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소년 上
"나는 저 별들 사이에서 왔어."
"아드님에게는 병이 있어요."
기억도 나지 않는 아주 어릴 적부터 제집 드나들듯 찾은 병원에서 커다랗고 푹신한 의자에 앉은 의사 선생님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의 무게를 모르고 그저 기다림이 지루했던 기범은 제 키에는 한참이나 높은 의자에 앉은 채 천천히 발장구치듯 바닥에 닿지 않는 발을 앞뒤로 흔들고 있었고, 그런 그의 옆자리에 앉은 기범의 어머니는 기범의 작은 손을 제 양손으로 조심스레 감싸 쥐며 기범의 병이 무슨 병인지 물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히 말하는 듯했던 목소리였지만 그 끝은 볼품없이 떨려 아래로 처박히듯 힘없이 떨어졌고, 의사 선생님은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다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정확한 병명은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햇빛 알레르기의 일종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동시에 아드님은 특이케이스이기도 해요. 두드러기가 나거나 가려움증이 나는 보통의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 그간 의심스러웠는데... 그 대신 극도의 어지러움을 느껴 쓰러지는 거죠. 정신을 잃은 뒤에 오래 있다가는 최악의 상황에서는 죽을 수도 있어요."
현재로서는 치료법이 따로 없습니다.
아드님은 햇빛 아래 오래 있을 수 없어요. 절대 오래 있으면 안돼요.
우주소년
7월, 기범의 여름방학이 시작하자마자 기범의 가족은 줄곧 살던 대구를 뒤로한 채 차에 올랐다. 바닷가를 낀 시골 동네에 계시는 외가에서 보낼 한 달간의 긴 휴가를 위해서였다. 12시를 겨우 넘은 아주 이른 새벽 시간에 출발해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타고 도착한 그곳에서는 어느새 태양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에 기범은 정문으로 마중 나온 할머니와 제대로 인사할 시간도 없이 우선 헐레벌떡 집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기범은 어릴적부터 몸이 약했다. 정확히 말하면, 햇빛 아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즈음 기범은 하루를 시작했고, 해가 지평선을 넘어 세상의 아침이 시작될 때 기범의 밤이 시작되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간 새벽 1시의 놀이터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길고양이나 바람 한 자락조차 없이 고요할 뿐이라 을씨년스럽고 서늘했지만, 기범은 투정 한번 없이 되려 조용한 놀이터가 모두 제 것인 것 같다며 환하게 웃어 보이곤 그네를 탔다. 한창 또래의 친구들과 태양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밖에 나가 어울려 뛰어놀 시기에 적막한 새벽, 불빛이라곤 흐린 가로등 불빛과 달빛이 유일한 불 꺼진 동네를 아빠 손 잡고 산책하거나 책과 함께한 기범이었지만, 역시나 기범은 아쉬운 기색 한번 보이지 않았다. 기범의 병을 몰랐을 적에는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들이기에 그것들이 얼마나 즐겁고 달콤한지 이미 알고 있는 기범이었지만, 한번 맛을 보게 되면 아예 겪어보지 못한 것보다 더 괴로운 그리움을 겪게 된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기범은 꿋꿋하게 이겨내고 버텨냈다.
그렇지만 그의 시간에도 변화를 미룰 수 없는 시기가 찾아왔다. 초등학교 입학이 바로 그것이었다. 입학식 날이 오기 몇 주 전부터 한참을 고민하고 의논한 기범의 부모님은 학교에 미리 연락하고 몇 차례 상담을 통해 기범의 병을 미리 알리곤 햇빛이 나지 않은 새벽 5시에 미리 학교에 기범을 등교시켰다. 기범은 사전에 건네받은 도서관 열쇠를 손에 꼭 쥔 채 도서관으로 들어가 시간을 보내다 시간 맞춰 입학식에 들어갈 수 있었고, 이후로도 기범은 같은 방식으로 등교했다. 하교할 때는 마찬가지로 도서관에서 해가 지길 기다리다 햇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저녁 시간이 되면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여덟 살이 겪기에는 고단한 일이었지만 기범은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았고, 매일 저녁 퇴근한 부모님께 즐거움으로 상기된 얼굴을 한 채 학교에서의 이야기를 잔뜩 풀다 잠에 들곤 했다. 다행히 친구들과 어울리기에 어려움이 없던 기범은 우려와는 달리 무난하게 친구들을 사귀고 학교 활동을 해냈다. 비록 창가 자리에는 절대로 앉는 법이 없고, 어딘가를 갈 때면 그늘 길을 찾아 필사적으로 햇빛을 피해내는 수고스러움을 겪었지만 그것 말고는 놀라울 정도로 어려움이 없는 기범이었다. 책을 읽어 아는 것이 많으니 친구들은 언제나 기범이 재밌는 이야기를 해주길 기다렸고,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른생활만 반복해온 아이들이기에 밤의 시간을 모르는 만큼 기범이 말하는 밤의 모습에 흥미를 느꼈다. 겉돌지도 모른다는 부모님의 불안이 무색하게 기범은 인기 많은 유명한 아이가 되어있었고 부모님은 남다른 기범의 능력에 매일같이 감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에 기범은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다 작은 어린이용 젓가락을 내려놓고 부모님께 말했다.
"엄마, 아빠. 저 바다가 보고 싶어요."
늘 불평도 투정도 없지만 동시에 그 나이 때의 흔한 요구 한 번 없던 기범이었다. 그런 기범이 처음으로 망설이며 고심해 겨우겨우 말한 한마디에 부모님은 당장 각자의 회사에 미뤄뒀던 휴가를 결재받았다. 기간은 곧 있을 기범의 여름방학, 4주가 채 되지 않는 약 한 달간의 기간 동안 한적하고 고요한 바닷가의 작은 마을에 위치한 외가로 가 방학을 보내고 올 계획이었다. 그렇게 기범의 긴긴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당연하게도, 도착한 그날 저녁에 그들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다였다. 그렇지만 기범의 생각과 달랐던 것이 있다면, 친구들의 가족 여행 이야기 속, 혹은 책 속의 윤슬이 반짝이는 태양 아래의 맑고 푸르른 바다가 아닌 당장이라도 세상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매섭게 파도치는 검푸른 바다였다는 것이었다. 기범이 직접 보고 싶어 했던 사진이나 그림으로 봐 온 바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밤바다는 기범에게 큰 실망을 주었다. 그렇지 않을 거란 것을 알면서도, 지구는 아름다운 푸른 행성이라는 말보다 사실 검은 행성이 더 올바른 표현이지 않을까, 하며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기범은 바다를 바라본 저의 뒤에서 제 반응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 부모님께까지 이런 실망스러움을 느끼게 하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기범은 어설프게나마 표정을 만들고 힘차게 뒤를 돌며 소리쳤다.
