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다병연화 연화루

*드라마 연화루만 봤습니다. 혼동되서 설정을 착각한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도 이연화는 실내에서마저 새하얀 피풍의를 단단히 챙겨 입고 있었다. 장작을 얼마나 땠는지 방안은 훈훈한 열기로 가득했다. 기동성만이 제일 큰 장점인 연화루라면 아무리 불을 때도 이만큼 따뜻해질 수 없을 테다. 이곳은 천기산장의 수많은 별장 중 하나였다. 한적한 곳에 있지만 조금만 걸어가도 마을이 있어 시장에 들르기도 좋고 주변 경치가 아름다웠으며, 무엇보다 관하몽의 집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짠 것처럼 이런 곳에 별장이 있었냐며 이연화가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팔지 않겠다는 걸 갑절의 돈에 천기산장에 큰 은혜를 내리는 것이라는 말까지 얹어 샀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말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연화루로 돌아가겠다며 버티는 것을 겨우내만이라도 지내달라고 빌다시피 해서, —아니 감금했다는 쪽이 더 가깝다—감금하다시피 한지도 벌써 두 달 남짓이었다.

겹겹이 꽁꽁 싸맨 이연화에 비해 건너편에 앉은 방다병의 옷차림은 가벼웠다. 물론 재력이라면 황가도 부럽지 않다는 소문의 천기산장의 소장주답게 충분히 따뜻하고 화려한 복장이기는 했지만 활기 넘치는 젊은 무인답게 날렵한 차림새였다. 다만 두터운 옷을 꽁꽁 둘러싸맨 이연화보다 방다병 쪽에 훨씬 훈기가 돌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연화는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그는 말하자면 두번 죽었다 살아난 남자였다. 이상이로서 한 번, 이연화로서 한 번.

    

    

    

“자자, 차 좀 더 마셔. 몸을 따뜻하게 해줄 거야. 잠깐만 뭔가 다과라도 준비할까? 아니지 그럼 또 저녁을 못 먹나?”

“방소보, 먼지 날리니까 좀 진정해. 그리고 네가 아직 어린애인 건 알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걸 차라고 할 수 있어? 귀하디귀한 용정차에 생강꿀을 들이붓다니.”

“잔소리 말고 마셔. 안 마시면 용정차보다 훨씬 비싼 차를 가져올 테니.”

“낭비는 좋지 않아 소장주. 도련님은 도련님이구만.”

“이럴 때만 소장주? 시끄럽고 마셔.”

    

    

이연화는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한 근에 금화가 오가는 비싼 차에 생강꿀을 들이붓는 것을 보고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방다병이 당장 황금으로 덖은 차를 구하러 가기라도 할듯 굴어서 결국 달큰하고 향긋한 차—꿀물에 가까운—잔을 조심스레 잡아 올렸다. 아직도 칼을 잡던 굳은살의 흔적이 약간 남아있는 손과 대조적으로 아슬아슬한 가는 손목이 묘한 감상을 주었다. 한때 강호의 일인자였다가 두 번이나 죽었다 살아나 겨우 삶을 이어가고 있는 남자의 손과 팔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퍽 부조화스럽게 보일 것이다. 거동도 그랬다. 단정하고 간결하지만 어딘가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은 듯한 움직임은 자꾸만 방다병을 안달 나게 했다. 젊은 청년의 애타는 마음이야 알 것 없다는 듯이 이연화는 달큰한 차도 한 번에 들이키지 못하고 후후 불어 조금씩 마셨다.

방다병은 저보다 12살 연상인 삼십대 남자가 꿀차를 마시는 모습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도 보듯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핏기 없는 부르튼 입술이 조금씩 젖어 드는 모습을 하도 신중하게 바라보아 방다병의 눈빛이 마치 살갗을 파고드는 듯 하니 이연화는 쯧 하고 혀를 차고는 왼쪽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린 채 아직 뜨거운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한참 집중해서 보던 얼굴이 옷자락에 가리우자 골이 난 다병이 막 잔소리를 하려는 찰나, 이연화가 잔기침을 시작했다. 방다병은 깜짝 놀라 이연화의 옆으로 가 조심조심 등을 토닥이며 쓸어내렸다. 겨우 달디단 차 한잔 빠르게 마시질 못하는 모습을 보니 타박하려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손바닥에 마른 어깨뼈가 스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듯 해서 표정이 심각해졌다. 시무룩해진 청년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이연화가 작은 병아리라도 귀여워하듯 웃었다.

