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순환

뱀의 순환 2장

소문

창백한 점 by 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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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룹 샤이니의 멤버 이태민, 김기범에게 영감을 받아 그 외형과 이름을 차용하여 가공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 90-00년대 버블 경제가 가라앉은 뒤의 일본 배경, 경찰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던 시절의 야쿠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but 짭 느와르)

-이에 따라 태민과 기범은 야쿠자 조직원이 됩니다.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

* 위 사정으로 일본어 대화는 []로 표기됩니다.

* 트리거 요소: 폭력, 폭행, 도박, 사채, 강간 등 다소 강압적이고 잔혹성이 포함된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 이 이야기는 제가 늘 그러했듯이 사랑을 표방합니다.

「그거 알아? 저기 강 너머에 사는 두 조선인 꼬마.」

「아- 둘이 같이 사는 거지, 역시?」

「음, 그건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파친코 업장 주인네 애들이라던가? 그랬다고 들었거든.」

「뭐 저쪽이 다 그렇지. 그래, 그 꼬맹이들은 조금 이상하긴 했어. 보면 소름 끼친다고 해야 하나.」

「그게, 얼마 전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잖아? 그 꼬마들이, 자기들을 돌봐 주던 삼촌을 죽였데.」

기범은 가위를 들었다. 이발을 위한 가위는 항상 태민만 쓰는 1층 다목적실 서랍에 있었다. 기범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미용 가위와 대충 집에 있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잘라 태민의 어깨에 걸쳐 줬다. 남자 머리란 늘 빨리 자라고 마는지라, 매번 태민이 있는 곳까지 와서 그의 머리를 손수 잘라 줬기에 익숙한 일이었다. 태민이 없던 4년간에 남에게 쓰진 않았어도 자기 머리를 조금씩 다듬는 데 쓰기도 해서 익숙했다. 기범은 가위를 들어 태민의 머리칼을 한 번 들추고서는 거울 속 태민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잘라 주면 되는데?"

그러자 태민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이 원하는 대로.' 그러고서 내 가위 든 손에 아무렇지 않게 제 머리를 가져다 댔다. 기범은 이럴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당장 그의 목, 급소에 이 날카로운 날붙이를 찌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개의치 않고 제게 머리를 내맡겼다. 아무런 동요도 없이 평온한 낯으로. 거울을 통해 비친 태민은 자신을 부드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 서걱서걱. 그의 머리칼을 잘라 주는 제 표정은 지독히도 서늘했다. 반면 그의 낯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저 밖에서 잔잔히 나뭇잎들이 소란스레 부딪히는 소음이 들려온다. 통풍이 잘되도록 지어진 다목적실에 찬 바람이 들어온다. 매끈한 결의 다다미가 제 무릎에 닿는 감촉이 썩 좋지 않았다.

"너는 언제까지 나한테 머릴 맡길 셈이야."

그를 나무라는 목소리에는 자연스레 기운이 빠져 있었다. 기범은 이 행위가 일종의 의식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태민은 그에 환히 웃으며 입술을 삐죽였다. 웃음기를 한껏 머금은 목소리가 여전히 소년 시절의 이태민이었다. 그들의 주변으로 사락사락 내리는 검은 머리카락. 태민 것이었던 흔적들. 서서히 드러나는 그의 얼굴은 이전보다 확실히 성년의 느낌이 많이 나고 있었다. 각진 턱선과 반듯한 콧대가 그중 하나였다.

"평생 해 주면 안 돼? 나 다른 사람한테는 머리 못 맡기겠어. 형은 감각도 좋잖아."

사각-. 그의 말투는 부드럽고 무척 일상적이었기에, 칼날을 놀리는 제 손목을 덥석 잡는 투박한 손에 화들짝 놀라 버렸다. 앞머리 쪽을 자르고 있던 차여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눈을 찌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범의 손은 따뜻함이 가득 담긴 그의 단단한 손아귀에 의해 아래로 이끌려 갔다. 그에 자연스럽게 그의 사선 뒤에서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이고 있던 상체가 앞으로 쏠리면서 그와 몸을 겹쳐 기대게 됐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바로 얼굴을 옆에 맞대게 된 자세 그대로 기범은 눈만 깜빡였다. 기범의 숨결이 닿는 목덜미에, 똑같이 서늘한 가위의 뾰족한 끝이 조준되어 있었다. 태민은 거울 속의 그를 보고 있었고, 이내 기범의 시선 역시 자연스레 그에 이끌리듯이 올라가 눈이 마주쳤다. 태민은 그에게 작게 속삭였다.

"정확히 여기였어."

"……."

태민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마치 유혹하듯이 기범의 귓가에 속삭였다. 여전히 옆으로 흘긴 눈은 거울 속을 향했다. 잘 봐.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형이 가르쳐 줬잖아. 기억나?"

기범은 그만 눈을 내려 감고 말았다. 짙은 검은 속눈썹이 내려앉고, 그 가여운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태민의 목 근처로 어느새 붉디붉은 피들이 흥건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스락거리며 그의 어깨를 덮던 비닐은 찾아볼 수도 없을 정도로 끝이 없었다. 가위를 쥔 손은 어느새 바닥을 짚었다. 기범은 그 상태로 아래로, 아래로. 거의 쓰러지듯 몸을 웅크리고서 어느새 자신을 압박하는 거대한 울림에 반항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자신을 따라오는 저주 같은 장면을. 낡은 책처럼 빛바랜 기억이 그를 잠식했다.

