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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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소년 中

"너, 혹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12년, 어느새 햇수로 1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기범은 시원한 그늘 아래 우뚝 서서는 태양이 찬란한 낮의 캘리포니아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기범은 그가 민호를 만났던 여덟살의 나이보다도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흐른 세월의 무게를 실감했고, 동시에 새삼스레 그 시간이 오래되었음을 느꼈다.

캘리포니아는 언제나 날이 맑았다. 바다가 있음에도 그 공기는 한국에서 느꼈던 특유의 습하고 짠맛이 나지 않았고, 그저 건조하고 뜨거울 뿐이라 그늘 아래에만 서도 시원스러운 바람이 기범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부분의 이들이 꿈에 그리는 쾌적하고 맑은 날이었지만, 기범은 가끔 한국의 날씨가 그립기도 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덟살의 8월, 하늘이 찬란했던 그 바닷가의 맑은 날이 그리웠달까.

한국에 남겨둔 기범의 미련은 오로지 민호 하나 뿐이었으니.

우주소년

캘리포니아에서의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부모님의 회사 사람들은 너무나 친절했고 또 진심으로 그들을 위했기에, 좋은 회사를 알아봐 준 것에 더불어 회사 근처의 좋은 주거지와 기범의 학교를 알아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기범은 사소한 싸움이 붙었을 때조차 동양인에 대한 그 흔한 인종차별 한 번 받지 않고 건강한 환경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거의 접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 가장 걸림돌이었으나, 기범은 언어를 배우는 데 흥미를 느꼈고 동시에 그에 재능도 있었다. 순식간에 영어를 배우고 구사하는 기범을 보면서 부모님과 주변의 친구들은 신기함을 느끼며 그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고, 학교 선생님들마저 기범에게 놀라 그의 남다른 언어적 능력을 눈여겨 볼 정도였다. 그러나 기범은 제가 가르치는 족족 흡수하고 스스로 더 나아가 앞서며 일주일 만에 대부분의 말을 깨우쳤던 한 소년을 기억했기에 제 능력이 새삼스럽다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 같은 시간을 보낸 의사 선생님과 몇번씩 연락을 계속한 기범은 종종 제 병으로 인해 어려운 점이 있을 때마다 그를 찾았다. 기범을 아꼈고 친절했던 의사 선생님은 귀찮은 기색 한번 보이지 않고 되려 제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한건지 세심하게 그의 물음에 조언을 주었다. 덕분에 특별히 큰 어려움을 겪지 않은 기범은 캘리포니아의 삶에도 금세 적응했다.

기범의 병을 완화할 수 있다는 그곳 캘리포니아의 의사 선생님과도 천천히 스며들 듯 정을 나누며 기범은 성실하게 그의 치료에 임했다. 의사 선생님은 기범의 병을 완전히 고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그의 심화된 증상이라던가 햇빛에 대한 예민함을 완화할 수는 있다고 말씀하셨다. 동시에 앞으로의 치료를 설명받은 그날 저녁, 기범의 어머니는 특정한 누구를 향하지 않은 감사 인사를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오랫동안 조용히 눈물을 흘리셨다.

몇 년 동안의 꾸준한 치료를 통해 기범은 그 증상이 점차 완화되었고,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에는 여전히 햇빛 아래 오랫동안 있을 수는 없지만 잠시간 스치듯 지나가며 반쪽짜리 낮을 사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것만으로도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었기에 기범은 매일같이 감사하는 삶을 살았다.

기범은 특유의 좋은 성격과 섬세하고 다정한 행동으로 늘 인기가 많았다. 여전히 독서를 취미로 했기에 아는 것이 많은 박식함까지 갖춘 데다가 이해력도 좋아 수업내용을 곧잘 따라오는 우등생이었고, 이에 학교를 다니는 내내 A반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좋은 학교에 가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며, 되려 명문이라 자자한 학교에서 기범을 데리고 오고자 스카우트 제의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성격 뿐만 아니라 외모 역시 눈에 띄는 아름다움을 지닌 기범이었다. 어릴 때는 아직 통통하게 올라와 있던 어린아이의 귀여운 볼살에 그저 언뜻언뜻 예쁜 모습이 비칠 뿐 그 모습이 빛나지는 않았던 기범이지만, 점차 나이가 흐를수록 성숙해지는 모습은 가히 아름답다 할 수 있었다. 장미를 떠올리는 놀라울 정도로 화려한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었지만, 새하얗고 투명한 피부 위로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별을 담은 눈을 가져 단아한 백합 한 송이와 같은 우아스러운 청초함을 지닌 그는 시간이 흐를 수록 그 향과 색이 짙어져 은근한 분위기를 내었다. 길쭉하게 뻗은 팔다리는 얇으면서도 옹골지게 자리하는 굴곡 없는 잔근육이 있어 허약해 보이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꽤 큰 편에 속했지만 커서는 큰 축에 속하지는 않는 적당한 키에서 성장을 멈췄음에도, 그 비율이 남다르고 몸의 태는 유려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키가 커 보이는 동시에 만인의 눈길을 사로잡곤 했다. 운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종종 체육 시간을 보내 땀을 흘리고 나면 성장기 남자아이들이라면 흔한 꿉꿉한 땀 냄새란 없이 향긋하고 달콤한 바닐라 향을 내었던 그는 이질적이고 신비로워서 한 번쯤은 닿아보고 싶은 매혹스러움을 내기까지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들로 기범은 특정 집단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두루두루 인기 많은 인기인이었다. 길을 걷는 내내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었으나, 한번 그를 의식하기 시작하면 결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달까. 여자아이들과는 장단이 잘 맞아 주로 깊고 편안한 관계로 어울리며 그들의 연애 상담이나 고민에도 성실히 반응해 조언을 주거나 감정에 공감해주었고, 남자아이들과도 그 나이대 성격 좋고 운동 잘하는 인기 많은 무리의 적극적인 초청들에 응해 주로 어울린 여자아이들 못지않게 잘 어울리며 그들과 함께 남부럽지 않은 학창 시절의 추억을 쌓았다.

