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십이국기AU


-너는, 살고싶단 생각을 안하는 것 같아.

의외의 말에, 마나난은 눈을 깜빡였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시선은 상대방의 얼굴을 훑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이 굉장히 희미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물을 탄 우유마냥 희끄무레하단 말이 어울렸다. 누구였더라. 마나난은 무심코 얼굴을 찌푸렸다. 가뜩이나 지는 해를 등 뒤에 짊어진 발화자의 표정은 명백하게 읽히지 않았다. 가까이 있으나 굉장히 멀리 위치한것같은 묘한 공간감이 느껴졌다. 마치 바다에 드리워진 희뿌연 해무마냥 아득했다.

겨울 특유의 싸한 볕이, 노을진 채로 교실에 쏟아졌다. 눈이 세상의 시간에 겨우 적응한듯, 점차 그 애가 눈에 들어왔다. 옆 반의 사토였던가. 마나난은 사람을 인식하는데에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다. 마나난은 때때로 자신의 시야와 인식 사이에 시차가 난다고 느꼈다. 희미했던 인식은 몇 초, 혹은 수 분 후에 명확해지곤 했다. 이 세계는 그에게만 반박자 느린 리듬으로 오곤 했다. 이런 ‘차이’를 타인에게 이해받고 싶단 생각은 없었다. 다만 마치 물 속에서 살아야할 존재를 뭍으로 끌고와, 어색한 세계의 법칙을 강요하고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 하기야?”

마나난은 겨우 대꾸했다. 눈 앞에 있는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해석하기가 어려웠다. 고정되지 않은 채 유리되어있는 수면처럼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열 길이 넘는 물길 속이었다면 되려 편했을지도 모른다. 마나난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지 생각했지만 영 신통한 것이 없었다. 말 그대로야. 넌 살고싶다는 생각을 안하는 것 같아. 이질적인 목소리를 들으면서 마나난은 애써 웃었다.

웃음으로 상황을 모면하려 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었지만, 막상 ‘곤란한 상황’이 올때마다 웃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마나난에게 유독 심하게 ‘기대’하곤 했다. 어딘가 세상에서 동떨어진 것 같은 아이가 저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기억해주길 바랐고, 자신이 그의 닻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한 듯 굴었다. 슬슬 해 지겠다. 집에 같이 갈래? 마나난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눈 앞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또 올게 왔구나. 마나난은 의자에 앉은 채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능청스레 넘기는 것이 실패했으니 그 다음엔 자연스러운 ‘논파’만이 남았다. 내가 죽고싶은 것 같아? 라고 묻자 상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틈 새로 마나난은 그 애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 애의 동공은 확장되어있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렸다. 갑작스런 질문에 시선을 어디 둬야할지 모르고 있었다. 게다가 눈썹이 일그러져있고 미간이 한껏 좁혀져있음으로 이는 여태까지의 데이터에 의하면 '당혹감'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그 해프닝같은 말은 평소 생각하고 있던 것을 예상하지 못한 채 내뱉었던 것 같았다. 마나난은 작게 웃었다. 상대가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으응, 사토. 우리가 싸우려고 한 말은 아니잖아- 그치이? 라고 말하며 그저 입술을 당겨 미소지었다. 달래는듯한 미소였다. 겨울의 해는 유독 빠르게 진다. 벌써 방금 전보다 어두워진 교실의 풍경을 눈에 담으며, 마나난은 제 앞의 학우에게 애써 웃어보였다. 이런 대치는 무의미하다는 듯 두 손바닥을 보여주면서 결백하다는 듯 팔을 올렸다.

장난스럽게 넘어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의 손을 잡아 교실 밖으로 끌었지만 손이 뿌리쳐졌다. 학우의 표정은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최초는 실수였지만, 점차 확신과 결심으로 보였다.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모양인지 어깨모양이 단단하게 굳었다. 뭐 그리 대단한 결심을 했을까. 마나난은 그저 곤란한듯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어물쩡거리며넘어가기 어려워보였다. 이 세계는 이게 문제였다. 멋대로 기대하고 멋대로 실망한다. 멋대로 좋아하고 멋대로 지쳐버린다.

