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의 순환

뱀의 순환 1장

소문

창백한 점 by 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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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룹 샤이니의 멤버 이태민, 김기범에게 영감을 받아 그 외형과 이름을 차용하여 가공한 인물의 이야기입니다.

* 90-00년대 버블 경제가 가라앉은 뒤의 일본 배경, 경찰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던 시절의 야쿠자 내부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but 짭 느와르)

-이에 따라 태민과 기범은 야쿠자 조직원이 됩니다. 불편하시다면 뒤로 가기.

* 위 사정으로 일본어 대화는 []로 표기됩니다.

* 트리거 요소: 폭력, 폭행, 도박, 사채, 강간 등 다소 강압적이고 잔혹성이 포함된 요소들이 존재합니다.

* 이 이야기는 제가 늘 그러했듯이 사랑을 표방합니다.

고베시의 나가타구. 세계 4위의 항구였던 고베시답게 여러 가지 볼거리들이 가득했으나, 대지진은 사람들의 터전도 상권도 흩트려놓았다. 그리고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존재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야쿠자였다. 재난이 일어나고, 그들은 많은 시민들을 구제하는 데 나섰으며 나라에서도 그들을 묵인하였다. 시민들은 그들을 우상처럼 대했으나, 조직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모두가 존중받을 수는 없었다.

그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야쿠자는 역시나 와타베구미였다. 현재 전국에서 가장 난폭하기로 유명한 조직이었다. 최근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가 흔들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조직은 국가에서 벌이는 범죄 소탕법과 맞물려 다른 조직과의 이권을 다투기 위해 일촉즉발이었다. 모두가 불안하게그들의 동태를 바라봤다.

[요 앞에 작은 미술관 생긴 거 봤어?]

[아, 강 너머에?]

작은 강들이 많은 이곳에서 주민들은 구로 구분지어 얘기하기보다는 보통 '강'을 기준으로 얘기하곤 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쉬이 이웃과 소문과 소란을 나눴다. 지금처럼 흉흉한 시기라면 누구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특히나 이질적인 존재가 생기면 이웃과 나눴다. 작은 미술관은 탁월한 주제였다. 아래쪽의 번화가는 아니었으나, 다리가 위치한 중간 지점에서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자영업자들에겐 특히나 민감한 소문이었다. 동네 장사라는 게 다 그렇고, 민심이라는 게 다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니겠는가.

덮밥집을 운영하는 겐죠가 옆집 목욕탕 사장인 노부마츠와 나누는 대화는 단순한 미술관의 '개업'에 관한 얘기가 아닌 듯 무척 심각했다. 노부마츠는 앞을 쓸던 빗자루를 대충 벽에 세워 두고서 겐죠에게 바짝 붙었다.

[그거지? 왜, 와타베구미에-]

[쉬쉬-. 그 이름 함부로 올리지 말라고.]

겐죠는 순간 심장이 철렁였다. 그들이 삶의 터전으로 잡은 곳이 어디던가. 바로 지척에서 야쿠자 조직이 거점을 잡은 나가타구였다. 그 규모만 해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곳. 그리고 지금쯤 후계자 문제로 가장 민감하고 혼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조직은 여느 때보다도 흉포했다. 최근에도 바로 아래 블록에서 버젓이 영업하던 파친코 가게에서 야쿠자 간의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지 않았나.

노부마츠는 겐죠의 콩알만 한 심장에 혀를 차며 더 목소리를 낮췄다.

[야상(*야쿠자를 일컫는 호칭)도 결국 다 그 자식들이 설쳐서 문제인 거야.]

노부마치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깨달은 겐죠는 금방 기운이 빠진 듯 한숨을 쉬고서 몸을 물렸다. 상대가 할 말이 너무도 빤했기 때문이었다. 또 무슨 음모론인가 하였더니. 그 행동이 적나라한데도 불구하고 노부마치는 그를 붙잡고서 심각하게 어르기 시작했다.

[이게 다 그 조선인 때문이라니까!]

[이 사람아,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그러나. 조선인이 뭐야, 조선인이.]

[그 기생오라비가 들어가는 바람에 모든 게 바뀌지 않았나. 야상도 원래 이 정도까지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고. 아, 그리고 아까 말한 그 미술관도 그 조선인 놈의 것이 분명하다니까?]

겐죠는 머리가 아파지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조선인' 역시 바로 옆동네에 살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일어났다던 파친코 가게 역시 그 사람의 소유였다. 정말 기절할 것처럼 등골이 쭈뼛 서고, 곧이라도 그들이 들이닥쳐 모욕죄를 물을 것만 같았다. 겐죠는 몸을 부르르 떨고서 그의 손을 탁 치고 멀리 떨어졌다. 이 동네에서는 무척 유명한 얘기였다.

[그러다 악신에게 잡혀가! 이놈아.]

