 불쑥 튀어나와 버렸다. 순간 헉, 하고 주춤했지만, 이제와 뱉은 말을 돌이켜 담을 수도 없었다. 나는 거의 등 떠밀리듯 고개를 치켜들고 그와 마주봤다.

“그 산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신 중사님은 이미 알고 계셨던 거 아닙니까?”

적군을 처리하라고 보내진 산에는 아무도 없이 그저 고요 뿐이었다. 그런 산에 총성을 낸 것도, 피를 흘린 것도 오로지 내 소대원들 뿐이었고, 그렇게 흘린 피는 역설적이게도 진급평가에서 꽤나 유리하게 작용했다. 죽어나간 병사들의 이름은 어느샌가 북한군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자신의 동료를 쏴죽였다는 죄책감에 헐떡일 줄 알았던 소대원들은 휴가니 식량이니 하는 것에 또 금새 어제일은 잊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의 요지는, 나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분명히 나도 그것에 동참했고, 되레 적극적으로 그러했다. 그래, 산에서는 차마 믿고싶지가 않아 그랬고, 부대에 돌아와서는 중대장의 칭찬 몇마디와 진급 운운에 홀려 그러했다. 그럼에도 나를 소대장님, 소대장님, 하며 따르던 병사들의 얼굴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중대장에게 따져물으러 갔을 때만 해도, 그럴 의도는 없었다거나, 그러는 너도 동참하지 않았느냐며 싫은 소리를 들을 것 쯤을 예상하고 갔었다. 하지만 제 잘못은 없다며 잡아떼는 말의 시작이 ‘신동현 중사님’이었을 때, 나는 직감했다. 헛된 목숨을 죽여 그 피로 진급을 하고 공적을 쌓고, 그러한 흔해빠진 이유로 부대원들의 목숨이 사용되었을 것이란 건, 형편좋은 내 착각이었을 거라고.

그런 내 추측이 기우가 아니듯, 내 질문에도 그는 뭐라 대답하는 일이 없이 별안간 하, 하고 웃음섞인 숨을 뱉곤 티백 봉지를 뜯었다.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줄곧 그런 생각을 해온 겁니까? 제가 왜 괜한 병력을 소진시키겠습니까?”

쪼르륵, 투명한 잔에 물이 가득 부어졌다. 관사는 수도관 문제인지 뭔지 핑계를 대며 단수를 해놓더니 저는 차나 타 마시고 있는 그 모양에, 더는 말이 곱게 나올래야 그럴 수 없었다.

“알고 계셨잖습니까.”

“아니라니깐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신 중사님이 그런 실수를 하실리가 없잖습니까?”

“하하, 그것 참 감사합니다만, 저도 한 명의 인간이라 실수도 하고 그럽니다. 그 작전의 실패는 전적으로 표본조사의 오류 탓이라, 제가 정보부장한테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따끔하게 한 마디 했으니 걱정 마십쇼.”

“아뇨, 신동현 중사님.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산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그리고 내 부대원들이 서로를 적군으로 오인해 사살할 것이라는 것도, 새로 들어온 신병…… 그래, 김 대위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렇게 전멸했을 거라는 것도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입이 어째선지 너무도 떫고 썼다. 나는 문득 조금 망설였다. 목구멍이 뭔가로 가득찬 듯 턱 막혀서, 나는 거의 마지막 숨이라도 뱉는 모양새로 겨우 말을 이었다.

“저와 중대장님이 그 사실을 어떻게든 숨겨 진급에 써먹을 거란 것도 아셨을 테죠.”

“으으음.”

그는 말을 늘이며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옅게 우러난 차를 내게 건넸다.

“다 알면서 왜 물어봤습니까? 제가 궁색한 변명이나 하는 꼴을 즐기고 싶었던 거라면, 안타깝네요. 예, 제가 그랬습니다. 전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러는 임 소위, 당신도 좋다고 진급평가 면접 때 그 작전을 운운했던데.”

“그 작전에 당신 이름은 없었어!”