    

    

“뭘 또 그런 표정을 해. 어쨌든 네가 온갖 짓을 다 해 나를 살려놨으니 난 그 보답으로 조금은 더 살아볼 작정이야. 그게 달포가 될지 해포가 될지는 하늘의 뜻이겠지. 그러니 안타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려거든 천기산장 본가로 돌아가든가.”

“심술 맞기는. 혼자 있는 게 뭐 좋다고. 솔직히 나랑 있으니까 안 심심하고 좋잖아.”

“시끄럽기만 하지. 그리고 잊지 마. 봄이 오면 난 연화루로 돌아갈 거야.”

“맘대로 해. 이미 연화루는 바퀴를 뽑아 천기산장 내 별채 앞 마당에 박아두었으니. 옆에 무밭도 만들었어. 원하면 감자도 심자.”

“누구 맘대로? 그리고 잘 꾸며진 정원에 누가 그런 무식한 짓을 하래?”

“남들한테 물어봐. 그런 몸으로 방랑을 계속하겠다는 게 더 무식하다고 할 걸? 그만하고 천천히 다시 마셔. 기침을 세게 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관의원이 그러더군.”

“나오는 걸 어쩌란 말이야. 누군 하고 싶어서 하나.”    

    

    

투덜대는 말투로 툴툴거리는 말간 얼굴이 꼭 어린애 같아서 방다병은 또 시선을 빼앗겼다. 다행히 오늘 이연화의 상태가 제법 괜찮았다. 뜨끈하고 단 걸 먹고 다병과 농을 나누며 좀 웃었더니 창백하던 얼굴에 조금이나마 핏기가 돌았다. 방다병은 또 그것이 못내 좋아 마치 얼굴에 구멍이라도 내겠다는 듯이 이연화에게 집중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병약해 보인다고는 생각했지만 그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지금의 연화는 허약해 보였다. 달포를 살지 해포를 살지 모른다고 하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천기산장을 비롯해 사고문과 백천원의 면면들, 관하몽, 그리고 황가에서까지 온갖 영약과 약초를 보내왔다. 아직도 하루 걸로 피를 토하고 온종일 침상에서 일어나지 않는 날도 많았다. 오늘은 정말 상태가 좋은 날에 속했다. 봄이 되면 연화루로 돌아가겠다니, 그랬다가는 단 하루를 세상에 붙잡아 놓을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얼굴 좀 말아라. 너는 나이가 몇인데 무슨 말만 하면 혼난 강아지처럼...”

“흥.”

    

    

방다병은 예전처럼 어리지 않다며 방방 뛰거나 소란을 피우지 않고 더 울상을 지었다. 이연화를 다루는 데는 이쪽이 훨씬 유효하다는 것을 이미 깨달은 터였다. 방다병은 이연화가 죽을 한 술 더 뜨고, 약을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실 수 있게 할 수 있다면 배를 벌렁 까고 놀아달라 애교부리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다. 마치 이연화의 발치에서 뼈다귀를 갉아 먹는 불여우처럼.    

    

    

“자 이제 좀 쉬어.”

“일어나 앉은 지 반시경도 지나질 않았는데?”

“당신은 아직 심각한 환자야.”

“내가 숨이 붙어있는 동안은 그럴 것이고 먹고 마시고 누워있기만 할 거라면 죽은 것이랑 진배없지 않으냐.”

“또, 또!”