악신이라는 말에 노부마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상체를 뒤로 물렸다. 경멸어리면서도 진정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라 귀신이라도 나왔나 싶었다. 악신. 겐죠는 언젠가 멀리서 본 적 있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소문과 달리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체격에 무겁도록 일본 전통 옷을 얹어 놓았던 소년 같은 청년의 모습은 확실히 시커먼 야쿠자 무리에서도 튀었다. 그는 오히려 노부마치가 말하던 '키노리'보다도 그쪽이 더 소름이 끼쳤다. 겐죠는 노부마치의 손길이 닿았던 곳을 툭툭 손으로 털어내며 몸을 돌리려 했는데, 이어지는 말에 그만 발이 잡혔다.

[그래도 내 말은 잘 들어, 자네 가게에 종종 오지 않나. 언젠가 우리 목욕탕에 딱 한 번 찾아온 적이 있었어, 그…… 키… 하여간, 보려고 본 건 아닌데…….]

설마? 하는 심정에 경악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고 겐죠가 뒤돌아봤다.

[홀딱 벗은 모습을 봤거든…… 그런데 그게, 새하얬어.]

[어?]

이게 무슨 이상야릇한 소리인가, 겐죠는 제 귀를 의심하여 결국 그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노부마치는 그때를 다시금 머릿속에 그려 보듯이 침을 꿀꺽 삼키며 미묘한 얼굴로 다시금 제 얘기를 반복했다. [등이 하얬다고, 아무것도 없이. 문신 하나 없이. 그 말이 사실인 거지. 녀석은 야쿠자도 뭣도 아니야. 그저 사기꾼이라고.] 그러나 그 말은 딸꾹질로 끝나고 말았다. 힉-. 하는 소리와 함께 먹혀든 말소리와 홉뜬 눈의 노부마치를 보며 겐죠는 서늘한 온도를 느꼈다.

[헉.]

"야쿠자는 아니긴 해."

뒤돌아 제게 드리운 그림자의 정체를 눈에 다 담기도 전에, 독특하고도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후벼팠다. 겐죠는 덩달아 딸꾹질이 나오려던 숨을 애써 눌러 참으며 위를 올려다봤다. 희고 신경질적으로 보이는 흑발의 사내. 오늘은 점잖게도 사각 안경을 쓰고서 한쪽 입꼬리만 올린, 기범이었다. 그들이 서두에서부터 내내 입에 올렸던 그자.

그의 입에서 나온 말 중 단 한 단어만이 그의 귀에 꽂혔으나, 어떤 뉘앙스인지는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겐죠는 최대한 활짝 웃으며 어서 오라는 인사를 건넸다. 그에 기범 역시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늘 먹던 메뉴로 주시죠.] 산뜻하게까지 들리는 주문에 겐죠는 후다닥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노부마치는 어느새 가게 안으로 꽁지 빠져라 사라지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슬렁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던 기범에게 한 우직한 남자가 붙었다.

[형님. 그냥 넘기실 겁니까? 이건 모욕입니다.]

씹어 죽여도 모자란다는 표정과 짓씹는 잇새 속 말이 그의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기범이 평소 자주 대동하는 그의 오른팔, 이부키였다. 유일하게 지금껏 조직에서 오랫동안 그의 보좌를 맡았고, 젊은 조직원들은 기범의 오른팔이라고 부르는 인물이었다. 기범은 그의 분노를 흘기고 어깨를 으쓱인다. 내가 진짜 야상도 아니고. 그는 노렌 아래를 지나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오는 내가 아니라 네가 살아야지. 시킬 거 없어?]

어깨를 으쓱이며 그는 눈앞의 주인장을 본다. 흰 모자와 흰옷, 정갈한 앞치마까지. 전문적이면서도 결코 다른 직업은 떠올릴 수 없을 듯한 반듯한 복장의 사람을 보며 한동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부키는 고개를 내저으며 속 터진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고 기범의 뒤에서서 사장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일반인이 듣더라도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었으니 이부키의 입장에서는 더 이해되지 않았다.

앞선 겨울에 멘션의 수도가 터져 목욕탕 한 번 썼다고 이런 얘기를 들을 줄은 기범도 예상치 못했다. 그날이 어떤 날이었더라. 굳이 제 손에 쥐어진 열쇠를 외면하고 십 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발들인 적 없는 욕탕으로 향했던 날이다.

사실 기범의 소속에 대해서는 암암리에 유명한 얘기였다. 길 위에까지 얘기가 나왔다면 이제 공공연한 얘기가 되겠지. 기범은 제 처지에 그저 짙은 웃음을 내걸었다. 금방 포장된 음식을 내오면서 그 웃음을 마주한 주인은 못 볼 걸 봤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괜히 힘주어 인사하고서 허리를 펴자, 가게 문 앞으로 천천히 서는 검게 선팅된 차 한 대가 겐죠의 눈에 들어왔다. 기이한 손님은 뒤돌아 차를 잠깐 멈춰서 보더니 자연스럽게 다가가 다른 이의 손길을 빌려 차에 올라고 차량은 빠르게 사라졌다. 겐죠는 머릿속에 떠도는 사내의 입술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붉은빛이 감도는 매끈한 입술에 내걸린 미소는 분명, 기이하게도 사람을 끌어당기는 야살스러움이 담겼기 때문이다. 참 이상한 일이지. 그리고 그는 머지않아 한 얘기를 떠올렸다. 4년 만에 악신이 돌아왔다는 얘기였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겐죠는 당분간 거리를 다닐 때는 입도 뻥긋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뱀의 순환