중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작전이 성공하건 실패하건, 북한군을 몇명 사살했고 그 상으로 진급을 하고 어쩌고, 그건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잖습니까? 우리 중대장님과 무슨 약속이라도 한 겁니까? 그러지 않고서야 이 일에 있어 아무런 득실도 없는 당신이 왜! 무엇을 위해 그런 명령을!”

짝.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뺨에는 잠깐 감각이 없다가 곧이어 얼얼한 통증이 올라왔고, 나는 저도모르게 한 손으로 뺨을 감싸쥐었다.

“오냐오냐해주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어디서 언성을 높여?”

그는 한참 구겨진 얼굴로 나를 쳐다보다가,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기라도 하듯 한번 푹 숨을 내쉬곤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곤 다리를 꼬며 편하게 기대앉더니 여전히 못마땅한 낯으로 말했다.

“왜 그랬냐고? 말 해도 이해 못할 것이 뻔해 구태여 말하지 않았던 건데. 무릇 군인이라면 위에서 시키는대로 넙죽 따를 줄 알아야지, 이유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렇게 경우없이 굴 정도로? 임 소위, 내 생각보다 훨씬 재밌는 사람이었네.”

여전히 화끈한 뺨에서 애써 정신을 돌리며, 나는 겨우 똑바로 서서 그를 쳐다봤다. 그는 대답따윈 원래 안중에도 없었던 듯, 내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않고 이어 말했다.

“말해서 군말없이 납득할 수 있고, 앞으로 이딴 버르장머리없는 짓을 안 한다고 약속하면 말해주지.”

그는 또 피식 웃었다. 그렇지만 그건 나를 향한 조소라던가 비웃음이라기 보다는, 마치 어린 아이에게 하는 듯한 맑은 미소여서, 나는 또 괜스레 마른침을 삼켰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말해주십쇼, 왜 제 부대원들이 그렇게 죽었어야 했는지………. 중사님과 대령님이 하고 계시다는 뭔지 모를 작전과 관계된 겁니까?”

“작전? 1중대에는 그런 식으로 퍼졌습니까? 1중대장이랑 행보관이 그렇게 말하덥니까? 참, 나이만 먹은 늙은이들이 할 짓도 없어. 그쵸?”

그는 그렇게 말하곤 정말 재밌다는 듯 하하 웃었다. 그럼에도 경직된 분위기는 풀어지지 않고, 그도 금방 웃음기를 거두고는 이어말했다.

“임 소위님의 부대원들이 그런 거창한 데에 쓰일리가 없잖아요? 그런 벌레만도 못 한 것들……. 그냥, 청소였습니다.”

“청소 말이십니까?”

“예, 뭐, 관사도 단수됐으니 아시겠지마는 요즘 부대 사정이 여러모로 말이 아닙니다. 대령님께서도 걱정하는 눈치시고………. 요 주변 민가를 어떻게 빨아먹는 것에도 한계가 있고, 그러니… 요컨대 자가포식이라는 겁니다.”

“자가포식…?”

“아까 악쓰던 그 기세는 어디가고 계속 되묻기만 하시네. 쓸모없는 세포를 스스로 파괴해서 효율을 높힌다는 의미입니다. 역시 전쟁이 시작될 무렵에 태어난 분이라 책을 많이 안 읽으셨나, 말이 자꾸 겉돌잖습니까? 역시 그 소대원에 그 소대장……….”

그의 말이 얼른 쉽사리 이해되지 않았다. 순간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리고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믿고싶지 않아서, 아니면 그 말을 태연하게도 하는 그가 소름이 끼쳐서?

“그 말은, 7경비단의 자원이 동날 것 같으니 저희 소대원들을 희생시켰다는 뜻입니까?”

“희생? 희생이라고 말 할 정도로 가치있는 생명이었습니까, 그거?”

“신 중사님!”

순간 아차 하고 황급히 말을 멈췄다. 정말 우습게도, 그에게 대놓고 맞서고 있는 지금에 와서도 겁이 난 탓이었다. 여전히 뺨이 아렸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그는 뭐라고 따져묻거나 하는 대신 그냥 웃었다. 그러자 나도 묘한 오기가 생겨서, 괜히 더욱 따져 물었다.

“자원이 문제라면, 신병들은 왜 받았습니까? 병장들은 왜 전역시키지 않습니까?”