[내가 그랬어, 형.]

[그러니까 형은 걱정하지 마.]

그리고 새하얗게 웃던 어느 소년이 제게로 몸을 기울인다. 아주 미약한 숨을 내쉬면서, 무척이나 나약한 껍질을 뒤집어쓴 채, 그에게서 온기를 갈구하듯이. 그의 온몸을 껴안으면서.

[나를 죽이고 싶어?]

"헉!"

기범은 전신을 옭아매는 무게에 숨이 차올라 가쁜 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거라곤 횅한 방의 천장, 그 가운데 둥근 흰색의 등만 있었다. 그러나 기범은 곧이라도 그게 제 위로 떨어질까 봐 겁이 났다. 놀란 마음에 급히 몸을 일으키려니, 식은땀 범벅인 몸이 부자연스럽다는 걸 뒤늦게 느꼈다. 소름이 돋아 날카롭게 벼려진 예민한 감각 위로 쌓인, 경직된 제 몸에 둘러진 어느 무게감을 벼락처럼 인지했다. 기범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어느새, 두꺼운 네마키(*일본식 잠옷. 주로 료칸이나 온천장에서 볼 수 있다.)만 걸친 채 잠들어 있는 태민이 있었다. 아니, 잠들어 보였다.

기범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의 혈색이 감도는 입술과 아래로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을 보고서 머리를 정리했다. 이미 잠은 한참 전에 달아난 지 오래였다. 그는 태민이 붙어 있는 오른편과 달리 자유로운 왼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미 식은땀으로 흥건한 이마가 느껴졌으나 몸을 일으킬 순 없었다. 제 가슴팍을 가로지르는 태민의 팔 때문이었다. 기범은 피로한 눈으로 다시금 천장을 바라봤다. 오래 뒤척인 밤이었고, 그만한 악몽이 저를 내몰고 있었는데, 그 악몽 속의 주인이 바로 옆에 붙어서 제 몸을 압박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싶었다. 기범은 까끌까끌한 혀로 입천장을 훑었다. 그러자 옆에서 기척을 느꼈는지 잠에 잠긴 나른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형, 일어났어?"

"응, 언제 왔냐."

기범 역시 이미 쉴 대로 쉰 목소리로 답했다. 태민은 몸을 조금 뒤척이더니 기범에게 몸을 더 바투 붙였다. 그는 기범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그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비볐다. 간지러운 감촉에 기범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목을 움츠렸다. 태민 역시 기분 좋게 웃으며 잇새로 답했다.

"끙끙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얼마 안 됐어."

"아-."

"다 들리거든."

"나는 너 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그러나 기범의 얘기에 대꾸하는 말은 없었다. 기범은 가만히 태민을 바라봤다. 태민은 눈을 접으며 웃고 있었다. 대신 그는 기범의 말을 흘려넘기며 속삭였다.

"이러니까 너무 좋다. 어릴 때 같아. 당분간 여기서 머물러, 형."

그의 어리광 같은 말에 기가 차서 헛웃음을 치며 인상을 보란 듯이 찌푸렸으나 이미 답은 내정되어 있었다. 기범은 웃기지 말라며 태민의 머리를 밀어내고, 태민은 아프다며 앓는 소리를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흘려보냈다. 아침햇살이 창을 타고 넘어 들어오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태민과 장난을 치며 몸을 비트는 과정에서, 그늘 속에 드러난 기범의 등에는 아직도 식은땀의 흔적이 배어 있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퍽 어려운 밤들이 지날 모양이다.


뱀의 순환

이태민 × 김기범

by. BB


BGM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칼, 그 아래 선연한 이목구비가 정갈했다. 정갈하다 못해 너무 반듯하여 어딘가 어리고 유약하게도 보이는 인상이었다. 아래로 고요히 내려섰다가 다시금 올라오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할 때면 그 생각은 완전히 뒤바뀌지만 말이다.

이태민은 1층에 따로 마련된 너른 방의 상석에 앉았다. 이곳은 나무 바닥이 그대로 깔린 길쭉한 공간이었는데, 바깥 마루와는 너른 장지문으로 구분되어 있기만 해서 무척 추운 공간이기도 했다. 태민을 기준으로 양옆에는 시커먼 사내들이 일렬로 무릎 꿇고 앉아 있었는데, 그중 왼편의 맨 앞이 기범의 자리였다. 기범은 아무렇지 않게 정면을 바라봤다. 새로운 태민의 오른팔, 호사(*보좌)가 그곳에 자리했다. 새로운 얼굴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기범은 앞에 놓은 찻잔을 들어 홀로 목을 축였다. 누구도 그를 비난하거나 눈길 주지 않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와타베구미의 신진 세력들이었기에 더욱이 그랬다. 다만 그들의 속내까지 고요하진 않았다.

'쯧, 결국 출소하시자마자 저놈이 곁에 달라붙었군.'

'형님께서는 언제까지 눈감아 주실 요량이지.'

