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XIV

완전 판결

단 한 사람과 세계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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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구름은 악의 그 자체라고 한다. 그 속에 들어간 사람에게 악의에 가득찬 세계를 보여준다. 끝없는 어둠을 보여주고, 결국에는 그 속에 집어삼켜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어둠 끝에 보이는 유일한 빛에 마음을 빼앗겨버린다고 한다. 뱉어버리고 나선 귓가에 저주스러운 말들을 속삭이고 위험한 충동을 끊임없이 일으켜 주변을 쑥대밭으로 만들게 한다. 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점점 시야가 캄캄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마음이 갉아먹히는 소리가 주변의 모든 목소리를 덮어 버린다는 것. 그리고 마음을 빼앗긴 대상이 자신을 난도질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영원한 비탄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시오르 티아가 철학자 의회를 엎은 뒤 일주일이 흘렀다. 그는 약속했던 대로 의회에 더 이상 출석하지 않았고 산크레드 워터스를 통해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뒤로 누구도 그에게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다. 소란스러웠던 링크펄도 잘 울리지 않게 되었다. 그가 분위기에 찬물을 얹은 적이 이제도록 한 번도 없었기에 그때의 그 언행이 무거웠다. 그는 절대로 그런 방식으로 언쟁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그나마도 그에게 말을 거는 건 산크레드 워터스와 에스티니앙 발리노였다.

"네가 그렇게 행동해서 불편해지는 건 결국 우리들인 거 알잖아. 알피노가 지금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알아?"

"그래. 너한테도 미안하게 됐다."

"난⋯⋯ 됐어."

"산크레드.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 이 녀석 휴게실에 쌓인 우편 봤나? 협탁 위에 산을 이루다 못해 무너져서 바닥에 다 떨어질 지경이다. 그게 전부 다 세계 각지에서 오는 불평 불만들이라고. 연인이 방에 처박혀서 나오지도 않는데 하루종일 일해도 모자랄 정도로 부려먹는 상황에서 오히려 거기서 누구 하나 안 패고 나온 게 대단해 보이는데, 난. 당초에 출석하라고 강요해놓고 이 녀석에게서 도끼를 압수한 놈들이다. 무기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머리도 좋다는 사람들이 멍청하기 짝이 없군."

"그래. 다 이해하고 나도 알지만, 네 입장을 좀 생각해야 된다는 뜻이야."

"알아."

산크레드 워터스의 지탄에도 시오르 티아는 별 말이 없었다. 그는 그 뒤로는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다.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도 없었고, 이전보다 행색도 깔끔해졌다. 그가 받지 않았어야 할 공격적인 말들이 쏟아져도 폭발하는 일 한 번 없이 그는 점잖게 행동했다. 임무가 쏟아지고 거친 일을 당해도 그는 내일이면 다시 나가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처리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회의로부터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는 마법대학에 처박혀 있는 알피노 르베유르를 찾아 갔다.

"알피노."

"아, 자네 왔나⋯⋯. 일이 너무 많은 것 같던데, 괜찮은건가? 팔에 그 상처는 또 뭔가."

알피노 르베유르는 답지 않게 조금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아마 그가 의회에서 처음 보여준 모습이 낯설고 산크레드 워터스가 링크펄에서 자신의 이름을 꺼냈기 때문이리라.

"괜찮아. 이거, 라노시아 토스트. 좀 먹으면서 해."

"고맙네. 직접 만든건가?"

"그래. 재료가 좀 모자라서 가게에서 팔던 정도는 아니지만."

알피노 르베유르는 그가 모험을 떠나기 전 림사 로민사의 명물 레스토랑 비스마르크 주방에서 일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이슈가르드로 떠나기 전엔 곧잘 음식도 직접 해주곤 했으니, 그리운 향기가 느껴졌다. 음식은 겉으로 보기에도 맛있어 보였고 또 방금 만든 것처럼 따듯했다. 포장은 둘로 나눠서 되어 있었고 책을 읽으면서 먹기 편하게 작은 크기로 잘려 있었다. 그는 잠시 귀에 낀 링크펄을 빼 전원을 끄고 말을 이었다.

"나 때문에 입장이 곤란해진 거 알아. 너한테 너무 많은 걸 책임지게 해서 미안해. 산크레드는 내게 입장을 생각하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말한 건 내가 에린의 대리인으로 입회했기 때문이야."

"아, 그건⋯⋯. 알고 있네. 충분히 이해도 하고. 너무 괘념치 말게. 이번 일이 그녀의 처분으로 마무리가 되면 다음은 누가 되어도 똑같겠지⋯⋯ 나는 그것만큼은 막고 싶네. 그것을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할테니, 너무 마음 쓰지 않았으면 좋겠네."