    

    

10년 전 벽차지독에 중독되어 대패하고, 철저히 부서지고 또 부서졌던 이연화는 오로지 사형의 시신을 수습하고 복수하는 것에 남은 생을 불태웠다. 제 생의 대부분을 믿고 따랐던 사람에게 철저히 배신당했으면서도 사람을 잘못 본 자신 때문이리며 자책하기 바빴다. 10년만 살고 죽으리라 각오로 했던 때도 삶에 대한 욕구가 느슨하였으나 모든 은원을 해소하고 사라지기만을 바랐던 이연화는 실상 껍데기만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끼던 애검에게 자신을 찌르게 하기가 미안해 부러뜨릴 만큼 다정한 사람은, 곧잘 자신을 냉정하고 오만하다며 깎아내렸다. 이연화는 종종 다병 아닌 다정이라며 방다병을 놀렸지만 실로 다정한 이는 이연화라고 늘 생각했다. 모든 인간은 숨이 붙어있으면 살아야 마땅하건만 생전 높디높은 이상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며 살았던 이연화는 살 방도가 있는데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과 연을 끝내려고만 했다. 천기산장과 황가가 틀어지지 않도록 망천화를 포기한 것은 죽음을 선택한 것과 같았다. 세상에 욕심을 부리면 천벌이라도 받을 것처럼.

그걸 억지로 세상에 붙잡아둔 이가 방다병이었다. 금파, 교완만, 사고문의 장로들, 적비성 마저도 이연화가 오래도록 평안히 살길 바랐으나 결국 연화를 붙잡은 것은 오롯이 방다병의 이기심이었다.

이 저돌적이고 순수한 청년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죽기 일보직전이던 이연화를 찾아냈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연화의 몸에 내력를 쏟아부어 겨우겨우 꺼져가는 생명을 간신히 붙들어 맸다. 이미 숨이 거의 끊어졌던 이연화를 데리고 금파를 찾아가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제자를 살려주십시오, 이상이를, 이연화를 살려주십시오.

두터운 피풍의로 감싼 이연화는 맥이 거의 뛰지 않았다. 식어가기 시작한 몸을 품에 안고 외치는 비통한 목소리에 금파는 서둘러 이연화를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이연화의 목숨을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느냐 방다병에게 물었다. 모르는 바 아니었다. 남에게 악의라고는 가져본 적이 없고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알며 늘 그것을 지키며 살았던 청년은 창백한 얼굴로 끄덕였다. 사부를 죽인 원수 소리를 들어도, 평생 원망을 듣게 되어도 좋았다. 이 사람을 세상에 붙잡아둘 수만 있다면 황제라도 죽일 수 있었다. 잔인하고 대역무도하다는 소리를 듣는 데도 좋았다.

금파는 기꺼이 제 수명을 줄여 이연화를 살렸다. 살 만큼 산 늙은이는 자신이고, 진작 그렇게 하고 싶었다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방다병은 눈물 흘릴 자격조차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무릎을 꿇었다. 어린 시절부터 연화를 돌봤던 금파는 누구보다도 제 제자를 잘 알았다. 당장이라도 제 내력을 전부 쏟아붓고 벽차지독을 제 몸으로 옮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 자신의 수명이 다한다면 다정한 애제자는 그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리 독을 몰아낸 데도 오랜 세월 망가졌던 몸이다. 그런 극심한 심상(心傷)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제자에게 자신이 살아있는 모습을, 거동할 수 있는 모습을 보일 만큼을 남겨두고 내력을 쏟았다. 어차피 칠목산이 세상을 떠난 이후 너무 오래 살았다 생각하던 참이었다. 연화의 맥이 뛰기 시작하고 숨을 내쉬는 것을 확인한 후 금파의 얼굴은 평온한 기쁨으로 가득 찼다. 방다병은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감사를 표했다. 차마 사죄의 말을 올릴 수도 없었다. 금파는 말릴 기력도 없다며 잔소리를 하고는 다병이 빠른 시일 안에 양주만의 내력을 쌓아 올릴 수 있도록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어차피 이대로 그냥 두면 다시 곧 죽음의 그림자가 이연화를 잡으러 올 터였다. 방다병이 어떻게든 10년 치 내력을 속성으로 익힐 시간을 버는 것, 금파는 그것을 위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수명 대부분을 포기한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렇게 한참을 병상에 누워있다가 깬 연화는 기억이 흐릿했다. 벽차지독이 빠져나가면서 생긴 증상이었다. 관하몽이 진맥을 하고는, 금파를 찾아가셨군요 하고 한참 말이 없다가 공범을 자처했다.