"바다가 너무 예뻐요!"
조금 긴장한 얼굴로 기범의 반응을 살피던 부모님은 그제서야 안도하며 환히 웃어보였고, 기범은 지금이 밤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웃는 듯 우는 듯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제 표정이 금방 들통났을 테니까.
기범은 첫날의 큰 실망을 이후로 본 목적이었던 바다에 더 이상 갈 이유가 없어졌지만, 다행히 머지않아 남은 방학동안의 즐거움을 얻을 새로운 곳을 찾을 수 있었다. 기범이 찾은 또다른 흥밋거리는 천문대였다. 외가댁의 마당을 지나면 바로 코앞에 있는 넓게 펼쳐진 바다의 해안가를 따라 쭉 거닐다보면 엉성하게나마 위로 올라가는 계단 길이 설치된 커다란 절벽이 있었다.
이곳 작은 촌동네는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한 가족으로 여길 만큼 사람 수가 적었고 또 유대적인데다가 찾는 관광객조차 없다시피한 한적한 곳이었기에, 그들이 주로 쓰지 않는 곳들은 자연스럽게 손길을 받지 못하고 점차 잊혀져 낡아가곤 했다. 그중 한 곳인 이 절벽의 계단은 가파른 길을 서툴게 깎은 뒤 그 위에 지금은 이미 다 썩어버린 낡은 나무 판자를 대어 발판을 만들어 놓았고, 원래 있었을 난간은 끈으로 만들어져 드문드문 겨우 살아남은 몇을 제외하곤 끊어져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한 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벽 위로 가는 길은 이 길이 유일하다시피 했고, 겨우 있는 또 다른 길은 차도를 따라 약 30분 정도를 돌아 갈 수 있는 길 뿐이었기에 기범은 늘 과감하게 아슬아슬한 곡예를 하길 선택했다.
범죄의 위협이란 말이 우습게 들릴 정도로 작고 조용하면서 친근한 동네였고, 기범은 나이답지 않게 아주 성숙하고 의젓했기에 기범의 부모님은 마음 놓고 기범이 자유롭게 밤시간을 돌아다니도록 하고 잠에 들었다. 휴가이기도 했고 기범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몇년의 시간동안 밤시간에 교대로 깨어있느라 만성적으로 쌓여있던 그동안의 피로를 풀겸 기절하듯 잠에 드셨기에, 기범은 저를 믿고 잠에 들어계신 부모님께 옳지 못한 행동이란 것을 알면서도 눈치보지 않고 그 위험한 계단을 올랐다. 생전 처음 해보는 일탈과 같은 행위는 기범에게 새로움을 가득 안겨주었고 동시에 몇번을 오르내리는 동안 한번도 일이 잘못된 적이 없으니 앞으로도 괜찮을거라 안심하는 안일한 믿음이 있기도 했다.
그렇게 올라가 도착한 절벽 위에는 다른 곳들에 비해서는 작지만 그 내부는 모자란 것 없이 알찬 천문대가 하나 있었다. 천문대에 들어가면 별과 우주에 관련된 장식들로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이 펼쳐졌고 공간의 중간중간에 있는 탁상에 놓인 우주를 다룬 책들은 기범의 눈을 쉴 새 없이 사로잡았다. 건물의 벽은 온통 두껍고 깨끗하게 투명한 유리창으로 되어있어 우아스럽고 황홀하기까지 했고, 나선형으로 된 새하얀 대리석 계단을 올라 2층에 이르면, 2층 유리벽의 중앙에 위치한 화려하게 장식된 유리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테라스에 천체망원경이 놓여있었다. 단단한 석고와 석영으로 이루어진 하얀 테라스는 군데군데 세월의 흔적이 남아 부서지고 깨진 곳이 없지 않았지만 꾸준한 손길로 잘 보존되어 그 고풍스럽고 세련된 형태가 반짝거리며 자태를 뽐내곤 했다.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바라보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 테라스로 보이는 천문대 앞을 바라보면 사시사철 흐드러지게 들판을 채운 무성한 갈대밭이 있었고, 멀지 않은 절벽의 끝 아래 너머 지평선까지 흐린 배경이 되는 깊고 검은 바다가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밤하늘은 대구에서는 볼 수 없을 별들이 쏟아지듯 아로박혀서는 성나게 반짝이고 있어 마치 별밭에 온듯 붕 뜨는 기분을 선사해주었다. 가끔 아주 맑은 날에는 은하수까지 언뜻 볼 수 있었기에, 기범은 바다에 대한 실망감은 금세 잊은 채 별보기를 즐겼다.
한번 두번 천문대를 다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매일같이 꾸준하게 오는 낯선 어린 소년을 의아해하던 천문대의 주인은 이내 늘 늦은 시간에 오는 기범을 인자한 미소로 맞이해주었다. 천문대의 주인은 외형적으로도 인상적인 인물이었는데, 은빛이 나는 새하얀 백발은 잘 다듬어져 말끔했고 잘 다려진 셔츠와 조끼, 검은 슬랙스는 책이나 영화에서나 본 과거 영국의 귀족같은 우아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 사이에 있는 따스하고 차분한 눈과 옅은 호선을 그린 미소는 인자했고, 외알안경에는 길게 늘어진 은빛의 안경줄을 끼고있어 세련된 인상을 주었다. 기범이 오는 새벽시간이면 늘 푹신한 소파에 앉아 제목만 들어도 어렵고 무거워 보이는 책을 읽고 있다가도 낮고 편안한 목소리로 가볍게 인사를 건네준 그는 제가 마시던 홍차를 내려놓고 어디론가로 들어가 따뜻한 핫초코를 내어 기범에게 건네 주었다.
낯을 가려 말을 망설이는 기범이었지만, 그런 그의 모습과 행동에 자연스럽게 그에게 마음을 열게 된건 불가항력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나누는 말도 늘어나게 되었다. 주인은 기범에게 망원경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주며 우주와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범은 그런 주인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경청했다. 그러니 기범이 점차 우주에 대한 흥미와 설렘을 키워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하루, 여느때와 같이 천문대를 찾은 기범은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할 그가 없는 것에 의아해 함을 느끼던 것도 잠시, 아직 따듯한 온기를 품은 핫초코와 함께 잠시 일이 있어 자리를 비울테니 천문대는 마음대로 이용해도 된다는 주인의 정갈한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평소같으면 천문대의 주인에게서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별이 잘 보일 즈음 테라스에서 별구경을 했겠지만, 그가 없는 오늘이었기에 기범은 곧바로 2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 테라스로 나가서는 세팅된 망원경으로 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간 흐렸던 날이 없어 맑은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맑은 날이었다. 천문대의 주인과 함께 이리 밝게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울 정도로, 시원할 만큼 깨끗한 밤하늘은 아름다웠고 감히 절경이라 할 수 있었다.