“신병을 안받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부대를 수소문해서 찾아올 정도의 열정을 가진 청년들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엽우회? 기술자? 그럴 바엔 차라리 받아서 썩히겠습니다. 병장들을 전역시키는 것도 비슷한 이유죠. 시키면 시키는 대로 곧잘하는 좋은 인력을 풀어서 좋을 게 뭐가 있습니까?”

“중사님에겐 병사들이 그저 적재적소에 쓰이면 쓰고, 그렇지 않으면 버리는 장기말로 보이십니까?”

“그럼 뭡니까? 수백이 넘는 이 병사들을 전부 자아를 가진 인격으로 대우하라고요? 제 줏대도 없이 시키는 일만 할 줄 알고, 그 어떤 성찰도 할 줄 모르는 것들을 인간으로 대우해줘야겠습니까?”

“그, 그럼, 생각없이 사는 이들은 인간도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걸 왜 중사님 멋대로 판단……….”

말문이 턱 막혔다. 뭇 간부들같이 전쟁 중이니 어쩔수 없다느니, 군대가 원래 그러하다느니 하는 실없는 소리가 아니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마땅히 인간인 것을, 그 인간됨에 어떤 자격이 더 필요한가? 그의 말에 따르면 나나 그나 똑같이 피차 당장에 죽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람들 아닌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얼마나 잘났다고! 당신이 내 소대원들을 사지로 몰고간 건,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당신의 무엇이 잘나서가 아니라 당신의 그 계급 때문 아냐! 당신도 어차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주제에! 당신은 죽은 내 소대원들이랑 뭔가 다른 것 같아? 병사들보다 나은 삶을 살고있는 것 같아? 어차피 당신의 노력으로 일궈낸 것도 아니고, 대령님한테 좀 잘보여서 얻어낸 그 계급-”

“어딜 대령님을 입에 올려!”

그가 순식간에 권총을 꺼내 겨눴다. 순간 너무 당황한 나머지, 홀스터에 있는 내 권총엔 손끝만 살짝 스쳤을 뿐, 나는 어찌할 바 없이 그저 가만히 서서 흔들림없는 총구를 바라봤다.

“계급 때문이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그건 귀관의 이야기 아닌가?”

그 말이 무슨 스위치라도 누른 것처럼, 그저 머리가 새하얘졌다.

“귀관은, 귀관이 장교로 진급한 것이 남들보다 특출나게 뛰어나서 그런 것으로 알고있지 않나? 저 바보같은 병사들과는 다르다, 뭐 그런 선민의식이 정말 추호도 없었나? 그래봐야 이런 세상에선 병사와 별 차이도 없는 그 다이아 하나에 집착하는 꼴이 딱 그래보이더만. 귀관이야말로 소위라는 계급이 귀관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나는 차마 뭐라 말하지 못하고, 그저 무슨 변명이라도 꺼낼 기색으로 입을 옴싹거렸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만 이유모를 모멸감과 수치심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아까 내 이야기에서 틀린 말은 하나도 없지 않나? 오히려 정론뿐이지. 나는 말하자면,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 있는 편 아닌가?”

그는 일부러 희생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그리고는 얼굴이 벌게진 채 아무말도 않는 나를 보더니 피식 웃곤 권총을 집어넣었다.

“임호중 소위. 소위는 지금 나한테 맞서면서 뭔가 옳은 일을 하고있다는 그런 착각에 빠져있지? 내가 조금만 겁줘도 깨갱하는 주제에.”

“그런………. 아닙니다! 겨우 그런 마음으로 중사님 앞에 선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정말이지 두려웠다. 신동현 중사가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어쨌건 그는 계급상으로는 늘 중사였고, 비록 내 연차가 많이 딸려도 소위 대 중사로서는 어느정도 대등하게 맞설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런 때가 아니라면 나는 상관들이나 그에게도 예의를 차리는 일이 없어, 꽤나 버릇없이 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그런 게 아니라, 그의 총이었다.

