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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페커미션 02. [carry] 파도 위의 평화

1차-테리온x캐럴(BL)

커미션 페이지: https://crepe.cm/@Haranging/14114

3천자 커미션이었는데 재밌어서 그만 6천자를 써버린 경우

신청 감사합니다!

캐리-파도 위의 평화

테리온은 고민했다.

‘플루가루도 까먹고 다니는 놈을 꼭 데리러 가야 할까?’

테리온은 고쳐 고민했다.

‘갖고 다녀도 쓸 수 없을 만큼 만취한 놈을 꼭 데리러 가야 할까?’

테리온은 또다시 고쳐 고민했다.

‘지팡이는 갖고 다녀서 감사하다고 해야 하는 건 아닐까?’

테리온은 급기야 철학적으로 고쳐 고민했다.

‘아씨오는 왜 인간을 대상으로 할 수 없는가?’

흡사 ‘왜 달이 존재하는가?’정도로 철학적이고 원론적인 고민이었다. 이딴 고민으로 도피할 정도로 테리온은 캐럴을 데리러 가기 싫었다. 아, 빗자루 운전이 불가능하면 나이트버스라도 타던지 왜 내가, 하고 머리를 벅벅 긁던 테리온은 생각을 정정했다. 나이트버스 같은걸 태웠다가 무슨 후환이 있을 줄 알고. 저가 멋대로 술 마시고 멋대로 취한 주제에 나이트버스의 원한이라면서 일주일은 신경을 긁어댈 것을 생각하면 버스는 아니었다.

정말로, 왜 데리러 가야하지. 마법 맞아서 혀가 길어지든 말든 지팡이를 도둑맞든 말든 찬데서 자다 입이 돌아가든 말든…. 아, 입은 돌아가면 안 된다. 입 돌아간 캐럴을 상상한 테리온은 얼굴을 구겼다. 그 얼굴에 흠이 생기는 것도 문제지만 네 입도 돌리라며 입술을 쥐어뜯을 걸 생각하면 끔찍했다. 무엇보다도 만취해서 길바닥에서 누워 자다가 죽으면 곤란했다. 얼어죽든 밟혀죽든 살해당하든 어쨌든, 곤란했다.

‘…곤란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테리온은 익숙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눌러 밟았다.

시계를 보고 한숨을 한 번 쉰 다음 테리온은 일어나 망토를 집어 들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테리온의 친구이고 연인이며 유일한 체온이었다. 포기할 수 있었다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가 사라질 그를 생각하면 정체모를 감정에 심장이 쥐어짜였다. 이유조차 모르는 고통이 장막처럼 그를 덮었다. 모든 아픔이 익숙해 지겨웠으나 오직 이 아픔만은 길들일 수 없었다.

그러니 까닭 없이 테리온은 그를 잡고 있어야 했고, 잡고 있어야 했으므로 함께해야 했으며, 함께해야 하므로… 술 마신 뒤치다꺼리도 해야 했다. 그런 결론이 났다.

다시 한 번, 술집 이름 위에 고정된 시계침을 보고 테리온은 지팡이를 가볍게 휘둘렀다. 제 영혼에 새겨진 가장 큰 상흔을 데려올 시간이었다.

순간이동으로 도착한 술집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사람 사이에 숨기 쉬우니 환영할 만한 일이긴 했는데 이래서야 애인을 찾는 것도 번거롭다. 테리온의 눈이 제 것을 찾아 이리저리 움직였다. 평균보다 조금 작은 키에 농익은 과일처럼 매끄러운 빛, 바람처럼 부드러운 선. 유능한 사냥꾼은 조금씩 인파를 뚫고 목표를 찾았다.

그리도 데리러 가기 싫었건만. 정작 꼴을 본 테리온은 바로 제 처지를 납득했다. 과연, 눈앞에 있는 건 영장류가 아니었다. 사람이라면 모를까 말 못하는 네 발 짐승이라면 데리러 와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런 거였다. 뭐, 가끔 두 발로 서긴 하는데…. 짐승치고는 마법사를 너무 닮긴 했는데 그래도 저 모양새며 내는 소리하며 아무리 봐도 새로 발견된 마법동물일 가능성이 컸다. 동물더러 집에 알아서 찾아오라고 기대하는 건 불합리한 일이었다.

