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XIV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두지 않고(上)

사람은 죄 아래에 죄를 둔다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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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위?”

가장 먼저 반문한 것은 백마도사였다. 그는 식사하던 손을 멈추고 다음 임무 소식을 발표한 파티 리더를 바라보았다.

“누구를 호위하는데요?”

“음… 그게…”

“누굴 호위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잖아요. 우린 맡은 일만 하면 되니까. 어차피 8명이 다 갈 필요도 없어요.”

어물거리는 전사의 입을 막은 건 학자였다. 말하는 것을 보면 호위 대상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했지만 그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는 듯 일부러 대답을 피했다. 식사하는 모두를 한 번 슥 둘러보았다. 필시 누가 그 임무에 적합할 지 가늠하는 중이었으리라. 버터 바른 토스트를 우물거리던 무도가가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나섰다.

“저! 저 가고 싶어요.”

“난 싫어.”

이어 빈정거린 건 사무라이였다.

“저도 가도 괜찮아요.”

“건브레이커님보단 전사가 나을 것 같아요. 백마도사님이랑 같이 내일까지 제출하는 서류랑 어제 임무 보고서 내주실 수 있으세요?”

“그래요.”

새초롬하게 대답하며 백마도사는 먼저 식사를 마치고 일어났다. 학자가 내민 서류 뭉치를 들고 건브레이커 역시 뒤따라 자리를 떴다. 남은 공격 역할 직군은 기대에 찬 눈으로, 혹은 기대를 피하고 싶은 눈으로 학자를 바라봤다.

“이번엔 무도가님이랑…”

“와!”

“닌자님으로 할게요.”

호명받은 두 사람과 전사, 그리고 학자만이 아침 식사 테이블에 남았다. 학자는 사무라이와 적마도사가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그는 거실에 있는 거대한 보드를 끌고 와 옆에 있는 라라펠용 발판 위에 섰다. 그는 임무 의뢰서를 보드 모서리에 붙이고 보드에 딸린 서랍에서 커다란 지도를 꺼내 가장자리에 핀을 꽂았다. 그리고 펜 뚜껑을 열고 칠판을 한 번 쿵 쳤다.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기라바니아로 갈 거예요.”

“기라바니아 말입니까?”

“정확히는 기라바니아의 산악지대에 있는 알라기리에 갈 거예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넓게 펴진 기라바니아 지도의 거대 에테라이트 하나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고보니 아까 백마님도 말씀하셨는데! 누굴 호위하는 거예요?”

“알라기리 근처에 해골부대 잔존 병사가 몇 명 있었나 본데, 그 병사들이 그 근방을 습격한 모양이에요. 막는 과정에서 주둔하던 해방군 투사들도 다쳤고요. 결론적으로는 지금 제압이 되어서 신병이 확보 되었는데…”

“그럼… 누가 다친건가요?”

“네… 뭐.”

명백하게 얼버무리는 대답이었다. 무도가 역시 그 부분을 더 자세히 묻지 않았기 때문에 그 주제는 거기까지였다.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학자는 임무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체포된 해골부대 병사를 랄거의 손길까지 수송해야하는데, 그 경로에서 해당 신병을 호위하는 임무예요. 물론 수송하는 해방군 투사들을 포함해서요.”

“경로는 어떻게 됩니까?”

“알라기리를 떠나서 백귀암 벌판을 통해 변방지대로 이동할 거예요. 수송 차량은 비행을 못하니까 카스텔룸 벨로디나를 지나서…”

학자는 지도 위에 경로를 표시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빨간색 선은 기라바니아 변방지대의 비르잘라 건곡을 지나 가운데 낀 다리를 거쳐 장창 폭포로 이어졌다. 그리고 깨달음의 다리를 다시 건너서 줄무늬 고원을 지나 랄거의 손길까지 이어졌다.

“…해서, 랄거의 손길에 있는 주둔 병사들에게 넘겨주면 끝이에요.”