총은 부대 내에서 그리 귀한 것이 아니라 당장에 나도 지니고 있었지만, 그는 꽤 쉽게 사람을 겨눌 줄 알았다. 누구의 명령도 없이 자신의 의지만으로 타인을 겨누고 쏠 수 있다는 것은, 말과는 달리 꽤나 어려운 일임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그와 보낼 이 밤이 아주 길어질 것을 예감하고, 또 마음을 먹고 이렇게 서기까지만 몇주가 걸렸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는, 죽은 소대원들이 눈 앞에 아른거려서, 그래서 견딜 수가 없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중사님 앞에 섰는데……….”

“그럼 왜 복귀한 날 따져묻지 않았지? 분명 복귀한 그 날, 귀관은 웃고 있었어. 아주 날아갈 것처럼 굴면서 열심으로 공로를 주장하더군. 귀관과 귀관이 언급한 그 잘난 김 대위가 앞서서 적군을 처치했노라고, 멀건 낯으로 말하던 귀관의 얼굴이 아주 선해. 그런데 뭐? 소대원들이 아른거려? 우습지도 않아. 이제와서 미안한 마음에 뒤늦게나마 자신은 그런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싶어진게 아닌가? 나같은 사람을 악으로 정의내려서 맞서고 대들면, 왠지 자신은 악에 반하는 선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그가 비릿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하지만, 아니. 귀관은 그저 귀관이야. 악도 선도 아니고, 그저 비겁자일 뿐.”

그는 어째선지 그렇게 말하고는 뭔가 캥기는 것이라도 있는 양 표정이 떫어졌다.

“그래. 남을 멋대로 악이라 규정하고, 그에 반하는 본인이 정의라고 믿는 그런 조악한……….”

전에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그는 마치 억지로 쥐어짜내듯 말했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또 빙그레 웃었지만, 그런 웃음의 한켠에는 아까 그 캥기던 무언가가 여전히 가라앉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나를 따로 찾아온 것에도 이유가 있지? 남들이 모두 다 있는 데에서 방금과 같이 허튼소리를 하면 내가 아량으로 넘어가주지 않고 바로 쏴 버릴까봐, 아닌가? 정의롭고 싶은 주제에 제 목숨은 아쉬운 거지. 그런 총구 앞에서 흔들릴 마음은 정의가 아니야!”

마치 자신은 정의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있다는 투였다. 한번 기울어진 형색은 다시 어찌할 바 없었다. 나는 차마 뭐라 반박하지 못하고, 분하지도 개운하지도 않은 얼빠진 얼굴로 그를 쳐다만 보는 수밖엔 없었다.

“자, 아까처럼 어디 한 번 꼬투리 잡아 변명해보게. 귀관이 어디까지 추해질지 나도 궁금해서 말이야.”

그야, 나로서는 나름의 큰 각오를 하고 한 말이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물론 치기어린 젊은 장교의 궤변으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드니 또, 나보다 스무 살은 많아보이는, 아마 이런 서울에서는 드문 나이일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고, 그리고 그 얼굴 옆에 마치 한 짝처럼 붙어다니는 내 또래의 젊은, 그분의 얼굴이 절로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변명을 해보라는 그의 말에 그저 머리에서 떠오른 대로,

“이것들도 다 대령님을 위한 겁니까?”

“그래, 그런 셈이지. 귀관의 소대원들은, 뭐랄까, 오합지졸이었으니까. 귀관의 지휘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진 않으니 걱정 말아. 지금와 생각해보면 귀관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은 것은 내 실책이 분명하지만, 어차피 그 때의 귀관이라면 군 말 없이 찬성했겠지.”

“이건… 정의입니까?”

그에 중사는 흘끗 나를 올려다보곤 웃었다. 그 눈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맑지는 않으나 어째선지 분명한 빛으로.

“물론이지.”

거짓말.

나는 분명 아까 중사의 말대로, 전쟁 무렵에 태어나 아는 것도 많지 않지만, 대령님을 롤모델 삼아 살아오며 그분께 이러저러한 것들을 주워들었다. 그분의 말에서, 제 부대원들을 죽이는 짓이 옳은 경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도 가담했다. 나도 모른체했고, 나도 그의 말마따나 즐겼을지 모른다. 그러니 이젠 좋든 싫든 간에 그것이 정의라고 믿는 수 밖에는 없었다.

