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동풍
엽우회와 7경비단
bgm: https://youtu.be/fNJqeboRD68?si=3DnSIvvUDorVQ8sN
이른바 군사적 요충지라는 것이 있다.
이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의미하고, 대부분의 군사세력은 이 지역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작금의 서울에서는 이것이 여러 세력이 걸쳐있는 N서울타워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 외에도 정수시설이 있는 지역, 자원이 풍부한 지역이 그 장소가 되기도 하는데, 가끔은 세력의 본거지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 그러한 요충지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강북구에서 활동하는 엽우회와 서대문구에서 활동하는 7경비단이 이렇게 만난 것도 그리 놀라울 일은 아니다.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닫힌다.
엽우회에서는 좀체 볼 일 없는 종류의 문이다. 그들은 이렇게 인간미라곤 느껴지지 않는 도구를 쓰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정확히 그런 이유로 이 곳이 회담장소로 쓰인 것이다. 기밀서류가 없으면서, 비밀스레 이야기를 나눌 법한 곳은 십 수년 간 사용한 적 없는 이 곳 뿐이기에, 엽우회 사람들도 이 장소엔 처음 오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7경비단은 달랐다. 그것을 사용할 이에 대한 그 어떤 감정적 배려도 느껴지지 않는 이러한 철문은, 군사시설에선 필수적이었다.
되레 엽우회가 즐겨쓰는 경찰서의 나무문이야 말로 아주아주 높으신 분, 단 한 분이 휴양을 즐기는 그런 비격식적인 장소에서나 사용되었기에 보기 드문 것이었다.
그러니 어쩌면 양쪽의 대화, 그 결론은 처음부터 예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하얗게 샌 남자와 군복을 입은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머리가 하얗게 샌 남자이자 엽우회장인 하비가 손을 내밀었으나, 그와 거의 동시에 군복을 입은 남자, 동현이 경례를 했다.
그 오묘한 어색함 속에, 하비는 멋쩍게 손을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편하게 앉으시지요, 신동현 중사."
동현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아보이시는데, 말 편하게 하십쇼."
훨씬에 들어간 강세로, 하비는 동현의 부드러운 미소 뒤에 있는 의도를 쉽게 알아챘다. 그야 하비는 동현의 말마따나 동현보다 수십년은 더 오래 살아왔고, 그렇기에 동현같이 예의없이 말하는 종자들에도 도가 텄기 때문이다.
주제에, 시시한 기싸움을 거는군……….
"그렇다면야."
또 잠시간 정적.
동현 뒤에 뒷짐을 지고 선 호중이 애먼 허공만 빤히 바라보고, 하비 뒤에 서있던 창수가 저, 하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
"본론부터 말하자면, 저희 대령님께서는 이 건에 대해 굉장히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엽우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어쩌라고' 싶은 말이다. 얼굴도 모르는 남의 집 대령의 마음따위, 알 게 뭔가?
중요한 것은 이어질 말이었다.
"대령님께서는, 엽우회 여러분의 뜻은 이해하나, 국가안보를 위해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기를 바란다며 말을 아끼셨습니다."
하비는 잠시 동현의 표정을 살폈다. 남의 말을 그대로 읊은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방금 동현이 한 말은 오롯이 동현의 의지였고, 어쩌면 바로 방금 내키는 대로 뱉은 것 같았다.
하비는 흐음, 하고 숨을 내쉬더니 톡 톡, 책상 위를 손 끝으로 두드렸다.
"그 말만 들으면 마치 우리가 못할 짓이라도 한 것 같은데…. 그 지역엔 우리 강북 주민들이 살고 있었네. 그것도 전쟁 전부터 말이야."
하비의 뒤에서 창수가 마른 침을 삼켰다.
"만약 우리가 그 멀쩡히 살고있는 주민들을 강제로 이주시켜서라도 자네들에게 그 땅을 줘야 할 이유가 있다면, 한 번 설명해 보겠나?"
