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순환

뱀의 순환 : 서막

창백한 점 by 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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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룹 샤이니의 멤버 이태민, 김기범에게 영감을 받아 그 외형과 이름을 차용하여 가공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 90-00년대 버블 경제가 가라앉은 뒤의 일본 배경, 경찰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던 시절의 야쿠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but 짭 느와르)

-이에 따라 태민과 기범은 야쿠자 조직원이 됩니다.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

* 위 사정으로 일본어 대화는 []로 표기됩니다.

* 트리거 요소: 폭력, 폭행, 도박, 사채, 강간 등 다소 강압적이고 잔혹성이 포함된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 이 이야기는 제가 늘 그러했듯이 사랑을 표방합니다.

비극이란, 끝이 존재하기에 붙는 이름이다. 그러니 나는 이 삶을 희극의 서막이라고 이름 붙이겠다.

https://youtu.be/RwlEj05fjd0?si=zo6BNTxQTd5038TF

저벅저벅.

묵직한 구둣발 소리가 수와 무게를 더해간다. 현대화되면서 포장된 거리는 정갈하였으나, 강 너머에는 여전히 낮은 지붕에 정돈되지 않은 벽, 저렴한 음식점의 가판대와 지저분한 노렌(*일본의 가게나 건물의 출입구에 쳐놓는 발로써 특히 상점 입구에 걸어놓아 상호나 가몬-가문의 문장-을 새겨 놓은 천을 말한다.), 낡디낡은 파친코 가게가 개장 사실을 알리고 있었다. 사람은 어디서든 살아간다는 걸 증명하듯이, 불과 십여 년 전에 이 땅을 뒤흔들었던 비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뿐일까. 그 위를 거니는 검은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장성들을 보아라.

멋들어진 선글라스나 안경, 잘 다듬어진 수염, 말끔하게 넘긴 머리칼. 단정한 차림새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상시 경계하듯이 걸어 다니는 장정들의 발걸음에서는 미지근한 어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이곳에서는 누군가에게 얄팍한 구원일 테고,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악몽이었을 소리. 그 선두에 서 있는 자는 왜소해 보이는 체격과 쪼뼛한 턱선이 무척 매끄러운 자였다. 새까만 선글라스를 착용해 그 눈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잔머리가 내려온 왁스를 먹인 머리가 유달리 젊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그에게 투명 사각 테 안경을 낀 길쭉한 두상의 사내가 다가섰다. 허리와 고개를 곧은 직선으로 유지한 채 숙이는 모양새가 퍽 남다른 절도를 지녔다. 물론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자 뒤로 고개를 살짝 젖힌 남자는 늘 그게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오늘 다시금 큰물에서 항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큰물, 항쟁. 그 말을 비웃듯이 남자는 날카롭고 비열한 웃음을 짓고서 손을 휘휘 내젓는다. 그러나 안경 쓴 사내는 물러나라는 의미임을 알면서도 다시금 그에게 붙어 우려를 표했다. 물론 그러한 과정에서 발걸음을 멈추는 일은 없었다. 이처럼 남자는 여태 단 한 번도 멈춘 적 없다는 듯이 굴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겁나냐-.]

선홍빛 입술에서 겨우 튀어나온 독특한 목소리는 훨씬 더 그를 어려 보이게 했다. 다만 심각한 사내의 얼굴과 달리 그의 물음은 무척 나긋하고 평어와 닮아 있어, 어떠한 위기감도 읽을 수 없었다. 남자는 곧 선글라스를 벗고 머리칼을 한 번 더 훑어 올렸다. 유독 흰 이마와 대비되는 검은 머리칼과 검은 그림자, 검은 눈동자가 건조했다. 사내는 정말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굳어서 입을 닫았고, 남자의 발걸음은 천천히 멈춰 섰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 내리쬐는 태양 빛 아래 그는 정면을 올려다본다. 검은 바탕에 힘 있는 필체의 [渡辺組](*음독: 와타베구미)가 흰색으로 그려진 웅장한 규모의 현판. 강 너머에서부터 위용을 뽐내던 거대한 저택의 입구였다. 저택. 남자는 입 안에 혀를 한 번 굴렸다. 이내 잠시의 멈춤이 꿈이었다는 듯이 묵직한 대문을 성급히 두드린다. 그냥 보기에도 엄청난 압박을 주는 건물을 주저 없이 두드리는 흰 손에 주변은 동요하지 않고 침묵했다.

