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적 공범¹
장송곡 이후 노자와 맹자
급할 것 없다. 천천히 내어오거라.
유교에 귀인으로 뫼시는 분인데 그럴 수야 없지요. 변변찮은 대접이라 죄송합니다.
탁자 위로 백색 주전자며 다완이 놓였다. 노자는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다 다식을 내어오려는 맹자를 손짓으로 제지했다.
되었다, 이 정도면 이런 시대엔 진수성찬이지. 너는 들지 않고?
손님 앞에서 주인이 음식을 탐하는 것만큼 꼴불견도 없지 않습니까.
차 안 좋아하던가?
제 스승님이 좋아하셨죠.
‘공자’?
맹자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런 이름으로 불리던 때도 있었죠.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음에도 기백 년 전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영 안 닮았구나.
닮았어야 하나요?
네가 정통한 후계자라면.
인위적이라고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웃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설레하지도, 약간의 기대도 없는 유학자. 노자는 태도를 지적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직접 덖은건가?
아, 이번에 낙향한 다산이 보내온 겁니다.
다산. 기억난다. 억새밭을 닮은 아해. 종종 유교가 전선에 나서거든 후방에서 사람들을 돕느라 뛰어다니던 어린 학자. 노자는 말없이 차를 홀짝였다. 녹차 특유의 쌉싸름한 향이 일순 눈가에 머물다 사라졌다.
… 향이 좋군.
다행이네요. 챙겨드릴까요?
됐네.
맹자는 흐린 낯으로 찻잎 더미를 거뒀다. 더운 물이 백자를 달군 탓에 손 주변이 뜨끈했다. 노자는 시선을 돌렸다. 창가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갈색 코트가 정갈하게 걸려있었다.
기실 방 안 자체는 맹자를 형상화한 듯 했다. 불필요한 가구는 일체 들이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선물로 준 물건은 버리질 못해 쌓아두는, 상냥하고 다정한 여자. 그럼에 생활 공간은 지극히 간결하고 단정된 군인. 코트는 아무것도 없는 생활 공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적인 물건이었다.
저 코트는?
상징성으로 걸어두긴 했습니다. 저는 잘 안 입고 다니지만요.
왜?
글쎄요, 우선… 다들 검은 정장에 갈색 코트라고 하면 그 분을 떠올려서일지. 전투할 때도 거추장스럽고요.
실리적이군. … 그 애는 안 그랬던 것 같다만.
겉차림에도 권위가 실리는 법입니다.
권위라. 노자는 침묵했다. 차만 홀짝이고 있으니 맹자가 말을 덧붙였다.
… 추억에 필요한 물건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좋지요. 나머지는 화장할 때 다 태웠으니.
네가 그 아이를 추억하는 매개체가 되었을텐데.
압니다. 다만 그렇게 겹쳐보는 것마저도 죄스러워하는 이가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그렇게 보여지는 상대의 인격을 말살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저는 굳이 공자님을 따라하지 않고, 그 분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지만 분위기라던지 사용하는 무구가 같으니 그리 느끼는 거겠죠.
겹쳐 볼 정도였던가. 노자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곧게 편 등, 조용한 목소리, 상대를 놀래키지 않으려 조곤조곤하게 읊는 어투. 공자도 그랬을 것이다. 등을 조금 수그리고 있었겠지만.
폭력적이었지.
그러셨죠. 유별이 뛰어나신 분이셨고.
너무 뛰어나서 문제였지. 사랑하는 법도 모르고.
사랑받아본 경험도 없으시다던데요.
누가.
공자님께서요.
유교가 준 신뢰는 사랑도 아닌가?
노자께선 주지 않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아닌가요?
어릴 때부터 폭력과 위계에 노출된 이들은 본능적으로 무엇이 권위적인지 안다. 맹자도 공자도 그랬을 것이다. 노자가 감히 짐작하지 못하는 곳에서, 그런 사고 체계를 형성하고 쌓아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가감없이 보여주었을테지. 너희가 감히 유儒의 권위에 도전하느냐, 하는. 노자는 금세 바닥을 보이는 다완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노자는 맹자의 본명을 모른다.
… 명명되지 못함은 얼마나 잔인한가?
유교의 수장이 노자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노자는, 문득, 그 시선 속에서 낯익은 철학자를 찾는다. 그리고 낯익은 청년을 찾는다. 노자가 알기로 굳세기론 어디가서 뒤쳐지지 않는 이들이었다. 노자는 몇 유학자들의 우려를 이해했다. 이래서야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있단 말이 우스울 지경이다. 그는 시선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내려 텅 빈 잔에 새 차를 따랐다. 은은한 녹빛을 띄는 차가 다완 두 개의 바닥을 가렸다.
알 거 다 아는 상태에서 말은 그만 돌리지. 무얼 찾으러 왔는지 알 거야, 맹자.
제가 이 협상에 응해야 할 이유는요?
수장을 살리고 싶은 것 아닌가?
현 유교의 수장은 접니다, 노자.
품이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인데도 굳이 네게 찾아온 이유를 알지 않나.
침묵. 정원의 작은 분수가 물을 흘려보낸다. 연못 바닥에 깔린 조약돌들이 물살에 쓸리는 소리가 들린다. 억겁같은 시간 속에서 노자 홀로 유영하는 듯했다. 이내 맹자는 긴 숨을 내뱉었다. 협상 테이블에 그제야 손 하나가 더 올라왔다.
…… 고작 이 의견 하나로 만족하십니까?
두 명 이상의 행동이 필요했거든.
다른 한 명은요.
글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다. 소식은 바람을 타고 흐르는 법이니까.
노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작은 움직임에 테이블이 걸려 덜컥거리며 찻잔이 흔들렸다. 녹빛의 투명한 찻물이 흔들리다 테이블 위로 자국을 남겼다. 노자는 그걸 손으로 훔쳐 가리곤 걸음을 이었다. 손님을 배웅하려는지 맹자가 따라나왔다.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든.
정착하실 줄 알았습니다.
유교는 너무 커. 이런 건,
무위자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잘 알면서 날 붙잡나?
맹자가 흐리게 웃는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으니까요.
이제 협상테이블 위엔 백전노장이 없다. 어리숙하고 상냥한 학자 한 명만 있을 뿐이다.
선생님을 부탁합니다.
*
글쎄, 내가 하고 싶다하여 되는 게 아니다만.
그러시겠지. 맹자는 멀리 사라지는 하얀 인영을 바라보다 시선을 거뒀다. 그는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붉은 해를 등진 채 걸어가다, 노을에 달구어진 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사이로 몸을 감췄다. 이러니저러니 신출귀몰한 치다. 필경 이담도 그리 나타날 것이었다.
“맹자님, 왜 나와계셔요? 누구 나갔어요?”
“… 아니, 이담 선생이 온다 하였는데 언제 오시는가 해서. 채비해둬라. 곧 오실 것 같다.”
“차랑 다식을 준비할까요?”
“그건 내가 준비해두지. 객청 청소만 확인해 둬.”
“네.”
맹자는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을 헤아렸다. 노자가 그에게 멋대로 안내를 맡기고 간 탓이다. 유교는 그 산골짜기와 정반대편에 있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기 전엔 그 여로에 눈이 녹지 않을 테다. 이제 그는 이담을 봄이 오기 전까지 잡아두어야 했다.
그리고 노자가 그를 찾았을 때 구는 어린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¹구성요건 자체가 처음부터 2인 이상이 참가해서만 실행할 수 있고, 1인이 단독으로는 실행이 불가능하도록 규정된 공범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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