동현이 빙그레 마주 웃었다.
테이블을 두고 마주앉은 둘 만이 마치 자연스러운 일상 대화나 나누는 표정이었다.
“이유라………. ‘대의’말고 더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합니까?”
“그러니까 그 대의, 우리에게도 말해주게, 응.”
동현은 한참동안 하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그 의중을 가늠하려는 낌새….
말하자면, 이 노인에게 대의를 설명해 설득시키는 것과, 준비해 온 달러 몇 상자를 쥐어주는 것 중 무엇이 빠를지를 재보는 셈으로.
그리고 동현은 슬쩍 제 뒤를 곁눈질했다. 영문 몰라보이는 얼굴의 병사와 얼빠진 얼굴의 호중.
이건 단지 엽우회를 설득하는 자리가 아니다. 동현이 설득해야할 것엔 저 바보같은 병사들 또한 포함되었다.
아아… 이래서 이런 자리가 싫은 건데. 최소한 저 쪽은 엽우회장이 말실수 한 번 했다고 분열될 리는 없잖는가?
동현이 한 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저희 7경비단은 조국의 영광과 겨레를 위해 한 몸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저희의 세력이 넓어지고 힘이 강해질 수록,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는 더 빨리 도래할 겁니다. 저희 7경비단을, 엽우회 여러분의 조국을… 믿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은근슬쩍 자기네들과 조국을 동치시키고 있군. 잠자코 서있던 창수가 티안나게 질색하며 생각했다.
“7경비단은 지금 뭘 하고 있지?”
“서울을 이렇게 만든 적과 교전 중입니다. 물론 교외와의 접촉도 꾸준히 시도중이고 말입니다.”
북한군 같은 거, 진짜로 있는 거였나, 하고 어느 한 구석이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하비는 그것보다 동현이 쓴 어휘에 주목했다.
북한군 같은 게 아냐, 적이라고 했다. 그런 두루뭉술한 어휘를 쓴 건 분명 실수가 아니리라.
7경비단의 주적이 북한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고있었다. 그렇담 그 교전의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궁금증 중 하나였는데, 용케도 밝히지 않는다. 게다가 교외라, 보통 경기도를 그런 식으로 표현하나?
“그말인 즉, 전쟁이란 것이지?”
“그렇습니다. 7경비단은 서울 유일의 국군부대로서 조국수호의 명을 받고……….”
“방금 자네가 한 말의 진의를 내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나?”
하비는, 마치 자기가 앞으로 뱉을 말을 알고선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밝게 웃었다.
“자네는 지금, 시민들은 존재도 모르던 적과 싸우기 위해 시가지를, 민간인을 착취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걸세.”
“바로 그 점이 국군의 존재 이유입니다. 시민들이 존재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위협을 뿌리뽑는 것이죠. 그리고….”
동현의 표정이 굳었다.
“조국을 위해서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국과 시민은 상호이익의 관계이니 말입니다. 여러분도 이 나라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그거야, 국가가 우리의 생명과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전제가 있을 때야 그러한 것이지. 이런 시기에, 국가가 우리에게 뭘 해준 것이 있다고?”
“조국의 의의는 그런 곳에 있지 않습니다. 조국은 국토와 목숨만을 주는 게 아닙니다. 저희는 여러분께 법과 제도, 문화와 사상을 주었습니다. 당신들이 이 땅에 태어난 이레 크건 작건 한번이라도, 그 은혜를 단 한 번이라도 입었다면…….”
동현은 나름 열심히 반박하다가 멈췄다. 하비가 지금 자신을 일부러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에.
아하, 이런식으로 궁지에 몰아서 자충수를 두길 바란 건가? 미안하지만, 나는 이 시나리오를 지난 18년동안 줄기차게 써먹어 왔으니, 이제와서 논파당할 일은 없어.
그러니 조금 더 어울려줘도 재밌을테지만… 난 오늘 부대로 얼른 복귀한 다음 대령님 저녁을 차려드려야 하는 입장이라.