그리고 기범은 본인의 성적 지향이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좋은 학교에서 좋은 친구들과 열린 교육을 받은 만큼 올바른 가치관과 성교육을 배운 기범이었기에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그의 친한 친구들 중 소수의 몇몇은 기범의 조심스러운 커밍아웃에 아무렇지 않은 담담한 반응을 보이며 평소같이 대했다.

아무래도 유교적인 사상이 남아있는 그의 부모님이었기에 저녁 시간에 자연스럽게 꺼낸 기범의 말에 처음에는 조금 충격을 받으신 듯했지만, 그날 저녁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고민하고 이야기를 나눈 부모님은 기범이 그들의 생각과는 다른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존중하고 인정해 받아들이면서 기범의 손을 잡고 응원한다는 말을 건네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동성혼이 합법이었기에 이곳의 사람들은 한국과는 달리 노골적인 시선이나 손가락질을 하지도 않았고, 어쩌나 저쩌나 기범은 그들의 소중한 아들임은 언제까지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부모님은 기범의 그러한 커밍아웃이 사실 동성애자를 의미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의 성적지향을 애써 부정하고자 하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들이 캘리포니아에서 12년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사이에 한국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기범은 갑자기 문득 멀거니 지평선을 바라보며 어딘지 서글픈 얼굴을 하곤 했다. 그 근본에는 기범이 제 마음속 가장 깊이 묻어둔 이야기를 언뜻언뜻 들춰내듯 겨우 드물게 들려주곤 하던 우주소년이 있었음을 짐작했기 때문이랴.

부모님은 기범의 우주소년 이야기를 모두 믿지는 않았다. 단지 어린 나이로 겪기에 힘들었던 시간이 많았던 만큼 즐거운 이야기 한 편을 떠올리고 그것을 실제와 착각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뿐이었다. 어른의 사고로 생각하기에 드문드문 말한 기범의 이야기는 공중 비행과 우주여행과 같은 신비롭고 공상적인 이야기로 들렸으니, 기범을 신뢰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의 이야기를 온전히 믿을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범이 그에게 얼마나 애정을 느꼈는지에 대해서, 기범의 부모님은 기범이 우주소년 이야기를 할 때 무심코 보이는 기범의 표정과 말투 같은 것들에서 감히 헤아릴 수도 없이 깊은 마음이 있음을 느꼈다. 그러니 기범이 마음이 맞는 익명의 동성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그때 만난 그 소년이 기범의 동성이었고 기범이 그 소년을 좋아했기에 동성에 매력을 느낀다 생각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기범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기범은 늘 매력적인 인기 많은 동성들 사이에서 함께 학창 시절을 보냈지만 단 한 번도 그들에게 성적인 사랑이나 끌림 따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정이 깊은 여자아이든 남자아이든 늘 진한 우정의 마음에서 멈출 뿐이었고, 친구들끼리 놀다 보면 흔히 서로에게 얘기하는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자신은 누구를 좋아한다는 쑥스러운 고백들 사이에서 기범은 늘 축하하고 응원하며 슬쩍 도와주기만 할 뿐 그러한 고백을 하는 당사자가 되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수 있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던 친구들도 기범의 말이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 뿐임을 알고 의심보다 놀라움을 표하길 선택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기범은 자신이 동성을 좋아한다기 보다는, 최민호 그 자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우주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기범은 힘이 들었다. 해결할 수 없음에도 사라지지는 않는 타는 듯 거대한 갈증만 느끼는 듯 한 그리움에 이제는 지쳤달까. 그저 머릿속으로 민호에 대한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짙게 끼치는 그날 바다의 향기와 민호에게서 느껴졌던 지금도 선명한 그 특유의 부드러운 우드와 새벽 공기의 향이 기범을 감싸는 듯했기에 숨이 막혀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이랬기에 기범은 민호에 대한 이야기를 부모님께만 겨우겨우 오랜 시간을 들여 꺼내놓았던 것이기도 했다. 심지어 부모님께조차도 민호의 이름은 말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목에 채웠던 여덟살을 이후로 단 한 번도 빼 본 적이 없는 그때의 목걸이가 혹여 반응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12년이란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이제 기범은 종종 부모님의 말씀처럼 그때의 일이 단순히 제가 떠올린 상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목걸이는 사실 천문대의 주인이 책과 함께 준 것인데 민호가 준 것이라 착각하고, 우주여행은 생생했지만 그저 아주 감각적인 꿈을 꾸었을 뿐이었던 것이지. 일종의 합리화와 같았다. 그렇다고 목걸이에 최민호의 이름 세 글자를 부르기에 기범은 겁이 많았다. 정말, 정말 만약에, 그와의 일이 현실이었다면? 애써 합리화를 하고는 있었지만 속으로는 내심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불렀음에도 제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합리화는 더 이상 합리화라 할 수 없었다. 사실이 되는 것이지. 그저 기범은 꿈을 꿨을 뿐이었던 것이고, 그가 사무치게 그리워한 모든 것은 사실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걸 확인받은 것일 테니까. 그러니 기범은 아리송한 두 갈래의 경우에서 무엇 하나를 확증 받길 미뤘다.