“이게 마법사야 개야? 얼른 일어나. 집에 가야지. 계산은 했냐?”

“개? …멍멍? 왕왕?”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역시 동물인 모양이었다.

날숨 대신 한숨을 뱉으며 테리온은 캐럴의 품에서 지갑을 꺼내 술값을 계산했다. 오죽 취했으면 제 지갑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데 꿈쩍도 안 했다. 심지어 몇 번을 일으키려 해도 주저앉아버리는 캐럴의 팔을 잡고 잠시 눈을 굴렸다. 어찌해야하나. 두어 번 더 눈을 굴린 다음 테리온은 어떤 방법으로 가든 만취한 캐럴이 멀쩡할 방법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설령 집까지 걸어간다 해도 골목에 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그럼 데려가는 건 마법으로 한다고 치고. 난장판이 된 이 테이블을 말끔히 치울까, 더 엉망으로 만들까. 어릴 적에나 하던 고민을 1초쯤 한 뒤 테리온은 저도 모르게 슬쩍 손가락으로 술병을 엎었다. 현장보존마법이라도 걸어서 청소를 어렵게 만들어도 좋을 것이지만 저기 울상 짓는 점원은 신참인 티가 나는 어린 마녀였으므로 참기로 했다. 술병도 몇 개 없고.

순간이동으로 집에 도착하자마자 거하게 속을 게워낸 캐럴에게 물을 건네고 욕실에 처넣은 다음 지팡이를 휘두르며 토사물을 치웠다. 머리가 아파왔다. 일찍 들어오기로 한 약속은 언제 씹어 드셨는지 알 길이 없다. 들키면 안 되는 처지인거 알고는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술도 약하면서 왜 이리 마셔댄 거야? 차라리 그냥 침대에 처박혀 잤으면 좋았을 테지만, 경험상 캐럴은 깨끗하게 씻고 나와서 좀 더 맑아진 정신으로 인간의 주정을 부릴 것이었다.

좋아, 욕실에서 나오기만 해봐, 바로 실렌시오를 쓴 다음 잠들기 직전까지 잔소리를 퍼부어 줄 테다. 뒤끝이 생기기 직전까지 귀에 꽂아줘야지. 테리온은 이를 갈며 다짐했다. 하지만 테리온의 다짐은 욕실 문고리 돌리는 소리에 이어진 고함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자기야! 섹스하자!”

“……뭐?”

컥 하고 잠시 숨이 막혔던 테리온은 이어서 귀를 후볐다. 지금 뭘 들은 거지? 저 입에서 나온 말은 단 두 마디인데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자기? 섹스?

“누구더러 자기라는 거야?”

“너. 왜, 아니야? 아니고 싶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긴 했다.

“아니다기보다, 아니, 그렇게 부르지 마.”

“오, 이렇게 부르는 게 싫은가봐? 자기, 자기야. 우리 자기자기야.”

테리온은 제 이마를 한 대 치고는 코알라새끼마냥 제 몸에 엉겨 붙는 캐럴의 어깨를 밀었다.

“넌 지금 그런 소리가 나와? 시계나 봐. 지금 몇 시야?”

“우리 자기 이제 시계 보는 법도 까먹었어?”

“그 말이 아니잖아! 약속한 시간에서 얼마나 지났는지 보라고!”

“넌 범법도 했으면서 내 통금을 신경 쓰는 거야? 거 참 대단히 공평한 기준인데.”

“지금 법은 이상한 거고! 통금은 안 이상한 거고!”

“통금이 안 이상해? 오, 사실 나는 하이틴이었던 거구나. 너는 페도필리아고. 변태네.”

“미친, 우리 동갑이거든? 아니, 그것보다 통금은 니가 먼저 이야기 꺼냈잖아!”

“그랬던가?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섹스하자 자기야.”

테리온은 무어라 반박하려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예전부터 알고 있지 않았나, 이 녀석의 언행은 대부분 큰 의미가 없다. 뭐 아주 가끔 의미가 큰 행동을 사이에 넣어서 사람을 환장하게 하긴 했지만. 어쨌든 높은 확률로 깊이 생각해봤자 이쪽이 손해였다. 취해서 하는 이야기라면 더더욱. 그러니 신경 쓰지 않고 무시하는 편이 현명했다.