기범은 정신없이 별들을 보며 연신 작은 감탄사를 흘리다가 곧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가만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어 정면을 바라보면서 선선한 바람이 갈대밭을 스치고 지나가 갈대들이 살랑이며 저 먼 은하수에게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가만히 구경했다. 오늘만큼은 적적하고 위압적인 검은 밤바다도 잔잔하고 평화로워 보였고, 언뜻언뜻 별이 비쳐내리는 듯 해 무섭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완벽한 평화로운 도중이었다.
"어?"
바다 끝 지평선을 향했던 시선을 내려 다시 갈대밭을 내려다보자 방금 전과는 다른 일이 벌어졌다. 아슬하게 기범의 키를 조금 넘는 무성한 갈대밭 사이에는 전에는 보지못한 제 또래의 소년 한 명이 서있었다. 순식간에 생긴 변화는 이상하다거나 소름끼친다고 느껴 경계하기에 마땅했지만 기범은 그보다 제 또래의 또다른 아이를 만난 반가움이 몰아치듯 밀려와 당장 테라스를 나와 갈대밭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놀러온 저를 제외하고는 가장 젊은 이가 독신주의의 40대였기에 또래를 만나지 못하던 시간이 꽤 되었으니 친구들이 그리울 법도 했고, 그렇게 겨우 찾은 또래의 아이가 혹여 사라질까 기범은 정신없이 달려 갈대숲을 헤쳤다.
마침내 눈에 들어온 미지의 소년의 모습에 기범은 얼굴에 화색을 띄우며 무어라 그를 부르려했다. 그러나 그 순간,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을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이 달려와서인지 튀어나온 울퉁불퉁한 땅에 걸려 기범은 철퍽, 앞으로 고꾸라질 위기에 처해버렸다. 답지않게 덜렁대고 무모했다고 생각하며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자연스럽게 이어졌을 땅과의 충격이란 없었다.
조심스럽게 눈을 뜬 기범은 제 바로 코앞에 위치한 바로 그 소년의 모습에 동그랗게 놀란 눈을 하곤 정지한 듯 그와 눈을 맞추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정적이라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기범은 멀리서 흐릿하게 봤던 그와 제대로 모습을 마주하자, 소년이 기범의 생각보다도 훨씬 수려하다고 느꼈다. 저와 같은 또래라 그런지 젖살이 빠지지 않아 귀여운 느낌이 있으면서도 저와 마주한 다람쥐처럼 동글동글하게 크고 뚜렷한 눈은 선명하게 빛나 별을 담은 듯 해 아름다웠다. 이목구비는 뚜렷했고 윤기나는 검은 머리는 생머리로 곱슬기 없이 적당하게 자라 다듬어져 있었지만 순간 기범은 그가 펌이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잘생겼다기 보다는 귀엽고 오밀조밀 예쁜 얼굴이었고, 어딘지 신비롭고 이질적인 분위기를 내었다. 마치 그가 다른 세계의 사람인 것처럼.
소년은 잠시간의 정적 뒤에 조심스레 받쳐안고 있던 기범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주었다. 똑바로 서서 마주한 그는 기범보다는 키가 조금 더 작았지만 팔다리가 길쭉하고 비율이 좋아 작은 키가 티나지 않았다. 새하얗게 하늘한 흰 티에 청 반바지를 입고 발목이 올라오는 스니커즈를 신은 그는 그렇게 멀뚱멀뚱 기범을 바라보고 있었다.
"잡아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어."
"..."
"이름이 뭐야? 난 기범이야, 김기범."
"..."
기범은 답이 없는 소년에 의아함을 느끼고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그에게 물었다.
"혹시 말을 하는 걸 배우지 못했니?"
기범의 말에 신비로운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는 있구나. 그럼... 혹시 배우고 싶니?"
그 말에 소년은 환한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빛이 나는 듯 밝은 미소에 기범은 놀라기도 잠시, 기분이 좋아진 기범은 소년과 마찬가지로 환한 미소를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 조금 작은 소년의 손을 잡은 기범은 그를 이끌어 천문대로 향했고, 어느새 돌아와 있던 천문대의 주인에게 소년을 소개시켜주었다. 주인은 처음보는 또다른 어린 아이에 놀랐지만서도, 기범이 평소보다 신난 기색을 보이자 다시 인자한 미소를 짓곤 소년에게도 핫초코를 내어주었다.
소년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며칠간 소년과 지내던 기범은 그에 대해 몇가지를 더 알 수 있었다. 소년의 나이 또한 저와 같은 여덟살이란 것, 그의 이름이 최민호 라는 것. 그 외에도 천문대의 주인마저 그를 처음보았으니 그가 이 마을에 살지 않는 저와 같은 외부인이라는 것과, 저처럼 저녁과 밤시간에만 나타나다 낮시간에는 어디론가로 사라진다는 것.
민호는 배우는 속도도 빨라 금세 말하고 쓰는 법을 배웠다. 그 모습에 기범은 장난치듯 제가 잘 가르쳤기 때문이라며 말했지만 예쁜 웃음을 하곤 응, 기범이 네가 잘 가르쳐서 그런가봐, 하고 말한 진심뿐인 민호의 대답에 되려 얼굴이 달아올라 뭐라는거냐며 빽 소리를 지르고 홧홧한 얼굴을 달래기 급급했다. 그 모습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말간 웃음을 터뜨린 민호는 그 둥그렇고 큰 눈으로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민호는 기범이 만나온 그 또래의 남자애들과는 다르게 아주 다정했고 따뜻했다. 그저 어떻게하면 친구를 더 새롭게 골릴 수 있을지만 하루종일 고민하며 장난치는 것이 일상인 그들과는 달리 앞의 경우처럼 툭툭 다정한 말들을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잘도 했다. 섬세하고 세심해 나름 또래와 다른 다정함을 가지고 있다 들어온 기범이었지만 민호를 따라갈 수는 없을 정도였다.
어느날은 기범이 민호에게 물었다. 여느때처럼 망원경으로 별들을 보고 천문대 주인까지 셋이서 소파에 둘러앉아 주인의 우주 이야기를 경청하던 도중이었다.