그가 나타나지 않으면, 캘리포니아에 와서 처음 맞이한 아홉살의 여름 방학 그날처럼 온종일 울다가 이번에는 끝내 탈수로 죽어버릴지도 몰랐으니까. 기범은 생각보다도 훨씬 여리고 약했으며, 눈물이 참 많았다.


"내일 있을 이번 프롬에도 갈 거지? 이제는 정말 마지막인데."

"..."

"가기 귀찮다는 말 같은 건 하지 말고. 나랑 가자. 3년의 프롬킹 자리를 화려하게 독재하고 내려오셔야죠, 황제 폐하."

캘리포니아에서는 최고라고 소문이 자자한 사립 학교였기에, 최고의 이름에 걸맞도록 무엇 하나 스케일이 작은 것이 없는 학교에서 한 해의 최대 행사인 프롬파티였다. 대개의 학교에서 진행하는 졸업생들만으로 꾸린 프롬파티는 너무 크기가 작아 기분이 나지 않는다며, 이곳 학교는 졸업을 3년 앞둔 학년부터 프롬 파티를 즐기도록 했는데, 기범은 인기인답게 선배들과 친구들이 손에 이끌려 프롬에 꼬박꼬박 출석한 것에 곁들여 프롬킹을 놓친 적이 없었다. 그 이유에는 다른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학교에 입학한 첫해 체육제에서 기범이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나와 벌인 댄스배틀 게임을 통해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을 휘황찬란한 전율의 도가니로 몰아넣어 1위를 하고 큰 환호를 받은 사건의 영향이 컸다.

남다른 스케일의 프롬파티, 그것도 이제 기범은 졸업식을 일주일도 남기지 않은 최고 학년의 시점이었으니 이번 프롬은 그를 위한 화려한 마지막 무대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처음 프롬을 갔던 설렘보다는 그곳에서 쏟을 에너지와 잔뜩 녹초가 되어 돌아와 침대에 쓰러질 이후를 먼저 떠올린 졸업 예정생이었던 기범이기에, 은근슬쩍 귀찮다는 말을 하려 했던 것은 곧바로 콘레드에게 제지당했다.

"그렇지만 힘든데."

"힘들다고 프롬킹이 마지막 프롬을 버려? 절대 안돼~"

"헤레이스 무리나 케니스네 애들이랑 가면 되잖아..."

"걔네도 올 거고 너도 갈 거고, 그치?"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무색하게 단칼진 콘레드의 말에 기범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밀며 일부러 크게 한숨 소리를 내었다. 콘레드는 익숙한 듯 그저 즐거움에 작게 웃더니 아무렇지 않게 무시한 채 기범의 세련된 옷장을 열어 어느새 그의 옷을 고르기 시작했다.

"...안돼, 나 파트너 없어."

"뭐라는 거야. 기범아, 우리 자기 객관화 라는 걸 해볼까? 너랑 파트너 하고 싶다는 애들이 수두룩해요~"

그렇지만 정말 파트너는 없는데, 기범이 중얼거리자 콘레드는 잠시간 아무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옷 고르기에 열중하다, 옷장 한켠에 고이 모셔진 고급스러운 정장을 발견하곤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그럼 이참에 만들어봐봐. 네가 아직 연애를 안 해봐서 잘 모르는 걸지도 모르잖아."

인기는 그렇게 많은데다 매년 꾸준하게 고백도 받아왔으면서 지금껏 한 번도 연애를 안 해 본 게 말이 돼? 너 고백도 여자애들 남자애들 안 가리고 많이 받았잖아. 네가 동성애자라는 거 밝히지도 않았는데도 오히려 남자애들이 더 많이 했지. 밝히면 매일같이 고백하는 애들이 줄 서 있을걸. 근데 이렇게까지 버티는 거, 그 정도면 고집이고 오기야.