끼익-.

[오셨습니까, 키노리 님.]

[안녕.]

키노리. 그 이름이 퍼지자 저택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뒤에 줄지어 발을 딛기 시작한 이들은 더욱 어깨에 힘을 주었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곁눈질하며 쉬쉬거리듯이 눈인사만 하곤 바삐 사라졌다. 무엇이 저리도 급하다고. 그를 향한 존칭과 깍듯한 응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질적으로 행동하였다. 마치 초대받지 못한 손님처럼. 그러나 '키노리'는 익숙하다는 듯이 회랑을 벗어나 잿빛 가레산스이(*일본 전통식 돌 정원)를 휘적이며 지나더니 까만 구둣발로 마루를 밟았다.

분명 무례한 행사 머리였으나 누구도 만류하는 자가 없었다. 그는 이윽고 장지문을 열고, 안에서 놀란 비명이 흘러나왔다. 구둣발이 다다미를 짓밟는 것도 잠시, 그를 나무라는 목소리를 뒤로 미루고서 다시금 장지문을 열어젖힌다. 이내 다시 낮은 탁상을 지나쳐 또 하나의 문을 열자, 너른 다다미방의 중앙. 흰 이부자리에서 죽어가는 노중년과 그 곁을 지키던 중년의 여성이 나타났다.

[기ㅂ, ……키노리! 이게 무슨 짓이니!]

"뭐겠어요, 병문안이지."

[……왔, 구나.]

힘겹게 뜨는 눈에는 노란 눈곱이 가득했고, 흐릿한 눈빛은 백탁이 낀 듯 불투명했다. 남자는 거만하고 불유쾌했던 행동과 달리 병상 옆에 무릎을 바로 꿇었다. 뒤에 있던 장정들은 시끄러운 소란을 막아 내고 장지문을 닫은 뒤 일렬로 뒤편에 섰다. 일사불란한 행동 덕에 상황은 금세 갈무리되고, 그들은 모두 허리와 고개를 숙여 조용히 인사했다. 남자가 항시 말하던 '조폭식 인사'였다. 물론 그걸 알아듣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에게선 종종 알아들을 수 없는 조선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처럼 어눌한 곳 하나 없이 정확한 발음으로 뱉은 이국어에도, 주변에서는 반응하는 이 하나 없었다.

여태 날카롭던 남자의 기색은 어디 가고, 한껏 누그러져 불쌍한 표정을 짓는다. 일견 눈물이 아롱지는 듯한 눈으로 노중년을 내려다보며 두 손으로 세월과 온갖 피가 담긴 손을 쥐었다.

"할아범, 알려드릴 소식이 있어 급히 왔어요."

[무슨-. 무슨 소리냐, 기범아.]

[……급한 소식이 있어요.]

되묻는 그의 말 속에서 버거운 호흡이 느껴졌고, 색색 바람 빠지는 소리까지 나는 입에서는 중환자 특유의 싸한 죽음의 향이 퍼졌다. 그런데도 제법 명확한 한국식 이름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그에 남자, 기범은 잠깐 무언가를 가다듬듯이 쉬었다가 말을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조곤조곤. 낮고 상냥하게, 그에게만 들리도록 바짝 낮춘 몸으로.