"민호야, 너는 어디에서 살아?"
천문대가 아닌 곳에서는 한번도 그를 만난적이 없거니와 부모님과 할머니께 여쭈어도 그런 아이는 없다는 의문스러운 대답만을 들은 기범은 이 김에 직접 그에게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민호가 말을 고르며 잠시 고민하는 시간동안 기범은 그 정적이 어색하지 않게 제 이야기를 먼저 말해주었다.
"난 대구에서 살아. 지금은 여름방학이라 할머니댁에 온거고, 지금부터 이주 정도 뒤에 다시 대구로 돌아가."
"여길 떠난다고?"
기범의 말에 민호는 놀란 듯 말을 고르던 것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급하게 물었다. 가뜩이나 큰 눈이 훨씬 더 동그랗게 커져 얼굴을 덮는 건 아닐까 했다. 기범은 생각보다도 훨씬 격한 민호의 반응에 어버버 고개를 끄덕였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응, 하지만 완전히 떠나는 건 아니야. 아마 여름방학마다 다시 올 것 같아. 너무 즐거운 시간을 보냈거든. 대구에 있는 동안 다시 이곳에 오고싶어서 매일같이 그리워 할 것 같아."
민호는 기범이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며 작은 한숨을 내쥐었고, 곧이어 열심히 머릿속으로 정리한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저 별들 사이에서 왔어."
"별들 사이? 우주를 말하는거야?"
"응, 그곳에서 매일 밤 이쪽을 보는 너를 보고 내려왔어."
기범은 별을 바라볼 때면 그 눈에도 한가득 빛나는 별을 담은 채 사랑스럽게 이곳을 바라보곤 했다. 어느새 민호는 그런 기범을 보는 것이 일상의 한 조각으로 자리잡았고 마침내 직접 만나보고자 마음 먹은 뒤 이곳으로 내려오길 결정했다. 그가 사는 행성에서는 그 의미가 크다고 했지만 끝내 민호는 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민호의 이야기는 자칫 허무맹랑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이야기였지만, 그간 민호의 행적들을 떠올리자면 이상하기는 커녕 의문스럽던 퍼즐들이 맞춰지는 느낌이라, 기범은 자연스럽게 민호의 말을 의심없이 받아들여 믿게 되었다. 천문대의 주인도 어느새 민호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마시던 홍차를 내려놓곤 설레는 감정을 담은 눈빛을 한 채 민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밤에만 올 수 있는거야. 아주 맑은 날, 밤에만 내려올 수 있어. 장소는 한 나라로 특정돼. 매년 1월 1일을 기점으로 일년 간 어느 나라에 내려올 수 있을지 정할 수 있지. 그 나라 안에서는 어디든 다닐 수 있지만 그 나라 밖으로는 조금도 나갈 수 없어. 그리고 나는 내 첫 현현장소를 지구의 이곳 대한민국으로 했어."
"날 보려고?"
"응, 널 보려고."
수많은 매력들을 지닌 화려한 행성들 중에서 굳이 지구를,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 이곳 대한민국을 골라 이 작은 동네에 현현한 이유에는 정말 오로지 기범 하나 뿐이었다. 기범은 그 사실에 간질거리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아직 그 감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리송했다. 처음 느끼는 아주 섬세하고 오묘한 감각은 낯설면서도 나쁘지 않은 묘한 기분을 주었기 때문이랴.
"사실... 밤이 아니어도, 어느 특정 장소가 아니어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방법은 있는데,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기범은 또다시 그 방법을 물었지만 민호는 다정한 어조로 기범을 어르면서도 단호하게 알려주지 않았다. 기범은 내심 서운하면서도 제게까지 이렇게 숨길 정도라면 정말 중요하고 엄청난 이야기 일 것이라 생각해 그를 이해하기로 했다.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모두 알려주겠다는 민호의 말도 있었고.
"그런데, 기범아. 너는 왜 밤에 살고 있어? 내가 본 지구 사람들은 다들 낮 시간을 살고 있던데. 나같은 경우는 이때만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고, 주인 아저씨처럼 낮과 밤을 다르게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나이의 아이들 중 밤을 사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어."
"난... 병이 하나 있어."
기범의 말에 민호는 또다시 눈을 크게 뜨며 재차 물었다. 병? 아픈 거 맞지? 어디가 아파? 괜찮아? 쏟아내듯 묻는 민호는 어느새 재빠르게 기범의 앞에 이르러 걱정스러운 얼굴로 기범의 몸 이곳저곳을 눈으로 살폈다. 기범은 병이 하나 있다는 말에도 순식간에 다가와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함과 함께 아까의 간지러움을 다시금 느끼면서도 웃음을 흘리며 그를 달래 진정시켰다.
"지금은 괜찮아. 지금 시간에는. 하지만 난 네 말대로 낮을 살 수 없어."
기범은 햇빛 아래 있지 못하는 제 병과 이를 어겼을 경우 나타날 반응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렇기에 제가 낮이 아닌 밤을 살아오며 보통과는 다르게 살아온 일상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은 너무나 고요한 곳이었고 친구는 책이 유일하던 때를 지나 막 학교에 다니며 본래의 왁자지껄한 세상을 알게된 이야기, 그러나 낮을 조금이나마 경험하게되면서 학교를 다니는 내내 바짝 긴장한 채 햇빛을 피해다녀야 했던 것까지. 천문대의 주인도 내심 궁금했던 기범의 이야기는 생각보다도 훨씬 놀랍고 안타까우면서 동시에 경이로운 부분이 있었다.
"이곳에 온 건 바다를 보고싶어서였어. 그렇지만 지금은 바다보다 천문대가 더 좋아. 네가 있고 별이 있으니까. 난 이제 바다보다 우주가 더 좋거든."
"새로운 흥미를 찾은건 좋다만, 바다는 충분히 즐겼니?"
"아뇨, 사실... 실망했거든요. 바다는."
기범은 조금 쓰게 웃어보이며 머쓱하게 천문대의 주인을 보았다. 기범의 부모님께는 끝까지 숨기고 무덤까지 안고가야 할 솔직한 이야기였지만, 두 사람이라면 진실된 제 이야기를 마음껏 해도 될 것 같다고 느꼈다. 늘 연기하고 제 마음을 숨겨내면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 '성숙한' 기범에게 아주 새롭고 또 다정한 이곳에서 기범은 그 나이에 맞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제가 기대했던 바다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금방이라도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고, 아주 차갑고, 또 무서웠어요."
저는 태양 아래 반짝이는 푸른 바다가 보고싶었거든요.