그들의 불만은 제각각이었으나, 혹자는 기범을 '키노리'라 부르며 깍듯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로 혼자 멀거니 밖에 서 있는 이부키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곳에 들어와 있지 못하다는 건, 분명히 이곳에는 태민의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는 명확한 경계를 뜻이었다. 사람의 감정을 읽는 데 도가 튼 기범에게는 더없이 불편하고도 이상한 자리였다. 태민은 그대로 앞에 놓은 찻잔을 들고 기범이 그랬듯이 천천히 목을 축였다. 그제야 술렁이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형님, 관동의 동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래, 미츠야마 놈들 말이지?]

먼저 입을 연 건 호사 옆에 앉은 자였다. 그는 태민이 꾸린 신진 세력-그래봤자 3~40대가 다수이다- 중에서는 제법 오래된 사내였는데, 늘 기범을 탐탁잖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기범은 가볍게 그를 흘기고서 다시금 시선을 찻잔으로 내렸다. 어차피 이곳에 있는 제 역할은 하나의 토템, 인형 정도가 다라는 걸 기범은 잘 알고 있었다. 엔도 오야붕의 의형제들마저 모두 죽은 지금 시점에서 가장 가까이 두는 사적인 존재. 그게 바로 기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도 직접적으로 태민에게 항의하지 않았다. 이전이라면 득달같이 외부인을 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을 텐데 말이다.

[얼마 전에 사토구미 건도 그렇고…….]

그 말을 하면서 굳이 기범을 보는 건 잊지 않았다. 이들 대부분이 그 파친코 가게에 있었으니 기범 역시 제게로 쏟아지는 화살 같은 눈빛을 피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담담하고 고요한 자세를 뻔뻔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 내에서 기범과 태민은 당연히 잘 알면서도 미심쩍은 구석이 많은 관계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 역시 의형제처럼 자란 사이, 그러나 의형제도 아니며 같이 산 적도 없는 사이였다. 하물며 엔도 오야붕이 언급하기를 엄격하게 금하는 '쟈이니치 코리안(*제1 한국인/재일교포)'에 대한 논란과 추측으로 인해 태민과 키노리에 대해 밝혀진 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뭐, 그들에게 조상이나 핏줄이 어떤지는 사실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들이 바라고 쫓는 건 협도 의도 아닌 바로 이득. 돈이었으니까. 단지 엔도 오야붕마저 나서서 추측하지 말라는 얘기를 공언할 정도니, 금기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는 건 인간의 당연한 사고였다.

[경찰들의 움직임도 과시할 수 없고, 엔도 오야붕께서도 지금 병석에 계시는데. 형님께서 출소하셨으니 이제 몸소 행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몸소 행한다라…….]

태민은 측근의 얘길 들으면서 여전히 차를 느리게 음미하고 있었다. 그는 측근과 눈을 맞춘 채 느리게 차를 마시다가 미소 띤 입매로 말을 던졌다. 시선은 측근에게로 가 있으나, 그 말의 표적은 분명히 다른 곳에 있는.

"내가 와타베구미에 들어온 지 벌써 12년인가."

"……."

갑작스레 나온 이국의 언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측근들은 오묘한 분위기가 감도는 태민의 말에 정적만 입에 물 따름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그대로 두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을 이들은 이미 태민의 밑에서 오랜 기간 몸으로 습득하였다. 그리고 그에 기범은 제외되어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기범 스스로도. 기범은 금방 피곤해진 낯으로 찻잔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소 신경질적인 눈매로 태민을 바라봤다. 그 시선을 느낀 건지, 태민은 고개를 돌려 기범과 눈을 맞췄다. 그래, 아무래도 그의 아이는 조금 큰 모양이다. 여기 앉아서 보는데도 아주 조금 위를 봐야 하니까.

"정확히는 이제 13년이 되어 가. 네가 17살에 들어왔으니까."

"그래, 맞아. 그럼 이제 뭘 해야 해, 나는?"

"……너도 쟤네도, 너무 쉽게 이런 얘길 입에 올리는 거 아니야?"

기범은 속이 울렁이는 걸 느끼며 날카롭게 질문으로 되받아쳤다. 그의 말은 무척이나 위험했다. 설마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말들이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기범은 침을 삼키고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이들은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정말로 완전히 알아듣지 못할까? 기범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초조함에 아랫입술을 잇새로 깨물고서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을 읽었는지 태민은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돌려, 이곳에 모인 이들을 무감한 시선으로 훑었다. 무엇보다도 건조하고, 무관심한. 무기질적인 까만 눈동자여서 기범은 이들이 온전한 그의 세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엔도 오야붕께서 이렇게 되셨으니, 우리 와타베구미의 저력을 널리 알려 더욱 내부의 결속을 다져야겠지. 조직을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의 살길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과장된 모습으로 고개를 다 같이 숙이며 우렁차게 대답하는 장정들에 기범은 한숨을 겨우 삼켰다. 이래서 건달 새끼들은 항상 가오나 챙기려고 한다니까. 하지만 그 어마무시한 단합력을 보고서도 태민은 고개가 뻣뻣해지기는커녕, 그저 찻잔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태민은 이내 웃으며 그가 쥔 찻잔을 하늘 높이 올렸다.

[그리 말하기엔, 확실히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어. 그렇지 않아?]