“하비, 저희가 집중해야 할 건 조국이 여러분께 뭘 했는지가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조국의 승리를 위해 그 땅을 넘겨줄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죠.”
“조금 다르게 말해보면 어떻나? 이 땅을 내가, 조국이 아니라 자네들을 위해 착취하라고 넘기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라고.”
“착취라니요.”
하비의 또렷한 눈이 동현을 꿰뚫듯했다.
그래봐야 일흔먹은 노인이다, 라고 동현은 생각했다.
“하비쯤 되는 분이라면 아시지 않습니까. 20세기의 총력전이라던가, 하는 것이요. 작금의 상황이 마치 그렇죠. 참, 제 살아생전 이런 걸 다 봅디다.”
아까부터 착취니 뭐니 운운하는 것을 보면, 인의같은 헛된 가치에 집착하는 인종인가본데, 그렇다면 감상전으로 가는 수밖에 없나.
“총력전도 지금의 핵처럼, 가스니 뭐니하는 온갖 지저분한 무기로 사람을 죽이곤 했죠. 그래도, 어찌할 수 없지 않습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황이 이렇게 되어도 저희는 적에 맞서 싸우고, 살아남아서, 평화를 지켜, 이 강산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니까 말입니다. 말하자면, 투쟁이랄까요. 엽우회가 좋아하는 게 딱 그런 것 아닙니까.”
동현이 나름의 농담을 덧붙혔다.
싸운다? 살아남는다? 평화? 동현의 알 바는 아니었다. 그저 헛된 이상을 좇는 사람에게 그 헛된 가치를 쥐어주었을 뿐.
하지만 동현의 생각과는 다르게 하비는 쉽게 넘어오는 일이 없이, 그저 까슬한 턱을 매만질 뿐이었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 합당한가, 그것부터 따져봐야하지 않겠나?”
“듣다보니 조금 의아한건데, 조국을 위해 주거단지 몇 개 쯤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왜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국가에 대한 숭고한 기여를 마다하는 겁니까?”
당황한 동현이 퍼뜩 뒤를 돌아봤다. 방금의 말은 동현이 한 것이 아니었다. 동현의 뒤에서 잠자코 듣고있던 한 상병이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일 뿐.
“무슨….”
하고, 창수도 덩달아 말을 꺼내려 했지만, 하비가 손짓으로 제지했다. 나서지 않아도 괜찮네, 하는 마음으로. 아니, 나서지 말고 기다리게, 에 가까운 심정으로. 창수도 그 마음을 알아들었음에 틀림없다.
하비는 동현과 그의 대화에 끼어든 상병을 어찌하려는 생각도 없이, 그저 동현과 상병을 빤히 보고 있었다.
동현은 아까 당황해 돌아본 그대로, 상병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병은 왠지 머쓱하고 당황한 마음에,
“그러니까 제 말은-”
“누가 귀관의 생각같은 걸 물었다고? 지금 여기가 어딘지 감이 안잡히나? 귀관정도 되는 자가 끼어들어도 될 곳이 아니야, 여긴 대령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논의하는 장소란 말이다. 한마디 한마디 신중하게 해도 시원찮을 판에 귀관같은 사람한테 발언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아, 아니, 그게… 죄송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군.
동현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다시 돌아앉았다.
“죄송합니다, 하비. 이친구가 아직 많이 어려서 뭘 좀 모릅니다.”
“조국을 위해 주거단지 몇 개 쯤…이라. 서울 유일의 국군, 7경비단의 병사들이 하는 생각은 대체로 이런가?”
하하, 동현이 웃으며 보이지 않게 상병의 발을 꾹꾹 짓이겨 밟았다. 그러다가 돌연 표정을 굳히며,
“그렇지만, 하비. 가끔은 더 큰 정의와 선을 위해, 잠시간의 피해는 감수해야할 때도 있는 겁니다. 모든 순간에 모두가 만족하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슬프지만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나도 자네 나이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네. 하지만 중사, 군인이라면 한 번쯤은 모든 걸 지켜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지 않나? 모든 걸 지키면서 승리하는 방법이 정말 없는 건가?”