학자는 직접 그린 경로를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 각자의 역할을 설명했다.

“우선 전사가 수송 차량의 가장 앞에서 이동할 거예요. 무도가님은 주변을 수색하면서 동행해주세요. 적당히 마물도 치워주시면서요. 상위 마물은 이 경로엔 출현하지 않으니 걱정 않으셔도 돼요.”

“네!”

“닌자님은 적당히 몸을 숨기시면서 저희와 따로 떨어져서 와주세요. 랄거의 손길까지 무사히 가면 일찍 돌아가셔도 돼요. 대신 위험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임의로 판단하시고 행동해주세요.”

“위험한 일이라 하면?”

“수송 신병이 탈주라거나, 수송 차량에서 난동을 부리거나 외부에서 수송 차량이 공격 받거나… 하면요. 주요 스팟은 여기, 여기…”

학자는 경로 근처의 지형지물 위치에 격자를 그리며 설명했다. 설명이 끝나고 그는 출발일자를 안내한 뒤 펜 뚜껑을 닫고 해산을 알렸다. 아침 회의가 끝나자 무도가는 식사를 치우겠다며 일어나 그릇을 겹쳐 들고 싱크대를 오갔다. 닌자는 곧바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고 회의 중 조용했던 것이 무색하게 각자의 일상이 시작된 듯 공동 생활관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현관에선 곧바로 외출하는지 다녀오겠다는 두 목소리가, 거실에선 무기를 정비하겠다는 두 근거리 공격군과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좀 나가서 하시라고요, 사무라이님!”

“내가 왜.”

“그야 시끄러우니까요. 근데 저도 해도 되나요?”

“할 거면 베란다에서 하세요. 거기 네 분은 임무 수고하시고요.”

“다녀올게요. 아, 제가 식사 치우고 갈까요?”

“다녀오세요, 먹은 건 제가 치울게요!”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이는 식탁엔 보드에 붙은 의뢰서에 뭔갈 바쁘게 적는 학자와 의자에 앉은 채 드물게 말이 없었던 전사만 남았다. 그는 잠시 학자가 까치발을 든 채 메모하는 걸 가만 보다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줘 봐. 써줄게.”

“넌 글씨도 못 쓰잖아.”

도와주려던 손이 매몰차게 차여 떨어졌다. 무안해진 전사는 억지로 펜을 뺏는 대신 벽에 붙은 의뢰서를 살짝 내려주고 다시 앉았다.

“진짜 괜찮겠어?”

“뭐가.”

“이 의뢰 받는 거 싫어했잖아.”

“…….”

두 사람의 근심은 칼을 갈겠다며 숫돌을 꺼내겠다느니, 기름칠을 하겠다느니 하는 난리통에 묻혀 사라졌다. 학자는 한참 침묵했다.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전사가 편지가 왔다며 가져 온 것이 꼭 닷새 전의 일이었다. 봉투는 빛이 한참 전에 바란 낡은 봉투였는데 발신 날짜를 보니 긴급 우편으로 온 편지였다. 발신은 자나이로라는 이름이었고 수신이 없는 편지였다. 봉인도 대충한 편지였는데 한 번 연 흔적이 있었다.

“접수원이 전달해주셨는데 수신인이 없어서 누군지 찾느라고 열어보셨다더라.”

“자나이로가 누구지?”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종이도 봉투만큼이나 낡았는데 찢어지고 군데군데 잉크가 없어 펜촉을 긁은 흔적만 남은 부분이 있었다. 그 탓에 내용이 조금씩 끊어지긴 했지만 못 알아 볼 정도는 아니었다. 요컨대 알라기리에 급한 환자가 있는데 의사가 없어 곤란하니 급히 와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알라기리에 간 적 있었어?”

“전에 적마도사님이랑 특수 마물 수배… 아!”

