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삼청은 본 청구를 인용한다

이담공구이담 / 학전시 결말 이후 선동과 날조

글러먹음 by 호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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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가 그를 찾았을 때 구는 어린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날 때부터 기감이 민감하던 치였다. 구는 돌아보는 대신 거센 바람에 펄럭거리는 왼소매를 갈무리해 겉옷 안에 밀어넣었다. 이담이 환자의 행동에 간섭하지 않음을 알아서 하는 행동이었다. 노자는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다가 돌길을 터벅터벅 내려와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조금 더 아래, 누가 일부러 만들어 둔 것 같은 공터 위에서 꼬질꼬질한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무리지어 놀고 있었다.

“널 찾던데.”

“난세의 간웅은 사라질 때도 됐죠.”

“네 스스로 간웅이라고 지칭하는 건가?”

“누구든 저를 그렇게 부를텐데요.”

“하여간에.”

“변변찮은 곳이라 대접은 못해드릴 것 같습니다.”

“되었다. 내려가서 애들이나 더 보고 오도록.”

그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몸을 돌려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구는 여전히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러나 둘 다 그것이 암묵적인 동의임은 알았다.

노자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구의 하루는 지극히 단순했다.

그는 절벽 위 소나무에 해가 걸리기 한 시간 전에 일어났으며, 새벽같이 그가 가꾸는 밭을 돌아보고 덫을 점검한 다음 정오가 되기 전에 돌아와 식탁에 앉아 일지를 썼다. 일지를 다 쓰면 점심을 먹고 놀러온 아이들의 놀이 상대가 되어주고, 해가 지기 시작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산아래로 향하고 돌아온다. 그는 소나무에 달이 걸리고 나서야 잠들었다.

노자는 기계처럼 이루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다 차를 우려내는 구를 치우고(그는 집안일에는 정말로 소질이 없었다) 부엌 한 켠을 차지했다. 구는 반발하지 않았고 노자가 내어 준 차를 마시곤 말갛게 웃었다. 서른이 넘은 사내의 얼굴이라곤 믿을 수 없는 낯이었다.

“곧 가을이로구나.”

“벌써 그렇게 됐나요.”

“아래에선 추수감사절 준비가 한창이니까.”

찻잔에서 하얀 김이 올라와 그의 얼굴을 가렸다. 노자는 말없이 손을 뻗어 연기를 치우고 다소 창백한 낯 위에 드리워진 머리칼을 치웠다. 외팔로 머리 다듬기가 어려웠는지 덥수룩한 머리카락 곳곳이 엉망으로 잘려있었다. 구의 뺨이나 귀, 목덜미나 이마에 남은 흉터들을 엄지로 쓸어내자 부끄러운듯 살갗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나중에 다듬어주마.”

“안 그러셔도 되는데.”

“되었다. 이런 몰골이면 내려가서 괴한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이니.”

“하하….”

구는 그제야 웃었다. 그게 퍽 불유쾌했다.

아이들에겐 끼니를 꼬박꼬박 챙기라며 신신당부하는 것과 별개로 구는 썩 모범이 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진 사내였고, 툭하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으며 -아마 각성자 시절 몸에 남은 버릇일 것이다- 제 스스로 돌보는 것은 더욱 못하는 치였다. 사랑의 유별을 논하고 사랑으로 인의를 펼치겠다던 원대한 포부와는 영 다른 태였다.

유학은 애愛를 표상하지만 구의 사랑은 연戀에 가까워 그런 것일거라고, 노자는 막연히 생각하다 식탁의 등불 세기를 줄였다. 걸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든 구의 낯이 달빛을 받아 어리숙하게 반짝였다.

“자도록.”

“아직 자정도….”

“자정은 무슨. 축시를 향해가고 있는데. 일어나.”

“그럼 이것만 쓰고,”

“술이부작이다.”