“하비, 저희에게 어찌 그런 마음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전쟁이란 건 그렇게 쉬운 게 아닙니다.”
왜 자꾸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 거야. 동현은 여전히 맑은 미소를 지으며, 정말 아쉬워 죽겠다는 투로 헛소리를 했다.
“사람도 아니고, 주거단지에 있는 자원과 시설을 이용해 조국의 승리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냥 주거단지가 아닐세. 그 곳의 주민들에겐 나고자란 삶의 터전이란 말이지. 자원과 시설이라고 줄여부를 수 있다고 해서, 그 가치도 줄일 수 있는 게 아냐. 그들이 피땀흘려 가꾼 토양, 평생을 지나온 길목, 그 모든 건, 주거단지라는 단어 하나에 함축되기엔 너무나 큰 가치이지. 자네들은… 전쟁이 시작될 때 젖먹이였던 이들이 태반이라,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같은 노인들에겐 말이 다르단 말일세.”
이 말에, 창수는 깊은 감명을 받았다. 왠지모를 존경심과, 또, 왠지모를 뿌듯함. 7경비단을 향해서, 이런 자랑스런 엽우회장을 둔 엽우회의 일원으로서, 창수는 옅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와는 정반대로 호중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건 창수의 표정 때문은 아니다. 창수의 그 옅은 미소는 지은 본인이나 겨우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저 호중은 생각했다. 우와, 어쩜… 단어선택 하나하나까지 신 중사의 심기에 거슬릴 만한 걸로… 하고.
호중의 걱정이 기우는 아닌 것이, 실제로 동현은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대령에게 무전을 쳐서, 역시 저, 이런 건 못해먹겠습니다, 하고 돌아가고만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이 위에도 핵을……….
후후, 동현이 웃었다. 상상만 해도 개운했다. 그리고 또 금방 그치곤, 대령을 떠올렸다.
대령같이 낯가죽이 두꺼운 사람이라면 이런 곳에서 몇시간이고 땅을 파도 괜찮았을 텐데, 나는 영 속이 쓰리군….
“예, 너무나 큰 가치입니다. 그렇지만 하비, 조국이라고 말하니 잘 와닿지 않으신듯 한데, 조국이라함은 단지 영토뿐만이 아닌, 오억이 넘는 국민들의 목숨, 그 한명 한명의 기억과 사상, 그리고 나라의 문화를 모두 통틀어 말하는 것입니다. 차마 하나하나 셀 수도 없는 작은 세계들과, 그 세계들이 쌓아온 모든 역사……. 그 모든 것에 조국에 있습니다.”
동현이 이어 말했다.
“주거단지, 그 안의 몇천…아니, 요즘같은 세상엔 몇 백도 무리겠죠. 몇십, 그래, 몇십의 추억놀이를 위해서 조국을 배반하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겁니까?”
진정 국가를 위해 싸우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이들이 계속 조국과 자신을 동치시키는 꼴을, 하비는 더이상 참아주기 어려웠다.
“첫째, 자네들이 정말 조국을 대변할 자격이 있는가. 둘째, 그래서 자네들은 국군이라는 이름대로 나라를 위해 싸우고 있는가. 만약 자네들이 정말로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있다면, 그래, 조국에 비하면 그깟 주거단지 몇 개쯤 별 거라고 내가 이러겠나?”
“하비…!”
그깟 주거단지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하지만 하비는 창수를 흘끗 올려다보곤, 고개를 슬금 저었다.
젠장, 여기에 오는 건 내가 아니라 대령이었어야 했는데. 동현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당연한 것이, 그런 증거같은 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망상과 헛소리를 겹치고 겹쳐 만들어낸 허상인데, 어떻게 증명할 수 있겠는가?