    

    

“저 사람이 살려면 모든 것을 숨겨야겠지요. 어떻게든 속여봅시다.”

“몸에 흐르는 기를 짚어보면 바로 알아차릴 겁니다.”

“이제 이연화는 정말로 어떠한 무공도 할 수 없습니다. 예전처럼 한 줌 남은 내력을 쏟아 무공을 펼칠 수도, 남에게 내력을 부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쪽으로는 모든 신경이 통째로 잡아 뽑힌 것에 가깝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습니다. 지식은 남아있겠으나 제 몸을 짚어보아도 아무것도 읽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그는 정말로 완전히 무력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방 공자.”

“그렇다 해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똑똑한 사람입니다. 불행할 정도로요. 그러니 변명은 잘 생각해 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도 말을 맞추기는 하겠으나 방도는 방 공자가 찾으십시오.”

    

    

방다병은 원래도 총명한 청년이었지만 이연화와 붙어 다니는 몇 개월 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다. 총명하지만 남을 이용할 줄 모르고 거짓을 싫어하던 소년은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교활함과 협잡을 익힌 청년이 되었다. 이제는 자신을 지킬 수 없게 된 이를 혼자 둘 수는 없으니 주변 사람들을 부려 위서(僞書)를 만들었다. 그쪽으로는 천기산장보다는 금원맹 쪽이 훨씬 통달했기 때문에 적비성의 도움을 받았다. 이연화를 살게 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할 수 있었다. 오래된 남윤의 종이를 찾아내 남윤의 글자로 마치 세상에 하나뿐인 영약이 있는 것처럼 꾸몄다. 적비성도 두말없이 이를 도왔다. 비밀을 많은 이들이 알아서는 안 되니 이 비밀을 아는 자는 방다병과 적비성, 관하몽 그리고 위서를 만든 자 넷뿐이었다. 위서를 만든 자는 곧바로 아주 먼 이국으로 떠나야 했다. 이연화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 돌아올 수 없었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어떻게 다시 세상으로 잡혀 왔는지 어리둥절해하는 이연화에게 남윤 문자를 쓴 위서를 보여주었다. 정말 그럴듯하게 하기 위해 소용에게 남윤 문자의 해독을 맡겼다. 물론 소용은 그것이 위서라는 사실을 모르고 뛸 듯이 기뻐했기 때문에 이연화에게 더욱 믿음을 주었다. 그런 영약을 자신을 살리는 데 쓰면 어떡하냐는 타박을 몇 번이나 해서 다병은 죄책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연화를 살린 영약은 기실 금파의 생명이었으므로.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뻔뻔한 협잡꾼이 되어야 했다.

    

    

“안 그래도 백천원에서 사건에 관련된 서신을 보내왔어. 환자한테 이런 걸 자꾸 보내지 말라니까.”

“어디 보자. 사람이 대접을 받으려면 일을 해야지. 내게 보낸 서신일 테니 이리 내.”

“그럼 오늘은 죽 한 그릇을 다 먹는다고 약속해.”

“건방진 놈이 사부를 똥개 보듯이 하는구나.”

“똥개 부리듯 하는 건 당신이거든? 그리고 누가 사부래?”

“네가 네 입으로 내가 사부라고 했잖으냐.”

“내 사부는 이상이야. 당신은 이연화고.”

“그래, 그랬지. 제법 말솜씨가 늘었어.”

“난 진짜 사부님께 제대로 무공을 배우고 있다고. 당신은 이제... 무공을 전혀 못 하잖아.”

“사모님께서는 건강하시고?”

“그래. 세상에서 제일 허약한 건 이연화 너니까 빨리 오늘은 죽을 한 그릇 다 먹겠다고 해. 그럼 서신을 보여줄 테니까.”

“알겠어. 약속할게. 천지신명께, 사부님과 사모님의 이름을 걸고.”

“좋아.”