마치 바람이 살랑이는 듯한, 어떻게 보자면 음률을 지닌 노래처럼 가볍고 산뜻한 목소리에 모두가 의구심을 가지고 고개를 하나둘 들기 시작했다. 기범은 점차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그들의 이목은 홀린 듯이 태민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태민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찻잔, 허공의 높은 곳으로 향할 때, 그 잔을 거꾸로 세워 안에 든 모든 차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주르륵, 툭, 투둑투둑. 놀란 반응은 아주 잠깐이었다. 공간을 가득 채우는 팽팽한 긴장감에 모두가 숨죽이고서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기범은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는 자신이 그리던 최악의 시나리오 중 하나만큼은 제발 빗겨나가길 바라며 무릎을 꽉 쥐었다.

태민은 소리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잔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오래된 영광은 빛이 바래기 십상이고, 고인 물은 썩어서 새로운 바람을 알아채지 못하죠.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으니, 와타베구미 역시 그에 맞춰 나아가야, 제 부모 되신 엔도 오야붕께 누가 되지 않을 테죠.]

그리고 그는 쉽사리 손에서 힘을 풀며 내렸다. 파장창-! 파편이 튀며 가장 날카롭고 큰 파편이 기범의 무릎까지 달그락거리며 밀려들어 왔다. 물기 어린 옥색 잔의 투명한 내벽에 기범은 제 얼굴이 비칠 듯해 한동안 빤히 그 파편을 바라보았다. 무척이나 날카롭고 손에 쥐기 알맞아 보였다.

[저만의 길을, 저만의 효를 다해 보일 겁니다. 적어도 제가 이 와타베구미에 속해 있는 이상. 이곳의, '와카가시라'로 있는 이상은 말이죠.]

엄숙해진 방 안의 공간에도 태민은 그들을 한 번 훑고서 마지막으로 기범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는 밖에서 은은하게 비쳐 드는 오전의 햇빛 속에서 서늘한 그늘을 드리운 채 웃음을 지었다. 기범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지 않은 채 하염없이 파편을 보고 있는데도. 그렇기에 태민은 그를 불렀다. 그가 인지하는 아주 익숙한 말로.

"형도, 함께할 거야?"

"무슨 생각이야, 너."

기범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기범은 모두 고개 숙인 채 태민의 마지막 말만을 기다리는 다른 이들의 모든 신경이 이곳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걸 느끼며 몸을 떨었다. 지독하다, 정말. 기범은 그의 교묘한 말이 모든 최악의 시나리오를 비껴가서 안도함과 동시에, 제게 밀려드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살짝 떨리는 턱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보고 되물었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그 물음에 처음으로 태민은 피식, 헛웃음과 비슷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고서 몸을 바로 세워 정면을 바라봤다. 적대적이기 그지없는 짙은 다갈색 눈동자를 보며 태민은 이 순간까지 와서도 기범은 참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엇이 어떻던가. 오히려 그의 안식처로 제격이었다. 태민은 조금 즐거워졌다. 그는 한 치의 거짓도, 티 하나도 없는 환한 웃음을 지은 채 마지막 언사를 다했다.

[와타베구미의 번영을 위하여.]

[번영을 위하여!]


기범은 제 손아귀에 굴려지는 얄팍한 종잇조각을 매만지며 걸었다. 그러다가 불쑥, 그에게로 다가오는 그림자에 몸을 뒤로 물렸다.

[안녕하십니까, 키노리 님.]

[……뭐야?]

갑자기 고개를 내민 정중한 인사. 기범은 자리가 파한 뒤 제각기 태민의 저택을 빠져나가는 장정들에 섞여 밖으로 나서던 중이었다. 테츠다가 오래 기다리기도 했거니와, 이번에 이태민이 자리에 자신을 두게 되면서 그들의 정보가 어디까지인지 대략 이해하게 되었으니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다만, 태민이 굳이 중요한 얘기가 오가는 자리에 자신을 앉힌 이유에 아직 명쾌한 답을 도출하지 못해서 찝찝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리고 제 곁을 바짝 붙어 오는 이부키 외에도 다른 인물이 제게 직접 '키노리'라고 하며 접근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특히나 그 인물이 태민이 이번에 새로 곁에 두기 시작한 호사일 경우는 더더욱이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부디 바쁜 길을 붙잡은 건 아니길 바랍니다.]

기범은 그에 우선 웃었다. 태민의 호사이지 않은가. 적어도 와타베구미 내의 서열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자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전혀 처음 보는 낯의 얼굴이었다. 기범 자신 역시 태민 함께 오래 와타베구미를 알고 지냈다. 어떻게 보면 태민보다 더 오래 와타베구미를 봐왔다. 그러니 이 이질적인 존재는 분명 이방인이고 새로운 쐐기가 될 거라는 직감이 따랐다.

[반가워요. 이름이 어떻게 되죠?]

그리고 그는 굳이 제 이름을 '김기범'이라고 소개하지 않았다.

[조, 라고 합니다.]

[……조.]

외자의 이름이 이 땅에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기범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서 자신을 '조'라고 소개한 이를 바라보다가 다시금 희게 웃으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가워요. 잘 부탁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가볍게 손을 마주 잡았다. 정확히는 조가 공손히 두 손으로 기범의 손을 잡았고, 그에 가볍게 손아귀에 힘을 주고서 손을 놓는 기범의 짧은 악수였다. 기범은 그가 한국인이라고 확신했다. 그의 내면에서부터 비틀린 웃음이 삐져나올 것만 같아서 꾹 참았다.