이태민 × 김기범

by. BB


BGM

쨍한 하늘은 겨울을 잊은 듯 화창했다. 길게 이어지는 오르막길을 지나다 보면 작은 주택가와 고급 멘션이 양측에 대립하듯이 이어지고, 이내 공사 부지인지 아무것도 없는 땅 위로 높다란 돌담 벽이 쭉 이어졌다. 그 아랫길을 걷다 보면 위로 빠지는 샛길이 나오는데, 온통 검은색인 차 한 대가 고요히 그 길을 올랐다. 분리수거하는 미화원들이 내려가며 차량을 힐긋거리는 건 덤이었다.

그들이 나눌 얘기는 빤했다. 차 안에 탄 기범은 늘 그렇듯이 차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무료하게 바깥을 볼 따름이다. 기이하고 음습한 저택.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장소. 사람 잡아먹는 악신이 있는 곳. 언젠가 마을에 재앙의 손길을 뻗칠 어둠의 둥지. 그리고 다른쪽에서의 악평도 익히 알고 있었다. 아직 누가 말한 건지는 파악할 수 없는, 떠도는 낭설 같은 얘기였는데 바로 [와타베구미를 무너뜨릴 배신자의 굴]이었다. 신기하게도 아래에 줄지어 이어진 집들로 인해 바다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이곳은 그렇지 않아도 살벌한 분위기를 더욱 삭막하게 만들었다.

지잉-.

검은 철문 앞에 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기계음이 울리고 웅장한 철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차량은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정원을 가로지르다가 지정된 곳에 차를 세운다. 그곳에서 내리는 인형들이 무척이나 익숙하다. 기범은 제 옆을 봤다. 저처럼 온갖 소문의 꼬리를 달고 있는 누군가를. 그러자 새까만 어둠이 자신을 바라본다.

기범은 명석한 아이였다. 그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으나 김기범 스스로만큼은 그를 부정했다. 제가 정말로 명석하고 똑똑하였다면 과연 이러한 판단을 내렸겠는가? 이러한 삶을 살았을까? 기범은 기이한 감각을 겪었던 한 날을 기억했다. 고베시를 관통한 대지진. 그 속에서 죽어가던 삼촌과 그나마 멀쩡히 남아 있던 가게를 번갈아 보며, 심장이 마구 뛰고 모든 소리가 그의 세상에서 소멸하던 순간을. 그는 갑작스레 가빠져 오는 숨에 허덕이다가 이내 현실로 등 떠미는 어느 눈동자와 마주쳤다. 새까맣게 반짝이던, 보석 같이 빛나는 둥근 눈동자를 한 소년이 엉망인 몰골로 같은 거리 위에 서 있었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더라.

"형?"

"아, 아-."

기범은 크게 목울대를 일렁이고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현실로 돌아왔다. 제 호흡은 정상이었으나 세차게 뛰는 심장이 느껴져, 스스로 괜찮다고 세뇌하기 시작했다. 태민은 익숙하다는 듯이 그의 손을 잡아 오며 아무렇지 않게 그의 팔뚝과 등을 쓸어 주었다. 기범은 괜찮다며 웃고 그에게서 살짝 떨어졌다. 고개를 돌리자 나지막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가로 둘러싼 아름다운 정원과 2층 구조의 넓은 건물이 보였다. 얼핏 보자면 어느 외곽의 수도원처럼 보일 만큼 성스럽게 여겨지는 양식 건물은 짙은 잿빛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들어가자. 그간 풀 얘기도 많잖아."

"그래, 참. 너도 돈부리 좋아하지? 같이 먹을래?"

기범은 포장해 온 음식을 이부키에게 건네받아 들어 보였다. 태민은 그를 보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웃었다. 기범은 이미 소문이 쫙 깔린, 파친코 가게 내의 야쿠자 전쟁 이후로 종종 태민의 저택에 들렀다. 정작 주인은 그리 오래 머물지도 못하는 집을. 항구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와타베구미 본가에서도 동서로 멀리 떨어진 이태민만의 저택에서. 그러나 서로 해결해야 할 일들이 있었으므로 대화나 식사할 여유는 없었다. 얼굴 마주칠 시간도 없었다. 며칠이 지나서도 말이다. 그러니 그저 기범은 때가 되면 저택을 방문하였고, 주인 없는 시간을 보내다가 홀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참, 미술관은 어떻게 할 거야?"

"일찍도 물어본다. 안 그래도 오늘 그쪽으로 출근하려고 했는데."

"오랜만에 시간이 나 버려서."