구는 순박한 눈을 두어 번 깜박거리다 얌전히 몸을 일으켰다. 잘 먹지 않은 탓에 마른 뼈마디가 손에 잡혔다. 노자는 그의 식습관과 수면버릇 등을 지적하려다 그만두고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클 남자를 침대에 눕히고 불을 껐다. 가림천을 달아두지 않은 탓에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얀 달빛이 침대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좀 쉬어.”

“…….”

“내일 아침은 내가 하지. 끼니 거를 생각은 접어두고 아이들이랑 놀기나 해.”

“그리 하겠습니다.”

“그래.”

구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원래 이렇게 얌전하고 조용한 자가 아님을 노자는 안다. 그는 구의 모든 것을 지적하는 대신, 좀 더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주고 소리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가을이 지나면 곧 겨울이다. 커튼 하나 없는, 다 쓰러져가는 작은 집을 보수하려면 그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무섭게 생긴 외형과 별개로 그 인품은 통하는지 구는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위치였다.

아이들의 증언도 마을의 신뢰를 얻는 것에 도움을 줬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산세가 험한 곳에서 홀로 사는 청년에게 기꺼이 선의를 베풀어주었고 그럼 구는 거절도 못한 채 온갖 방한용품이나 식료품 따위를 한가득 안고 돌아왔다.

그러면 구는 식료품에 손이 묶인 채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이다. 경첩이 단단한 것도 아니고 문 정도야 발로 차서 열면 그만일텐데 그 문이 불과 며칠 전에 노자가 보수해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폭력적인 행태를 어려워했다.

그럴 때마다 노자는 한숨을 푹 내쉬며 구가 미련하게 붙들고 있던 짐을 빼앗아들고 대신 문을 열어주었다. 그럼 구는 말갛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난세를 닫은 영웅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소박한 웃음이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구는 자처해서 사냥꾼 노릇을 했다. 눈이 소복히 쌓이기 시작한 날부터는 어린아이들의 숲 출입이 금지되었으므로, 구는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이 사냥용 화승총을 들고 하얗고 까만 숲속을 누볐다. 그가 지내는 곳은 상록수가 침엽수보다 많은 곳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발 닿는 곳마다 흑백이었다.

짐승의 새끼는 겨울에 활동하지 않아 눈을 헤쳐가며 덫을 치우다보면 어느새 밤이었다.노자는 날밤을 꼬박 샐 때까지 숨어있는 구의 뒷목을 잡고 새벽의 숲을 헤쳐 그를 침대로 밀어넣었다. 화승총에 안전장치를 걸고 입혀뒀던 방한복을 벗기고 가죽으로 만든 신발도 벗어 한구석에 던져두면 구는 꼭 새색시마냥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노자가 미리 끓여둔 우유를 홀짝였다.

“새파랗게 어린 것에겐 관심 없다.”

“… 저도 압니다.”

어차피 볼 장 못 볼 장 다 본 사이 아닌가? 노자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면 구는 시선을 피했다.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아는 모양이었다.

구는 어딘가 쫓기거나 무언가 버거운 사람처럼 굴었다.

겨울만 되면 구는 유독 더 잠을 못 잤다. 집 주변에 쌓인 눈이 반사한 달빛 때문에 그런가 싶어 어두운 커튼을 달아주면 어둡다며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노자는 하루하루 짙어지는 구의 눈그늘을 가만 바라보다가, 커튼을 치고 기름등의 불빛을 줄이는 구의 손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왔다.

“저, 저기.”

“따뜻한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화로를 가져와야겠군.”

“저,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오늘은 같이 자지. 내일 화로를 가져올 테니까.”

“네?”

“싫은가?”

“아니요?!”

부정의 말을 내뱉는 목소리가 다소 새된 소리였다. 노자는 나직하게 웃었고 그제야 부끄러워진 구가 벌개진 목덜미를 벅벅 문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노자가 마을에서 화목난로를 받아왔을 때 구는 집 앞마당의 눈을 쓸어내고 있었다.