이 남자는 지금껏 동현이 말로 구워삶아왔던 여느 병사들과는 달랐다. 무언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 내에서 녹여내고 질문할 수 있는, 그래, 말하자면 옳은지 아닌지를 오직 자신의 신념에 근거해 판단 내리는…. 이런 세상에선 보기드문 사고할 줄을 아는 ‘인간’이었다.
어느새 동현은 존경심마저 들었다. 이런 세상에서 저런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건,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무리겠지….
물론 동현이 하비의 사상에 감화되었다던가 그런 것은 아니다.
동현이 하비에게 느끼는 존경심은, 이를테면 매일매일 집앞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심과 같아서, 결국은, 존경스럽긴 한데 왜 굳이 쓸데없이 저런 일을? 이상한 사람이네, 시간이 남아도나, 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었다.
게다가 동현은 그런 사람 앞에서도 태연하게, 오히려 보란듯이 꽁초를 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거야 뭐, 각하께서 안계신 지금에 와 증명하라고 하셔도 말이죠….”
동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하비의 눈가가 아주 살짝 떨렸다.
“제 공무원증, 부사관 임명식 때 사진, 아니면 대령님의 공무원증이라던가 사진, 그런 것은 드릴 수 있지만서도……….”
“아니, 자네와 자네의 사령관 말고, 작금의 7경비단이 가진 명분말이야.”
“그런걸 이런 곳에서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을리가 없잖습니까?”
“명분도 없는 군사세력이 조국을 자칭한다…라. 미안하지만 자네, 올해로 나이가 어떻게 되지?”
동현이 잠시 머뭇였다.
“올해로………. 그러니까 제가, 신미년생입니다.”
“아직 마흔도 넘기지 못한 젊은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건가, 나는.”
하비는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포옥 숨을 내쉬었다. 동현의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자네가 데리고 온 병사들도, 아무리 봐도 스물 중반을 넘긴 걸로 보이는 이들은 없군.”
“그거야, 중요한 자리이니만큼……….”
보기 좋은 젊은 애들만 데리고 온 거니까. 뭣도 모르는 높으신 분들을 끌고와봐야 미관상 좋지도 않고, 내 말에 토나 달 뿐이고. 하지만 그에반해….
“…그에 반해 엽우회쪽은, 주름없이 번듯한 청년이라곤 두 명 밖에 없고 말입니다.”
하비는 그런 동현의 쓰잘데기없는 말엔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자네들은, 명분없는 군사세력이라는 게, 시민들에게 있어 얼마나 공포의 대상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걸세.”
무슨…. 동현은 어느샌가 표정관리를 해야한다는 것도 있고, 도끼눈으로 하비를 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약자, 피해자의 입장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맞지? 보아하니 자네들, 특히 중사는 머리가 좀 큰 후로 총을 한번도 몸에서 뗀 적이 없을 것 같은데.”
동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엽우회에선 총이 꽤 귀하단 말이지. 아니, 서울 전역에서 말이지.”
하비는 슬쩍 웃었다.
“자네는 그 귀한 총을, 서울 유일의 국군 사령관의 최측근이라는 칭호를, 핵이 터진 이후로 단 한번도 놓아본 적이 없지?”
동현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갔다.
“이런 서울에서, 밝은 대낮에 홀로 걸어다니다 강도에게 걸려 객사하진 않을까, 그런 걱정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 그리고 어딘가에 걸어서 크게 잃어본 적도 없어보이고. 그러니 자신들을 믿고 가진 것을 걸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지.”
하비가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더불어 모든 걸 포기하고 은거했던 적이 있어. 그때는 그것이 도피라고 여겼지만,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때를 잘 기다린 거였지, 좋은 경험도 되었거니와……….”
“아하하, 혹시 지금까지 계속 뜸을 들이셨던 이유가, 주거단지를 걸기 두려워서…였습니까?”