기범은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그 말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민호는 지긋이 그런 기범을 바라보며 눈에 기범의 모습을 담곤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했다. 어딘지 가라앉은 분위기에 기범은 그렇지만 괜찮다면서, 우주를 얻었고 민호를 알게 되었으며 이런 천문대와 이런 천문대의 주인을 만날 수 있어 행복하다고 덧붙여 분위기를 환기했다. 기범의 말은 가식없는 진심으로 차있었기에, 부드럽게 풀린 분위기에서 다시 평소와 같은 우주 이야기로 돌아갈 때 민호는 기범에게 여느때의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면서도 머리를 바쁘게 굴리고 있었다.
한 주의 시간이 흘렀다. 기범은 오늘도 천문대를 가기 위해 위험천만한 길을 오르고 있었고 바람이 좋고 덥지 않게 시원한 공기가 좋아 평소보다도 가뿐한 발걸음으로 계단의 발판을 하나씩 밟아 올라갔다. 별과 우주의 이야기를 듣고 무엇보다 민호를 볼 생각에 기뻐 잔뜩 신이 난 걸음으로 오르던 기범은 그저 날이 맑은 오늘이라면 별을 더 많이 볼 수 있을거라는 즐거운 생각에 잠겨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상황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우지끈,
언제나 위태로웠던 다리는 기범이 오른발을 내딛어 발판을 힘차게 오르던 순간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그 발판 하나가 무너져내렸다. 순간적으로 피가 차갑게 식는다는 표현을 직점 실감한 기범은 그간 위험한 다리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지 다행히 반사적으로 낡은 나무 기둥을 잡아 가까스로 추락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무 기둥을 잡으면서 충돌한 무릎은 울퉁불퉁한 암석들로 이뤄진 절벽에 쓸려 까져 벌써부터 송골송골 피가 맺히고 있었고 나무 기둥의 작은 잔가시들이 파고든 손은 쓰라렸다. 설상가상으로 힘조차 점차 풀려가고 있어 양손으로 다 썩어가는 나무 기둥 하나에만 오롯이 몸을 의지 한 채 버티고 있는 것은 오래 가지 못할 일이었다. 그나마 가벼운 무게의 기범이었기에 겨우 버티고 있는 기둥이었지만 썩을대로 썩은 나무가 얼마나 오래갈지도 미지수인데다가 더 버틸 힘도 남아있지 않았으니.
기범은 앓는 소리를 내며 헉헉, 가쁜 숨을 내쉬었다. 무릎은 아프고 손을 쓰렸으며 과하게 힘을 쓰니 머리가 핑 도는 듯 했다. 기억의 저편 속 마지막으로 햇빛 아래에 있었을 때, 정신을 잃기 전 딱 지금과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이대로 추락하면 어떻게 될거란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그저 정신을 잡으려 애쓰다 결국 한 손이 미끄러져 전보다 위태로워 졌을 때,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네가 정말 우주에서 왔다면, 지금 날 구해줄 수 있을까?
"최민호!"
온 힘을 다해 세글자를 소리치자마자 우직, 겨우겨우 버티고 있던 기둥이 끝내 결국 무너져 내렸다. 놀란 마음과 동시에 기둥을 잡고 버티고 있던 손이 놓아지며 몸에 힘이 풀리니 되려 정신이 또렷해졌고,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허공에서의 순간은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감각되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그저 먹먹하게 웅웅이는 바람소리만 귓가를 가득 채우며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린 그때였다.
순간 기범은 제 몸이 정지하는 감각을 선명하게 느꼈다. 기분 탓은 아니었다. 기범과 같이 떨어진 나무 기둥의 부서진 일부가 매섭게 철썩이는 바다에 풍덩 빠지며 내는 소리가 저 아래 멀리서 먹먹하게 들려왔으니.
기범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첫날의 그날처럼, 최민호는 제 코앞의 거리에서 기범과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잔뜩 놀란 눈을 하고서 입꼬리를 내린 채 처음보는 날카로운 얼굴을 하곤 기범을 바라보던 민호는 기범이 눈을 뜨고 그와 시선을 마주하자 힘이 풀린 듯 사르르 웃으며 기범을 감싼 팔을 고쳐잡았다. 구름 위를 밟는 듯 허공 속을 천천히 걸어 오르며 기범을 이끈 민호는 절벽 위 갈대밭에 올라와서 완벽히 안전해 졌을 때야 그를 놓아 내려주었다. 기범은 갈대밭에 쓰러지듯 누우며 깊게 심호흡했고, 민호는 허공에서 사뿐히 내려와 기범을 살폈다.
믿고는 있었지만 그는 정말 우주소년이었다. 기범은 멍하게 허공을 바라보다가 민호가 그 옆에 앉아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자 도르륵 눈을 굴려 시선을 옮겨서는 그를 바라보았다. 민호는 그런 기범에게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준 뒤 기범의 손과 무릎으로 시선을 옮겨 금방이라도 깨질 수 있는 여린 유리를 만지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고 섬세한 손길로 상처들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라진 상처들에 기범은 뉘인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아서는 신기한 듯 제 손과 무릎을 재차 살펴보았다. 민호는 잠시 그런 기범을 바라보다가 일어나 서서 절벽 위를 올라오는 계단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빤히 그 위태로운 계단을 바라보곤 다시 기범에게로 다가왔다.
"고마워."
정말로 제가 부르자마자 나타나서 저를 구해준 민호였다. 기범은 숨을 고르자마자 그에게 가장 먼저 고맙다는 말을 건네었고, 민호는 그저 미소를 보이면서 작게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내 이름을 불렀는걸. 그걸 듣고 올 수 있었어."
"내가 부르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는거야?"
"거의. 내가 이곳에 오지 못하는 흐린 날과 낮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가까이 있을수록 더 빨리 알아챌 수 있어."
"모두에게 그런거야? 누구든 네 이름을 부르면 이렇게 올 수 있어?"
그 말에 민호는 대답없이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기범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자 민호는 결국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양 옆으로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제야 의미를 이해한 기범은 순간 귀까지 붉게 달아올라 얼굴이 익을 듯 홧홧해짐을 느꼈고, 그에 한순간 시원했던 공기가 후더워지는 듯 했다. 간지러운 바람이 또다시 심장께를 스치고 지나갔다. 손부채질을 하며 괜히 오늘 날이 덥지 않냐며 말한 기범은 횡설수설거리다 이제 천문대로 들어가자며 민호의 손을 덥썩 잡고 이끌었고, 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범의 손을 마주잡곤 기범을 따랐다. 주체되지 않는 입꼬리와 토마토처럼 오른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꼿꼿하게 정면만을 바라본 기범은 민호의 귀도 저와 같이 붉게 물들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다음 날 저녁, 절벽 앞에 이른 기범은 언제든 부서질 듯 위태로웠던 나무 계단이 완전히 새것인 단단한 철제 계단으로 바뀐 것을 보았다.