그렇겠지. 이태민의 출소는 극비리에 잡혔고, 정보는 철저하게 통제당했다. 지금은 병상에 누워 있다고는 하나, 오야붕인 엔도 마저 명확히 알 수 없었다. 기범은 그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분명 평소처럼 이른 점심거리를 사서, 경찰 조사를 받느라 잠깐 닫은 파친코 가게를 두고 새로 개장한 미술관으로 출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이태민이 제가 자주 가는 가게 앞으로 시간 맞춰 데리러 왔다. 기범은 찰나 많은 생각이 들었으나 굳이 입 밖으로 내지도, 표정에서 티 내지도 않았다.

건물은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운 지붕이 있는 석조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면 나무 마루가 있어서, 현관에서 신발을 벗고 올라가야 했다. 끼익-. 발을 딛으면 들려오는 소음에 기범은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앞서 나가는 태민을 따라 들어가는데 저택의 사용인이라고는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몸을 숨기며 다닌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 저택에는 사용인이 몇 없었다. 바깥을 경계하는 조직원들만 있고, 내부에는 철저히 이태민이 손수 고르고 짠 인원만이 돌아가며 상주하게 되어 있었다. 정해진 주기도 없었고, 때마다 스케쥴이 바뀌었으며 모두가 비밀엄수 계약서를 작성한다. 그리고 반드시, 그들은 모종의 사유로 이태민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벽을 따라 둥글게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바로 보이는 현관 옆을 따라가면 거실이, 그리고 그 앞으로 아치형으로 뻥 뚫린 벽을 지나면 너른 아치형 창이 나 있는 식당이었다. 분명 거실은 일본 장식으로 가득 채워진 좌식 공간이었는데, 이곳은 작은 장식부터 디테일까지 모두 양식을 따른 공간이었다. 기다란 테이블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다인용 식탁이었다. 공간이 무식하게 넓으니 이러한 짓도 가능했다. 아마 이태민의 측근 수에 맞췄겠지.

"앉아."

"너도 밥 안 먹었어?"

"형, 옆에 앉아야지."

생긋 웃으며 제 허리를 감아오는 손이 거리낌 없었다. 아, 이곳은 그의 영역이었지. 기범은 순간 섬뜩했다. 태민은 굳이 가장 안쪽 상석의 바로 옆을 가리켰다. 관성처럼 제일 멀면서 마주 보는 곳에 앉으려던 기범의 발걸음은 순순히 그의 옆으로 옮겼다. 말 잘 듣는 개도 이러진 않을 텐데. 기범은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으며 그가 내어 준 자리에 앉았다. 그는 바깥 창으로 비치는 녹음이 진 정원을 보고 참으로도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직 봄이라기에도 살짝 이른 계절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저들은 저리도 생생할까.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저택의 사람은 온통 흰색 옷을 입었다. 정갈하게 테이블을 세팅하고서 그들은 음식을 데우겠다는 명분으로 기범이 가져 온 포장 음식도 가져갔다. 기범은 제 접시 양옆으로 알맞게 놓인 식기를 보며 잠깐 고민했다. 만약 이태민이 당장에라도 이 나이프를 들어서 자신의 목을 찌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도 없는데 자꾸 여기 출근은 왜 했어."

그의 입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분이 좋은 듯 운율을 갖춘 문장이 지금의 태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기범은 어깨를 으쓱였다.

"집에는 모름지기 사람이 있어야지. 그리고 당분간 얼굴 잘 못 볼 거 같아서, 혹시나."

"여기도 사람은 있는데, 괜히 마음도 안 좋게."

"사토구미는 잘 정리됐어?"

"그래도 기분은 좋네."

불쑥 튀어 나간 궁금증과 함께 기범은 태민과 눈을 마주쳤다. 여전히 거칠고 짙은 검은 머리칼이 아무렇게나 내려와 눈을 찌르듯이 내려와 있었다. 태민은 무엇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웃었다. 그 모습이 순수해 보이기만 한 기범은 그냥 넘어갔다. 아니, 사실 어쩔 줄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났다. 4년은 그리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그가 당시 들어간 교도소는 역대 가장 많은 흉악범이 수용되었기로 유명했다. 어떻게 지냈을까. 잘 지냈을까? 아프지는 않았을까? 험한 꼴을 겪진 않았을까? 하지만 감히, 한창 가장 잔혹함으로 명성을 떨치던 와타베구미의 제 1대 행동대장 격의 와카츄인 그를 건드릴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기범이 그토록 태민을 걱정하는 일은 습관이었다. 우선 아주 어릴 때 만났으니까. 이태민과의 인연은 제법 평범하게 시작했다. 아닌가. 사실 그 당시의 상황은 모두에게 혼돈이었기에 평범하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가 7살, 내가 9살일 때. 그는 자신과 연고도 일면식도 하나 없었다. 그나마 있는 접점이라고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점. 하지만 그마저도 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사케도 준비해 봤어."

"……굳이 낮부터?"