“아니, 나는 자네들이 두렵지.”
동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내가 잘못된 판단을 내릴까봐도 있지만, 그것보다, 내가 신뢰했던 이들이… 그럴 가치가 없었을 때. 그때거든.”
“아하, 전에 믿었던 이에게 된통 당하신 적 있나봅니다. 하지만 저흰 국군입니다. 이 나라에서 국군을 믿지 않으면 누굴 믿으려는 셈입니까?”
“뭐, 아니라곤 안하겠지만……….”
하비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내가 아까 나이를 왜 물었는지 아나?”
이제 슬슬 논의라기보단 잡담에 가까워지는군. 역시 이렇게 나이먹은 노친네들과 대화하는 건 진이 빠진단 말이지. 동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주 웃었다.
“왜인지 궁금하군요.”
“자네는 군사정권이란 걸 겪어본 적이 없지?”
하.
당했다. 애초부터 이런 생각으로 논의에 임한건가? 그러니까 그렇게 단호했군.
처음부터 믿을 생각이 없었던 거면, 부르긴 왜 부른 거야. 그냥 소문의 7경비단이 어떤지 궁금할 뿐이었나? 우리쪽 병사들은 ‘군사정권’이라는 단어가 함의하는 바가 뭔지 전혀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이래서야 더 대화를 이어나가도……….
동현은 낯짝 두껍게도 하하 웃으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습니까? 저희는 그런 것과는 경우가 다릅니다, 하비. 저희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엄연히 헌법에 입각해서……….”
하비는 동현에 대해 뜻을 굽히거나 어떤 좋은 처사를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네의 그 대령도 그렇게 생각하나?”
“예, 물론-”
“그럼 이런 중요한 자리에, 왜 그는 나오지 않았지?”
이제 막 사반세기를 산 남자애를, 어떻게 대령이랍시고 여기까지 모셔오느냔 말이야.
“하하….”
하비는 턱을 괴며 동현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 표정, 어디선가 많이 본 표정인데.
웃고는 있지만, 흔한 즐거움도 고분고분한 굴종도 아닌 묘한 미소. 어디서 봤더라, 분명 곤란해지면 저런 표정을 짓던 남자가 또 있었는데. 아, 그래, 아마… 최우정, 그였던가?
최우정에 대한 생각은 정말이지, 잊히질 않는군….
“저어, 중사님. 대령님께서, 정 곤란해지면 지체말고 복귀하라고 하셨습… 하셨지 말입니다.”
호중이 동현의 귓가에서 속삭였다. 동현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곤란? 귀관은 내가 곤란해보이나?”
예, 누가봐도….
호중이 본 동현은, 툭 건들면 발끈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는 밖에서도 샌다. 눈치 볼 이 없는 밖에서는 더 샌다.
제발, 제발 뭔가 저지르지 말고 돌아갑시다, 이 인간아. 호중은 동현이 저지르는 일의 뒷처리를 하기도 싫었고, 앞뒤 안 재고 지멋대로 구는 동현을 말리기에도 지쳤다.
그와중, 하비는 동현의 얼굴에서 최우정을 발견하고 기분이 가라앉았다. 동시에, 창수도 동현에게서 비슷한 것을 발견했다.
“그 대령이라는 거, 있기는 한 건가? 아니면 혹시…….”
누군가의 의문제기에 쾅, 동현이 책상을 내리쳤다.
“그럼 저희가 어딘가의 공식집단도 아니고, 민간인 몇 명 모여 만든 엽우회라는 집단에 그정도 대우를 해드려야 하겠습니까? 자꾸 뭔가 증명하라고들 하시는데, 반대로 생각해보십쇼. 무장수준도 처참하고, 그럴싸한 강령도 뭣도 없는 집단에, 대화를 통한 수교를 맺으러 왔으면 오히려 감사해야하는 입장 아닙니까? 저희가 계속 엽우회, 엽우회, 하고 대우해드리니까 당신들이 맞먹는 줄 아나본데, 대령님의 넓은 도량만 아니면 금명간에 그 주거단지는 아주 탱크로-”
“아아-!! 아, 하하, 그러니까, 저희 중사님 말씀은…. 그러니까…….”