인간을 인식하는데에 시차가 난다는 것을 믿어주지도 않는 주제에, 상황에 대한 변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마나난은 ‘타인’을 응시했다. 껄끄러운 기분이었다. 이런 종류의 사람에게 마나난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겠지만, 마나난은 열여덟을 갓 넘긴 지금 이런 사람을 수두룩하게 많이 봐 왔다. 멋대로 기대하고 친해졌다가 ‘시차’를 인식한다는 걸 알면 서운해해서 견딜 수 없어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마나난은 이 세계가 제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공상을 하곤 했다.


“너는 있을 곳을 만들지 않아.”


아무래도 사람이 비버는 아니니까. 마나난은 생각을 입으로 꺼내지 않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 모습을 '그 상황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으로 선해해줬는지 상대방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항상 바다에 나가는 것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싶어 그는 그저 엄지손톱을 검지의 아랫면으로 쓰다듬으면서 애매하게 웃어보일 뿐이었다. 저를 탓하는 말은 계속 이어졌다. 레파토리는 비슷했다. 결국 자신의 옆에 타인의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는게 서운한 거였다. 미안해. 마나난은 익숙한 듯 사과했다. 하지만 질책은 끝나지 않았다.

마나난, 너는 나랑 싸운다고 해도 결국 바다로 나가서 그 곳을 응시하다보면 마음이 풀리겠지. 다음 날 나는 네게 이런 말을 한 일을 미안해 하겠지만 너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인사를 하고, 이런 말이 관계를 흔들거라고 생각해서 맘졸이던 사람을 우습게 만들거야.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건 애초에 기대한게 없단 뜻이잖아. 고작 바다에서 파도가 밀려오는 모습이 뭐라도 된다고 같이 오랜시간 부대끼고 사는 삶보다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거야…

말을 이어갈수록 남는 것은 여백같이 막연한 막막함일 뿐인지 눈 앞의 상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정수리의 가마 모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무심코 물었다. 눈 앞의 사람이 슬퍼하는 것만을 인식한 채 기계적으로 쏟아지는 행동이었다. 그런 값싼 친애 필요없어. 상대방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싸늘했다. 네가 그럴 수록 더욱 비참해지는 것을 알고 있냐는 목소리에선 날이 서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하나도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혼나고 있었다. 마나난은 학습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인식하고 기억하는데 누구보다도 많은 시간을 써야하는 소년은 애매하다는 듯 제 엄지손톱 옆에 난 거스러미를 검지로 지그시 눌렀다.

힘이 빠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나난, 너와 나는 같은 사람인데도 종이 다른 것 같아. 사람의 신호체계나 비언어적인 해석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는걸까. 이 또한 자신이 대답할 수 없는 말이기에 마나난은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달래는 듯한 모습에 사토는 소리내어 흐느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흐리멍텅했고, 그의 표정을 읽기 위해서는 많은 집중이 필요했으며- 그와의 관계는 성기게 엮어 금방 풀리게 되는 매듭과도 같이 느껴졌다. 차라리 내가 이세계에서 왔다면 좋았을 것 같지. 마나난은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혀 안에서 굴리면서 연신 미안하다 사과했다.

여전히 주파수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비참하였다. 차라리 미워할 수 있는 이유라도 만들어주면 좋으련만. 상대방의 어깨를 연신 도닥여주며, 마나난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겨울의 해는 빨리 지고, 광원이 거의 없어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바다로 걸어들어가 머리까지 잠겨 폐마저 물에 채운다면, 원하는 세상으로 갈 수 있을까. 여전히 공상이 이어졌다. 마음 속을 깊게 짓누르는 돌덩이같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나쁜 사람이 되기에는 착하고, 착한 사람이 되기에는 무심했다. 마나난은 여전히 바다를 꿈꾼 채, 눈 앞의 이를 위로했다. 애매하게 끼인 각 같았다.




'이전 세계'에 있었을 때의 꿈을 꾸었다. 어지러운 호흡을 갈무리하려고 노력했다. 협탁에 손을 뻗어 잔을 집었다. 안에 든 차는 식어있었지만 맘을 다스리는 데는 탁월하였다. 그는 점잖게 움직이려 노력했다. 차게 식은 잔은 딱딱하게 굳은 손 끝을 녹여주진 못했다.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숨을 고르려고 부러 숨을 참았다. 잠수를 하는 요령을 생각하면서 숨을 내쉬었다. 마나난은 머리를 쓸어올렸다. 잠들긴 그른 것 같았다.