한겨울이라지만 그날은 조금 날이 맑았다. 하늘엔 구름이 없어 햇빛은 따뜻했고 실개천의 얼음이 깨져 물소리가 들리던 날이었다. 춥게 다니지 말고 제대로 챙겨입고 다니라고 매어준 목도리를 아직도 안 풀고 있었는지 어울리지 않는 샛노란 개나리색 목도리가 노자의 시야 언저리에서 흔들렸다.

그리고 흩날리는 스웨터의 옷소매도. 노자는 구가 몇 년 동안 셔츠 두세 벌로, 홀로 고독하게 살았을지 상상했다. 그 스웨터는 삼주 전 마을 주민 중 한 명이 떠 준 것이었다. 구의 집에는 옷장이랄 것이 없었으므로 그는 셔츠 두세 벌, 코트 하나, 잠옷 한 벌만 가지고 이 숲속에서 몇 년을 보냈을 것이다. 타고난 생존의 욕구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거세된 것마냥, 그렇게….

노자를 발견한 구가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녹아내린 눈에 젖은 땅이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짙은 발걸음을 남겼다.

“무거우실텐데.”

“이 정도는 괜찮다. 환기구는?”

“예전에 뚫렸던 곳을 좀 더 보강했습니다.”

“뭐, 일단 끼워보고 생각해보자꾸나.”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지만 구는 그 대답으로 족하다는 듯 활짝 웃었다.

두 시간 가량 위치를 잡고 환기구를 끼워넣자 해가 질 때였다.

노자는 뻐근한 허리를 톡톡 두들기며 남은 장작의 양을 헤아렸다. 밤이슬이나 눈에 젖지 않게 방수포를 덮어두었다고 해도 그리 많이 남지는 않았을터다. 노자는 문득, 그가 막 초가집에 도착했을 땐 모든 것이 텅 비어있었음을 깨달았다. 생존의 욕구에 체온 조절은 불필요했던 모양이지. 그때는 방수포를 오래 쓰지 않아 위에 먼지가 쌓여있었고 집안은 살풍경해 사람이 사는 곳처럼 보이지 않았다.

“불을 때울까요?”

“… 아니, 됐다. 너 불편하면 때우지 말거라.”

“날이 춥습니다.”

“넌 이런 날씨에도 난로 하나 없이 지냈으면서, 동굴에서 지냈던 날 걱정하는건가?”

“…….”

“구야.”

“그렇게 안 부르셔도 됩니다. 저야 이제 이런 외부의 날씨엔 무뎌졌으니까요.”

남자는 나직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것이 노자가 웃는 낯과 똑같았다. 노자는 그를 바라보다가 난로에 시선을 고정했다. 마른 나뭇가지 다발과 불 붙은 성냥개비만 던져 넣으면 홀로 알아서 잘 탈 테지만 구가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남자는 이제 잠들 시간이 되면 노자를 찾았다.

난로를 들이기 전, 딱 하루만 같은 침대에서 자 준 것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노자는 제 체온이 평균보다 낮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외부의 자극에 무뎌졌다는 말이 사실인지 남자는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이제 그는 달빛을 가리는 커튼이 없어도 하얀 빛 아래서 잠들 줄 알았고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노자는 필요로 했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는 원시천존도 알지 못할 것이다. 노자는 희미하게 일렁이는 화롯불을 지켜보다 침대를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희게 웃으며 옆자리를 비워두고 있었다.

“먼저 잠들지 그랬나.”

“잠이 안 와서요.”

“나를 안고 자는 게 도움이 되진 않을 것 같은데.”

“의외로 편해요.”

“그래.”

노자는 자리에 눕는 대신 침대에 걸터앉았다. 남자는 노골적으로 아쉬운 티를 냈으나 재촉하지 않았다. 그 대신 침대 시트 위에 올라온 손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제 뺨으로 가져가 꼭 노자가 그를 쓰다듬는 것처럼 행동했다. 노자는 그의 손바닥에 닿는 온기에 대한 적확한 설명을 찾으려 한참 애를 썼다. 어리광? 애교? 안도? 그 모든 단어가 그를 표상할 수 없음을 안다. 남자는 인간이었고, 노자와 달리 복잡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길 물속 들여다보기 어려운 존재였으므로.

