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2033

사랑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1)

중상중사와 대령

2차 by 사단장

탕-!

"안되겠습니다, 대령님. 꼼짝을 안하는데요."

"참 내⋯."

대령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는동안 동현은 문고리를 돌려봤다. 문고리는 무리없이 휙휙 잘만 돌아갔지만, 그 안의 부품 하나가 문이 열리는 걸 막고있는 듯 싶었다. 동현은 권총의 손잡이로 몇 번이고 문고리를 내리쳤다.

덜컥, 덜컥.

"괜히 힘빼지 말고 이리 오게."

"예, 대령님."

동현은 침대에 앉아있는 대령의 앞에 뒷짐을 지고 섰다.

"뭐, 그래도 납치한 것 치곤 시설은 좋지 않나?"

대령은 소풍이라도 온 듯, 조금 들뜬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침대도 있고, 수도도 나오는 데다, 저⋯ 뭐라 부르더라?"

동현의 눈이 대령의 손끝이 가리킨 곳을 향했다. 

"냉장고 말이십니까?"

"그래! 그것도 있으니, 공관보다 백배 낫군. 자네도 좀 편히 있지 그러나?"

대령이 하핫 웃었다. 늘상 그렇듯 무게라곤 하나 없는 웃음이었다.

"그렇지만⋯."

동현은 제 손목을 내려다봤다. 마지막 기억이 오후 9시. 시계의 시침은 12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3시간이 지났는지 15시간이 지났는지는 모를 노릇이었다.

어쩌면 27시간일지도 모르지.

동현은 흘끗 대령을 내려다봤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마음편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대령님께서 쉬실 동안 전 이 방을 더 돌아보겠습니다."

"이봐⋯.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가만히 앉아있던 내가 뭐가 되나, 응?"

대령이 주춤이며 일어났다. 그러고는 침대 옆에 있던 탁상 서랍을 열어봤다.

"⋯이건 스킨로션같은 건가? 그리고 담뱃갑? 처음보는 디자인인데. 당최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군."

동현이 달칵, 탁상 서랍을 닫았다. 자연히 대령이 동현을 돌아봤다. 

"나 아직 다 못봤네만."

"대령님은 가만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대령이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동현이 목적모를 샤워실 캐비넷 구석구석을 뒤적일 동안, 대령은 가만히 앉아 생각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하니까 가만히 못 있겠다.

대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돌아다녔다. 샤워실에서 쏴아아,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1초만에 그친걸로 보아, 동현이 실수로 샤워기의 물을 틀었음이 짐작갔다. 대령은 그런 동현을 무시하고 냉장고를 열어봤다.

그러고보면 냉장고라는 걸 보는 것도 거진 십여년 만인가?

이온음료, 콜라, 오렌지 주스, 생수 두 병. 대령은 그 중 생수 한 병을 집어들어 뚜껑을 땄다. 찰랑이는 물의 표면, 투명한 내부, 모로봐도 문제될 것 없어 보였다. 대령이 그것을 목 뒤로 넘겼다.

"대령님! 아무거나 드시지 마세요!"

어떻게 알았지? 안보이는 줄 알았는데⋯.

대령이 뻘쭘하게 입가를 닦으며 일어섰다. 대령은 다시 침대 근처로 돌아가, 동현이 닫아버린 탁상 서랍을 열었다. 투명한 스킨, 뜯지 않은 새 담배, 그리고⋯.

"여기 무슨 쪽지가 있네만."

"쪽지 말이십니까?"

"그래, 그래. 자네가 아까 억지로 닫았던 그 서랍에 말일세."

동현은 대령의 빈정거림에도 별달리 딴지를 걸지 않고 슬그머니 다가왔다.

"무어라고 적혀있습니까?"

"음⋯."

[사랑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이라는군."

동현이 대령의 손에서 쪽지를 휙 뺏었다.

"자네 정말 아까부터 위아래도 없이 뭐하는 겐가?"

동현은 대답없이 그 짧은 쪽지를 몇번이고 다시 읽었다. 동현의 표정이 경멸인지 경악인지 모를 감정으로 물들었다. 동현의 저런 얼굴은 또 처음보는 것이라, 대령도 덩달아 긴장했다.

"뭐⋯ 그렇게 놀랄 것있나? 사랑이라는 게 뭐 별 거라고."

대령이 어색하게 웃었다.

"따지고보면 우정도 존경도 다 사랑 아닌가. 자네, 설마 날 싫어하기라도 하나?"

그제야 동현이 아차하듯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아닙니다, 제가 뭘 착각해서⋯."

"그 짧은 쪽지에서 착각할 게 뭐 있다고?"

동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나가는지도 알았으니, 좀 편하게 있게. 자네가 자꾸 그렇게 굴면 나까지 뒤숭숭해지잖나?"

동현이 힐끗 대령을 내려다봤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 얼굴이 묘하게 질려있었다.

폐쇄공포증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 정말 피곤해질텐데⋯.

동현은 조심스레 대령의 반대쪽에 앉았다. 동현 나름, 적당한 거리를 둘 겸 사각지대 없이 방안을 볼 겸 내세운 최고의 방책이었지만, 덕분에 둘은 침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등을 맞댄 채 앉아있는 것 같이 되어버렸다.