그게 너무도 가증스러웠던 중년의 여인은 손을 떨었다. 무례하다고 낮게 읊조리던 그녀는 잘 알았다. 거대한 조직의 안주인인 자신이 상대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사람이 바로 눈앞의 남자라는 걸. 그녀의 남편이자 와타베구미의 오야붕인 '엔도 타카시'가 이전에 아꼈던 그의 의형제처럼 곁에 가까이 두는 남자. 그녀가 조직에서 가장 꺼리는 존재조차도 그녀의 말을 이리도 무시하진 않았다. 그 존재가 지금은 아예 부재한 이 시점에서, 기범은 그녀가 가장 꺼리는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약 5년 전, 엔도는 본진을 파악할 수 없는 암살의 표적이 되어 부상을 입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다. 첩첩산중으로, 갑작스레 산하에 있던 카이(會)가 전쟁을 벌인 뒤에는 완전히 병상에 눕게 된 엔도였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두려움 없이 만날 수 있는 상대가 바로 안주인인 그녀와 여기에 자리한 남자였다.

김기범. 통칭 키노리. 그리고 그녀는 누구도 들을 수 없는 속삭임을 전하는 그를 다르게 불렀다. 사람을 현혹해 어떻게든 구워 삶고 제 입맛대로 삼키는-

蛇[へび] 뱀.


가짜 목조를 덧댄 골조에 딱 하나 난 양창, 어울리지 않게 다다미가 깔린 공간을 희뿌연 안개 같은 연기가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 속에서 질식하지 않으면 다행일까. 그런 곳에서도 계속해서 연기를 뿜어 대는 이들이 화투 패를 쥐고 둥글게 모여 앉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웃통을 벗거나 웃옷을 대충 걸친 채 낄낄거리며 패를 받고 까고, 죽고, 혹은 돈을 걸었다.

그런 공간에 창백하다고 해도 좋을 만큼 희멀건 남자가 갑작스레 들어와 인상을 찌푸렸다. 자욱한 연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바로 앞에 보이는 한 사람의 패를 단숨에 훑고서 패를 하나 더 받으려고 하는 등을 대차게 발로 깠다.

"야야, 그래서 쓰겠니. 그러다 3 뜬다."

[어어, 어? 형님?]

[형님은 개뿔. 89 떴으면 쓸데없는 욕심내지 말고 접어라.]

대뜸 등짝을 까이고서 어안이 벙벙한 사내의 어깨로 화려한 문신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들은 게임을 재개하기는커녕 황급히 담배를 끄며 옷가지를 챙겨 입고 황급히 자리를 정리했다. 남자는 그들을 한 번 흘기고서 다시 걸음을 더 깊숙한 안쪽으로 재촉했다. [언제 오시냐?] 그의 물음에 모두가 각 맞춰 서면서 곧 온다는 대답을 우렁차게 내뿜었다.

[그럼 환기 좀 시켜라, 새꺄.]

[네!]

그들은 곧장 일어나 창문을 다 열어젖혔다. 기범은 유달리 기분을 알 수 없는 낯으로 가장 안쪽 방으로 향했다. 저것들은 손가락 잘리고도 저래. 그의 웅얼거림은 이곳에서 그만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높은 곳에 달린 좁디좁은 창문이 전부인, 문을 닫으면 밀실처럼 변하는 업장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비밀스러운 자리. 그는 바깥에서 여전히 울리는 파친코 소리를 들으며 손목 시계를 소매 안에서 들췄다. 물론 바깥방에서 들리는 소리는 아니었다. 엄연히 구분된 방이었으니까. 기계음이 여기까지 울린다는 건 그만큼 이곳, 기범이 지닌 업장의 규모가 그만큼 크다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적막한 방 안에서,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 놓은 건지 한동안 그는 홀로 자리를 지켰다. 한 다리를 다른 쪽 무릎 위로 얹고, 한 팔은 나무 의자의 등받이에 걸치고, 위태롭게 의자를 뒤로 기울인 채로 말이다.

똑똑.

조금 긴 시간이 흘러, 바깥에서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는 금방 빙긋 웃음을 내걸었다. 여전히 잘 넘긴 머리카락에 깔끔하고 세련된 인상의 얼굴은 순식간에 사업가의 얼굴이 된다. 그리고 들어선 사람은 나이가 조금 있는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였다. 기범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며 허리를 가볍게 숙였다. 가벼운 예의였다. 그에 흡족한 듯,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어딘가 조금 불편해 보였던 사내는 목을 가다듬으며 짤막한 인사를 건넸다.