늘 능글맞고 능청스러운 콘레드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기범을 보며 차분히 말했다. 평소에 말 잘하기로 소문난 기범이지만 그런 친구의 말에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고, 그저 조금 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콘레드를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콘레드는 그런 기범의 반응이 알겠다는 긍정이란 것을 알았기에 다시 원래의 능청을 찾아 싱긋 웃으며 기범에게 옷을 건네었다. 화려한 블라우스 위에 걸치는 정장 재킷은 은빛의 실로 자수가 놓여있어 단아한 듯 수려했고 조화로워 부담스럽지 않았다. 기범의 부모님께서 며칠 전 마지막 프롬을 위해 사주신 수제작 옷이었기에 당연히 기범과 기막히게 어울릴 게 분명했고, 그런 옷을 어떻게 귀신같이 찾아 건넨건지 기범은 옷을 선물한 부모님을 떠올려서라도 프롬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옷을 받아드는 기범에 콘레드는 화색인 얼굴로 그 옆에 앉아 종알종알 말을 쏟았다. '그' 김기범이 이번 기회에 파트너를 만들기로 결심했으니 기범과 완벽하게 맞을 사람으로 찾아 결코 후회 없는 프롬을 선사해주겠다며 비장하게 말하는 콘레드의 말에 기범은 마지못해 픽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 더 신이 난 콘레드는 당장 그 소식을 저와 기범의 또 다른 친구들에게 알렸고, 함께하는 몇 년 간 경이로울 정도로 일절 타인에 대한 연애적인 감정이나 관심 없이 도인처럼 지내던 학교 최고의 인기인이 콘레드의 설득에 결국 파트너를 찾아보는 것을 승낙했다는 소식에 친구들은 모두 뛸 듯이 기뻐하며 온갖 열정을 불태웠다. 소식을 알려주자마자 미처 내용을 볼 새도 없이 위로 끊임없이 올라가기만 하는 채팅창에 기범은 어휴 지겨와, 장난스럽게 말하면서도 그들이 기범을 위하는 마음에 따스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기범아, 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응, 뭐?"

"너, 혹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어?"

콘레드의 말에 기범은 순간 몸을 굳혔지만 티를 내지 않고 금세 태연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들에게는 일절 우주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기에 짚이는 구석이 없을 터인데, 감도 눈치도 좋은 학교의 또 다른 인기인은 그 명성에 걸맞게 기범의 그간 묘했던 분위기를 느낀 듯했다. 기범의 도리질에 고개를 갸웃하며 어깨를 으쓱인 콘레드는 다시 채팅창으로 주의를 돌려 친구들과 김기범의 파트너 찾기에 몰입했고, 기범은 잠시간 말이 없다 곧 담담한 어조로 콘레드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물어?"

"별건 아니고, 넌 항상 이런 얘기를 할 때면 세상 사랑에는 관심 없는 듯하면서도 무언가를 아주 그리워하고 있는 것 같았거든."

그렇구나, 기범이 티를 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콘레드가 눈치가 빨랐기에 그 사소한 것까지 눈치챈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웅얼거리듯 대답하곤 말을 흐린 기범은 탁상에 놓아둔 핸드폰을 집어 들어 진심이냐는 친구들의 물음으로 도배된 채팅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응, 기범은 토독 타자를 쳤지만 보내는 전송 키를 누르지 못한 채 그대로 한참을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이내 입력란에 적은 그 대답을 지워버리고 채팅창을 꺼버렸다. 조금 전 콘레드의 말이 다시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난 언제나 너를 기다리고 있어왔나봐. 지금까지도.


"김기범!"

모두가 목을 빼며 기다린 프롬날이 되었다. 기범은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고 백합 한 송이를 준비해 프롬 파티장으로 들어갔고, 파티장을 이곳저곳 두리번거리다 멀리서 제 이름을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에 웃으며 그들에게로 향했다.

"기범이의 꽃이 드디어 파트너에게 전해지겠구나..."

"정말 나는 졸업하기 전까지 이런 모습을 못 볼 줄 알았는데."

"이게 모두 내 덕이다, 이거야. 기범아 잘 되면 나 비싼 거 사줘야 한다?"

주인공의 등장에 왁자지껄 말이 많아진 친구들에 기범은 웃음을 흘리곤 알겠다고 말하며, 당사자인 그는 차분한데 되려 흥분한 친구들을 진정시켰다. 그래서 그들이 고심한 제 파트너는 누구냐고 묻는 기범의 물음에 시선을 맞춘 친구들은 주체하지 못하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에스핀, 작년 프롬퀸 그 친구야."

"진짜 대단하지 않냐? 남자애들의 그렇게~ 그렇게~ 쏟아지는 구애에도 시선 한번 안 주던 퀸이 직접 너랑 파트너를 하겠다고 찾아왔다니까?"

기범에게 자랑하듯 말하면서도 본인들이 이뤄낸 업적이 그리도 환상적인지 어느새 그들끼리 잔뜩 설레는 마음으로 에스핀에 대해 이야기하는 친구들 몰래, 일을 주도한 콘레드는 기범의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와 기범에게 속삭였다.

"네가 커밍아웃을 제대로 한 게 아니라 나한테만 따로 알려준 거니까, 우선 여자 파트너를 찾아보려 했어."

콘레드의 말에는 파트너를 고민하며 여러 번 고뇌했을 부분에 대한 그의 다정한 배려가 있었기에, 기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표했다. 별일 아니라며 샐쭉 웃은 콘레드는 자연스럽게 친구들의 대화에 어울렸고 기범 역시 어색하지 않게 대꾸하며 반응했다.