"⋯⋯그래, 고마워. 라하도 밤 새고 있는 것 같은데 그 토스트 전해주겠어?"

"물론이네."

시오르 티아는 대화가 마무리 되고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의 관리인인 오지카 츤지카는 부러 밝은 모습으로 그를 반겼다.

"어서 와, 쉬고 가려고?"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이거, 도시락입니다만⋯ 에린 진잘에게 챙겨 주시겠습니까?"

"에린 진잘은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방에 안 들여. 식사도 매 끼니마다 갖다주고 있지만 손도 안 댄다고."

"⋯⋯그럼 직접 전해주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만⋯⋯ 제가 말해둘테니 에린 진잘의 방을 좀 옮겨 주실 수 있겠습니까? 방이 지저분할 것 같아서요. 청소는 제가 나중에 하겠습니다."

"됐어, 청소는 내가 할테니까 신경 쓰지 마. 앞쪽 방이 비어 있는데 거기 쓰면 돼."

"고맙습니다."

그는 곧장 복도를 가로질러 에린 진잘이 묵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가던 도중 제 방문 앞에서 발길이 멈췄다. 그는 들어가진 않고 문만 열어 안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우편이 또 한아름 쌓여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문을 닫았다. 어차피 지금 봐도 소용 없을 우편들이 절반 이상일 게 틀림 없었다. 정말 중요한 우편은 타타루 타루를 향해서 전달되고 있고 확인한 후 내용을 링크펄로 직접 전달하기 때문에 보지 않아도 크게 문제 되진 않았다. 이런 식으로 우편 배달부 모그리를 통해서 주소지로 바로 전달되는 우편들은 대부분이 불평불만을 적어놓은 편지거나 무슨무슨 이유를 붙여 보낸 청구서들 뿐이었다.

익숙한 노크 두 번 뒤에 그는 문을 열었다. 에린 진잘은 여전히 침대 끝에 붙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방 안은 얼어 붙은 듯 차가웠다. 시오르 티아는 더러워진 카펫을 지나 침대 모서리로 향했다. 침대 끝자락에 널부러진 빈 도시락이 보였다. 먹고 치우지 않았는지 음식물 쓰레기 냄새가 확 끼쳐왔다. 그는 인상 하나 구기지 않고 에린 진잘의 옆에 앉았다.

"에린."

"⋯⋯."

"여기 봐."

에린 진잘은 순순히 그에게 얼굴을 보였다. 얼굴이 온통 엉망이고 옷차림새도 어지럽게 흐트러진 채였다. 그 며칠 새에 여윈 게 느껴졌다. 그는 바짝 마르고 갈라진 입술에 가볍게 입맞추고 에린 진잘을 억지로 일으켰다.

"앞방으로 옮기자. 밥도 좀 먹고. 속 편하게 먹을 수 있는 걸로 해왔으니까 꼭 챙겨 먹어."

"그렇게 말하고 또 갈 거지."

"⋯⋯."

그는 대답 없이 일으킨 에린 진잘을 안아 올렸다. 책상 위에 있는 치유서는 요정에게 맡겼다. 요정은 무거운 치유서를 끙끙거리며 옮기면서도 열심히 그를 따라 나갔다. 에린 진잘은 텅 빈 눈으로 따라 나오는 요정을 곁눈질 했다. 그리고 눈을 한 번 깜빡인 사이 요정은 소환자의 의지대로 파삭, 부서졌다. 등 뒤에서 책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오르 티아는 돌아보지 않고 빈 방으로 들어갔다.

"세상이 다 어둠으로 가득 찬 거 같아. 눈이 하나도 안 보여⋯⋯ 그래도 너만큼은 제대로 보여. 근데 왜 떠나는 거야? 역시 너한테는 내가 별로 안 소중한 거야? 너한텐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더 중요하고, 그 사람들의 행복과 안전이 너를 생각하고 사랑하는 사람들보다 먼저야?"

"그렇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거짓말쟁이."

다 갈라진 목소리가 아팠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

그때 링크펄이 울렸다.

─오르, 상황이 안 좋게 됐다. 에린 진잘의 처분이 결정됐어.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침대에 에린 진잘을 내려두었다. 그리고 그 손 안에 따듯한 도시락을 쥐여주었다.

"네가 날 미워해서 기분이 풀리면, 원하는 만큼 원망해."

그래도 여전히 널 사랑할게.

대답은 방을 나갈 때까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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