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역전세계

F-1au

― 굳이 약팀을 선택한 이유가 뭐야?

― 차가 파란색이라서.

 

페라리는 레드라서 별로. 그렇다고 해서 메르세데스의 민트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거든. 마나난은 느긋하게 대답하면서 목을 뒤로 젖혔다. 바다를 닮은 에메랄드빛 머리카락이 쏟아질 듯 찰랑거렸다. 그는 머리부터 후두 하근까지의 경계를 손으로 몇 번 쓸어모으더니, 그것을 대강 높게 묶었다. 긴 머리카락은 그의 생각보다 낮게 묶였다. 그는 의자 등받이를 끌어안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평소에도 물흐르듯 사는 앤줄은 알았는데, 지금은 평소보다 더 느긋하구나. 에이전트의 말에 마나난은 어깰 으쓱였다.

곤란해보이는 그와 달리 마나난은 별달리 할 말이 없었다. 시즌을 앞두고 팀을 바꾸는 건 생각보다 흔한 일이었다. 입을 열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었다. 자기도 알다시피 미국의 고용시장이 생각보다 불안정해.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빠른 스무 명에게도 빠짐없이 적용되는 일인 거지. 그리고 내 할 일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어. 다만 팀이 바뀌었을 뿐이지. 일등 팀에서 꼴등 팀으로. 익숙한 기체에서 다른 차로. 연봉도 조금 줄었고, 스릴은 조금 더 생겼고. 마나난은 장점을 꼽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에이전트는 눈앞의 곤란한 골칫거리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잘못한 게 없다는 양 뻔뻔하게 웃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그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빠른 팀의 no.1 드라이버였다. 시차를 이용해 에이전시가 바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이용해, FA 계약이 풀리자마자 바로 꼴지 팀으로 상의없이 이적해버린 말썽꾸러기기도 했다. 이미 수락된 계약서를 보고 위법성을 꼬투리 잡으려고 해도 딱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그게 더 문제였다. 포뮬러 원은 자본의 스포츠다. 중력에 저항하며 물리법칙을 극복하고, 마찰력에 발목을 잡히지 않기 위해 공기역학을 이용하는 과학자본기술 엔터테이먼트의 끝판왕이라고 해도 좋았다. 요컨대 이것은, 드라이버의 실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차가 좋지 않으면 시즌을 엉망으로 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이 그렇게 적지 않다는걸 스스로도 알고 있냐는 질문에 눈 앞의 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즌에 우승 못할수도 있단 것도 알고 있죠? 에이전트는 그렇게 질문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를 담은 눈꼬리가 예쁘게 휘어졌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인생에 스릴이 부족했나요? 이어지는 질문에 마나난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일궈낸 모든 커리어가 잘못된 팀 선택으로 한 방에 고꾸라질 수도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이 또한 스스로 선택한 일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와서 레드불의 바짓가랑이를 잡아가면서 제발 1년만 뛰게 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라 그의 에이전트는 검수가 끝난 계약서를 그에게 다시 건넸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꼭 파도소리 같지 않아? 마나난은 계약서를 종이봉투에 잘 담아 갈무리하며 말했다. 잘 못들었는지 반문하는 말에 그는 못들었음 됐다고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느슨하게, 대강 묶인 머리카락은 마나난이 움직일 때 마다 파도마냥 가볍게 흔들리곤 했다. 이게 맞는 일인지 모르겠어요. 에이전트는 한숨을 섞어가며 말했고, 마나난은 도전은 될 수 있을 거라면서 가볍게 웃었다. 그 자신만만한 미소가 오래 갔으면 좋겠다는 덕담이 해변을 빠져나간 파도의 하얀 포말처럼 남았다.

근데 정말 차가 파래서 계약한 거 맞아요? 그의 에이전트는 호기심을 해소하지 못한 듯 다시 물었다. 그렇다니까! 마나난은 경쾌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리고 이것이, 2024 포뮬러 원 개막 전의 가장 핫한 이적의 전말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마나난 리르는 2024 시즌, 차가 블랙 앤 블루로 도색된단 이유만으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를 걷어차고 허접한 엔진과 막 되먹은 브레이크를 가진 ‘갤럭시-오션즈’로 이적했단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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퀄리파잉에서 막차. 첫날에서도 막차. 모나코 시티레이스 트랙 근처의 카페테라스에 손을 흔들면서 마나난은 트랙을 거슬러 올라갔다. 마지막 날 레이스가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주변이 지나치게 시끄러웠다. 그는 느긋하게 코스를 훑어보았다. 그가 지나가는 길에는 포르티시모로 강하게 울리는 야유가 있곤 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그가 저번 시즌까지 속해있었던 레드불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마나난은 느긋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레드불의 팬보이에게 마나난의 행보는 제법 배신처럼 느껴지는 일이었다. 마나난은 그 팀에서만 7년을 꼬박 해먹었다. 만 18세의 소년 드라이버로 데뷔할 때부터 그를 스타로 만든 친정 팀이었다. 그느 레드불 포뮬러 원 카의 테스트 드라이버였고, 세컨 드라이버였고, 퍼스트 드라이버였었다. 그런 팀을 유니폼 색과 차 도색을 이유로 계약을 손수 걷어찬 것이 올해 초였고, 마나난의 성적도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차의 만듦새가 지독하게 쓰레기인 탓이었다.