“저희는 지금 국가의 명령을 받은 입장으로서, 국가의 승인을 받은 무장단체도 아닌 주제에 무기를 들고 국가의 토지에 소유권을 주장하는 뒷방 어르신들을 말로 달래려 여기에 온 거란 말입니다. 당장 지금도, 이 앞에서 무기를 수거하니 뭐니 꼴값만 안 떨었어도 내가-”
“중사님, 저희 이제 슬슬 복귀하는게 어떻습니까? 그러고보니 대령님께서-”
“임호중 소위! 뭐합니까, 지금! 어딜 버르장머리없이 남의 말허리를 끊어먹어!”
“자네야말로 지금 어디에서 언성을 높힌다고 생각하는 건가?”
동현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하비의 올곧은 눈과 마주봤다.
뭐라고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동현은, 자신이 무시해왔던 바로 그 눈에 의해 전의를 상실했다.
이놈도 저놈도, 다 자기가 정의인양 굴고 말이야……….
짜증나게….
동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인지 수치인지, 본인은 분노라고 확신할, 그 묘하게 안달나는 듯한 감정을 느끼며, 동현은 고개를 홱 돌렸다.
“됐어, 이제 부대로 복귀한다. 임호중 소위, 보급팀은 제대로 도착했습니까? 뭐가 얼마 온댔지?”
“예? 아니, 그게, 그걸 왜 이들 앞에서 물으십니까? 그러니까, 예……. 10분 전에 이미 도착해서 대기중이고, 보급받은 것은 K2소총과 탄환 뿐입-”
“복귀하면 그거, 제일먼저 임 소위 머리에 박아넣을 준비하십쇼.”
두꺼운 철문, 7경비단과 엽우회의 본질적 차이를 보여주는 그 문을, 동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나갔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은 나름의 열을 갖춰 차례차례 나갔고, 마지막으로 호중 만이 멋쩍은 표정으로 살짝의 목례를 하고 나갔을 뿐으로, 엽우회는 그동안 그 어떤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은채 그 비겁한 후퇴를 지켜봤다.
어느새 긴장이 풀린 엽우회도 하나둘씩 해산했고, 결국 지하실엔 하비와 창수만이 남았다.
“하비, 괜찮겠습니까? 어떻게 하지 않으면……….”
창수가 조용히, 몇 분 전까지 동현이 앉아있던 자리에 앉았다.
“난 오히려 엽우회의 근간이 위태하던 이런 때에 찾아와준 저 손님이 고마운데.”
“금방이라도 처들어올 기세 아닙니까.”
“글쎄…….”
하비가 싱긋 미소 지었다.
“본인들의 사상과 행동의 의미가 뭔지도 모르는, 저 불쌍한 친구들이 그정도 결단력을 지녔으리라고 보긴 어렵군.”
“하지만……….”
창수가 말 끝을 흐렸다. 그러자 하비는, 창수의 그 확신없는 무언가를 바로 잡아주기 위해, 조금 더 굳센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 싸워야 할 날이 온다면, 그 땐 아마 우리가 처들어가는 쪽일 걸세.”
하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창수도 얼결에 일어나 하비의 곁에 섰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에 하비는, 잠시 자신의 생각을 뭐라 표현해야할지 고민하다가, 마침내 말했다.
“뭐, 그야 당연한 걸세.”
하비가 방의 내부를 돌아봤다. 사방이 마감이 덜 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그리고 그 백미로 곧 꺼질 듯한 백열등이 불타는 이 방….
“불의는 정의를 외면하고 무시함으로써 살아남지만, 정의는 불의를 절대 외면할 수 없는 법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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