이부키는 성큼성큼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가는 기범의 뒤를 쫓았다. 아까부터 거친 발걸음이라고 여기면서 침묵을 물었다. 방금 기범에게 인사를 한 이는 자신조차 잘 모르는 이였다. 존재감 없이 흐릿한 인상에 빼어나지도 않는 체구, 그나마 균형이 잘 잡힌 몸이라는 게 자세에서부터 느껴진다는 점이 독특한 사내일 뿐이었다. 어디서든 잘 어울릴 법한 사내는 웃는 낯을 보았을 때 야쿠자가 아닌 영업직 사원을 떠올릴 정도로 말끔했다. 그래도 굳이 태민의 의중이나, 소집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기범이 갑작스레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시선을 조금 더 앞으로 당기자, 저 앞에 테츠다가 차를 대기해 놓고서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있었다. 약지.

느릿하게 가까워진 거리감을 느꼈는지 기범은 다른 이들은 먼저 빠져나간 길목에서 일어나는 모래바람을 보고서 시선을 멀리 던졌다. 그의 눈에 걸린 곳은 공사 현장이었다.

"이부키."

[네.]

"이태민이, 무슨 생각인 거 같아?"

[…….]

기범은 고개만 뒤로 돌려 이부키를 힐끗 보고서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이내 알 수 없는 말을 몇 번 더 혼잣말처럼 내뱉고서 곧장 담배를 꺼내 물었다. 이부키는 자연스럽게 라이터를 쥐고 그의 담뱃대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기범은 숨을 들이켰다. 새하얀 얼굴이 꼭 밀랍처럼 창백하게만 보였다. 이부키는 그 와중에도 호선을 그린 연분홍빛의 입술이 참 담배와 이질적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뒤로 물러섰다.

콜록콜록.

짧은 기침이 터져 나오더니 금방 적응한 목이 연기를 깊게 빨아들이고서 뱉어낸다. 기범은 한동안 길목의 한 가운데에 서서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서 숨과 연기을 뱉었다. 테츠다는 어느새 허리를 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는 꼭 기범의 앞에서 작아지곤 했다. 물론 이태민의 앞에서는 더 숙어지는 고개였다. 이부키는 탐탁지 않게 그를 흘겨보다가 이내 바닥에 다 태워 가는 담배를 버리고서 발로 비벼 끄는 기범의 구둣발을 보았다.

[후-. 너는 와타베구미 사람이야, 아니면 내 사람이야, 그도 아니면, 이태민의 사람이야?]

[……키노리 님, 우선 차에 타시지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묻는 말이야. 대답이 어떻든 나는 널 어떻게 할 생각도 마음도 없어.]

그는 다시금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곤란할 만큼 가냘프게 웃어 보였다. 비록 이부키를 향해 웃어 보인 건 아니지만, 사선으로 보인 옆얼굴이 제법 위태롭다고 생각한 이부키였다. 그는 어째서인지 원인 모를 죄책감을 떠안으며 그의 본래 주인이었던 이태민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렇기에 담담히 답했다.

[저는 키노리 님의 사람입니다.]

[그래?]

기범은 아주 담백하게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테츠다가 있는 차로 향했다. 이부키 역시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셋은 모두 차량에 올라타고, 온통 새까만 차는 아래로 내려갔다. 이부키는 제 뒤에 앉은 기범을 힐끗거렸다. 오래전부터 와타베구미에서 유명한 소문이자 누군가는 전설로 추앙하는 얘기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이태민의 입회에 관한 얘기였다. 이부키 역시 그때는 말도 안 되는 햇병아리였다. 와타베구미 본가에서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하는 헤야즈미(*야쿠자 견습생)을 막 졸업하는 시기였다. 당시 태민은 이름도 모를 꼬맹이에 불과했고, 기범은 어느 순간부터 키노리라 불리고 있던 한 파친코 가게의 어린 사장이었다. 어린 사장. 그랬다. 그때 당시만 해도 기범에게는 이미 좋지 못한 꼬리표가 수십 개 달려 있었다. 그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제 부모를 죽게 내버려뒀데.

-내가 듣기론 삼촌도 제 손으로 죽였다더라.

-짐승만도 못한…….

-일본인도 아니잖아. 역시 더러운 피여서 그런가. ……불길해.

이부키는 17살의 아이에게 떨어지기엔 적잖이 매서운 말들에 저절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으나, 그뿐이었다. 그에게 키노리란 늘 있던 소문 나쁜 어린놈일 뿐이었으니까. 그가 살아야 할 세계는 더 지독했고, 스스로 발을 디딘 지옥이었다. 애초에 밑바닥 인생이었던 그에게 조선인이고 일본인이고는 상관이 없는 얘기였다. 입에 풀칠할 수 있다면 뭐든 달려드 삶인데 누가 누구를 한 잣대로 가를 수준이겠나. 그저 제게 남을 해칠 재주가 탁월하다는 점이 기꺼웠을 뿐이었다.

그런 태민이 그에게 존재를 각인시켰을 때는 다름이 아니라 이부키의 사카즈기고토 때였다. 그는 불순하게도 와타베구미의 본가로 걸어 들어왔다. 키노리가 울며 그를 막으려 애썼고, 그들이 지나고 난 곳에는 피가 묻어났다. 무엇보다 오야붕이 허락한 방문이었다. 문 앞에서 터무니없는 소리를 들먹였기 때문이다.