인기 많은 친구들의 마찬가지로 인기 많은 파트너들이 하나둘 그들이 있는 자리로 찾아왔고, 왁자지껄 했던 그들의 자리는 점차 그 목소리가 줄어들어 갔다.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는 파트너와 각자가 준비한 꽃들을 주고받으며 자리를 나서는 친구들은 그들과 파티장의 중앙 홀로 내려가기 전 하나같이 기범에게 윙크를 하거나 어깨를 두드리는 신호를 주었고, 기범은 지겹다는 듯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면서도 입가에는 웃음을 띄운 채 그들에게 손 인사를 건네었다.

기범의 모든 친구들이 제 파트너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러 나가자 마지막으로 자리에 남은 이는 기범 혼자뿐 이었다. 졸업생들에게는 암묵적으로 술을 허용하는 자리였음에도 꿋꿋하게 도수없는 탄산수를 고집한 기범은 제 파트너를 기다리며 한 모금씩 음료를 홀짝였다.

"기범, 맞죠."

그리고 곧 머지않아 들리는 목소리에 기범은 고개를 돌려 제 파트너를 바라보았다. 가히 프롬퀸다운 돋보이는 고양이상의 외모와 매력적인 분위기를 가진 에스핀은 제 몸매를 드러내는 붉은 빛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기범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기범이 생긋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고개를 끄덕이자 에스핀 역시 한 손을 내밀며 본인이 에스핀이라 소개했다. 기범은 그 손을 마주 잡고 가볍게 흔들어 악수한 뒤, 제가 준비한 백합 한 송이를 매너 있게 선물했다. 에스핀 역시 그녀를 닮은 만개한 장미 한 송이를 기범에게 건네주었고, 기범의 팔에 손을 넣어 두르곤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프롬의 홀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은 프롬 파티장을 가는 족족 모든 이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프롬퀸과 킹의 조합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한명은 자자한 김기범이요, 상대는 단칼 지기로 소문난 에스핀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파트너와 함께하는 축제인 프롬인 만큼, 두 사람을 힐끔힐끔 살피던 것도 잠깐일 뿐 모두 각자의 파트너에 집중하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에스핀과 이야기하는 기범은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으로 고동치는 심장에 대한 설렘이나 간지러움이 아니라, 마음이 특히 잘 맞았던 여자아이들과의 시간에서 느꼈던 것과 결이 맞았다고 할 수 있었다. 기범은 아무리 예상은 했다지만 정말로 아무런 동요의 마음조차 들지 않자 정말 어쩔 수 없음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언제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은 있기 마련이었다. 대화가 끊긴 잠시간의 고요함이 지나자 에스핀은 슬쩍 시끌벅적한 프롬이 한창인 중앙홀에서 그 가장자리로 기범을 이끌었다. 기범은 의문스러움을 느꼈지만 순순히 그에 응해 그녀를 따라갔고, 에스핀은 적당히 어색하지 않은 자리에서 사람들과 섞여 있으면서도 동시에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에스핀이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린 기범은 살짝 허리를 숙여 그녀에게 제 귀를 맞춰 주었고, 에스핀은 화색인 얼굴로 그의 귓가에 제 입술을 가져가 한손으로 그 모습을 가린 채 기범에게 속삭였다.

"기범, 사실 지금 난 연인이 있어요."

기범은 순간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닐까 슬쩍 고개를 돌려 에스핀의 얼굴을 살폈다. 연인이 있는데 그 상대와 파트너를 하지는 않고 나와 파트너를 하기 위해 직접 찾아왔다고? 하지만 에스핀은 사뭇 진지했고 또 어딘지 무언가를 더 말하고 싶어 다급해하는 느낌이 있었기에 기범은 순순히 다시 귀를 대어 그녀의 말을 경청해 주었다.

"당신을 속인 건 미안해요. 하지만 사정이 있었어요. 지금 우리의 건너편에 서 있는 아이들 중 중간에 있는 금발의 아이가 제 애인이에요."

기범은 그 말에 정면으로 시선을 돌려 에스핀이 말한 이를 찾아 살폈다. 그러자 건너편 칵테일 바에서 예닐곱 명의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만담을 나누는 여자아이들의 무리 중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여인이 기범의 눈에 들어왔다. 조금 긴장한 듯한 얼굴로 기범의 반응을 살피던 에스핀은 그의 반응이 아무렇지 않은 담담함을 보이고 있음에 다행이라는 듯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전보다 편안한 어조로 기범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보다시피, 저는 저 아이와 사귀고 있어요. 벨리사, 예쁜 이름이죠? 하지만 저 아이는 겁이 많아서, 졸업을 앞두고 이 열애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혀 화제의 중심에 오르고 싶지 않아 했고요. 그래서 비밀 연애를 시작했어요."

"그래서 파트너로 그녀와 함께할 수는 없었군요. 그렇지만 왜 제게 찾아왔죠?"

"피곤할 정도로 요청받는 파트너 신청이 질렸고, 파트너 없이 가기에는 정말 그냥 갈 거냐며 재차 확인하는 친구들에게 일일이 대답하기 힘들었거든요. 마지막 프롬이니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다 오고 싶었고, 파트너가 당신이라면 주제를 아는 아이들은 제게 하려던 파트너 요청을 다른 아이에게로 돌릴 테니까요. 당신을 뛰어넘을 최고의 파트너는 없잖아요?"