“내일은.”

“숲으로 나가나?”

“덫을 보러 갈 겁니다. 수가 부족해요.”

“외곽으로?”

“네. 짐승을 잡을 생각은 없으니 권총 한 정이면 충분합니다.”

“글쎄, 네가 정말 다치지 않고 돌아올거란 확신이 없는데.”

“이렇게 오래 보셨으면서도요.”

침묵. 노자는 그의 칠십 년 일생동안 오래도록 침묵해본 적이 없다. 남자는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래서 노자는 마음껏 침묵한 후에 그의 뺨을 덮고 있던 제 손을 꺼냈다.

“난 너를 오래 본 적 없어.”

“하하, 그러시겠죠.”

“일찍 자. 눈은 미리 치워둘테니.”

“네, 안녕히 주무세요.”

남자는 흐리게 웃곤 노자를 등지고 누웠다.

그 권총은 구세대의 노자라도 오래된 것이라고 생각할 법한 것이었다.

총신은 짙은 먹색이었지만 곳곳에 칠이 벗겨져있어 어느 곳엔 은빛이 돌았다. 노자는 옷소매로 먼지를 벅벅 문질러닦고는 잠금쇠를 풀어 탄창을 꺼냈다. 탄창은 가득 차 있었지만 어느 것이 공포탄이고 어느 것이 실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시 잠금쇠를 채워 주머니에 쑤셔넣고 밖으로 나오자 눈을 쓸던 남자가 그를 향해 걸어왔다. 비어있는 왼팔이 유독 바람에 심하게 흔들렸다.

“위험합니다.”

“됐다. 여기서 격발해봐야 내 다리만 스치지.”

“치유 능력도 없으시잖아요.”

“건강한 나보다 네가 더 아프겠지.”

“아하하…. 그래도요. 같이 가시렵니까?”

“네가 한몸 아끼지 않으니 내가 같이 가야되지 않겠나.”

“피가 날 일은 없을텐데요.”

노자가 눈을 깜박였다.

“네가 제때 치료를 받지 않는 것도 자해 행위라고 한다면, 난 그걸 막을 의무가 있어.”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로가 없던 때,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남자는 종종 잘려나간 왼팔을 붙잡은 채 잠결에 끙끙 앓았다.

성긴 옷감에 살갗이 쓸려 피가 배어나오고 식은땀으로 이불이 젖을 정도로 앓던 때였다. 그러면 노자는 남자가 가지고 있는 것들 중 그나마 부드러운 천으로 된 옷으로 그를 갈아입히고, 상처난 부분 위로 연고와 붕대를 감아주었다. 자연히 덜 아물었거나 딱지가 뜯어진 곳으로 시선이 갔다. 노자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큰 몸이 온통 다 낫지 못한 상처와 흉터로 가득했다.

이런 외진 곳에서, 제대로 된 의식주 없이 사는 것이 일종의 자해와 같았다고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화목난로를 들고 오던 날 보란듯이 목도리며 스웨터를 챙겨입은 것도 나름 저 잘 살고 있노라고 보여주는 행위였을 것이다. 노자를 안심시켜서, 봄이 오면 그를 떠나보낼 생각이었을까?

그는 숲속이 얼마나 잔인한 지 알고 있다. 봄이 되면 겨울잠에서 깨어난 짐승들이 사냥감을 찾으러 다닐 것이고, 여름이 되면 독초가 산채들과 뒤섞여 자라고, 가을이 되면 낙엽이 푹 꺼진 구덩이를 가리고, 겨울이 되면 모든 것이 메마른다. 그런 곳에서 또, 제대로 된 방비 없이 고행하듯 살아갈까.