[제가 그들을 죽였어요.]

[증명해 보아라.]

그리고 17살의 태민은 어떤 낡고 제법 큰 나무 갑을 덜컥, 마룻바닥에 놓았다. 제법 무게가 나가는 소리가 묵직했고, 낡은 것 안에서 덜거덕거리는 소음은 어딘가 기이한 울림을 지녔다. 당시 다른 이들은 모두 물리고서 엔도 오야붕만이 직접 나서서 그 상자를 열어 보았고, 아직도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누구도 명확히 아는 바가 없었으나, 오야붕이 그때 지은 웃음은 지금도 기억 속에 생생했다. 비틀린 욕망, 그 속의 열등감. 혹은 지독한 경멸. 몸을 잠시 떨던 엔도는 갑을 닫으며 크게 웃었다. 그 살기 어린 웃음을 당당히 마주한 어린 태민은 무척이나 왜소해서, 실제 나이보다 더 어렸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오히려 뒤에서 가만히 못 박힌 듯 서 있던 키노리가 더 인상이 깊은 지경이었다.

[저 녀석도 예식에 참여한다.]

[오야붕!]

[엔도 님!]

그래, 인상 깊게 남을 수밖에 없었지. 17살의 나이에 그와 함께 사카즈기고토를 받고, 곧바로 이레즈미(*전신에 새기는 문신의 일종으로, 야쿠자 문신이 근간이다.)를 받았으니까. 그날의 흉흉하던 태민의 눈빛 역시 아주 섬칫한 인상을 남겼더란다. 그러나 키노리는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힘이 풀린 다리로 기어가 엔도 오야붕의 다리를 겨우 붙잡았다. 높은 마루에도 불구하고 낑낑거리며 매달리던 키노리 님의 당시 나이는 19살에 불과했다.

툭-.

이부키는 너무 놀라 잠깐 굳었다. 그는 제 앞에 높인 한 작은 나무 갑을 보았다.

[이걸 배달해 줬으면 해.]

서늘한 눈빛과 달리 무감한 말투였다. 이부키는 고갤 들어 기범을 바라봤다. 그는 곧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깍듯이 허리를 숙이고서 제법 무게가 나가는 나무 갑을 품에 넣고서 사라졌다. 달그락거리는 소리 없이 꽉 찬 나무 갑에 대해 이부키는 영영 알려고 하지 않았다.

기범은 사라지는 이부키를 보고서 밤이 짙게 내린 강가의 다리에 기댔다. 강. 마을의 경계. 기범은 달을 올려다보다가 방금까지 미술관에서 정리하던 장부를 손에 팔랑거리고서 테츠다를 불렀다. 이젠 제법 사람이 많이 살게 된, 깨끗한 거리로 젊은 사람들이 깔깔거리며 지나다닌다. 곧 관광 철이겠구나.

[넵.]

[사실이야?]

누군가가 가까운 가게에서 구입한 저렴한 폭죽을 강가에서 터트린다. 힘 빠지는 소리와 달리 제법 아름다운 불빛을 쏘아 허공을 수놓는 모양을 보며 기범은 다시금 담배가 땅긴다는 얼굴을 했다. 테츠다는 그들의 소음을 빌려 기범에게 작은 목소리로 본인이 모은 정보를 전달했다. 서류를 건네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기범은 서류를 받아 들고, 대신 그에게 장부를 넘겼다. 한참 동안 서류를 훑는 동시에 테츠다의 말을 듣던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간수 잘해.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해 둬. 오사카로 간다.]

[정말 가시렵니까?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경찰들이-.]

[소문이 이렇잖아. 이런 류의 소문은 특징이 그거야. 후에 이대로 일어날 조짐이거나 큰 움직임이 있을 거라는 뜻이라고. 참, 류노스케 님께도 연락을 넣어. 키노리가 뵙고 싶어한다고.]

[네-?! 잠시, 키노리 님!]

기범은 몸을 옆으로 돌려 자신보다 조금 낮은 곳에 있는 테츠다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웃었다. 기운 상체에 따라 그들의 얼굴은 지나치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테츠다는 그게 두려웠다. 가끔 기범이 짓는 표정이 있었다. 그게 어떠한 감정에서 긁어져 나오는 표정인지는 잘 알 수도 없거니와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테츠다에게는 그게 꼭, 서늘한 변온 동물을 연상케 했다.

[우미즈구미가 움직이고 있어. 그것도 다른 구미에도 이런 은밀한 소식이 전해지고 있지. 그런데 어째서 이 고베시의 와타베구미만 모를까.]

[그, 그건…….]

[둘 중 하나야. 와타베구미를 두려워하고 있거나, 잡아먹으려고 하거나.]

달빛 아래에 비치는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이 오늘따라 더 요사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는 밤에 잠식되어 완전히 까매진 기범의 눈동자를 피하지 못하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잡아먹힌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리 생각하여 거부감을 느꼈다. 표정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그에 기범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털어낸다.

[테츠다 씨가 생각하기엔 어때? 와타베구미를 위해서, 어떤 게 올바른 길 같아?]

