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을 몰아내는 방법
바질 화분을 샀다. 뭐에 쓰는지도 모르면서.
작은 밥공기 같은 화분에 새싹 한 톨이 돋아 있었다. ‘이런 날씨에는 과습에 주의해야 한다’는 말을 어떤 방식으로 지켜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마나난은 화분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나름대로 성의있게 들고 제 자취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봄이라지만 비가 계속 내렸고, 멋을 내서 신은 신발에는 자잘한 흙들이 묻어 있었다. 베란다가 있는 주제에 집값이 싸단 이유로 계약한 자취방 근처가 내내 비포장도로인 탓이었다.
코트 주머니 속을 더듬느라 작은 투명우산을 턱과 어깨 사이에 끼고 있었다. 투명우산의 경사면을 타고 빗물이 흘러내렸다. 이마나 머리에 묻은 빗방울이 묘하게 찝찝했다. 우산을 고쳐 들었다. 열쇠를 꽂을 때까지 손이 유난히 헛돌았다. 낡은 문은 열 때 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음엔 꼭 기름칠을 해야겠어, 라고 혼잣말을 했다. 아무도 없는 집은 묘한 적막을 품고 있어, 마나난은 무심코 집 안의 허공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아, 빨래. 그는 물 묻은 세탁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묘하게 쳐져있는 건조대 쪽으로 서둘러 다가갔다. 간 김에 바질 화분을 베란다에 놓아두었다. 베란다의 나무 데크는 파삭 젖어있었고, 제때 걷지 못한 빨래들이 다시 세탁기 속으로 구겨진 채 들어갔다. 어쩐지 오늘은 제대로 되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마나난은 괜히 어깨나 으쓱이고선 작은 화분에 겨우 돋아난 것처럼 보이는 새싹을 응시하다가 뒤를 돌았다.
치워야 할 것들이 참 많았다. 서둘러 집안의 불을 켰다. 그는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가지들을 세탁바구니에 넣었고, 뜯지 않았던 택배를 정리했다. 마침 분리수거를 내놓는 날이라 서둘렀고, 빈 거치대에 종량제 봉투를 넣어 곱게 폈다. 비질을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마른걸레로 방 안 먼지들을 훔쳤다. 할까말까 고민하다가 스팀 청소기의 코드를 연결했다.
집안일에 손을 댔던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질 생각하려 했지만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요새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이었다. 벚꽃은 아직 피지 않았건만 과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집 정리도 정리거니와, 벌써 이 주씩이나 바다에 가질 못했다. 프리다이빙이든 스쿠버다이빙이든 요트를 몰든 서핑을 하던, 일단 파도치는 해안가로 장비나 바리바리 싸들고 나가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뭍에 메여있을 뿐이었다.
대학에 가면 자유로워질 것이란 막연한 생각이 허상이었었음을 절절히 느끼며 마나난은 스팀 청소기로 걸레질을 마무리했다. 좋은 향이 나는 디퓨저의 스틱을 괜히 검지로 톡톡 건드리다가, 냉장고 쪽을 응시했다. 분명 며칠 못 들어왔으니 저걸 정리해야만 하는데도 영 손이 가질 않았다. 남긴 반찬이 있었던가 조차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쁜 버릇이란 걸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고칠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왤까. 마나난은 난처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소파에 눕고, 마지막으로 먹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학교에 늦게까지 남아있으면서 들이킨 건 술이고, 카페인이자, 각종 액상과당이었다. 나란 인간은 발전이 없구나.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소파의 팔걸이 너머로 빠져나간 발을 까딱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핸드폰의 액정을 톡톡 건드리다가 배에 올리고 그만 두었다. 지금 시간이라면 그 애는 수업을 듣고 있을 터였다. 괜히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며 그는 헛헛한 허공을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질 화분이 물에 젖고 있었다. ‘과습에 유의하라는 말’은 ‘물을 많이 주지 말라는 말’과 같다는 걸 방금 깨달았다. 뭔 이런 초보적인 실수를 했담? 마나난은 성큼성큼 걸어 바질 화분을 집 안으로 옮겼다. 집이 건조하면 푹 젖은 흙도 마를까 싶었지만 이미 새싹은 내린 비가 무거워 머리를 숙인 채로 처음보다 움푹하게 파인 흙에 담담하게 들어 있었다. 그는 바질 이파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잘 자라려나, 자라지 않으려나. 당장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바질 새싹의 미래를 헤아리다가, 그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그의 장점은 생각이 많지 않단 점이었지만, 비 오는 날의 상념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습기를 틀고, 창밖 너머로 톡 톡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었다. 혼자 있는 집은 유난히 소리의 밀도가 적었다. 처리하지 못한 것들을 품고 있는 냉장고가 윙윙대는 소리가 최대의 소음이었다. 눈을 감으면 스르르 잠들어버릴 듯한 적막이 그림자처럼 짙었다.
