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 판결
단 한 사람과 세계
그 여자를 비탄에 빠트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그 검은 인영의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처음에는 거대한 블랙홀처럼 보였던 그것은 그날 철학자 광장 위에 드리워 원형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킬 것처럼 우르르 울었다. 그리고 미처 상황을 알지 못했던 에린 진잘이 문을 열고 나온 순간을 노려 그 모습 그대로 집어 삼켰다. 우리는 그가 사라졌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3분도 채 되지 않아 블랙홀 바깥으로 빠져나오듯 에린 진잘이 떨어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찰나였고 에린 진잘은 바닥에 주저 앉은 채 비명을 지르고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그리고 사람을 하나 삼켰던 검은 그림자는 그대로 나선을 그리며 소멸했다.
"모험가 님⋯ 오셨어용?"
"에린은?"
"휴게실에 틀어 박혀 나오지 않고 계세용⋯⋯."
알겠어. 짧은 대답이 퍽 건조했다. 그의 일상은 원래부터 타인의 일로 가득 차 쉴 틈 없이 바빴지만 근래에는 전에 없던 피곤함이 느껴졌다. 눈밑은 새카맣게 그늘 졌고 간혹 면도를 하지 않거나 옷차림새가 지저분하는 등 관리 하지 못한 모습이 보였다. 원래도 짧았던 말은 더욱 간결해지고 링크펄에 대답하는 일도 거의 없어졌다. 타타루 타루는 곧장 휴게실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시오르 티아의 앞을 막아 섰다.
"지금 가도 좋지 않으실거예용."
"그렇다고 혼자 둘 수 없어."
"⋯⋯그럼, 옷이라도 이걸로 갈아 입으세용. 최근 전혀 세탁을 못 하시는거죵? 더러워진 겉옷은 이리 주시고용."
시오르 티아는 마지 못해 누구 것인지도 모를 혈흔이며 흙탕물로 얼룩진 겉옷을 벗어 타타루 타루에게 내밀었다. 겉옷을 벗어 드러난 팔에는 또 어디서 긁혔을지 모를 상처가 가득했다. 지혈도 못하고 왔는지 여즉 피가 조금씩 흘렀지만 가공할 만한 생명력 때문인지 상처는 그 순간에도 조금씩 아물고 있었다. 받아 든 옷은 꽤 격식 있는 정장이었다. 재킷의 깃에 꽂힌 작은 메모에 아멜리앙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르베유르 가문에서 보낸 건가. 그는 이런 건 받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하려던 입을 다물었다. 말을 삼킬 때마다 마르고 건조해 갈라진 입술이 느껴졌다. 지금 이야기해도 듣지도 않을 테고, 또 지금은 필요 하지 않은 언쟁이 귀찮기만 했다. 그는 그래도 감사 인사 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고마워. 부인께도 전해주겠어?"
"물론이죵."
시오르 티아는 그대로 중앙 에테라이트 광장을 지나 곧장 휴게실로 향했다. 친근하게 말을 걸던 오지카 츤지카도 피로해 보이는 모습에 말없이 방을 내주었다.
"에린 진잘은 옆방이야."
"⋯고맙습니다."
그는 에린 진잘의 방에 가기 전에 방에 들어가 받은 옷으로 환복했다. 새로 난 상처를 보여서 좋을 것도 없어 보였고 에린 진잘에게 얼굴을 보이고 난 후에도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일이 끊이질 않았다. 원래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 그랬다. 뭘 먼저 처리해야할지 판단이 안 설 정도로 많은 일들이 쏟아졌다. 그 일들의 많은 부분을 샬레이안의 현자들과 새벽의 혈맹이 도와줬으나 대부분의 것들은 곧장 시오르 티아에게 쏟아졌다. 최근 올드 샬레이안에 머무르고 있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옷장 옆 협탁에 그새 편지며 소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잠시 링크펄을 빼 우편 위에 두었다. 하루종일 울렸던 전자음들이 조금씩 멀어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시오르 티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아까웠다. 그는 시끄러운 링크펄을 다시 귀에 끼우고 방 밖으로 나섰다.