[반갑군.]

[영광입니다, 사나다 형님. 얘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착석한 그들은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무척 겉도는 얘기만 이어 나갔다. 요즘 장사가 어떻고, 유통망이 어떻고, 경찰들이 언제까지 저럴 거 같냐는. 영양가 없이 흔하디흔한 얘기들만 주워 담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기범은 티 내지 않고 시계를 확인했다. 손목을 옥죄는 낡은 아날로그 시계를 보고, 그는 무언가 신호라도 받은 듯이 말끔하게 웃으며 이만 일어나 보겠느냐는 말을 건넸다. 그에 사나다라 불린 이는 의문을 표했으나 조금 더 성의 있게 접대해드리며 편하게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기범의 말에 따랐다. 대화하는 내내 다리를 떨고 눈을 굴리던 그는 누가 보더라도 불안한 사람으로 보였다. 오히려 밖으로 나간다는 선택지가 사내에겐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방문을 열기 전에 잠시 뒤돌아 기범을 오묘한 눈으로 응시했다.

[그런데, 사토구미에게 겁도 없이 거래를 제안하는군.]

[아, 그러는 형님께서도 이곳에 홀로 오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린 듯한 웃음에 사나다라는 자는 처음으로 떨었다. 미친놈. 무슨 어마무시한 배짱인 건지, 그도 아니면 단지 수완 좋은 말씨인지. 그는 속으로 혀를 차며 마저 문을 열고 다다미방으로 나섰다. 다행히 문은 순순히 열렸고,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상정해 둔 최악의 수는 아니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리라는 예감을 떨칠 수 없어 인상이 더욱 구겨졌다. 이 방, 기이하게 짜맞춰진 이 방만 나서면 바깥에 포진한 그의 조직원들이 숨어 있었다. 한낱 도박장이나 운영하는 기범은 상대가 되지도 않을 테지. 그의 수하는 그리 많은 수도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는 사이 기범은 완전히 방을 나서서 문을 닫았고, 사나다는 그를 돌아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키노리, 나는 아무래도 당신 같은 사람에게서는 의리를 기대할 수 없군. 이대로 와타베구미를 우리에게-]

그러나 그의 말은 문장이 되어 끝나지 못한 채 멈춰야만 했다. 황급히 뒤돌아본 사내는 바깥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는 걸 잡아챘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머신 소리, 지금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경박한 음악 소리. 그를 배경음 삼아 무언가 격렬히 부딪히는 소음이 이질적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벌컥! 문이 갑작스레 열리고, 사나다의 뒤에 있던 기범에게서 [뭐야?] 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사나다는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을 위한 머리가 돌아갔다. 뒤에 놈은 이 상황을 정말 예상 못했다는 반응이었다. 우선 몸이 먼저 칼을 빼내 들었고, 문이 열리며 들어오는 한 사내를 보자마자 이건 잘못된 수준이 아닌, 재앙이라고 여겨졌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난 그는 방어적으로 돌아섰고, 비명이 울려 퍼지는 바깥 소리에 [젠장!] 하는 그 음성은 쉬이 묻혔으며, 도망치기 위해 달려 나가던 그의 육중한 몸은 쿵 소리와 함께 살을 가르는 참혹한 소리, 다다미를 붉게 물들이는 피로 인해 더 이상의 판단은 내릴 수 없게 됐다.

이 모든 일이 1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재빠르고 무자비하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명치를 꿰뚫은 깔끔한 칼이었다.

커헉-. 컥…….

생각보다 살을 가르고, 사람을 죽이는 소음은 아주 작고 미약하다. 죽음을 맞이한 자의 소리가 가장 클 따름이었다. 기범은 무감한 눈으로 쓰러진 시체와, 그 시체 위에서 사시미를 쥔 손을 비틀어 상대에게 확고한 죽음을 선사한 대상을 차례로 훑었다.

