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두지 않고(中)
사람은 죄 아래에 죄를 둔다
하루를 꼬박 새웠다.
상처가 심한 사람들을 순서대로 돌아보고 급한대로 처치를 끝내니 이미 한밤중이었고 명검상단 숙소 터 쪽은 저녁 중에 일이 마무리가 됐다. 전사 역시 저녁 내내 이젠 폐허가 된 터와 알라기리를 오갔다. 그들은 아무 대가도 약속받지 않았고 그 흔한 식사 대접조차 받지 못했지만 아무런 불평 없이 밤새 사람들을 돌봤다. 흥분에 가득 차 소란스러웠던 마을도 밤엔 조용해졌다. 지친 해방군 투사들도 돌아가면서 불침번을 서며 쪽잠을 잤고 대부분의 주민이 잠에 들었지만 마을의 서쪽에 있는 여관 두 채는 밤새 불이 켜진 채였다. 자나이로를 비롯한 여관 주인들이 학자를 도와 환자들을 돌봤다. 왼쪽 여관에 모여있는 중환자들에게 급한 처치를 끝내고 나왔을 땐 이미 동이 트던 중이었다. 그는 자나이로에게 잘 돌봐달라는 말을 하고 문을 닫고 나서야 문에 기대 주르륵 쓰러졌다. 입에선 가쁜 숨이 뱉어졌다. 힘이 빠진 손에서 치유서와 함께 빈 에테르 병들이 끝도 없이 떨어졌다. 작은 병은 누군가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신발에 부딪힌 병은 반대 방향으로 튕겨나 조금 더 굴러가다가 멈췄다.
“좀 쉬면서 하라니까.”
전사였다.
“…에테르 남았어?”
“없어. 그것도 중간에 랄거의 손길에 가서 받아 온 거야.”
“옆에 경상 환자들은?”
“대부분 자던데. 말해준 대로 처치해두긴 했어.”
학자는 아무 말 없이 머리를 젖혀 문에 완전히 기댔다. 체력적으로 녹초인 것과 별개로 머리가 몹시 어지러웠다. 소환수를 전환해서 만든 에테르까지 쉴 새 없이 사용한 탓에 온 몸의 에테르가 끊임없이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일을 마치고 나오자 하루종일 순환시켰던 에테르가 역회전하며 온몸의 창자를 비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마나도 하루종일 찰 일 없이 닳기만 해서 하루종일 슈퍼 에테르를 비웠다. 그렇게 억지로 조금 찬 마나는 또 금방 바닥났다. 그는 그것이 남용이라는 걸 알면서도 끝도 없이 에테르 병을 비웠다. 상처는 또 얼마나 지독했던가. 얼굴에 자상이 가득한 중원 부족 남자, 온 몸의 뼈가 부러진 달의 수호자 여성, 다리가 절단된 바다늑대 남성…… 그리고 끝내 숨을 거뒀던 사람들. 눈을 감고 있는데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불쑥 치밀고 오른 구토감을 이기지 못한 학자는 결국 그대로 슬픔을 토해냈다.
휴식을 권하는 전사의 말도 마다하고 그는 아침, 그리고 점심까지 양쪽 여관을 순회하며 온 마을의 환자를 돌봤다. 열심히 돌본 덕분인지 운이 좋았는지 새벽 이래로 사망자는 더 나오지 않았다. 여관에서 간단한 점심 식사를 받았다. 전사는 깨작거리는 모습을 보다 못해 그의 몫까지 남기지 않고 먹었다. 그는 다 굳어버린 빵, 식어버린 수프처럼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성의를 남기는 걸 어려워하니까. 바람같이 식사를 마친 후엔 급한 환자들을 수송 차량에 싣고 랄거의 손길에 있는 야전 병원으로 옮겼다. 야전 병원에서 나온 아켐발드가 긴급 상황을 대비해 수송 차량에 동승했고 호위는 전사와 해방군 투사들이 맡았다. 그 시간 동안 알라기리를 지킨 것은 학자였다.
긴급한 환자들을 전부 옮기고 나선 새벽 중 숨을 거둔 사람들과 숙소 터에 있었던 시신들을 에테라이트 쪽으로 옮겼다. 그들은 신도 믿지 않고 전혀 다른 출신의 이방인이었기에 알라기리에 있던 방식으로 예를 다했다. 여관에서 시신을 옮긴 것은 전사였다. 봐서 좋을 것도 없는데 학자는 일하던 손도 멈추고 그와 해방군 투사가 주검을 들고 나가는 모습을 망연히 보고 있었다. 비참한 기분이 몰려왔지만 눈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일일이 눈물 흘리기엔 그는 너무도 무뎌져 있었다.
밤이 되어서야 모든 일이 정리됐다. 경미한 부상을 입은 환자들은 거의 다 회복이 됐고 심각한 상황의 중환자들은 대부분 랄거의 손길로 옮겨졌다. 사망자에 대한 장례 의식은 알라기리의 주민들과 유가족이 치룰 테니 두 사람이 알라기리에 더 있을 이유는 없었다. 학자는 남은 부상자들을 돌보는 방법과 몇 가지 당부 사항을 자나이로에게 전했고 전사는 마을 광장에 모아뒀던 시신을 게이트 바깥 외부로 옮겼다. 마지막 시신을 마차에 싣고 나서 전사는 학자가 있는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다 됐어?”