[저, 저는…… 와타베구미를 위해 움직일 따름입니다.]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그 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움직여야지. 날 지켜봐 왔잖아. 누구를 따라야 할 거 같아?]

[……키노리 님입니다.]

기범은 잘했다는 듯이 몸으 일으키며 테츠다의 팔을 툭툭 쳤다. 그의 새끼손가락이 빈 그 자리의 팔이었다. 준비해 둬. 길지는 않을 거야.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끄럽게 뛰어놀며 불꽃놀이를 즐기던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려 사라졌다. 어두운 밤거리에 말 그대로 정적과 어둠만이 내려앉았다. 달빛은 어룽거리며 기범의 눈에 맺혔으나 금방 그의 눈은 돌아서서 소리 없이 강가를 벗어났다. 다시 고립된 성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끼익-. 끼익-. 끼익-.

태민은 기범의 민낯을 잘 알았다. 무감하고도 무심한. 그리하여 아무것도 관심이 없고, 그 무엇에도 무기력한 얼굴을 잘 알았다.

자리가 파하고 모든 이들은 제각기 일을 위해 나섰다. 그가 말한 새로운 바람은 거짓이 없었고, 이미 국지적으로 여러 알력 관계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다가올 봄에 걸맞은 변화였다. 그러나 기존의 케케묵은 조직 구성원은 이제 연예계나 필로폰이나 주무르면서 살기 어렵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지금까지도 되지 않았다. 그러니 영특한 이들이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들었을 테며,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알 거라 믿는다. 그를 위해 고르고 고른 조직원들이었으니까. 설사 모른다고 해도 괜찮았다. 그는 그저 전진할 뿐이었다.

드르륵. 끽-. 탁-.

어느새 빛이 점멸했다.

태민은 어둑해진 창밖의 밤하늘을 보며 별의 기울기를 가늠했다. 씻고 나온 그의 몸에 수증기가 가득했고, 항상 잘 벼려 놓은 칼날 같은 몸은 근육을 따라 깊은 그림자를 그려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을 꿈틀대며 태민의 나신을 헤집은 상처 같은 검은 선들이, 등에 빼곡했다. 그는 상처를 가리듯이 곧장 두꺼운 네마키를 몸에 걸치고, 창밖을 향하던 몸을 돌려 또 다른 창 앞으로 가 앉았다. 벽면에 뚫린 둥글고 작은 창은 또 다른 밤을 비추고 있었다. 이어지는 기척은 더 없었다.

태민은 제 귓가를 울리던 나지막한 목소리를 떠올려 본다. 잘 자, 이태민. 그는 그 말을 곱씹으며 그저 둥근 창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제 귓가를 스치던 칼날 소리가 그 다정한 말을 잘라내는 듯했다. 서걱, 사각, 사락. 태민은 가끔 신기했다. 어쩌면 기범이 내는 모든 소리는 날카롭고도 메마른지, 어떻게 보면 작은 비명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손아귀에 잡힌 다 식어 빠진 찻잔을 굴리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협탁 위에 소리 없이 찻잔을 올려 놓고, 이윽고 옆에 있던 나무문이 열렸다. 견고한 벽처럼 보였던 문은 태민이 벽면을 더듬어 무언가를 누르자마자 온순히 입을 벌렸다.

스르륵-.

그는 발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한 밤이 가라앉은 방으로 스며들었다. 기범은 제 머리칼을 자를 때마다 제 목덜미를 빤히 바라보고는 했다. 태민의 예민한 성정에 그 시선을 못 느낄 리가 없었다. 그는 그저 담대하게 받아들이길 택했고, 그러길 계속해서 배웠다. 기범을 대할 때면 인내심이란 그에게 유별스럽거나 버거운 요구사항이 아니었다. 당초에 다른 이들이 만져 주는 것보다야, 차라리 기범이 형이 낫지. 태민이 어떠한 심정으로 기범에게 머리를 내맡기는지 기범은 아마 평생 모를 테다. 그는 늘 제 목을 내놓는 심경으로 기범에게 제 머리를 맡겼다. 마치 그를 무한히 신뢰하고 애정 하듯이. 그리고 그 칼날이 교차하며 맞물리는 순간 그는 늘 오싹함을 느꼈다. 저 가위가 내 목덜미를 찌르면 어떨까. 몸에 비하면 아주 작은 구멍으로 제 생명력이 모두 빠져나간다는 기분은 과연 어떠할까.

부스럭.

"형-."

"……."

"자?"

그리고, 숨이 꺼지는 마지막 순간. 하얀 손이 떨면서 제 얼굴을 매만지고, 눈물을 내비칠 얼굴은 어떠할까.

이곳에 무방비하게 잠에 들려는 한 남자가 있었다. 벽 하나를 두고서 무방비하게. 마치 자신은 어떠한 힘도 없이 순응할 따름이라고 말하는 듯한, 순백의 옷을 입은 검고 흰 남자가. 장지문을 통해 은은한 빛이 흘러들어와 그의 실루엣을 타고 흘렀다. 이불 하나 덮지 않은 채 옆으로 누워 살짝 몸을 웅크린 기범은 꼭 달빛을 피하고자 몸을 숙인 듯이 보였다. 태민은 곧바로 그의 양옆으로 손을 짚고서 그의 위에서 내려다봤다. 그의 성격을 나타내는 분명한 검은 선들, 부드러운 흰 곡선. 그것이 기범을 이루는 모든 선이었다. 태민은 가만히 그를 살피다가 그의 가슴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작은 박동과 온기가 느끼려고 하자, 기범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태민아."