불현듯 생각나는 얼굴이 있었다. 그는 태양의 추종자 여성이었는데 마물 추적이 길어져서 알라기리에 묵었던 여관의 주인이었다. 그때 여관에 있었던 전염병 환자를 돌봐주었던 게 기억에 남았는지 무턱대고 거주구 구역으로 편지를 부친 모양이었다. 어쨌든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학자는 당장 가봐야겠다며 편지를 읽자마자 간단하게 짐을 챙겨 알라기리로 떠났다. 그것은 개인적인 용무였기 때문에 그 길에 동행한 것은 전사 뿐이었다.

대형 에테라이트를 통해 도착하자마자 학자는 몸이 기억하는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인파에 뛰어들어 사라진 학자를 쫓아 전사도 부리나케 달려갔다.

“야, 같이 가!”

알라기리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모두가 소란을 떨었고 들것에 눕혀진 사람이 끝도 없이 게이트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고, 이리 치이고 저리 채이던 학자는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넘어졌다. 엎어진 채 여기저기 방황하는 발걸음에 몇 번 차인 학자는 결국 알라기리를 넘어 이 넓은 백귀암 벌판 끝까지 울려퍼질 목소리로 앙칼지게 소리쳤다.

좀 비키세요!!!

그 작은 몸에서 나왔을 거라곤 도저히 생각지 못할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일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고요해졌다. 사람들은 바닥에 쓰러진 작은 사막 부족 주위에서 조금씩 물러났고 그곳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학자에게 꽂혔다. 그는 먼지를 털면서 바닥에서 일어났다. 마침 맞은편에 허둥대며 달려오는 붉은 머리의 미코테 여성이 있었다.

“학자님!”

몇 주 전 알라기리에 왔을 때 봤던 얼굴이었다. 학자는 간단하게 목례하고 상황 설명을 요구했다. 요약하면 소탕된 줄 알았던 해골부대 잔존 병사들이 알라기리 북쪽에 있는 명검상단 숙소 터에서 근근이 생활하다 알라기리를 기습했고, 그 결과 알라기리 주민과 상주 해방군 병사들이 크게 다쳤다. 그리고 돌봐 줄만한 의료인이 없어 편지를 부쳤다는 것이었다. 여관이든 가게든 다친 사람들로 가득찼고 여기저기서 고통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어쩔 줄 몰라하는 가게 주인, 겁에 질려 떨고 있는 주민, 사람들을 싣고 달려오는 병사들, 친구, 가족, 이웃을 찾는 다급한 목소리들. 학자는 한 번 숨을 들이 쉬었다. 어차피 크게 소리치는 것 정도야 매일 하는 일이니 어렵지도 않았다.

“가게나 여관 하시는 분들은 환자 눕힐 공간 좀 확보해 주세요. 주민분들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우선 부상자 눕히고 돌보는 것 좀 도와주세요. 심한 부상자 분들 먼저 살피게 급한 분들은 따로 알려 주시고요. 해방군 투사 분들은 수고스럽겠지만 자리 나오는대로 눕혀주시고 여기 길 통제 좀 부탁드립니다.”

“우리 가게는 비교적 가벼운 부상자들만 있어요… 그러니 옆에 여관에 먼저 가주세요.”

“아, 네. 근데 왜 이렇게 부상자가 많습니까?”

“숙소 터에 감금된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병사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는 만물상들을 습격해왔던 것 같은데 인질로 식량이나 물자들을 요구해서…….”

자나이로가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학자는 뒤를 홱 돌아봤다. 학자가 뒤를 돌아 본 순간에, 전사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눈빛이 한 번 마주했을 때 전사는 가져온 짐을 바닥에 두고 곧장 등을 돌려 북쪽 게이트로 나갔다. 학자는 가져온 짐에서 치유서와 의약품들을 꺼냈다. 보지도 않고 그린 녹색 원에서 에오스가 튀어나왔다.

“사람들 좀 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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