신나게 별을 보고, 우주 이야기를 듣고, 민호를 만난 그해 여름방학은, 8년이라는 기범의 온 생을 통틀어 기범에게 아주 달콤하고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시간은 야속할 정도로 순식간에 흘러, 어느새 떠나는 날을 하루 앞둔 마지막 날이 금세 찾아오고야 말았다.
평소보다 조금 쳐진 발걸음으로 한발 한발 망설이며 천문대에 들어간 기범을 천문대의 주인은 다 안다는 듯 인자하게 맞이하며 기범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려 토닥여 주었다. 기범이 이 동네를 찾는 날이 있으면 언제든 천문대에 와도 좋다는 이야기와 함께 그가 가장 아끼는 동시에 기범이 제일 눈을 반짝였던 이야기를 담은 우주책을 기범의 손에 쥐여주었다. 기범은 콧잔등이 지끈거리는 느낌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울음을 참고 먹먹한 목소리로 감사인사를 전했고, 그 얼굴은 말간 웃음을 담고 있어 그가 감각하는 예쁘고 아름다운 행복을 주인에게도 가득 전해주었다.
"참, 민호도 네게 주고 싶은 선물이 있다더구나."
"정말요? 그러고보니 민호는 어디에 있어요?"
들어올 때부터 언제나와 같은 자리에는 보이지 않는 민호에 혹시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 내심 걱정하던 기범이었다. 다행히 천문대의 주인은 기범에게 민호가 있는 곳을 알려주었고, 좋은 시간을 보내라는 말과 함께 천문대를 나서는 기범에게 마지막 손인사를 건네주었다.
기범은 민호가 있다고 전해들은 갈대밭으로 나와 두리번 거리며 그 형체를 찾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아 의아하던 것도 잠시, 어느새 기범의 뒤에 있던 민호가 기범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자 기범은 놀라 후드덕거리며 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호쾌하게 웃은 민호는 여느때처럼 좋은 얼굴을 하고 있어 기범은 속으로 안도하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만약 민호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면 기범 역시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깜짝 놀랐잖아... 오늘은 왜 여기 있었어?"
"내일이면 앞으로 오랫동안은 못볼거잖아. 그래서... 범이 네게 선물하고 싶은 게 있어."
"선물? 어떤 선물?"
기범의 물음에 민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더니 기범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기범은 잠시간 가만히 그 손을 바라보다, 이내 선물받은 책을 갈대밭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고 민호가 내민 손에 제 손을 뻗어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그러자 민호는 기범의 양손을 잡아채듯 고쳐 잡아 마주 잡은 뒤, 깍지를 끼며 기범과 몸을 가까이 붙였다. 순간적인 행동에 둘의 몸이 밀착되고 서로의 얼굴이 닿을락 말락한 아슬한 거리를 겨우 두자 기범은 헉 숨을 들이킨 채 정지되었다.
곧 완전히 낯설지만 전에 한번 경험한 감각이 이어졌다. 민호의 몸이 둥실 떠오르자 그와 손을 마주잡은 기범 역시 붕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다가 허공에 뜨는 기분이 아직은 낯설고 무서운 기범이라, 기범은 다시한번 힉 숨을 멈추며 필사적으로 민호에게 조금 더 매달렸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래를 보지 않으려 애썼다. 민호는 싱긋 싱그럽게 미소지고는 그런 기범을 부드럽게 달래며 점점 더 위로 올라갔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 민호가 기범을 불렀다.
"범아."
"싫어, 무서워, 안볼거야. 절대 놓지마."
"범아."
"갑자기 놔버리면 나 앞으로 너 진짜진짜 미워할거야. 계속 옆에 있어."
답지않은 투정에 민호가 작게 웃음을 흘리며 기범을 다시한번 달랬다. 아냐 범아, 이제 다 됐어. 딱 한번만 눈 떠봐. 민호의 말에도 한참동안 고개를 도리질하며 민호의 몸에 찰싹 붙어있던 기범은 마침내 겨우겨우 실눈을 뜨며 주위의 모습을 보았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황홀한 절경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었다. 새까만 우주의 중앙에서 쏟아지듯 눈에 담기는 수많은 별들은 지구에서 바라본 아무리 맑고 투명한 밤하늘의 별이라도 비교는 커녕 비교선상에조차 오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저 멀리서 둥둥 궤도를 공전하는 달은 입체적이었고 태양계 행성들은 저 멀리서 아주 작게로나마 언뜻언뜻 형체를 보이고 있었다.
민호는 기범의 빳빳했던 긴장이 어느정도 풀린 채 풍경을 보고 감탄하는 모습에 안도와 뿌듯함을 느끼는 동시에, 혹여 민호를 놓칠까 그를 꽉 붙든 채 천천히 몸을 돌리는 기범이 안정적으로 몸을 돌릴 수 있도록 든든하게 지지해주었다. 그 도움을 받으며 완전히 몸을 돌린 채 민호와 같은 곳을 바라보자, 기범은 제게 펼쳐진 황홀경에 연신 감탄을 내었다.
거대한 태양은 웅장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그 앞으로 우리네의 푸른 지구가 있었다. 지구는 정말 푸르구나, 기범은 바다를 본 첫날 되도않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상함에 내심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며 생각한 검은 지구에 대한 생각들은 모두 잊어버리기로 했다. 지구는 정말 푸르렀고, 찬란한 태양빛 아래에서 온전히 찾은 색은 아름다웠다.
"바다를 보고 싶댔잖아. 태양빛 아래서의. 푸르른 그 바다."
기범은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보던 지구와 태양의 모습으로부터 겨우 고개를 돌려 천천히 민호를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줄곧 기범만을 바라보고 있던 민호였기에, 민호는 기범과 시선을 마주하자 그 크고 똘망똘망한 둥근 눈을 반쯤 가려지도록 접어 환하게 웃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늘 그랬다. 최민호는 평소에도 그 특유의 다정을 기범에게 쏟아내었지만, 종종 이렇게 숨막힐 정도로 아득한 다정을 진득하게 흘려내어 기범을 가득 채우곤 했다. 그리고 그 다정함에 질식할지라도, 그저 쉴 새 없이 제게 향해지는 다정에 숨막히기를 원하는 기범은 그 모습이 결코 사랑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이어진 기범의 행동은 불가항력적이었다. 민호의 목을 감싸안은 기범은 질끈 눈을 감은 채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꾸욱 내리눌렀다. 부드럽고 말랑한 기범의 입술이 그보다는 조금 더 버석하지만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민호의 입술과 모양을 맞췄다. 여덟살의 입맞춤은 그저 입술을 포개는 것이 전부였지만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단순한 첫 입맞춤을 넘어서는 특별한 것이었다.