“취했으면 얌전히 잠이나 자.”

“이게 취한 걸로 보여? 왜 안 해? 설마…….”

말을 끊고 아래로 시선을 옮기는 제스처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했다. 테리온은 발끈해서 맞받아쳤다.

“내건 문제없어!”

“지금 안 서계시는데도?”

“동해야 서지!”

“이 내게 안 꼴리는 건 문제가 있는 거라고. 정말 고자가 되어버린 거야?”

캐럴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테리온은 제 뒷목을 잡았다. 캐럴의 저 반질반질하고 뻔뻔한 얼굴만 보면 테리온의 아랫도리사정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다. 실상은 이틀 전에도 그것의 기능을 온몸으로 확인한 장본인인데도 말이다.

“아니, 너 방금 토했거든…. 그걸 봤는데 서겠냐?”

“아하.”

캐럴이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납득하고 자는 건가. 테리온이 마음을 놓으려할 때였다. 캐럴이 오른주먹으로 왼손바닥을 치며 외쳤다.

“그럼 꼴리게 해주면 되는 거네?”

“되겠냐!”

“맛있게 해줄 테니까 영광으로 알아, 자기야.”

그놈의 자기. 환장할 기분이 된 테리온이 마른세수를 하건 말건 캐럴은 테리온의 팔에 엉겨 붙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이윽고 팔을 따라 올라온 손가락이 가슴께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테리온은 지팡이를 꺼내들고 싶은 충동을 열심히 눌러 담았다. 지금 마법을 쓰면 둘 중 하나였다. 지금 마법싸움으로 번지거나 내일 기절마법의 뒤끝을 보거나.

테리온이 충동을 참거나 말거나 캐럴의 손가락은 조금씩 대담해졌다. 손가락 끝이 가슴을 가볍게 긁다가 유두를 스치고 지나갔다. 유륜 주변을 문지르다가 다시 목을 쓰다듬기도 하고, 말랑한 귓불을 만지작거리다 얼굴을 쓸기도 했다. 만취해서 그런지 만지는 것이 유혹적이라기엔 애매했지만….

테리온은 탄식했다. 문제가 생겼다. 캐럴의 수작질에 넘어가고 싶어진다는 문제가. 조금 전까지 개처럼 취했던 녀석을 상대로 말이다. 제 처지는 여러모로 망했지만, 만취한 놈의 엉성한 애교로 마음이 동한다는 시점에서 자신은 돌이킬 수 없이 망한 것 같았다.

가만히 캐럴이 하는 양을 보던 테리온이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갑자기 하고 싶어진 거야?”

“음, 그게 말이지…….”

배 쪽으로 가져간 손이 옷 아래로 파고들었다. 테리온의 목에서 낮게 끓는 소리가 났다. 흥분한 것을 안 캐럴이 짧게 웃었다. 이 괘씸한 녀석에게 손을 대야 하나? 아니, 아직 아니었다. 조금 더 하는 양을 두고 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었다. 테리온은 가볍게 캐럴의 어깨를 안았다. 이제 대화는 흡사 전희의 색을 띠었다.

“보통 섹스 할 때 네 맘대로 구는 편이지?”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키는 대로 구는 성격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보다는 예전의 습관이 굳어진 것이 컸다. 상대가 싫어하지 않으니 고쳐질 기회도 없었고.

“네 맘대로 굴려지는 거 뭐, 나쁘진 않은데. 너, 최선을 다 한 적은 없지?”

“본능에 최선이라는 게 있나…….”

“상대의 쾌감에 맞춰주는 그런 쪽으로.”

“아하. 잠깐, ……최선을 바란다고?”

순수하게 궁금한 나머지 테리온의 뇌에서 거쳐지지 않은 의문이 튀어나왔다.

“네 인생에도 없는 걸 나한테서 찾는다고?”

“너무하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가슴을 지분거리던 손이 복근의 금을 훑었다. 캐럴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는 테리온의 시선은 그의 눈동자에 스친 것을 보지 못했다. 얇고 희박하지만 확실한 무언가가 망막 위에서 찰나를 갈랐다.

‘난 나름의 최선을 다했어. 높으신 네 눈에 내 최선은 바닥일지 몰라도…….’