    

    

방다병이 두툼한 종이뭉치를 가지고 와서 이연화에게 바싹 붙어 앉았다. 이연화도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이 몸을 살짝 기댔다. 생명은 붙잡았지만 모든 것이 돌아오지는 않았기에 이연화의 시력은 현저하게 떨어져 있어 작은 글씨를 읽지 못했다. 방다병은 그저 숨이 붙어있는 것에 감사했다. 오히려 위서를 자세히 읽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이 이연화의 손과 발과 눈이 되면 됐으니까.

옆에 앉아 사건의 개요를 정리해서 읽어주었다. 연화는 턱에 손을 갖다 대고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연화가 비교적 보통 사람처럼 일어나 앉고 말할 수 있게 되자마자 방다병은 그저 숨을 붙여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한 번도 의미 없는 삶을 살아본 적 없는 이 남자는 그저 먹고 자기만 하는 자신을 혐오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가짜 신의 행세를 하게 할 수도, 돌아다니며 사건을 해결하게 할 수도 없었다. 지금의 이연화는 그런 것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급기야 이 몸뚱이는 도대체 무엇에 써야 쓸모가 있을꼬 저자에서 시나 노래라도 팔아야 하나... 하고 말을 흐리는 것을 보고 정말로 기력을 차리면 도망가 길바닥에 앉아 그러고 있을 것 같아 두려워졌다. 외부의 공격에 무력해진 이연화가 사람들 가운데 앉아 시를 읊다가 공격을 당하거나 희롱을 당하는 상상이 거듭 방다병을 괴롭혔다. 결국 고민 끝에 교완만을 찾아갔다.

    

    

“정말 그것으로 되겠나요? 진짜 사건을 도와줘도 되지 않을까요? 그것이 상이의... 아니 이연화에게 더 의욕이 되지 않을까요?”

“진행 중인 사건은 위험 요인이 있습니다. 저는 양주만의 내력을 더욱 빨리 익혀야 해요. 가끔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습니다. 천기산장의 사람들이 항상 주변을 지키고는 있지만 그래도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진짜 위험이 있는 사건을 해결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지난번에도... 초자금이 헛소문을 퍼트려 이연화를 위험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자금은 이제... 알겠어요. 이연화가 살아있다는 게 널리 알려지면 그런 사람이 또 나타날 수도 있겠죠. 좋아요. 그럼 정기적으로 하나씩 뽑아 보낼게요.”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중대한 사건들로. 백천원이나 사고문에서도 일부 사람들만 아는 사건들이어야 합니다. 이연화는 지난 10년간 늘 백천원과 사고문의 일들에 귀를 열어두고 있었어요. 유명한 사건은 이미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알겠어요. 하지만 방 공자 그는 누구보다도 영명한 사람이에요. 언제까지 속일 수 있을지는 몰라요.”

“감사합니다, 교낭자. 지금부터 다음 수를 생각해 두겠습니다.”

“그래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정도겠지요. 부디 평안하시길 빌어요. 이연화도 그렇지만 방 공자도요.”

“감사합니다.”

    

    

너무 빈번하지 않게, 그렇다고 뜸하지도 않게 무언가 이연화에게 조언을 묻는 서신이 왔다. 미해결된 사건 사고에 대한 조언이기도 했고 사고문과 백천원의 운영에 대한 조언이기도 했다. 어떨 때는 금원맹이 친 사고에 대한 서신도 있었다. 이연화는 신중하게 사건을 검토하고 붉은 글씨로 제 의견을 덧붙여 서신을 보냈다. 얼마 후에 일이 어찌 되었다 하는 답이 정중히 도착하면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질문을 하면 이연화는 한심하다고 놀리면서도 천천히 이것저것을 알려주었다. 과연 박식하고 지혜로운 사람다웠다. 조언은 신중하면서도 막힘이 없었다. 이미 해결된 과정을 전부 알고 있는 방다병은 이연화가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적확한 조언을 하며 수수께끼를 해결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것은 이미 결론이 난 수수께끼로 해주할 필요가 없는 것들뿐이었다. 연화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기뻐하면 죄책감이 심장을 찌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삶을 조금이라도 더 땅에 붙여놓은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여차하면 이 문가의 장자를 범인으로 착각하기 쉽겠지만 잘 살펴보면 역시 문가의 장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문가의 노복이 꾸민 짓이야.”