이태민은 그저 방긋 웃을 뿐이었다. 그가 이럴 때면 정말 어린 시절이 떠올라 모든 걸 포기하고 싶게 했다. 기범이 지금의 태민을 두려워하면서도 목줄 맨 개처럼 행동하는 이유기도 했다. 그리고 저와 태민 사이에 놓인 사케 병과 각자 하나씩 놓인 흰색의 술잔에 잠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태민의 뒤쪽에는 유일하게 서양식 골조와 맞지 않은 장식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과 유사한 흰 잔이었다. 기범은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윽-. 아파. 아프다, 형아.'

'하하, 이거 생각보다, 많이…… 아프네.'

'자. 어때, 형?'

아찔한 기억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기범은 술을 따르는 태민을 힐끔거렸다. 딱 알맞게 잔을 채운 술이 자연 빛에 반사되어 일렁였다. 태민은 이미 술잔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는 기범의 술잔을 기다렸다.

"왜, 형 낮술도 잘 마시잖아."

"딱히, 요샌 그러지도 않아. 조금 더 먹고 마실게."

그 말에 태민은 처음으로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기범은 언제 나온 건지, 제가 싸 온 돈부리와는 차원이 다른 음식을 향해 식기를 놀렸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태민의 자세는 한껏 풀어져 있었다. 술잔을 쥔 팔을 식탁에 대고, 다른 한 팔은 등받이로 향한 채 제게 허리를 숙인 상태였기에, 그의 벌어진 남색 기모노 앞섶으로 흉포한 가슴팍이 슬며시 비쳤다.

"사카즈기고토(*오야붕과 술잔을 나누어 마시므로 인해 야쿠자 조직의 일원이 됨을 알리는 예식)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냥 술잔이잖아, 형."

그 말이 단박에 기범의 신경 줄을 당긴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대번에 인상을 팍 찌푸렸다. 오늘따라 차분하게 가르마를 타고 내린 머리가 그의 예민한 성정을 더 돋보이게 했다. 태민은 기범의 속을 긁는 법을 아주 잘 알았다. 무척이나 빼어나서, 그것으로 상을 만든다면 전국구가 아닌 세계 1위 상을 타리라 장담할 정도였다. 기분 좋은 걸 숨기지 않고서 술잔을 쥔 손등에 턱을 괴고 기범을 빤히 보는 태민에 기범은 결국 식기를 내려놓고 삐딱하게 자세를 잡았다. 참, 귀한 집 자제처럼 보이면서도 그가 평소 말하는 '건달'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라고 태민은 생각했다.

"내 신경 긁어 먹으면 좋아? 응? 어쩌자고 이 시기에 덜컥 출소를 해."

"보고 싶을까 봐."

"지랄 마. 사토구미는 어떻게 정리했어."

"잘. 아직은 쓸모가 좀 있지 않을까 해서, 와카쵸 몇 명은 남겨 뒀어."

기범의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를 기민하게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태민은 방금처럼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기범의 가슴팍을 짚었다. 묵직한 압박에 기범은 순간 숨 쉬는 법을 잊은 듯이 숨을 들이키곤 멎다. 조금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태민의 눈이 새까맣다. 여전히 미소 지은 입가로 기범을 달래기 시작했다.

"진정하고 밥부터 먹자, 내가 미안해."

"……몸 사려, 이태민."

짤막하고 퉁명스러운 말이었으나 태민은 해사하게 웃으며 다시금 자리로 돌아가 반듯한 자세로 식사를 이어갔다. 기범 역시 목울대를 일렁이며 식사에 집중하고자 애썼다. 그는 수만 가지 생각을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끝내 그의 입에서 나온 말도 식사와 함께 같이 삼켜 내며 답을 뱉었다.

"그래서 형, 나랑 술잔은 언제 나눌 거야?"

"너 하는 거 봐서."

태민은 그저 웃으며 그 성의 없는 답을 지나쳤다. 그럼 식사하고 나서, 내 머리 좀 잘라 줄래? 그제야 기범은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이 이 집에 출근 도장을 찍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태민의 이발이었다는 걸. 참으로 별 볼 일 없고 사소한, 그래서 더 친밀하기 그지없는 이유지 않나. 그는 아직도 그에게만큼은 한없이 순종적이고 유순하게 굴 때가 있는 태민을 가늠하기 위해 앞으로도 무던히 애써야만 한다는 직감에 몸서리쳤다. 그러나 가슴팍을 누르던 온기가 남았기 때문인지, 그는 그저 의연하게 웃었다.

알겠어.


테츠다는 다리를 달달달 떨며 연신 연초를 태우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는 웅장한 돌담 벽 아래에서 그의 상사를 몇 시간째 기다리는 중이었다. 오늘 미술관 일정은 어찌 되고, 얼마 전에 출소했다는 태민 님께 납치를 당한 지금의 상황이 무척 불안해서였다. 정확히 선을 긋자면 기범은 와카가시라와 오야붕 사이에서 오야붕 편에 서 있는 쪽이었다. 적어도 윗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모르는 테츠다와 주변 조직원들이 보기엔 그랬다. 태민과 엔도 사이는 물론 문제가 없었다. 드러난 바로는.