“그래.”
“…….”
전사는 한참 여관 주인인 자나이로와 학자를 번갈아 봤다. 자나이로 역시 무언갈 아는 눈치인지 머뭇거리면서 학자를 보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무뢰한들 신병을 확보했대요.”
“뭐라고요?”
“지금 알라기리 동쪽에 있는 빈 창고에 있다고 하는데……”
학자는 날선 눈으로 치유서를 소리나게 덮었다. 학자는 자나이로가 설명을 다 하기도 전에 문을 박차고 반대 방향으로 달려갔다. 하루종일 메스껍던 속이 뛰는대로 흔들리며 비틀리고 있는 듯 역겨웠다. 생전 처음 봤던 사람들의 얼굴이, 저를 부르며 고통스럽게 신음하던 목소리가, 차마 불러주지 못했던 이름 몇 자가 심장에 박혔다. 다 낡은 창고의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결박된 채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을 쳐다보는 몇 쌍의 눈에 깃든 것은 여지없는 분노와 경멸, 그리고 끝없는 슬픔과 비탄이었다. 심장이 갈가리 찢긴 순간에 호흡이 멈췄다. 몰려오는 분노에 집어삼켜질 것처럼 발밑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다리를, 허리를, 가슴을, 그리고 목을 지나 솟구친 격노는 이내 갈라진 숨이 되었다. 피로에 제대로 뜨인 적 없었던 눈은 기어이 온전한 눈동자를 드러낸 채 어둠 속에서 새하얗게 빛났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슬펐을까. 뭐가 그렇게 억울해서 쌍심지를 킨 눈으로 그 손으로 죽인 사람들을 감히 살리려 들었던 자를 미워하고 원망할까. 하룻밤 사이 갈라지고 말라버린 입술이 차갑게 웃었다. 그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분명 일어나 걸을 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선가 힘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뭘 어쩌려고.”
붉게 빛나던 손끝을 잡아챈 것은 전사였다. 그는 평소보다 단호한 태도로 학자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뭘 어쩌냐고? 당연한 거 아냐?”
“뭐가 당연해. 죽이기라도 할 거야?”
그 말은 얼음보다도 차갑게 떨어졌다. 하지만 조각난 심장을 다시 꿰어붙이는 듯 했다. 종일 비틀린 채 고함을 지르던 창자도 얌전해졌다. 종일 양방향으로 순환하던 전신의 에테르도 제 자리를 찾아 갔다. 그의 요정은 아까보다도 훨씬 빛나며 주인의 곁을 뱅글 뱅글 돌았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일으킬 것처럼 날뛰던 난폭한 감정이 식어갔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따라 온 자나이로는 다 못한 말을 이었다.
“며칠 뒤에 랄거의 손길로 죄인을 옮겨갈 거라고 해서요… 거기서 재판을 치른다고 수송을 해야하는데…… 괜찮으면 두 분이 와주셨으면 해서…….”
부탁하는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전사는 언제 받았는지 모를 의뢰서를 학자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여기 사람들은 별로 내켜하지도 않고 투사들도 많이 다쳐서 아무도 안 가려고 한대.”
“너 미쳤냐? 그래서 우리가 하자는거야, 지금? 그리고 저놈들은 갈레말에서 온 놈들인데 재판을 왜 해요?”
“해방군 쪽에서 정한 거야. 의뢰도 랄거의 손길 쪽에서 받은거고. 어쨌든 누군가가 수송은 해야 할 텐데 요즘 기라바니아에서 나오는 의뢰를 누가 받겠어.”
그들은 이틀을 꼬박 새서 한 마을을 살렸음에도 아무런 보수도 받지 못했다. 해방 직후였고 여전히 형편이 좋지 못한 것을 뻔히 알았기 때문에 구태여 받을 마음도 없었다. 의뢰서에 적힌 보상도 일의 복잡함이나 위험성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다. 당연히 통상적인 용병들이 이 일을 받지도 않겠지. 입밖으로 뱉는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우린 자선 사업가가 아니야.”
“알아. 그래도 넌 모른 척 하기 싫을 거 아냐.”
“…….”
결국 그는 신경질적으로 의뢰서를 전사의 가슴팍에 던졌다. 올 때와 달리 텅 비어버린 가방을 질질 끌며 전사를 내버려둔 채 혼자 림사 로민사로 돌아갔다. 전사는 초연한 표정으로 구깃해진 의뢰서를 둘둘 말았다. 학자가 떠났으니 그가 여기에 더 있을 이유도 없었다. 그는 에테라이트를 통해 텔레포하기 전에 뒤에 선 자나이로에게 말린 의뢰서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우린 저 자식들을 지키는 게 아니야. 같이 가는 해방군 투사를 지키러 가는 거지. …그런 뜻이라면 의뢰 받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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