같이 있을 때는 하나도 눈치채지 못했는데, 혼자 있을 때만 적막도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몸집을 키운 검고 거대한 그림자를 상상하다가 마나난은 피식 웃었다. 얼마 전까지 학교에서 그 애랑 같이 있었기 때문에 더 그리운 거라고 생각했다. 시장을 지나다가 어울리지도 않는 화분을 사올 정도로 보고싶었던 모양이었다. 화분 한 개 분의 그리움이었을지도 모른다. 봄 비 내리는 계절 속의 그 애는 꼭 소담스런 목련꽃 같았다. 그래서 눈을 감아도 내내 생각이 났다.
별일이 없어도 말을 붙일 수 있는 사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이유를 붙여 옆에 두고 싶었다. 바쁜 시간 사이의 짤막한 휴식마저도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칫 어린애 투정처럼 느껴지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냉장고 핑계로 말을 거는 거나, 화분 핑계로 말을 거는 거나. 보고 싶다고 한다던가, 같이 바다에 가고 싶다고 한다던가. 정제되지 않은 여러 말들이 상념처럼 문득 튀었다가 스물스물 사라지거나 했다. 차라리 요리를 할 줄 안다면 좋았을 걸. 마나난은 냉장고 쪽을 응시하다가 다시 소파에 누웠다.
포토푀를 끓일 줄 알았다면 날씨를 핑계로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받은 봄나물을 어떻게 할 줄 알았다면야, 그에게 솥밥을 지어줄 수도 있었을 거다. 곱창김을 김발에 길게 펴서 향이 짙은 냉이를 넣어 돌돌 만 다음에 그를 꼬여냈을지도 모르지. 마나난은 그가 해줬던 것들을 하나하나 곱씹듯 반추했다. 허기가 질수록 그가 보고 싶은 것은 버릇일지, 아니면 사랑일지 무 자르듯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고 느끼면서도 그냥 보고 싶었다. 이미 길들여진 꼴이었다.
요리를 배워볼까- 싶다가도 그러지 않고 싶은 건, 응석을 부리고 싶다는 말의 다른 표현일지도 모른다. 애매하게 뾰족대고 멜랑콜리한 마음을 정제해 영 내놓을 수 없었다. 보고싶다면 그냥 보고싶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이렇게 에둘러 고민하고있는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은 사람을 꽤나 곤란하게 만드는 조미료인 것만 같았다. 마나난은 발을 동동 구르며 허공에 투정을 부렸다가, 괜히 핸드폰을 잡고 액정을 톡톡 두드리다가- 곤란한 듯 냉장고를 바라보다가. 배달 어플을 켰다가- 또 빗소리를 들었다가.
혼자 견딜 수 있지만 능히 견딜 수 없어진 적막과 허공을 어색한 듯 느끼고선 그저 투정을 부리듯 바질 화분의 사진을 찍었다. 있잖아 아르, 이거 어떻게 해? 라고 전송하고서 괜히 핸드폰의 액정을 접어 닫고서 소파에 깊게 누워 봄비 오는 소리에 기대 돌보지 못한 집에 사랑스러운 그 애가 어서 와주길 바라게 되는 것이었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 소리나, 기름에 지져지는 밀가루 소리로 적막을 몰아낸다면 끝내줄 거라고도 느끼다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미묘하고 묘한 것들이 그저 ‘보고싶다’는 말로 정의될 수 있다는 걸 조금은 부끄러워하면서.
처리하지 못하고 열어보지도 않은 냉장고 쪽을 응시했다. 마나난의 적막은 여전히 봄비 소리에 물들어 있었고, 단 한 사람이 내는 소리만으로 무게를 키워가는 그리움을 완벽히 메울 순 없었다. 마나난은 창 밖을 흘러내리는 빗방울들의 궤적을 바라보다가, 역시 바질이 잘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걸 뭐에 쓰는지도 잘 모르면서. 오로지 그 애가 그걸 이유로 부엌에 서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보고싶다는 말을 에둘러 하지 않은 채, 그를 그리워 하면서. 그저 그렇게. 단지 그것 뿐이면서도 이유나 덧대고 싶어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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