짙고 검은 존재.

잠깐 제 얼굴까지 튄 피를 엄지로 훑으며 그는 짧게 소리 없이 웃었다. 까만 흑발은 지저분하다 느낄 만큼 길었고, 여전히 짙은 하카마가 잘 어울렸다. 놀라긴 방금 숨이 끊긴 자와 마찬가지였으나, 오히려 얼굴을 확인하자 모든 게 부질없을 정도로 다 흩어지고 말았다. 서서히 죽은 감각이 일깨워지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하며 전신에 온기가 감도는 느낌이 들었다. 기범은 그 신호들이 주는 감각을, 감정을 아주 잘 알았다. 그에게 유일한 두려움이었다.

"……태민아."

제 부름에 응답하듯이 고갤 돌려 자신을 보는 말쑥한 얼굴에는 신기하게도 핏방울 한 점 튀지 않았다. 그는 가뿐하게 칼을 빼내 손을 털어 칼에 묻은 피를 바닥에 뿌렸다. 이내 두꺼운 천으로 칼날을 닦고서, 아비규환인 문 너머를 배경 삼아 그를 부른 이에게 해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 충만한 웃음만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기범은 침을 삼키며 마주 웃어 보였다.

"복귀, 축하한다."

"오랜만이야, 형."

그리고 그는 사르르 접은 눈을 살며시 뜨며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청량한 소년의 목소리가 세월을 무색하게 했다. 바깥의 소란도 서서히 정리가 되었는지, 피비린내는 후각을 마비시키고 비명은 줄어들다. 엷은 미소만 띤 맑고 앳된 얼굴이 지척으로 다가왔다. 전에는 분명 자신보다 작았던 거 같은데. 기범은 쓸데없는 감상에 사로잡혔다가 그의 입술이 다시금 열리는 걸 유심히 지켜보았다. 온 신경과 본능이 외치고 있다. 자신은 약자라고. 그러니 도망치라고. 그러나 모든 게 어긋나 어울리지 않는 공간처럼, 그곳에 덩그러니 혼자 있던 그에게 유일무이하게 많은 부분을 공유한 자가 바로 눈앞에 존재했다.

"오늘만 기다렸어. 같이 돌아갈까?"

그 손끝이 아주 조심스럽게 제 손의 온기를 찾는다. 투박한 손끝이 아주 조심스럽게, 제 손등만 건드리고서 멀어진다. 그 신호가 무엇이라고, 기범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가 겨우 안으로 다시금 밀어 삼키고서 억지로 웃었다. 그가 가자고 하는 곳이 어디인지 잘 알아서였다. 기범은 지금 상황에서의 정답을 명확히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렇지 않은 일상처럼 말이다.

"그래."

살짝 찌푸려지던 그의 눈썹을 유심히 관찰하던 태민은 그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이 더 해사하게 웃었다. 그의 대답, 허락이 떨어졌기에 그는 그제야 기범의 손을 살며시 쥔다. 서로의 세월이 가득 묻은 그 손의 감촉을 오롯이 느끼며, 기범과 태민은 밖으로 나섰다.

문밖으로 나서자마자 안쪽 문을 바라보며 좁은 가게 안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장정의 사내들은 어깨를 들며 허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형님!] 그 짜맞춘 듯한 인사를 받으면서, 기범은 지옥도 같은 살벌한 풍경에 한숨만 가볍게 내쉴 뿐이었다. 염증이 난다는 듯한 태도와 함께 그는 무리 속에서 자신의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을 하나둘 눈으로 짚고서 업장을 치우라고 명령을 내린다.

그래, 평소 와타베구미를 적대시하던 사토구미를 들이고서도 마치 아무런 접점도, 접촉도 없었다는 듯이. 방금까지 장난스레 패를 나누던 이들이 여기저기 피 묻은 모습으로 고갤 숙여 우렁차게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천천히 발맞춰 봉쇄해 둔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섰다.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키며 기범은 제 손의 떨림이 싱대에게 전해지지 않기를 바랐다.