"그런 칭찬을 받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데. 그래서, 지금 당신께 제가 도움이 되었나요?"

"당연한 말씀을. 겸손한 거라면 좋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면 조금 더 생각해봐요.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관대해질 필요가 있을 테니까. 잠깐 이야기를 나눈 거였지만, 난 당신이 누구라도 탐낼 빛나고 따스한 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기범은 말간 웃음소리를 내며 에스핀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에스핀 역시 기분 좋은 듯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를 보였다. 이제는 서로 마음이 맞는 친구가 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본 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서로에게 인사했고, 흔히 파트너와 헤어질 때 건네는 손등의 키스 대신 처음과 같은 악수를 나눴다.

"이제 나는 내 종달새에게 가보려고요, 잠시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종종 인사하고 싶네요, 당신과."

아, 그리고. 당신도 연을 잡아내길 바라요. 나와 같은 부류 같은데. 기범은 다 안다는 듯 쿡쿡 웃으며 덧붙이는 에스핀의 말에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고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웃어 보였다. 에스핀은 또각거리는 구두소리를 내며 그의 애인이 있는 건너편으로 향했고 기범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프롬이 한창인 홀의 중앙 무대를 바라보았다.

단이 높지 않은 무대에서는 잔잔히 흘러나와 홀을 가득 채우는 분위기 있는 음악에 맞춰 이곳 프롬파티만의 왈츠를 추는 사람들이 서로의 스텝과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개중에는 친한 친구와 즐거움으로 추는 사람, 간지러운 호감과 연애 사이에서 이제는 막 꽃봉오리가 터져 개화하기를 앞둔 관계의 사람, 이미 안정기에 접어든 오래된 연인 사이의 사람까지 다양한 이들이 한창 춤을 추는 데 전념하고 있었다.

춤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는 기범이기에 프롬파티의 왈츠 같은 건 애저녁부터 익히고 있었고 파트너만 있다면 기범은 당장 무대로 올라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춤을 출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파트너 없이 혼자 출 수는 없는 노릇에다가 그렇다고 새로운 파트너를 즉석에서 찾아볼 의향 또한 없었기에, 기범은 그저 카페처럼 탁상과 함께 준비되어있는 폭신한 소파들 중 무대가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선 춤을 추고 있는 제 친구들을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러던 도중이었다.

"파트너가 없으신가요?"

기범은 제 바로 위쪽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무대를 향해있던 시선을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옮겼다. 저음 계열에 가까운 낮고 편안한 목소리는 안정감 있었고 또 매력적이라, 누구라도 고개를 돌리게끔 하는 능력이 있었다.

고개를 돌려 마주한 시선의 끝이 닿은 곳은, 앉아있는 기범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한 청년이었다. 청년이 입고 있는 고딕풍의 화려한 정장은 그것을 보는 상대가 과함을 느낄 법도 했지만, 청년에게만큼은 신기할 정도로 잘 어울려 그저 화려하게 아름다울 뿐이었다. 다른 빼어난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뒤처짐이 없이 되려 돋보이는 비율을 가진 그는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우월한 키를 가지고 있는 데다가 팔과 다리 역시 길쭉하게 뻗어 있어 모델을 보고 있는 듯한 감상을 주었다. 정장에 꽁꽁 감싸져 있음에도 드러나는 탄탄한 몸의 균형 잡힌 라인과 우락부락하지 않지만 단단하고 꽉 찬 근육으로 적당히 체격 있는 몸을 가지고 있었고, 숱이 많은 검은 머리는 곱슬머리같이 자연스럽고 차분한 펌으로 세팅되고 단정히 다듬어져 있어 그와 더없이 잘 어울렸다. 하얀 편은 아닌 옅은 갈색빛을 띄고 있었지만 드러나는 손목 같은 것으로 보이는 피부는 한눈에 보기에도 깨끗하고 좋아, 그간 잘 관리되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었는데, 특이하게도 얼굴을 가린 검은 베일 때문이었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의 천이 아닌 은하수를 실로 만들어 엮어 짜낸 듯 묘하고 신비로운 베일이라, 이질적이기 보다는 하나의 패션 포인트처럼 그와 잘 어울린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기범은 분명 학교를 다니는 몇 년 동안 그와 비슷한 인물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 이곳 학교를 다니지 않는 외부의 새로운 존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누군가와 혼동되거나 아이들 사이에서 한 번도 입에 오르내리지 않기에는 우월하고 눈에 띄는 화려한 모습을 지닌 청년이었기에 그것을 기정사실인 것처럼 확신한 것이기도 했다.

잠시 넋을 놓고 미지의 청년을 감상하던 기범은 곧 제가 초면인 이에게 실례했음을 깨닫고는 정신을 차렸다. 그러다 기범은 그의 물음을 다시 떠올리며 대답을 기다리는 청년에게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청년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 뜸을 들이다 기범에게 또다시 물었다.

"그럼, 저와 파트너를 해보는 건 어떤가요?"