그는 철학자 광장으로 향하기 전 에린 진잘의 방에 들렀다. 노크는 평소의 그처럼 두 번, 너무 크지 않은 소리로 울렸다. 그는 그 앞에 서 잠시 기다렸지만 대답이 돌아오진 않았다. 그는 안에 에린 진잘이 있는 것도 알았고 자고 있는 게 아닐 것도 알았다.
"들어 갈게."
문은 소리 없이 조용히 열렸고, 타타루 타루의 말대로 침대 구석에 처박혀 누운 에린 진잘이 있었다. 물건을 사방으로 내던졌는지 방 안이 온통 엉망이었다. 걷는 발끝에 치유서가 차였다. 그는 무심하게 책을 밟거나 발로 차는 대신, 허리 숙여 책을 줍곤 먼지를 털어냈다. 언젠가의 추억이 묻은 깃털펜도 세월을 타 깃이 다 빠진 채였다. 나오는 것은 한숨 뿐이라서, 시오르 티아는 들리지 않게 숨을 내뱉었다. 책상 위에 덮은 마법서를 내려두자 방 구석에서 날던 에오스가 포르르 날아왔다. 소환자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서인지 형태도 흐릿하고 빛도 꺼질듯이 약했다. 그래도 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부던히 애쓰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상처 투성이 손을 약간 뻗어서 연약한 요정을 감싸고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의 에테르로 다른 누군가의 존재를 보강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리 해두면, 우선은 내일 밤까지는 괜찮으리라.
"식사 했어?"
"⋯안 했어."
물 먹은 목소리가 돌아왔다. 식사를 누군가가 안 챙겨줬을 리는 없고, 아마 아무도 방에 들이지 않았던 거겠지. 그는 말없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귓가에 고성이 오가는 게 들렸다. 협탁 위에도 그의 것과 똑같은 링크펄이 있었지만 진작에 고장난 듯 그 속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잔뜩 웅크리고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못내 가여웠다. 당차고 새침한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밝게 웃으며 이름을 부르고 반겨주던 모습도, 어디서 긁힌 거냐며 다친 곳을 기어이 찾아내는 일도 더는 없었다. 그것이 아파와도 그는 낙심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간신히 붙잡은 어떤 행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시오르 티아는 들고 온 도시락을 머리맡에 두곤 일어섰다.
"아프칼루 오믈렛이야. 따듯할 때 먹고, 푹 자. 바깥일 걱정하지 말고."
나가는 길 끝에도 미련이 길게 걸렸다. 에린 진잘은 결국 그가 문을 닫고 나갈 때까지 그 눈을 보여주지 않았다.
문을 닫고 나온 시오르 티아는 소란스러운 링크펄을 아예 꺼버리고, 곧장 철학자 광장으로 향했다. 그는 어떤 의결에 중요 참고인으로 참석해야 했다. 에린 진잘은 그저 절망에 빠져 방 안에 틀어 박혔다. 그러다 충동적으로 난동을 부리며 비명을 지르다 다시 제풀에 지쳐 쓰러졌다. 어쨌든, 생각해볼 수 있는 건 그날의 블랙홀 같은 검은 구덩이렷다. 그에게는 그게 무슨 현상이고 해결법을 규명해낼 만한 지식이 없었지만 마음을 완전히 닫아버린 에린 진잘에게 유일하게 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연스럽게 대부분의 질타는 그를 향했다. 올드 샬레이안에서 돌연 끝없는 비탄에 빠져 간헐적으로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에린 진잘의 처분에 대해서 논의하는 자리에 출석하는 것도 그였다. 그는 정치적인 자리에 서는 것이 매우 불편했지만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회의에 참석했다. 상황이 좋지 못할 뿐 더러 함께 참석하는 새벽의 혈맹 현자들 역시 물러설 부분 없이 의견을 내다보니 항상 고성이 오갔다.