이전 세계에서 마나난은 언제나 붕 뜬 애였다. 하지만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가 애정으로 닻을 내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낙관적인 생각이었지만 그리 맞는 말은 아니었다. 받은 애정을 모르는 건 아니라, 나름대로 노력을 한다고 하는데도 사람들은 그에게 쉽게 지쳤다. 아마도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에 대한 방어기재가 있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다른 세계 사람이 그 세계에 적응을 못 한다는 억지력이 있던가.

휑하게 느껴지는 침실 안을 서성이듯 배회하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벽 하나 너머에는 태보가 있을 터였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모든 자신을 다 아는 이였다. 어리광을 부리듯 걸음을 옮기고 천천히 장지문을 옆으로 밀었다. 방에 발을 들이민 순간 그는 자신이 왔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특별히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은 마나난이 아직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아르, 애칭을 입에 담으며 마나난은 그의 침대에 걸터앉았다. 갈기가 보이지 않으니, 오늘은 ‘사람’의 태로 잠들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애써 어둠을 더듬어 그의 머리께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손을 뻗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곧장 마주잡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밤이 늦었음을 타일렀다. 괜히 간질거린다고 생각했다. 마나난은 피식 웃었다. 편안한 항상성에 맘이 놓였다. 손 끝이 차다고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있잖아, 아르. 나- 별로 안좋은 꿈을 꿔버렸네에- 마나난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의 태보는 곧바로 이불을 열어 마나난이 들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넓은 침대와 너른 품을 바라보다가 그의 옆에 누웠다. 이리 달게 굴어주는데 어리광을 부리게 되는 일은 당연하다 느끼며 마나난은 그의 품 안을 파고들었다.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긴장에 서늘해진 마나난을 부드럽게 끌어안아주며 그는 악몽에 대해 질문했다. 감출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뒤로 숨기고 싶었다. 이전 세상의 일을 그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왕의 결점을 말로 정제해 내놓기 싫었거니와, 달콤한 체온만큼 약함이 버릇이 될 것 같았다.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웃었다. 평소 잘 자는 주상을 일으켜 세울 정도로 독한 악몽이었던 모양인데, 이는 제게도 말하실 수 없는 비밀입니까?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이어졌다. 마나난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품에 볼을 부볐다. 따뜻한 체온이 빠듯하게 끌어안아 오는 느낌이 좋았다.

주상, 하고 속삭이며 들린 목소리에 마나난은 무심코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 말해주고 싶진 않았다. 이 세계는 기린이 선택한 왕은 반드시 왕이 될 사람이며 기린에게 선택된 자가 옥좌에 앉는것이 천명인 세계다. 자신의 기린이 선택한 왕이니 틀리지 않았을 텐데, 실망할 구석이 많으면 안될 것 같았다. 교태를 부리듯 그의 뺨에 입술을 부비며, 별일이 아니라 말했다. 주상- 하고 호칭의 끝을 길게 늘이며 부르는 말소리는 저를 꼭 타이르는 것처럼 들려왔다. 마나난은 으응- 하는 애매한 대답을 흐르듯 남기며 그의 가슴께에 이마를 댄 체 그의 체온을 탐하며 눈을 감을 뿐이었다.

"재워줘"