이런 인물이 파트너가 없다고? 물음을 받은 기범이 곧바로 떠올린 생각은 거절도 승낙도 아닌 의아스러운 당혹이 섞인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러한 의문으로 동그랗게 눈을 뜬 기범을 보고 청년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조금 당황한 듯 몸을 움찔거렸다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당신이 괜찮다면요.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물러섬이나 둘러댐 없는 돌직구에 기범은 오랜만에 꽤 신선한 놀라움을 느끼고 있었다. 기범에게 연심을 품고 접근하는 이들은 훤히 보이는 그들의 마음과 의도를 어떻게든 애써 둘러대 보려 가식을 보였는데, 그와는 다르게 가식이나 꾸며냄 하나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제 솔직한 의도를 고하는 이는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기범은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제가 하고자 하는 말들은, 설령 그것이 낯간지러운 말이라 할지라도 한치의 꾸밈없이 솔직하게 표현하던 낭만적인 소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감상은 생각보다 괴롭지 않았기에, 기범은 평소라면 가볍게 거절하고 지나갔을 요구를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기범은 정말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동시에 정말 그러고 싶은 기분을 느꼈다.

기범이 잠시간의 상념을 보내고 이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보이자 청년은 어딘지 즐거운 기색으로 에스코트하듯 기범에게 제 한 손을 내밀었다. 베일 너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기범은 그가 어떤 것을 느끼고 있는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같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려 낼 수 있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저 자연스럽게 알아차렸달까.

기범은 청년이 건넨 손에 제 새하얗고 고운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얇고 길게 뻗어있고 군데군데 잔뼈가 드러났으며, 그 피부는 투명하게 새하얀 데다가 관절의 마디에는 붉은 기색이 있는 기범의 손은 예쁘기로 소문이 자자한 손이었다. 그러나 청년 역시 그에 못지않은 잘생긴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범이 위에 올리자 더 두드러진 것은 그의 옅은 갈색빛의 피부색과의 대조와 잔근육이 드러난 직선적인 손의 형태였다. 무엇보다도, 손이 작은 편이 아닌 기범임에도 청년의 손 위에 올려보니 조금 아담하게 느껴질 정도로 크고 긴 손을 가진 청년이었다.

청년은 기범이 제가 건넨 손 위에 그의 손을 올리자 기다렸다는 듯 부드럽게 그 손을 감싸 잡았다. 곧이어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무대로 향하는 청년의 걸음에는 여유로움이 있었고, 청년은 그 존재만으로도 빛이 나고 신비로운 오묘한 분위기를 내었다. 무대로 향하는 동안 기범과 그를 에스코트하는 정체 모를 청년을 힐끔힐끔 살피는 이들도 있었으나, 그런 건 기범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기범은 지금 어딘지 묘하고 독특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낯설지 않은 청년에게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무대의 단상에 올라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는 청년을 기범이 따랐고, 청년은 두 사람이 춤을 추기 적당한 공간을 둔 빈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청년은 몸을 돌려 기범과 마주 보았고 한 손으로는 기범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로는 기범의 허리를 감싸 둘렀다. 그 일련의 과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기범은 초면인 상대와 프롬 파트너가 되어 프롬파티 왈츠를 춰도 되는건지, 애초에 청년은 누구인지 따위의 생각을 거칠 새도 없이 조금 넋을 놓은 채 무의식적으로 청년과 같이 자세를 잡았다.

기범이 그것을 의식했을 때에는 이미 타이밍을 놓친 뒤라, 나긋하고 여유로운 몸짓으로 왈츠를 추기 시작하는 청년에 기범도 휩쓸리듯 왈츠를 추기 시작했다. 프롬의 왈츠를 파트너와 추는 첫 순간이었다. 그 낯선 감각은 어딘지 어색하기도 했지만 설레는 것이기도 했다. 잔잔하게 흐르는 보드라운 선율의 왈츠에 어울려 스텝을 밟고 몸을 움직이며 턴을 도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감상이 있었으나, 별개였던 각자의 스텝을 하나로 맞추는 동안 줄곧 기범을 바라본 청년의 한결같은 시선에 기범은 아주 오랜만에 간지러운 바람이 그를 스치고 가는 듯한 감상을 받았다. 아주 그립지만, 동시에 애타고 서글픈 그 선명한 감각.

기범의 선은 유려하고 고왔으며 모든 동작이 어색함 없이 부드러웠다. 춤이라면 언급되지 않는 자리가 없는 그다운 실력이었고 능력이었달까. 그렇지만 동시에 시선을 끄는 것은 청년의 춤이었다. 부드럽다기 보다는 절도 있는 그의 춤은 힘이 실려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부담스러운 면이 없었다. 기범은 그 바탕에 제 앞의 청년 특유의 분위기로서 은은하게 깔린 원초적인 달콤함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자아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시선을 끄는 돋보이는 외양의 소유자인 둘인데다가, 주위의 분위기를 압도하는 듯 아우라가 있는 두 사람이었다. 그에 춤을 추지 않고 그저 구경하던 이들 몇몇이 그들의 춤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구경한 지가 꽤 되었지만 기범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상관하지 않고 그저 신비로운 베일 너머로 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을 청년의 눈과 그의 눈을 맞추었다.