“너는 사랑하지 않는구나.”

“어쩌면요.”

그리고 남자도, 구도. 노자가 깨달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목장갑 하나 끼지 않은 손이 능숙하게 덫을 해체했다. 그는 담담하게 긍정하며 해체한 덫을 자루에 던져놓고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눈더미에 한참이나 손을 넣고 있던 탓에 손끝이 새빨갰다. 노자는 장갑 하나를 던져주고 걸터앉아있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랑하지 않는데 아이들은 좋아하나?”

“그건…. 글쎄요, 대동과는 다른 느낌이 아닐지.”

“인애?”

“아뇨, 그건 당연한겁니다. 아이들은 죄가 없잖아요."

어떤 것은 학습된다. 그리고 학습된 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서 선의 형태로 싹튼다. 노자는 선의 순환을 믿었으나 난세에서 선의란 바람 앞 촛불보다 가엾은 것이었다. 구가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갈구했듯, 또 어쩌면 그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오롯이 선의만 가지고 있진 않았던 것처럼, 흉내낸 사랑이라도 어찌되었건 그 겉면은 애愛였다. 흉내내었던 진심이었던 그가 사랑하는 법을 학습한 순간부터 그는 사랑할 줄 아는 자였다.

그러나, 다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아끼는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배우지 못한 것을 스스로 깨달을 수는 없는 법이다.

마지막 덫에는 어린 곰이 걸려있었다. 겨울잠에 들지 않은 개체거나 어미 몰래 나온 것임이 틀림없었다. 다행이라면 그 어린 것이 순순했단 점이고, 불행이라면 새끼를 잃은 어미가 미쳐 날뛰고 있던 것이었다. 노자가 무어라 반응할 틈도 없이 구는 허리춤에 꽂혀있던 권총을 꺼내들었다. 공포탄인지 실탄인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잠금쇠가 풀리고 총알이 장전되었다. 노자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불안정한 자세로, 한손으로 권총의 반동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여 노자가 무어라고 했던가? 그가 외친 말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구의 독백은 지워지지 않고 선명했다.

“하지만, 노자님.”

그의 능력은 학이學而라고 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은 이토록 쉬운 것을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법마저도 배운 것 같았다.

일종의 악재였다. 노자가 가져온 권총은 글록17이었다. 첫 발이 나가면 바로 다음 탄이 약실에 장전되는 자동장전식 권총. 첫 발은 공포탄이었지만 두 번째는 실탄이었다. 구의 손 안에서 총이 크게 돌고, 총구가 위로 확 꺾이는 것과 동시에 불꽃이 튀었다. 우레와도 같은 소리에 귀가 얼얼한 것도 잠시 눈 위로 새빨간 것이 흩날렸다. 그 숲은 매화 자생지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흑백의 숲속에서 오롯이 그것만이 선명했다.

가늠쇠가 이마를 강타하면서 두 번째 총성이 울렸다. 찢어질 것 같은 이명 속에서 노자는 겨우 눈밭 위로 쓰러지려는 구를 받쳐안았다. 달궈진 총열의 열기가 크게 찢어진 살갗 옆으로 화상 자국을 남겼다. 총알이 머리를 스치지 않은 것은 천운이었지만 이마가 너무 깊게 찢어져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의 손바닥을 적시는 핏줄기가 꼭 삼도천 같았다. 구는 의식이 없었고, 뇌진탕 증세를 얼핏 보였으며 최악의 경우엔 뇌출혈까지도 의심해야했다. 총열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부딪혔는지 모르겠지만 코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 옷깃을 흠뻑 적셨다.

“죽지 마.”

노자가 중얼거렸다. 그를 들쳐업자 팔이 아래로 뚝 떨어지는 것이 시체 같았다.

“죽지 마라, 구야.”

이런 죽음은 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구는 일주일을 꼬박 앓고도 일어나지 못했다.