민호는 놀라 둥그렇게 눈을 뜨며 기범을 바라보았지만, 곧 입술을 붙인 채 제게 안겨든 기범을 감싸안았다. 기범보다 키가 작은 민호였기에 기범을 안정적으로 감싸 안을 수 없거니와, 기범과 맞붙인 입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살짝 올려야만 했지만 더없이 기쁘고 또 좋았다.
잠시 뒤 천천히 입술을 떼어낸 기범은 부끄러운 듯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웅얼이듯 대답했다.
"네가 내게 와준 것 부터가 내 최고의 선물이었어."
어린 아이의 사랑표현은 종종 아주 직관적이고 솔직하며 동시에 낭만적이다. 기범의 말에 민호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휘어접고 웃었다. 그동안 보아온 민호의 웃음들 중 무엇하나 기분좋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이번 웃음은 특히나 간지러웠고 그의 진심이 곱절로 담긴 것이 뚜렷해 기범은 더 붉어지는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살짝 허리를 숙여 민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한자락 꿈같은 달콤한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범은 또다시 눈을 감은 채 민호에게 매달렸다. 그렇지만 그런 기범을 단단하게 마주안고 내려오는 민호의 손길은 묘한 간지러운 긴장감이 있던 이전과는 달리 이제 그저 혀가 아리도록 달콤할 뿐이었다.
그간 들어온 우주의 이야기가 어째서 성립되지 않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왜 춥지 않았는지,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었는지와 같은 현실적인 것들을 묻기에 민호는 그 존재만으로도 비현실적인 우주소년이었고, 상처를 한순간 치료할 수 있고 허공을 둥둥 떠다닐 수 있는 능력많은 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단 하나, 정말 묻고싶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민호야, 태양을 마주했는데 나는 왜 멀쩡했을까?"
"내가 마술을 부려놔서 그래."
민호는 차분하게 기범의 물음에 답했다. 그 말을 요약해보자면, 기범의 몸에 특수한 투명막을 씌워 기범은 태양빛에 영향을 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낮에 올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그러면 범이 네게 막을 씌워줄 수 있을거고, 너는 자유롭게 낮을 돌아다닐 수 있을테니까."
민호는 그 자신이 기범에게 씌우고 일시적으로 사라질 막을 옆에서 지속적으로 제 힘을 넣어 유지해 온 것이기에 방금과 같이 둘이 붙어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것에 아쉬워했다.기범은 그 마음만으로도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그가 저번에 말한 '낮과 밤, 어느 한 나라와 같이 특정 공간이나 시간에 제약없이 평범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방법'을 더욱 궁금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부분에서 만큼은 단호한 민호였기에 때가 되었을 시점에는 꼭 알려주겠다는 약속만 받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난... 정말 갈게. 고마웠어, 네가 준 모든 것들에."
"꼭 다시 볼거지?"
응, 꼭, 다시보자. 기범은 갈대밭 위에 고이 내려놓았던 선물받은 책을 집어들고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그때,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민호가 기범을 불러 그를 멈춰세웠다. 그리곤 옷 안으로 넣어 보이지 않게 감춰둔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 두개 중 하나를 빼내어 기범에게 건네었다. 목걸이에는 섬세하게 세공된 반지 하나가 걸려있었는데, 그 나이답지 않게 우아하고 고급진 고딕풍의 디자인이었고 반지의 중앙에는 붉은 루비같은 영롱한 빛을 내는 작은 보석이 박혀있었다. 민호의 목에 걸려있는 남은 하나에도 중앙 루비의 색만 진한 남빛의 파란색이라는 점만 빼곤 역시 다른 모든 것이 기범에게 건넨 것과 똑같은 반지가 걸려있었다. 민호는 그것을 손수 기범의 손에 쥐여준 뒤 그 손을 부드럽게 감싸고 기범에게 말했다.
"이 반지는 나와 연결되어 있어. 낮에는 그저 평범한 반지에 불과하지만, 날이 맑은 밤이 되면 언제나 나와 연결돼. 그러니 이 목걸이를 항상 차고 다니다 언제든, 네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불러. 이름을 부르면 이제 거리와는 상관 없이 난 너를 알아차릴 수 있어, 네가 어디있는지 말이야. 그럼 전처럼 네게 달려올게."
전에 말한 몇가지 제약의 경우 중 거리에 대한 제약이 해제된 것이었다. 비록 여전히 민호가 올 수 없는 낮이나 흐린 날에는 기범이 아무리 부른다 해도 민호는 아무것도 알아차릴 수 없다는 제약이 있었지만, 날 맑은 밤에는 기범이 어디에 있든 항상 그와 연결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언제든 위험에 처하면 도움을 구할 든든한 이가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는 삶과 같았다. 그 의미를 모르지 않았던 기범이기에 왈칵 눈물이 고인 기범은 민호가 기범의 손에 쥐여준 목걸이를 제 목에 맨 뒤 뚝뚝 눈물을 흘리며 민호를 바라보았다. 되려 놀란 민호가 당황한 듯 횡설수설 그를 살피며 눈물을 닦아주자 기범은 슥 무심하게 옷소매로 제 눈물을 닦은 뒤 민호를 보며 팩 소리쳤다.
"좋아해 최민호!"
민호가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잽싸게 뒤돌아 정신없이 갈대밭을 헤치며 달린 기범의 귓바퀴는 터질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민호는 그런 그를 쫓아가려다 얼마나 재빠른지 그만 놓쳐버린 기범을 뒤따르기 보다는 곧 다시 만날 다음을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손으로 입을 가렸지만 가린 손이 무색하게 속절없이 올라가는 입꼬리에서는 기분좋은 낮은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흘렀고 잔뜩 휘어진 눈과 붉게 오른 귀가 그 행복의 크기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머지않아 다시 만났을 그때, 민호는 기범에게 오늘의 대답을 들려줄 생각이었다.