"응, 형."

기범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그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민은 몸을 완전히 내려 기범에게 몸을 붙였다. 그의 가슴팍에 머릴 비비적거리며 기범의 다리를 옭아맸다. 기범은 다시금 그를 불렀다. 태민아. 그러나 태민은 이번에 말없이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그 움직임은 미약하면서도 어딘가 불온했다. 하아-. 어느새 낮은 숨이 기범의 귓가로 흘러 들어갔다. 추운 밤, 열에 들뜨기에는 이른 계절이었다. 바르작거리는 소리가 밤의 고요를 깨트리기 충분했다.

이태민! 기범은 제 하반신에 닿는 묵직한 양감에 당황하여 몸을 돌리기 위해 애썼다. 정면으로 밀어내야 그나마 승산이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서였다. 어릴 땐 한없이 가벼웠던 그의 몸이 이제는 옴짝달싹도 못 할 정도로 묵직해졌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며 옷감이 스치고, 서로의 몸이 부딪히며 방은 어느새 완전히 소란스러워졌다. 은근히 문질러오는 몸의 접촉에 아래서부터 온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기범은 지금 태민의 무게가 버겁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겨우 돌린 몸의 가랑이 사이로 그의 다리가 맞물렸다. 기범은 도리질을 치며 태민의 어깨를 밀어내려 애썼다. 너무 당황하면 아무런 말도, 생각도 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마구잡이로 손을 뻗어 그를 밀쳐내기 위해 애썼다. 그러자 태민이 그 노력을 알았는지, 갑자기 바닥을 짚고 상체를 살짝 떼고서 기범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달뜬 숨이 그의 흰 빛에 가까운 입술에서 새어 나왔고, 은은한 밤의 미약한 빛 아래서 말갛게 비치는 상기된 피부와 까만 눈동자가 몽환적이어서 순간 넋을 놓았다. 그러면서도 기범은 그게 애처로워 보이는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 마…… 형."

기범은 제가 순간 무슨 말을 들었는가 헷갈렸다. 한껏 뻗어낸 팔은 태민의 어깨를 밀쳐내고 있었고, 태민은 완전히 상체를 일으킨 채 조금 슬픈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한 손이 기범의 두 손 중 하나를 꽉 잡았다.

"형, 내 문신. 안 좋아하잖아."

보지 마.

일순 기범의 심장이 철렁였다. 그는 제 손바닥 아래로 느슨하게 벗겨지려는 옷자락을 보고 저절로 힘이 빠지는 손을 느꼈다. 마구 흐트러져 벌려진 옷깃에서 적나라하게 보이는 가슴팍, 그곳을 헤집는 검은 선들. 그건 어깨로 뻗어 올라, 그가 지금 볼 수 없는 등과 팔뚝까지 전부 점령했겠지. 그건 기범의 원죄였다. 제 두 눈이 적나라하게 흔들리고 있으리라고 짐작한 기범은 입을 벌린 채 뱉을 다른 말을 더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이태민은 아주 영리하게도 잡은 손을 끌어 올려 그의 손바닥에 뺨을 대고 얼굴을 살며시 문질렀다. 예뻐해 달라는 몸짓에 기범은 제 아래를 묵직하게 누르고 있는 하반신의 존재를 잊을 만큼이었다. 어느새 기범은 손을 떨었고, 침을 삼켰다.

"하-."

태민의 입에서 얕은 정욕이 서린 숨결이 나왔다. 기범은 몸을 떨었다. 모든 생각과 행동을 멈춘 채 그만을 직시하던 기범은 뒤늦게 밀려드는 야릇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그는 와타베구미의 이태민이고, 제겐 어린 이태민이며, 또……. 복잡한 머리가 다 정리가 되기도 전에 태민은 갑자기 슬며시 몸을 포게어 뉘었다. 마치 기범의 몸을 덮듯이. 기범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른하게 밀착한 몸에 오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가르쳐 줘, 기범이 형. 여태 그랬듯이."

"……뭘."

당혹스럽게도 제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제 얼굴이 어떤 표정일지 몰라서, 그리고 태민이 다시금 제 목덜미를 깊게 파고들며 다시 아래로 내려가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 모습을 보여서 안심했다. 기범은 저도 모르게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흥분이라기엔 지나치게 차갑고, 공포라기엔 지나치게 젖은 숨. 그리고 태민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르는 몸으로 그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면 이 욕구가 해결되는지, 좀 알려 줘."

정확히 그건, 무언가를 오랫동안 갈구했던 속삭임이었다.


이걸 성인으로 걸어야 하나?

펜슬은 왜 이렇게...자잘한 오류와 불편함이 있는가?

하여튼 왔습니다, 2편이. 3편이 성인이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는...성인이 많지 않을까요?

다음 편까지 '소문' 챕터이고 그 다음부터는 다른 챕터로 이어집니다! 이제 슬슬 기범과 태민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 지 나올 거예요.

그럼 낯선 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감상이나 기타 등등은 포스타입이나 트위터에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모두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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