"지난 번 사건을 잊진 않으셨겠죠? 마법대학 강의실 하나가 완전히 쑥대밭이 됐단 말입니다!"
"에린 진잘은 현재 알 수 없는 검은 구름의 영향으로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 자리는 그것에 대한 해결 방안을 논의하는 자리가 아닙니까."
"아니, 틀렸어. 위리앙제, 여기는 에린 진잘의 처분을 결정하는 자리다. 그녀가 샬레이안에서 우수한 학생이었고 다채로운 지식을 창출해냈다고 하더라도 금서에 접근할 권리는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연구 실적과 학구열은 이미 금서 열람의 권한을 얻기에 충분한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에린 진잘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까지의 생활과 실적을 보면 그가 올드 샬레이안에 진심으로 공헌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학자임을 잘 알지 않습니까? 에린 진잘은 에테르학에 능통하여 여러 지식을 창출했을 뿐 아니라, 바다 건너 니므의 비술과 군용마법에 재능 있는 학자로서 재앙을 막기 위해 부던히 노력한 사람입니다."
알피노가 항변했다. 점잖지 못한 언성이 끝도 없이 오갔다. 그 가운데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는 한 번 숨을 들이 쉬고, 단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넓은 홀에 나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조절하긴 했기로서니, 단상은 인류 최강자의 힘을 받아내기엔 너무도 약했다. 쿵, 하고 나무 단상이 부서지자 사방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는 침묵 속에 부서진 나무 조각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저희끼리 다투는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 자네 지금⋯ 이 신성한 의회에서 폭력을 휘두를 셈인가!"
"무기는 입회 전 반납했습니다. 단상을 부수게 된 것은 죄송합니다. 새벽의 혈맹의 경리원인 타타루 타루에게 청구하시면 배상하겠습니다."
"자네는 자네가 어떤 입장으로 이곳에 섰는지 알고 있는겐가?"
"물론입니다. 저는 지금 에린 진잘의 대리인으로 입회했습니다."
그 상황에선 새벽의 혈맹 중 그 누구도 그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그는 결단코 그런 식으로 언쟁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에린 진잘이 보이는 모습들은 미지의 존재에 영향을 받은 결과입니다. 저는 그 현상을 정확히 규명하고 해결 방안을 찾는데 힘쓸 것을 의회에 약속 받고 이 자리에 출석한 것입니다. 하지만 회의에 참석할 때마다 서로를 공격할 뿐인 말싸움을 하고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결과만을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여러분이 제게 약속한 해결 방안입니까? 철학자 광장이 아니라면 누가 올드 샬레이안의 현자들을 보호한단 말입니까. 여러분은 자신이 당사자가 되었을 때도 이렇게 쉽게 처분을 논하실 수 있습니까?"
"너무 흥분했어, 오르. 좀 진정해."
겨우 한 마디 건넬 수 있었던 것은 산크레드 워터스였다. 그의 눈에 일렁이던, 아주 옅은 붉은 빛을 눈치챘던 것이다. 물론 산크레드 워터스는 그가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노를 야만적으로 방출하지 않는 사람임을 알았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원초를 잘 다루니까. 그래도 그 상황에 그를 제지할 수 있는 사람도 자신 뿐이었다. 날선 시선 끝에 동료가 걸리자 단 한 사람만이 알아차린 빛은 꺼졌고 그는 평소의 온화한 모습을 되찾았다. 심하게 피로 해보이기는 했지만. 그는 허리를 숙여 부서진 단상의 조각을 줍곤 중얼거렸다.
"저도 난폭한 방식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상을 내려왔다.
"하지만 제게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저 역시 올드 샬레이안에 지켜드릴 의리가 없게 됩니다. 이런 불필요한 말다툼에 참여하느니 부탁하신 일들을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으니, 이번을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앞으로 결정되는 사항들은 산크레드 워터스를 통해서 전해주십시오. 저 또한 그리 하겠습니다."
"어이, 시오르!"
그는 산크레드 워터스의 목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그대로 철학자 광장을 떠났다.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
(제목 없음)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