끝을 맺지 못한 말이 캐럴의 목구멍을 간질이다 다시 돌아갔다. 캐럴은 제 안에 가라앉은 말 대신 하던 대화를 이었다.

“뭐, 내 인생엔 필요 없으니까 없는 거겠지? 어쨌든, 난 테리온이 캐럴에게 맞춰주는 섹스 같은 걸 아직 맛본 적이 없다고. 그러니까 최선을 다해서 내 쾌감에 집중해. 능력이 딸리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시도는 해보지 그래?”

“미치겠네.”

아무리 오래 알고 지냈어도 캐럴의 성격은 지금도 종잡을 수 없었다. 기분이든 태세든 전환이 지나치게 빨랐고 그 전환에 별다른 의도도 없었다. 별다른 의도가 없다는 점이 제일 열 받는 지점이었다. 저도 진중한 성격은 아니었다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나.

지금도 보라, 만족했으면서 만족 못한다는 것처럼 굴지 않나. 아니, 그 모든 관계가 사실은 별로 좋지 않았다는 걸까. 반성하려던 테리온은 곧 생각을 바꾸었다. 캐럴이 자기가 싫어하는 일에 어울릴 리가 없지 않은가. 육체의 쾌감만이 아니라 다른 것에서 만족했다는 소리였을 것이다.

캐럴의 입술이 제게 닿았다. 한 번 질척하게 혀를 섞은 뒤 캐럴이 속삭였다.

“우린 연인이잖아? 이건 정당한 요구라고.”

그건… 그랬다.

놀랍게도 캐럴의 말은 옳았다. 안타까운 일이지만(안타깝다는 수식어가 붙을 일이 맞는지도 헷갈리긴 했지만 어쨌든) 둘은 연인이었고, 연인이라면 침대 위에서도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는 게 맞았다. 지금까지가 최선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것은 조금 충격이었다.

테리온이 그런 점에서 충격을 받는 상태라는 것이 캐럴의 불만이었으나 테리온은 알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따라서 지금 캐럴의 안에서 차오르는 말이 따로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의 관계에 네가 기여한 게 얼마나 있어?’

같은 생각들. 캐럴의 눈에 다시 억울함이 스쳤다. 이 또한 테리온은 보지 못했다.

‘정말로 멋대로 군 건 누군데?’

그러나 캐럴은 표면 위로 떠오르지 못한 질문을 애교로 덮었다. 눈웃음을 치며 테리온의 손을 잡아 제 셔츠 아래로 끌어당겼다. 제 살갗을 문지르기 시작한 테리온의 손을 느끼던 캐럴은 문득, 모든 것이 다 귀찮아졌다.

테리온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며 캐럴은 생각한 모든 것을 흘려보냈다. 애초에 여러 생각이 치고 올라오는 게 기분 나빴다. 생각해서 뭐에 쓴단 말인가. 제 생각을 이야기해서 굳이 관계에 금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

‘하던 대로 굴어, 캐럴 라이트.’

그래서 캐럴은 하던 대로, 변덕을 부렸다. 고개를 들고 바싹 붙였던 몸을 떼고 비딱하게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굳이 금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아, 근데 너의 최선은 쾌감이랑 별개로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네.”

테리온은 생각했다. 아, 확 식는다는 건 이런 거였지. 이런 타이밍에서까지 태도를 뒤집는 게 말이나 되나? 순간 울컥한 테리온이 지팡이를 꺼내며 고함쳤다.

“내! 최선은! 네놈을 픽업한 것에서 끝났다!”

지팡이 끝에서 날아간 빛이 정확하게 캐럴의 입술을 건드렸다. 캐럴은 비딱하게 웃는 그대로 기절했고, 뒤이어 둥둥 떠서 침대로 연행 당했다. 진작 이럴 것을.

정말 넘어갈 뻔했다. 더 참지 않고 그대로 손을 댔다간 비웃음이나 당했겠지. 대체 술집에서 무슨 소리를 들어서 이딴 주정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지 고약했다. 그래서 자신과 하는 섹스가 좋단 말인지 싫단 말인지…….

인상을 찌푸리던 테리온은 고개를 흔들어 남은 생각을 털고, 캐럴의 잠자리를 고쳐주고는 제 침실로 향했다. 어차피 방금 일도 별 의미 없는 변덕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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