그는 욕지기가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사실 지금도 당장 도망치고 싶었다. 이부키 놈이야 이미 오래된 조직원 중에서도 태민 님의 사람이라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처음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기범에게 보내진 이부키를 보고 테츠다는 경악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이태민이 쓰던 잘 갈린 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칼을 잘 쓰는 사람이었고, 과감하면서도 멍청하지 않은 인물이었다. 오죽하면 한참 태민이 와카가시라로 임명된다는 소문이 나돌 때, 이부키가 그의 호사(*보좌)가 되리라 모두 예측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실상 그가 '좌천'됐다고 했다. 하지만 기범의 밑에서 잔뼈 굵은 뼈 다 키워 온 테츠다는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다. 이부키는 태민의 칼이었다. 그 칼은 결코 기범을 향하지 않았다.

'항상 키노리 님을 대하는 태도가 유별나단 말이지.'

유별난 것 치고는, 또 너무 날카로웠고. 최근에는 젊은 와카가시라와 와타베구미의 돈줄 역할을 톡톡히 해온 키노리가 거의 결별하는 거 아니냐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했다. (사실 대다수의 구설수들이 두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있는 형국이긴 했다.) 그게 본격적으로 대두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태민이 와카가시라가 되고, 또 교도소에 입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전쟁 때문이었다. 몇 년 전에 직접 마주했던 참상을 떠올리고서 테츠다는 몸을 떨었다. 그건 전쟁이라기보다 참상 극에 가까웠으니까. 그는 그날의 참혹한 장면을 떨쳐내기 위해 다시 담배를 꺼냈다. 그런 그의 왼손에는 새끼손가락이 비어 있었다.

테츠다는 도박에 너무 빠져 버린 나머지 조직에서 손가락이 잘린 못나고 못 쓸, 몹쓸 패였다. 그런 그를 주워간 게 바로 기범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테츠다는 웬 썩은 동아줄인가 했다. 파문당하지 않았다 뿐이지, 졸개로 살아가야 할 그에게 그나마 최소한의 가오만은 살릴 만한 자리라는 계산을 했다. 당시 그에게 기범의 존재는 조직에서 관리하는 한 파친코 가게의 어린 관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떠도는 소문도 안 좋았고, 더러운 조선인이 아닌가. 그래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는 수밖에.

졸개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테츠다는 조직의 허락하에 정식으로 기범의 밑에서 일하게 됐다. 그때도 윗선의 명령은 관리 잘하고 감시도 좀 하고 그러라는 내용이었다. 열심히 상납만 잘 시키고, 대충 돈이나 빼돌리면서 주변 정리나 가끔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제 예상과 달리 키노리는 17살의 어린 조선인 사장이 아니라, 돈에 미친 귀신이었다.

[우린 커다란 장사를 하게 될 거야. 이곳 말고, 다른 미래도 보자고.]

그 뒤로 이어진 조곤조곤한 말이 그리도 전율을 불러들일 줄은 몰랐다. 도저히 17살의 머리에서 나온 설계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는 성인 오락실의 지역 프렌차이즈 화를 계획했고, '다른 물건'들을 팔만한 유통 경로를 짰다. 이래서 세상에 사기꾼이 넘치고, 상재는 따로 있는 거구나. 테츠다는 그렇게 생각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를 분명히 더 숨기고 있었다. 실제로 그 어린 나이에도 수완 좋게 사업을 따내고, 와타베구미와 원만한 관계를 맺었으니까. 그래서 그걸 쥐고 이용할 수 있을 만할 때까지 곁에서 비위 맞춰 놀아 주려고 했는데, 그게 어느덧 12년이라는 세월이 되어 그에게 충성심을 심어 주었다.

기범은 몸소 실천해 보였다. 온갖 더러운 수를 가리지 않고, 또 엄청난 돈을 만지며 그에 많은 부분을 와타베구미에게 바쳤다. 엔도 오야붕과는 테츠다가 기범의 아래에 들어갈 때부터 모종의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공공연히 그게 사실로 드러나게 되자,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두가 쉬쉬거렸다. 테츠다도 그에 대해 온갖 상상을 다 해 보았었는데, 언젠가부터 더러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오야붕의 그거래, 그거.]