드디어, 그가 나왔다.

고개를 돌려 태민의 낯을 샅샅이 살폈다. 상한 곳 하나 없이, 아름다운 직선을 절묘하게 그어 놓은 앳되고도 성숙한 얼굴, 투박한 옷을 걸쳤음에도 도드라지는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 지나가는 이들에게서 감탄을 자아내는 하늘의 피조물. 그러나 관서를 넘어 일본 전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와타베구미의 젊은 피이자 가장 잔혹한 칼, 유일하게 한국 이름을 쓰는 최연소 와카가시라(*야쿠자 조직에서 후계자의 직급), 이태민. 그가 기범을 말갛게 응시하고 있었다.

기범은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한번 쓸어 넘겼다. 뒤쪽에서는 이태민이 끌고 온 무리 중 몇 명이 나오며 주변을 경계하였으나, 두 사람의 친근감 어린 접촉에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기범은 계속해서 태민의 눈을 찌르는 앞머리를 열심히 넘겨 주고 여상하게 말했다.

"가면 머리부터 손질해야겠다."

"응, 좋아."

그리고 태민은 제 머리칼을 훑던 손을 살며시 붙잡아 볼을 기댔다.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걸리며, 나부끼는 듯 기다란 속눈썹이 내려가며 눈을 살며시 감는다. 기범은 심장이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을 순간 느끼고서 입을 꽉 다물었다. 어느덧 그런 그들의 앞으로 검은색 차량 한 대가 다가와 섰다. 두 사람은 익숙하게 그 위로 올라탔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운전석에 앉은 이도 다른 호칭으로 그를 환영했다. 차가 움직이고서야 기범은 콩닥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제 손을 여전히 가볍게 잡은 굳은살 박인 온기에 현실을 실감했다. 기범의 머릿속에서 예견된 시기를 훨씬 앞당겨서 이태민이 출소했다. 안타깝고 아쉽게도.

"무슨 생각해?"

"……뭘 그런 걸 묻냐?"

창밖을 바라보는 기범의 까만 눈동자에 수많은 생각이 얽혔으나 그 표정은 놀랄 만큼 고요했다. 그에 걸맞지 않은 운율을 지닌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날카로웠으나 이태민에게 그것은 익숙한 음성이었기에 문제 되지 않았다. 자신에게로 향할 시선을 지그시 기다린 이태민은 곧 기범의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기범은 창밖을 보던 무감한 낯을 완벽히 바꾼 채 웃고 있었다. 익살스럽게, 그리고 어딘가 모난 모양새였다.

"이제야 말이 좀 통하겠네, 싶었지."

그렇지 않니, 태민아.

그리 반문하는 듯한 눈에 태민은 그저 웃었다. 태민은 그제야 답답하게 가려졌던 시야가 한층 개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그리워하던 품이 이곳에 있었다. 지금의 그를 만들어 준, 그의 모든 시초이자 바라 마지않던 우상이 눈앞에 존재했다. 밖으로 나오게 되면 어떻게 할지 계획하던 복잡한 머릿속이 모두 간단명료한 수식과 답을 도출해 내고 있었다. 이제 폭풍이 휘몰아치겠지. 그가 시작했든지, 자신이 시작했든지. 그렇기에 새어나가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자신과 달리 여전히 차갑고 부드럽게 맞닿는 유려한 손의 촉감이 기분 좋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태민은 사토구미가 어째서 기범의 업장에 있었던 건지 묻지 않았다. 그 물음은 앞으로도 꺼낼 일이 없을 테니까. 그저, 뱀의 속을 뜯어내 보이면 그만인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북박입니다. 펜슬에서는 처음 인사하는데 그 첫 글이 이런 요상한 탬키네요.

하고싶은 게 많은 글인지라 완결까지는 낼 작정입니다.

본래는 24년에 올리려고 했지만, 그러나 저러나... 빨리 써서 다음 편이나 쓰도록 채찍질 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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