포뮬러 원 드라이버인 마나난의 강점은 칼 같은 코너링과, 직선에서의 거리유지감각이었다. 레드불의 머신은 그의 섬세한 주행법에 맞춰 설계를 몇 번이고 변경했고, 차체를 안정시켰다. 하지만 갤럭시 오션스가 그에게 들이민 머신은 코너를 돌 때마다 차체가 들떴다. 엔진을 경량화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고, 엔진이 너무 무거운 탓에 부품과 차의 벨런스를 맞추느라 무게가 영 꽝이었다. 마나난 스스로도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브레이크는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할테니까 들드는것만 고쳐주면 안 될까? 라고 아부다비 레이스부터 요구했는데, 그러려면 차에 가해지는 무게를 최대한 감량해야 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래서 10kg을 덜어냈다. 식단과 처절하게 싸우며 웨이트를 했다. 레이스에서 레드불의 차고를 지날 때마다 동정을 받았으니 (심지어 레드불의 치프는 혀를 쯧쯧 차면서 집나가면 고생이니까 알아서 다음 시즌에 돌아오라는 말까지 했다.) 말 다한거였다. 좀 더 샤프한 미남이 된 것 같지 않아? 라는 농담에 웃는 스태프는 아무도 없었다. 이겨보려고 저렇게까지 하는데 좀 이기게 해주자는 투지가 들끌었지만, 설계 자체가 개거지같은 차에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시즌을 치루면서 차가 발전하고, 그 패치에 따라서 성적이 오락가락한다지만, 갤럭시-오션스는 지나치게 깊게 삽질을하고 있었다. 모나코 레이스의 말석을 차지한 건 순전히 운이었다. 앞에 달리던 차 두 대가 지들끼리 싸우다 사이좋게 코너에 꼬라박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것 뿐이었다. 심지어 출발도 맨 마지막 자리에서 할 수 밖에 없었다. 당연했다. 그는 이틀 내내 꼴지였으니까. 하지만 팀 분위기 자체는 좋았다.

그야, 앞에서 열대만 코너 돌다가 망해주면 포디움에 올라갈 수 있었으니까. 가능성이 0인 것과 0.1인 것은 엄밀히 다르다는 희망회로가 팀 내에서 가열차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은 건, 드라이버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엔지니어와 같이 코너를 살펴보았다. 피트에서는 절대로 실수하지 말자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그 마나난을 데려왔는데 포디움이 하나도 없단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면서 치프가 차고 안의 사기를 돋웠다. 어쩐지 이번에는 이길 수도 있을 것 같지 않냐는 말이 희망회로처럼 활활 탔다.

 

쨍한 파란색으로 파도를 표현하고, 검은색으로 포말을 그려낸 머신이 자리를 잡았다. 앞의 놈들에게 바나나 껍질이라도 던지고 싶다는 농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하긴 나도 내가 리틀-포니 식단을 하던 걸 생각하면 껍질좀 던지고 싶기도 해. 마나난은 마이크 테스트 대신 농담을 건넸다. 여전히 긴장한 듯한 레이스 엔지니어를 오히려 다독이면서, 그는 눈 앞을 바라보았다. 제쳐야할 것들이 잔뜩 있었다. 레드불에서는 겪을 리 없었던 풍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모기업이 음료회사라지만, 그들은 멋진 엔진을 사올 줄 알았다. 그리고 그걸 기술력과 자본으로 비비고, ‘마나난 리르’라는 드라이버의 버릇을 담아 한 대의 차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금 레드불이 메르세데스나 페라리에 비해서 고전하는 건, 그들의 차 안에 마나난 리르가 너무나도 깊게 녹아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미소 지었다. 스태프들이 썰물처럼 트랙 위에서 빠져나왔다. 신호를 확인하는 와중, 비가 톡, 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못 이기면 5kg쯤 더 감량할까?”

마나난은 농담처럼 물었다. 레이스 엔지니어는 심각하게

“발목이라도 자르게요?” 라며 농담을 받았다. 퍽 유쾌한 순간이었다.