“그렇지만 여기 증좌가 있잖아.”

“이 녀석아 그렇게 생각이 짧아서 어찌하누. 이 증좌를 가져온 것이 이 노복이고 다른 사람들은 이 서책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고 하잖아. 이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가 밝혀지지 않다니 이상하잖으냐.”

“...과연 그렇네.”

    

    

사건의 경위가 자신이 한 짓과 비슷하여 방다병은 입이 바짝 말랐다. 하필 이번 서신은 자세히 확인하지 못하고 범인만 봐둔 것이 문제였다. 얇디얇은 붓을 집어 글을 써내려 가던 이연화의 손에서 붓이 나동그라졌다. 제일 얇고 가벼운 붓인데도 오래 들고 있을 수가 없는 상태인 것이다. 덜덜 떨리는 손을 나머지 손으로 애써 누르는 이연화는 멋쩍게 제 손의 허약함을 나무랐다. 방다병은 깨끗한 명주 천을 항시 준비되어있는 따뜻한 물에 적셔와 붉은 먹이 묻은 연화의 손을 세심하게 닦아주었다. 피를 연상시켜서 영 보기에 좋지 않았다. 크고 굵은 손이 섬세하게 제 손을 닦아주고 붓을 정리해주는 것을 보고 이연화가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소리 내어 웃는 것도 그리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방다병은 잠시 동작을 멈추고 연화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네 녀석은 이름을 다병이 아니라 다정으로 바꾸어야겠어.”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병이 뭐야 다병이? 이젠 건강해졌으니 이름을 바꿔야 하지 않아?”

“하지만 그 이름이 네 액막이를 해주고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그래도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게 된 건 정말 좋은 일이야, 방 도련님.”

“액막이로 병을 고칠 수 있다면 당신한테 내 이름을 줘야 할 판이야. 이다병, 썩 어울리진 않지만.”

“이상이로 한 번, 이연화로 한 번 죽었다 살아났으니 이제 세 번째 이름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당신은 모르겠지만 진짜 다정이 어울리는 사람은 당신이야. 이다정 어때?”

“내가 다정해? 세상 사람들이 웃겠군.”

“웃으라고 해.”

“다 커서는 어린애처럼 투정을 부리는구나. 이제 슬슬 너도 장가를 가야 하지 않니?”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서신을 돌려보내야 하잖아. 불러, 내가 쓸 테니.”

“그래, 그래. 잘못하면 문가의 장자가 다 뒤집어쓰고 사형을 당할지도 모르니 어서 보내줘야지.”

“잘 생각했어.”

    

    

다병이 몸을 지탱해주겠다는 명목으로 연화의 어깨를 한 팔로 감싸 안고 나머지 손에 붓을 들었다. 연화는 이 어린 제자가 자꾸만 자신을 껴안고 들어 올리고 하는 것이 난감했지만 병자라서 몸을 덥혀주려고, 옮겨주려고, 지탱해주려고 그러나 싶어 내버려 두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움직이려다 넘어지고 주저앉는 바람에 강아지 같은 눈망울이 순식간에 촉촉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엉엉 울면서 잔소리 말고 그냥 살아주면 안 되냐고 불여우도 안 할 어리광을 부리는 데에는 속절없이 그러마 하고 말았다. 다 큰 남정네들이 이리 껴안고 있는 걸 남들이 보면 희한하다 할 모습이었지만 차마 12살이나 어린 남자, 그것도 제자가 제게 어떠한 마음을 품는지 짐작하는 것은 아무리 총명한 이연화라도 당연할 지도 몰랐다. 그러든가 말든가 방다병은 제 품 속 연화가 부서질 것처럼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미 5년도 전에 범인으로 몰려 죽은 문가의 장자가 그 시절 이연화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방다병은 진실을 숨긴 채 이연화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유려하게 글씨를 써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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