몇몇 말단 조직원들이 흔히 소모하는 더러운 추문이었다. 아직 어리고 뽀얗던, 어딘가 낭창한 느낌을 주면서도 건드릴 수 없었던 돈을 낳는 거위, '키노리'가 지날 때마다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보이며 저마다 반찬거리로 써먹었다. 오야붕과 얼굴을 맞대고 잔을 나눴던 테츠다는 어떻게 조직 내에서 그런 소문이 퍼질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시했는데, 언젠가부터 그 소문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돌이켜 보면 그때 추잡한 추문을 흘리던 놈들은 지금 얼굴도 볼 수 없었다. 주변의 '약지'들은 그게 태민의 소행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만큼 기범과 태민 사이는 각별했다. 당시 제 기억에서도 너무 흐리지만 태민과 기범은 무척이나 사이가 좋았다. 친형제라고 해도 좋을 만큼이었고, 또 어떻게 보자면 형제라기엔 별났다. 실제로 기범은 자신의 몫으로 돌아오는 수입에 절반을 태민에게 붓고 있었고 말이다. 다만 그들은 항상 따로 살았고, 가족이라기엔 묘한 선이 있는 관계였다. 그렇기에 간혹 태민이 기범에게 사람을 포함한 온갖 것들을 바치기 시작할 때는, 그게 더 기이하게 비쳤다. 그들은 제법 오래전부터 형제나, 조직이 내미는 부자 관계보다도 조금 뒤틀린 형태를 지녔다.

어느 무더운 여름이었다. 당시 기범은 치안이 걱정될 만큼 오래되고 낡은 집에 살았다. 뒷마당을 통해 들어가면 마루가 보이고 거실로 바로 들어갈 수 있었다. 뒷문이 열려 있기에 들어섰더니, 거실에서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선풍기를 튼 채 나른하게 잠에 빠진 기범 위로 겹쳐 누운 이태민의 모습이 보였다. 테츠다는 봐선 안 될 무언가를 본 기분이었다. 성인이 된 기범보다 더 어렸던 태민은 가만히 기범의 가슴팍 위에 귀를 대고서 눈을 감고 있다가 슬며시 눈을 떴다. 그 까만 눈은 살짝 접히고, 검지를 가져다 대던 입가에 걸린 조용한 미소를 봤을 때, 테츠다는 원인 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이후로도 수많은 사건을 목격했지만, 테츠다는 그때부터 태민을 꺼리기 시작했다.

언젠가 테츠다가 기범에게 태민과는 어떻게 된 인연이기에 이리도 챙기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걔는 그냥…… 나 없이 안 돼.'

무슨 의미인지 되물었을 때 그는 그리 답했다. [내 꿈.] 그런 그들 사이가 틀어진 건 많은 이들이 고베시 내의 상권에 관한 이해가 엇갈렸을 때부터라고 하지만, 가까이서 기범을 지켜봐 온 테츠다는 그보다 이전이라고 짐작했다. 이태민이 와타베구미의 정식 조직원이 되었을 때쯤으로. 대충 이해가 됐다. 똑같은 조선인이면서, 그것도 제 이름이나 출생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던 태민은 가장 큰 야쿠자 조직의 조직원이 되었고, 기범은 그래 봤자 파친코 가게의 사장 명함밖에 못 땄다. 당시의 테츠다는 조직을 우러러보고 있었기에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

지금은? 글쎄. 그는 아직도 기범의 의중을 읽을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관동 지역의 마츠야마구미의 정보나 오사카에서 최근 시끄러운 우미즈구미의 정보나 서신을 꾸린 가방을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다. 그것도 상당히 민감한 내용의 정보였다. 그냥 동태 정보 정도였다면 이리 손발이 떨리지 않았을 테지. 기범의 최근 행적은 위태롭다 못해 여태 테츠다가 일방적으로 쌓아온 신뢰와 친밀감의 근간을 뒤흔들만한 일들로 넘쳤다. 그를 망설이게 하는 건 한낱 정이었다. 아무래도 똑같은 사람이다. 같이 부대끼며 산 세월이 얼마란 말인가.

'그렇다고 전쟁에 휘말려서 죽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돈을 만지게 된 이후 오로지 돈에 대한 가오만 쑥쑥 자라난 테츠다에게는 그를 온전히 누릴 생이 가장 중요했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그랬지. 이렇게 기다리는 이유가 그럼 그깟 정과 생명에 아직 위협을 느끼지 못 해서일까? 그는 복잡한 심경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 시간까지 서 있었다. 띠리링-. 그때, 기범이 선물한 낡고 무거운 휴대전화가 울렸다.

-키노리 형님-

[형님!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

[형님…?]

-왜 아직도 기다려, 이만 들어가지.

부드러우면서 차가운 미성이 귓가에 꽂히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바로 이태민이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곧장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당혹감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외쳤다. 지켜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는데도.

[와, 와카가시라 님! 안녕하십니까! 영광입니다!]

-형은 오늘 못 나가요. 혹시 전할 거라도 있으면 이부키를 보낼게요.

순간 머리가 차갑게 식으면서 테츠다는 어떠한 길이 그의 생존과 가장 직결되어 있을까 머리를 굴렸다. 다행히 십수 년 동안 따까리 행세를 하면서 키운 생존 본능은 '이걸 넘겨줘서는 안 된다'에 가까운 답을 내렸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무난한 답은 무엇일까?

[아, 아닙니다. 그저 오늘 함께 미술관 쪽에 가기로 해서 기다리고 있었을 뿐입니다. 형님께서도 오랜만에 회포를 푸셔야죠. 제 생각이 짧아 미련스레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니 너무 염려하진 마십시오.]