기범은 오롯이 무언가에 집중한다는 감각을 직접 실감하고 있었다. 프롬파티의 다른 소음은 먹먹하게 들릴 뿐이었고, 기범에게 감각되는 것들은 청년, 그와 추는 춤, 은은한 노래 세 가지가 전부일 뿐이었다. 마법에 걸린 듯, 무언가에 홀린 듯 어느새 청년에게 사로잡힌 기범은 어느새 그와 청년 단둘이서만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느꼈다. 무대 위를 비추는 스포트라이트가 기범과 청년만을 위한 것이라는 듯 강렬한 감상은 기범으로 하여금 청년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알지 못한 채 미스터리하고 마법 같은 시간을 간직할 수 있기를 바라게 했다. 그럴 수 있다면 기범은 청년을 기범의 기억 속 그때의 그 우주소년이었을지도 모른다며 멋대로 생각하고 위안삼을 수 있을지도 몰랐으니.

잠시만, 우주소년? 기범은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에 그저 생각을 맡기고 춤을 추다, 문득 떠오른 가정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춤을 멈췄다. 분위기에 취해 머릿속에 난잡하게 펼쳐지는 상념 속에서 몽롱하게 반쯤 풀린 눈을 하고 있던 기범의 눈에 이채가 번뜩 떠오르며 이제 그 눈은 베일 너머 청년의 눈과 마주하고 있었다.

스르륵, 기범이 청년의 허리를 감싼 손과 청년과 마주 잡은 다른 한 손을 놓아내리자 청년 역시 그 손을 놓고 기범과 마주 본 채 섰다. 기범은 주체되지 않고 그 크기를 부풀리는 가능성에 대한 만약의 가정들에 파묻혀버렸고, 평온했던 기범의 맥박은 한순간 불타오르듯 거세게 고동쳐 금방이라도 목구멍을 올라 입 밖으로 튀어나올 듯했다. 흐르는 음악은 아까와 같이 잔잔하기 그지없을 뿐인데, 온갖 폭죽과 난잡한 소리가 뒤엉켜 주위를 메우는 듯했다.

"당신이,"

기범은 목이 메이는 듯 답답한 느낌을 느꼈다. 심장이 터져버릴 것처럼 미치도록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선명했다. 전과는 달리 그 끝이 여리게 떨리는 긴장한 기범의 목소리에 청년 역시 전보다 조금 뻣뻣하게 굳은 몸으로 기범의 앞에 우뚝 마주 서고 있었다. 기범과 마찬가지로 긴장한 청년의 모습에, 기범에게 사정없이 몰아쳤던 순간의 '만약'에 번쩍, 스파크가 튀었다.

"네가,"

당신이 말야, 당신이, 네가, 정말, '그'라면,

"민-,"

"김기범, 여기 있었네!"

민호야? 마침내 고단했던 12년을 지나 겨우겨우 입 밖으로 나오려던 그리운 이름은 타이밍이 어긋난 누군가의 부름에 속절없이 무너져 끊겨버렸다. 기범은 토해내듯 한숨을 쉬면서 제 이름이 불린 방향으로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던 몸은 예민해져 있었기에 그 움직임은 평소 기범의 것과는 다르게 날카로웠고, 기범의 말이 끊겨버리자 청년도 덩달아 맥이 풀린 듯, 뻣뻣한 긴장으로 은근하게 올라가 있던 그의 어깨가 작게 쉬는 한숨과 함께 느릿하게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기범은 그의 이름을 부른 이이자 저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팩 노골적으로 얼굴을 구겼다. 원체 누군가를 적나라하게 싫어하지도, 설령 싫어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티를 내지는 않는 기범이었지만 그 상대에게만큼은 예외였을 만큼 그는 기범이 끔찍하게 싫어하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한참 찾았잖아. 그쪽은 누구? 아니 뭐... 사실 알고 싶진 않고, 내가 잠시 김기범이랑 할 말이 있어서."

"...금방 올게. 잠시만 기다려요."

기범은 금방이라도 상대, 에리스에게 육두문자를 퍼붓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청년의 앞에서 그러는 것은 무례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가까스로 참아내고는 청년에게 차분하게 일렀다. 은근슬쩍 기범의 어깨에 제 팔을 감싸두르며 어깨동무하는 에리스가 진저리난다는 듯 기범은 미간을 구기며 그에게서 몸을 떨어뜨리려 했지만,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압박해 붙어오는 에리스였기에 기범은 결국 그와의 접촉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포기한 채 그저 그를 향해 은근하게 경멸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잠시 실례. 마음 같아서는 기범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억지로 기범을 끌어당긴 에리스를 뿌리치고 싶은 기범이었지만, 기범은 졸업을 앞두고 프롬파티를 즐기는 제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 그저 에리스에게 눈을 흘기곤 마지못해 그가 이끄는 곳으로 향해주었다. 그런 기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던 청년은, 그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들을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기범이 청년에게 이르고 간 기다리라는 말이 있었기에 청년은 그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서 있을 뿐이었다.

흐르는 음악은 여전히 달콤한데, 춤을 추던 순간의 향기는 아직까지도 황홀한데. 청년은 한순간 차게 식어버려 갈 곳 잃은 빈손과 또다시 혼자 남게 된 낯설지 않지만 결코 익숙해 질 수 없는 감각이 오늘따라 특히나 사무치게 공허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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