혹여 쫓아올까, 달리는 중간에도 단 한 번조차 멈추지 않고 곧바로 할머니댁까지 뛰어온 기범은 그제야 숨넘어갈 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슬슬 해가 뜨는 시간었기에 파란만장한 하루를 보낸 기범은 방전되듯 잠에 들었고, 다시 일어난 어둑한 저녁에는 이미 모든 짐을 실어둔 부모님을 따라 차에 올랐다. 할머니와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기범에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제부터는 동네를 벗어난다는 표지판이 보였다. 기범은 정말 떠나간다는 것을 실감하며 아쉬움을 느꼈고 대답이라도 들을걸 급하게 도망쳤다며 생각하곤 미련을 남겼지만 민호가 선물한 목걸이를 조심히 문지르며 작게 웃었다. 다음 방학에도 올 수 있을테니, 조금만 더 기다리면 금세 또 다시 방학이 찾아올 터였다. 그렇게되면 다시 민호를 만날 수 있겠지, 기범은 생각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러던 그 해 겨울이었다.
"기범아! 김기범! 김기범!!"
세상에는 좋은 일이 있으면 그만큼 나쁜 일도 있다고 했던가. 비극적인 불행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시점에 찾아와 한순간에 겨우 그러쥔 행복을 앗아가 버렸다.
사건의 발단은 아주 사소한 장난이었다. 악의없는 아이들의 순수함과 궁금증이란 때로는 한없이 잔인하고 무서운 것이었고, 기범은 그런 아주 순수한 물음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정말 햇빛을 받으면 안돼? 응, 절대. 그게 뭐야, 말도 안돼! 사실 거짓말 아니야? 아냐! 의사선생님께서 심하면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단 말이야.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 직접 해봤어? 정신없는 물음과 아이들의 순수한 호기심은 기범의 돌아오는 타격감 높은 반응에 재미를 느껴 어느새 점점 더 대담해졌다. 결국 선생님이 계시지 않은 점심시간에 시작된 실랑이는 기분에 휩쓸린 반 아이 한 명에 의해 걷잡을 수 없어졌는데, 그가 한 일은 기범의 팔을 잡아채 그를 끌고 오후의 땡볕 아래로 향하는 것이었다.
또래에 비해서도 체격이 크고 짓궂은 아이는 그와 마음이 맞거나 좀전의 실랑이를 통해 마찬가지로 기분에 휩쓸린 아이들을 몰고 기범을 끌어당겼고, 기범과 친하게 지내는 대부분의 여자 아이들과 몇몇의 남자 아이들은 그런 그들을 말리려 애썼지만 막무가내인 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뜩이나 힘도 약하고 곱상해 체격 또한 평균적인 남자아이들과 비교해 왜소한 기범은 저를 끌고가는 아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어 속절없이 끌려갈 뿐이었다.
마침내 학교를 나와 몇년만에 강한 태양과 마주한 기범은, 당장 한겨울의 추운 기온에 하얗게 퍼지는 입김이 선명한데도 겉잡을 수 없는 열기가 제 몸을 집어삼켜 몰아치는 감각을 느꼈다. 동공이 크게 확장되어 멀거니 태양에서 눈을 떼지 못한 기범은 순간 머릿속이 팽팽 돌아가다 이내 점차 흐릿하게 의식이 깜빡깜빡 끊겨갔다.
겨우 몸부림을 치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애쓰던 기범의 모습이 어딘지 즐거웠던 철없는 아이들은 태양 아래로 그를 내놓자마자 우뚝 몸부림을 멈추고 뭐에 홀린 듯 정신을 놓고 태양을 바라보는 기범의 모습에 무언가 잘못됨을 느꼈다. 아무리 기범을 부르고 그를 놓은 채 몸을 흔들어도 대답없이 하늘을 바라보던 기범은 이내 암전을 느끼며 뒤로 고꾸라졌고 그제야 제 이름을 부르는 듯 웅웅대는 소리를 먹먹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지만 머지않아 완전히 정신을 잃고 말았다. 몇몇 아이들은 울며 연신 기범의 이름을 불렀고 장난을 주도한 아이는 거의 패닉에 가까운 상태로 울먹일 뿐이었다.
그나마 천운이었던 것은, 마침 양호 선생님과 담임 선생님께서 점심식사 후 운동장을 산책중이셨기에 금세 그 현장을 발견하고 대처가 순조롭게 이뤄져 기범이 겨우 목숨을 구해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후로 기범은 꼬박 일주일을 병상에서 누워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사건이 일어난 이주 뒤에야 학교로 갈 수 있었다. 예전에는 이정도까지 심각하지 않았지만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화된 증상을 보이는 기범의 병에 의사 선생님은 진지하게 해외에서의 치료를 권했다. 하나뿐인 아들을 잃을 아찔한 위험을 겪은 기범의 부모님은 몇년간 정을 나눈 대기업 직장을 퇴사한 뒤 과감하게 해외로의 이주를 택했다.
다행히 오랜 시간 두 사람과 지내며 그들의 사람 됨됨이와 성격에 사람으로서 깊은 정과 매력을 느끼고 안타까운 기범의 사정을 알고 있던 회사 사람들 몇몇은 그들과 연이 있는 해외의 사람들과 연락해 두 사람의 일자리가 될만한 좋은 직장을 권해주었다. 의사 선생님 역시 기범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 해외의 명의에게 연락해 기범의 병을 장기적으로 치료할 준비를 돕고 기범의 부모님에게 이를 알렸다. 부모님은 연신 그들 모두에게 감사를 표하곤 혹여 기범의 병이 더 악화되랴 곧바로 기범과 함께 준비된 해외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기범의 전학 소식에 아쉬워한 그의 친구들 중 몇몇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고 마지막 날에는 기범에게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적은 편지를 한가득 건네며 작별인사를 했다. 장난스럽고 또래보다 조금 더 짓궂었던 아직 멋모르는 어린 아이일 뿐인 남자아이는 그들 중 가장 크게 울며 연신 기범에게 미안했다며 사과했고, 기범은 웃으며 괜찮으니 걱정말라고 그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기범의 가족은 비행기에 올라 한국을 떠났다. 해외로 간 첫 해 여름방학, 가장 달콤했던 한순간의 백일몽과 같았던 존재와 만난지 딱 일년이 되는 날, 기범은 이제는 앞으로 절대 그와는 다시 만날 수 없음을 실감하곤 숨넘어갈 듯 종일 울음을 흘렸다. 늘 의젓해 우는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던 아들이 괴롭도록 내내 울자 부모님은 그 이유를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너무나 서글프게 우는 그의 모습에 감히 이유를 묻지도 못한 채 기범을 조심히 품에 감싸안은 채 한참을 셋이 함께 울었다.
그리고 그 해 여름, 민호는 다시 기범을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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