한참이나 긴 정적이 계속되고, 마침내 대령이 입을 열었다.

"신동현이, 있잖나⋯."

"예, 대령님. 말씀하십쇼."

"사랑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이란 것 말일세. 우리 둘이 이미 서로에게 존경이나 신뢰같은, 그러니까 일종의 사랑과 같은 감정을 품고 있다면⋯. 그럼 이미 문이 열렸어야하는 게 아닌가?"

동현은 아무 대답없이 가만히 앉아서 침대보를 쥐었다.

"혹시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게 있는 건 아닌가? 뭐, 이를테면 '사랑'이라는 게, 무언가의 은유라던가."

돌겠다⋯.

동현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바라고 또 바랐는데. 동현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썼다. 

"⋯그런 건 아닐겁니다. 제 생각에는, 아마 저희가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그런 감정을 말로 표현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누가 저희를 가뒀는지는 몰라도, 저희 안에 있는 감정을 그 누군가가 속속들이 알고있지는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감정을 명료하게 말하고 나면, 그러면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어디선가 보고 있지 않을까요, 그 누군가가."

대령은 문득, 동현이 이상하리만치 말이 많아졌다는 걸 알아챘다. 하지만 대령은 그걸 지적할 만큼 짓궂은 이도 아니었으니, 그저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 뭐. 이건 좀 다른 이야기인데, 만약 나가게 된다면 저 음료 좀 챙겨가도 되나?"

"편하신대로 하십쇼."

대령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나부터 하지."

대령은 잠시 말을 골랐다. 자신이 동현에게 느끼는 감정을 문자화하기 위해서.

한참을 생각했지만, 음, 씁, 하는 소리밖엔 나지 않았다. 또 입소리, 말을 고르는 소리가 이어지고, 그렇게 몇시간같던 몇분이 지나자, 대령이 말을 시작했다.

"잘 모르겠는데."

"⋯그럼 왜 그렇게 뜸을 들이셨습니까?"

"음, 그래. 나는 자네를 매우 신뢰하고 있어. 이런 이상한 방에 있는데도 불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자네가 있으니 최소한 죽지는 않겠다 싶군. 자네라면 내 목숨도 맡길 수 있지. 우리가 벌써 십여년동안 함께하지 않았나? 이쯤되면 가족일세, 가족."

이렇게 얼렁뚱땅해도 되는 건가?

동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령을 돌아봤다. 대령은 내심 뿌듯하고 또 기대된다는 듯한 표정으로 동현을 돌아봤다.

"자, 이제 자네 차례야. 제대로 대답하게, 명령이니까."

동현은 대령의 시선을 피하며 다시 정면을 봤다.

"뭔 사내자식이 이런 걸로 부끄럼을 타고 그래?"

"저는 대령님을⋯."

말이 나오다 말고 목끝에서 멈췄다.

그래, '대령님'을. 동현은 '대령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제 등 뒤에 있는 남자가 아니라.

동현은 자연스럽게 이어 말했다.

"저는 대령님을 아주 존경해왔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존경해왔습니다. 대령님은 제 모토고 롤모델이셨으니까요. 뛰어난 행동력과 리더십이 정말 멋있었습니다. 대령님같은 군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왜 다 과거형이지."

동현이 몸을 돌려,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린 채인 대령을 마주봤다.

"그리고 대령님도요. 말마따나 이쯤되면 가족 아닙니까."

대령은 싱긋 웃었다.

문쪽에서 덜그럭, 하는 소리가 났다.

"이제 가십시다, 얼른."

"그래, 그래."

동현은 빠르게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그러는동안 대령은 냉장고 앞에 쭈그려앉았다.

"그나저나 여긴 뭔놈의 방이 냉장고는 있는데 에어컨이 없어?"

대령이 궁시렁거렸다. 그리고 동현이 문고리를 돌리자-

찰칵, 찰칵.

응?

동현이 재차 문고리를 돌렸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그리고 그제야 동현은, 덜그럭하던 소리의 진원을 발견했다.

"신동현이, 안 나가고 뭐하나? 슬 더워 죽겠구만."

"저, 대령님."

"왜?"

대령의 눈길이 동현의 눈과 손을 차례로 지나 그 손끝이 가리킨 곳으로 향했다.

문고리에 팻말이 걸려있었다.

"■■하지 않으면 못 나가는 방?"

"큰 소리로 말하지 마세요⋯."

동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동현은, 정말 영혼까지 끌어낸듯한 깊은 한숨을 쉬더니, 대령을 둔 채 침대 맡 바닥에 아무렇게나 퍼더버리고 누웠다. 그 체면도 뭣도 없는 모습에 대령은 드디어 동현이 맛이 갔음을 알았다.

갇힌지 얼마나 됐다고 투정인지, 원. 저 놈이 저렇게 재미없는 녀석이었나?

그리고 동현이 그럴 동안, 대령은 팻말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런데 ■■가 뭔가?"

동현은 이제 거의 울고싶은 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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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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