꿈자리가 사나웠어. 괜히 그리 말하면서 웃었다. 몇 마디 더 타이르려 하다가 그만 두었는지 어린아이를 얼르는 것처럼 등을 토닥여오는 손길이 있었다. 아르, 너는 나한테 이길 생각이 없구나. 이미 알고있는 사실을 방금 안 것처럼 새삼스레 속삭이자 이길 이유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품에 갇혀서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비밀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마나난은 꿈 속에서 느꼈던 시차를 떠올렸다. 이 세계에서는 한번도 느끼지 못한 일이었다. 마치 제자리를 찾은 듯 그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었으며 저를 아끼는 이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이게 ‘맞는 일’일텐데도 청소년기에 겪었던 일은 때론 그림자처럼 혹은 파도처럼 그의 발목을 잡을 때가 있었다. 마나난은 숨을 들이켰다. 태보의 체향이 깊게 느껴졌다.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을 아느냐 질문했다. 괜한 물음인데도 태보는 성실하게 대답을 내어놓았다. 마나난은 이 순간이 참 좋았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웃음을 그는 다르게 생각했던 모양인지 잠들 생각이 없으시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마나난은 손을 뻗어 그의 어깨에 둘렀다. 더 깊게 밀착하며 그의 체온을 뺏었다. 움직일 때 마다 비단 이불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잠들 생각은 있다 뭐- 하고 말 끝을 길게 늘이면서 마나난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체온은 여즉 이어져 있었다. 놓지 않아도 도망가지 않으리란 확신이 있는 존재는 꼭 닻처럼 느껴졌다. 풍랑에 흔들리고 파도에 출렁여도 아르만 있다면 이 세상에 남아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나난에게 있어 그런 확신은 소중한 일이었다. 허리에 다리를 올려서 깊게 안아줘. 전혀 졸리지 않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태보는 마나난이 말한 대로 하면서도 ‘이러다가 내일 회의 때 졸게 된다’는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 그럼 아르 네가 깨워줄 거잖아. 마나난은 괜히 그의 벌려진 앞섶에 입을 맞추었다. 깜짝 놀랐는지 세게 끌어안아오는 양 팔의 압력을 느끼면서 마나난은 부드럽게 웃었다.


“있잖아.”

괜히 운을 땠다. 하지만 가볍게 운을 뗀것과 다르게 입이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보통 인간’ 같은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말하기에도 뜬금없었다. 이전 세계의 나는 가끔씩 바다 안으로 스스로 걸어들어가 풍랑에 휩쓸리고 파도를 삼켜 아무것도 아닌게 되고 싶었다고 내뱉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시차’가 났다는 것을 잊고 살았던 것처럼, 지금 이 세계에서는 한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었다. 자신조차 멀게만 느껴지는 부분을 구태여 내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다가 마나난은 입술로 그의 가슴과, 쇄골. 목선을 더듬었다. 마른 키스가 이어질 때 마다 그의 체온이 올라간 것 같단 착각이 들었다.

말할 생각도 없이 운을 땐 주제에, 그에게 뭔가 말을 해야한단 생각만은 건재했다. 마나난은 그의 딱딱한 볼에 입술을 콕, 찍어 누르다가 다시 그의 팔을 고쳐 베고 누웠다. 여전히 포옹은 이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그에게 안겨 잠들고만 싶었다. 뭐가 있습니까, 라고 돌아오는 목소리가 있었다.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기 뭐해 마나난은 음- 하고 운을 땠다. 얇은 창호지 너머로 들려오는 파도소리를 들어도 이제는 외롭지 않은데 이를 내어놓아야 하는 걸까. 마나난은 여즉 고민이 끝나지 않은 문제에서는 잠시 도망치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의 어깨 너머로 두른 손으로, 그의 뒷목을 간질이듯 쓰다듬다가

“그냥, 네가 좋아.”

같은 애매한 대답을 내어놓으며 웃었다. 이 말은 명백한 사실이었고 한톨의 거짓도 없는 말이었지만,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캥기는 기분이었다. 사죄 대신 그를 깊게 끌어안았다. 여전히 그의 체향을 호흡과 함께 들이마시고 따듯한 체온을 나누어 가졌다. 한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밤이었다. 눈을 감을 때 마다 밤은 눈꺼풀에 켜켜이 쌓였고, 네가 좋아. 라는 말을 연신 입에 올렸다. 목소리가 멈출 때 마다 마나난은 이름도 가물한 그 애를 떠올렸다. 있을 곳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다가 곧 잊었다. 이미 그의 옆이 제 있을 곳이었고, 자신이 정한 자리였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일에 이유가 있다면 제 이유는 반드시 아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며 마나난은 숨을 내뱉었다. 주파수는 같게 이어지고 그는 더 이상 사람과 있을 때 바다를 꿈꾸지 않았다. 빠듯하고 깊고, 다정하게 닿고 싶었다. 저를 세상애 매어놓는 닻에게 기대며 그는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사랑해. 좋아해보다 더 좋아해. 목소리의 끝 부분 마다 졸음이 가득 담겨 있는 것 빼고는 썩 나쁘지 않은 사랑고백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외롭지 않은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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