 

 

 

-

 

모나코의 마지막 날은 비가 내렸다. 도시에 쳐놓은 트랙은 굉장히 빽빽했고, 코너가 많고 직선이 적었다. 바로 앞에서 머신 한 대가 화려하게 코너에 박았다. 파편이 튀겨서 그 바로 다음 차의 타이어를 찢어놓았고, 그 틈을 이용해 추월했다. 선두와 몇 랩 차이인지를 보고하는 레이스 엔지니어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 일 칠 것 같은데요? 라는 말에 마나난은 유쾌하게 웃었다. 심장이 뛰는게 느껴졌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호흡을 마실 때 마다 맥박이 세게 쳤다. 선두와의 남은 거리를 가늠하면서 가속했다. 빗방울이 가득 묻어 미끄러운 트랙이지만, 어쩐지 ‘생각대로’ 나가고 있었다. 그는 마치 거센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두 사람을 더 재쳤다. 속도를 거의 줄이지 않고 코너링을 했다. 방금 제친 레드불의 2드라이버가 노발대발하는 것이 눈에 선해, 마나난은 좀 더 도망치기로 했다. 피가 도는 감각에 손 끝이 저릿했다. 중력이 내장을 온통 압박하는 것 같으면서도, 그에 따른 고양감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선두에서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 추격자에겐 자리한다. 빗물에 시야가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인류는 빗물방지 스프레이를 정복하지 못했다. 코너를 돌때마다 물보라가 세게 쳤다. 도로가 온통 젖어 있었고, 비는 그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전자에게 어울리는 환경이었다. 오늘 기세 좋은데요? 라고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 언제나 그렇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웃는 목소리를 간만에 들어본다는 잡담에, 그는 뭐라고 대답할지 몰라 앞차와의 간격이나 질문했다.

 

이적의 이유에 대해서 그저 ‘파란색’이라고 대답한 것은 반만 정답이었다. 그는 누군가를 추격하는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았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짜릿한 역전승을 바랐다.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올 것 같은 느낌보다는 제가 강하게 따라붙는 순간을 탐닉하고 싶었다. 정점에 자리한 사자보다는, 왕을 물어뜯는 언더독이 좋았다. 단순히 그뿐이었다. 레드불에서 너무 오래 달렸다. 아드레날린이 도는 것 같았다. 짜릿했다. 빗물에 미끄러지려는 차체를 어떻게든 달리게 만들었다.

구데기 같은 머신의 고삐를 제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도 가산점이었다. 도를 넘은 스릴. 죽음과 고작 한 뼘 정도를 두고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는 긴장감. 그 모든 것들이 휘몰아치는 파도처럼 다가왔다. 이 또한 선두에 익숙해진다면 느끼지 못하는 감각이었다. 살아있는 것 같네. 마나난은 그렇게 생각했다. 심장이 귓가에서 고동치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게 꼭 ‘남’처럼 느껴지는 부유감이 있었다. 마나난을 세상에서 매어둘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속력이었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크게 미끄러지는 것 가튼 머신을 가까스로 살려 트랙 위로 복구했다. 얼마 남지 않았다. 메르세데스를 제치고, 운 좋아 보이는 페라리를 누르고 앞서나갔다. 지금쯤 중계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감탄과 경의를 담은 해설이 쏟아질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레이스 엔지니어는 그에게 그저 수치만을 말하고 있었다. 이 것을 넘어선다면 최강이 될 수 있다. 나열된 숫자를 초월하고, 인식을 넘어가며 그는 곧장 가속했다.

 

일정 속도를 넘었을 때 느껴지는 중력은 압박처럼 느껴진다. 힘이 부피를 가지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며 그는 마지막 코너를 돌았다. 체커 기가 눈에 들어왔다. 온 세상이 빗물에 젖어 색을 더해가는데도 그것만이 온전한 색을 보존하고 있었다. 그가 결승선을 통과하고, 구더기 같은 차의 너덜거리는 엔진이 가동을 멈추었다. 비가 오는데도 샴페인을 들고 굳이굳이 나온 팀원들의 표정과, 우레같은 관객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살아있다는 감각이 온 몸을 찌르는 것 같아서 짜릿했다.

헬멧을 벗어던지고, 그것을 든 채, 하늘로 손을 뻗었다. 가속도를 견딘 몸은 원래의 중력을 만나자 비틀거리면서 휘청였다. 안락을 넘어 쟁취한 언더독의 승리라는 멘트가 온 트랙을 울렸다. 온몸을 채운 고양감을 함성 한 번으로 뱉은 그는, 샴페인 세례를 비처럼 받으며 생각했다. 여전히, 달리지 않으면 껍질 안쪽이 바싹바싹 메말라 가는 것 같았다. 묘한 기분이었다. 허공에 떠있는 기분이 되지 않으려, 그는 부러 땅을 세게 밟았다. 그제야 그를 둘러싼 세상이 올바른 중력으로 그를 옭아맸다.

 


F-1에유의 마냐는 뭔가….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서 살아가는 감각을 잘 망각하는 바람에… 죽을 자리를 본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달릴 것 같아요. 아르를 만나서 좀 사는 감각에 익숙해지고 그러긴 하겠지만 일단 이런 느낌이란 느낌적인 느낌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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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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