중사는 조용히 일어나, 차가 든 잔을 내게 다시 건넸다.

“다 식었네. 혹시 아까 내가 소리치고 총 겨누고 그런 것 때문에 마음 상한 건 아니죠? 그거 다 내가 임 소위님 아끼니까 그런 거지, 임 소위님 아니었으면 국물도 없었어.”

내가 잔을 받아들자 그는, 그것을 무언가의 허락이나 용서같은 걸로 여기기로 한 건지 태연스레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서로 말 가려하도록 합시다, 임 소위님.”

“예, 죄송합니다.”

방금만해도 이러저러한, 중사에 대한, 혹은 나 스스로에 대한 온갖 의문과 분노들이 가득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을 따져물을 기운조차 없었다. 그는 그런 나를 어떻게 생각한 건지, 가여이 여기는 듯한 얼굴로 한 번 웃고는 내 등을 살살 토닥였다.

“그렇게 마음이 불편합니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더는 불편하다거나 괴롭다거나 하지도 않았고, 그저 그랬구나, 하는 마음 뿐이었지만, 차마 그것을 입 밖에 낼 낯은 없었다.

“원래 소위님 나이에는 이런저런 방황도 해보고 그러는 겁니다. 그런 중요한 시기에 헛되이 시간 보내지 않고 여기서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보람찹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의 실패정도야 별 것 아니죠.”

“맞습니다.”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피했다. 그냥 피곤했다. 어서 관사로 돌아가 잠이나 자고싶었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는 밝은 얼굴로 미소지었다.

“얼른 들어가고 싶은 거죠? 가고싶다면 가도 좋아요, 피곤할텐데.”

“예, 그럼-”

그 때 갑자기, 그가 나를 덥썩 안았다. 끌어안았다기보단 뭐랄까, 제 몸으로 내 몸을 덮거나 감추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무슨……….”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콧가에는 그의 체취인지 비누와 같은 향이 머물렀다. 그에게서 차마 몸을 떨어뜨리거나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므로, 나는 그저 얌전히 그에게 몸을 맡길 수 밖에 없었다.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언성을 높히던 상대에게는 우습게도 말이다. 그리고 몇 분 전의 격정이 마치 거짓이었던 듯이, 그 포옹과 따스한 온기가 뭐라고 어쩌면 그가 내 생각보단 부드러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까, 비록 이런 때고, 이런 장소이니 그런 사상도 어쩔 수 없을 뿐, 그도 결국 한명의 어른이었고, 나로서는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라는……….

몇 초가 흘렀을까, 내게서 몸을 떨어뜨린 그의 손엔 권총 하나가 들려있었다. 절로 내 시선이 그의 홀스터로 향했지만, 내 이마를 정조준했던 그 권총은 바로 그 자리에 얌전히 있었다.

찰칵, 그가 내 권총을 장전했다.

“아까 내가 총을 겨눴을 때 홀스터에 손을 가져다 댄 것, 봤습니다. 여차하면 날 쏘려는 그런 마음가짐은 말로는 꺾을 수 없는 거겠죠. 정의니 선이니 악이니 하는 두루뭉술한 것들은 혀 끝으로 다듬을 수 있지만, 몸에 새겨진 반항심은 그럴 수 없잖습니까?”

요컨대 제 목숨이 급하다고 주인에게 이를 드러내는 개가 가당키나 하냐는 것이었다.

그가 총구를 내 얼굴에 가져다 댔다.

“자, 소위님. 아 하세요.”

입이 굳게 다물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사람이긴 개뿔, 그는 내가 가늠했던 것보다 훨씬 끔찍한 무엇이었던 것이다.

“안 쏩니다. 제가 미쳤다고 여기에서 임 소위님을 쏘겠습니까? 그냥 위아래만 제대로 하자는 거죠.”

마음만 같아서는 당장에 입을 벌리고 싶었다. 하지만 묘한 두려움이 앞서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는 살짝 웃음기가 가신 낯을 하고는 총구로 내 뺨을 꾹 눌렀다.

“같이 날 샐까요?”

나는 절로 눈을 질끈 감았다. 각오했던 것과는 다른 의미로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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