그러나 제 긴 혀가 문제였을까. 저편에서 들려오던 고요한 목소리가 끊겼다. 수화기가 잘못된 걸까 싶어 화면을 한 번 보고 다시금 입을 열려고 할 때 생각보다 단출한 답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그럼. 잘 가요.

테츠다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순간 그 한숨이 수화기 너머로 들어갔을까 봐 애써 밝은 웃음으로 이만 좋은 밤 보내시라는 말을 온갖 미사여구를 다 붙여서 전한 뒤 통화를 끝냈다. 그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워낙 거대한 저택이니만큼, 아래로 이어지는 돌담 벽이 상당히 긴 편이었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은 입구로 향하는 샛길과도 떨어져 있었고, 쓰레기장과 건물 공사장이 있어 사람들도 잘 오가지 않는 곳이었다. 거기다 저택의 CCTV가 달린 곳도 아닌, 태민의 저택에서는 사각지대나 다름없는 곳이었는데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져 오싹했다.

[으으, 모르겠다.]

그는 황급히 걸음을 재촉하며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정보가 금방 닳아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당장에 위험해 보이지는 않으니까. 그는 차라리 먼저 미술관에 가서 자리를 정리해 놓는 게 더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며 빠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김기범이 키노리라 불리게 된 계기는 단순했다. 조직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비쳤을 때, 김기범(金起範)이라는 석 자의 한자를 보고서 누군가 지나가며 '킨키노리?'라고 읽었기 때문이었다. 십 대였던 기범은 뒤늦게 '키노리'라는 호칭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어린 시절이었음에도 그리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길거리에서는 '조센진'이라고 불리는데. 어떻게 보면 격식이 올랐다고 봐야지 않겠나.

끼익-. 끼익-.

기범은 종종 강 서쪽에서 살던 때를 떠올리곤 했다. 이태민과 한 번도 같이 산 적은 없어도, 그와는 늘 지척에 살았다. 그건 강 동쪽으로 거처를 옮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둘 사이의 교류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기범은 태민이 강제하지 않았으나 그의 허락 없이는 저택을 나서지 않았다. 바깥에 차를 대기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는 이부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의 심부름을 하게 된 테츠다 역시 바깥에 오랫동안 서 있었겠지. 그는 항상 묘한 눈으로 이부키를 보게 된다. 이태민의 가장 날카로운 칼. 지금 태민의 곁에 있는 또 다른 칼은 사실 그보다 날카롭지는 못했다. 이부키는 제게 충성을 다하지만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도 했다. 오늘만 해도 그와 함께 나서자마자 이태민을 마주하지 않았는가.

끼익-. 끼익….

어두컴컴한 창밖을 보다가 발끝으로 시선을 내렸다. 자연스럽게 풀어져 내린 젖은 머리칼을 타고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밤공기가 아직 차가운데도 기범은 씻고 나서 준비된 유카타 한 장만 걸치고 걸음을 옮기는 중이었다. 짙은 나무 바닥은 걸을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졌다. 집을 지을 때 설계도를 옆에서 봤기에 잘 알았다. 예민한 놈이 뭐 하러 비싼 돈 들여가며 소리가 나도록 짓냐고 나무랐지만, 녀석은 대쪽과 같이 복도에 소리가 나는 나무 마루를 깔았다. 그렇게 저택을 유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사용인만이 머물게 되었고, 시공비가 천문학적으로 들었음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기범은 어느새 파리해진 입술로 한 방 앞에 계속 발걸음을 멈추고 있었다. 금장이 된 손잡이의 큰 나무문 하나. 2층 정 중앙에 위치한 큰 방은 태민의 방이었고, 왼쪽 욕실에서부터 나오던 기범의 방으로 지정된 곳은 그 방의 오른편에 있었다.

똑똑똑.

기범은 그 방을 두드리고서 가만히 귀를 가져다 댔다.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는데, 기범은 그곳에 대고 작은 인사만 남기고서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잘 자, 이태민."

한 조직의 차기 후계자이고, 조직에서 직할로 관리하는 가게의 주인 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사적인 말이었다. 삐그덕거리는 소음이 잠시 멎은 뒤 미닫이문이 열리는 소리가 작게 났다. 복도에서의 마지막 발길을 떼니 끽-소리가 멎었다. 기범에게 제공된 방은 일본식 장지문으로 되어 있었기에 그가 들어가고 나서 은은한 불빛이 한동안 복도를 비췄다가 꺼졌다. 서늘한 밤이 저택을 지켰고, 기범은 오래도록 그에게 맞지 않은 둥지 속에서 잠을 설쳤다.

깊은 새벽이 지나 겨우 얕은 잠을 자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제 위에 있는 누군가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북박입니다.

어째 새해 전에도 이런 걸 쓰고 있는가. 저는 새해가 무척 걱정이 되는군요. 허허허.

이 글을 새해부터 읽으실 여러분들께서는 복 많이 받으실 겁니다. 치얼스.

다음 편도 빨리 가져올 수 있도록 할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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