악몽이라도 꾸는 듯 노자가 알아듣지 못하는 이름을 연신 불렀다. 상처는 금방 아물었지만 흉터가 크게 남았고, 감아둔 붕대는 피보다 식은땀으로 젖는 일이 더 잦았다. 노자는 붕대를 풀어내고 차가운 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올려주었다. 뇌출혈은 없는 것 같았고 가벼운 뇌진탕으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구도 그것을 다행으로 여길지는 몰랐다.

“이담, 이담님…….”

“그래.”

“아파요….”

“사람도 못 알아보고. 이 지경이 되어서야 솔직해지나?”

“아파…….”

아프다는 말도, 어쩌면 거짓일거라고. 노자는 수건을 갈아주다 문득 생각했다. 구는 사랑하는 법을 흉내낼 줄만 알았지 사랑받고 싶어하는 것은 배우지 못한 탓에 꼭 제 고통을 겉으로 내밀었다. 찡그린 눈가를 살살 문질러 펴 주자 눈꼬리에 매달려있던 물방울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이담님…….”

“정신이 좀 드나?”

“…….”

노자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열에 몽롱하게 풀린 눈을 굴려 노자를 바라보던 구가 헛숨을 내뱉었다. 더듬더듬 손을 뻗기에 맞잡아주자 내뱉는 탄식이 절망과 환희 어딘가를 헤메는 소리를 냈다.

“저를, ….”

“구야.”

“저를, 죽이러 오셨나요?”

노자- 도덕천존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담은 종교에 많은 뜻을 두지 않았다. 세상사는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이고, 민중이 제 사상을 가지고 이리저리 변형했다 하여 그 기반이 상선약수라면 굳이 더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던 성정도 한몫했을 것이다. 이담이 발할라로 올라온 이래 태상노군이니 도덕천존이니 하는 호칭을 부여받았지만 그는 스스로를 신선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관리자도 그것을 허락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담은 발할라에서 오롯이 ‘노자’로 남을 수 있었다.

이제 와서 세간에 떠도는 태상노군의 역할은 해낼 수 없다. 이담은 타인을 벌하는 것엔 재주가 없었고, 무위로써 다스려야 할 세상 위에 군림하는 천존의 역할은 제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작금의 사태가 이례적인 일이다. 태상노군은 죽어가는 어린 것의 영혼을 두 눈으로 보았다. 구는 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이담은 죽음에 유감을 두지 않는 자였지만 인간인 구는 또 어떻게 여길 지 모르는 일이었다. 한길 물속은 원시천존도 알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몸을 돌려 오른팔로 태상노군의 손목을 붙잡은 구가 가쁜 숨을 내뱉었다. 기껏 아물은 상처가 다시 벌어져 수건 아래가 새붉게 물들었다.

“저는, 지옥에, 갑니까?”

“글쎄. 삼청의 판단에 맡겨야겠지.”

“삼청의, 헉, 일원이시지 않습니까.”

“나는 도와 덕만 주관할 뿐이다. 여기가 재판장도 아니고.”

“하실 수, 있잖아요.”

“구야.”

손목을 붙잡은 손이 벌벌 떨렸다. 태상노군은 힘겹게 몸을 일으키는 어린 늑대를 가만 바라보았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옷, 이불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천, 끼익거리는 소음을 내는 침상, 간절함과 일말의 번뇌로 물든 낯…. 구는 말을 더듬으며 겨우 말을 이었다.

“제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간단 말입니까?”

“태상노군이요?”

“대성지성선사로 추존된 자네가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하하, 설마요. 과한 찬사입니다.”

“글쎄, 꼭 그렇지만도 않을 것 같은데.”

이담은 공구가 막 발할라로 올라왔던 당시 새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트린 수많은 호칭을 떠올렸다. 추국공, 문선왕, 문선제, 지성선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성지성선사. 공자는 죽어서 제후부터 시작해 황제를, 그리고 그 황제의 스승으로 작위를 마감했다. 어쩌면 후에는 다른 작호가 더 붙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뇨, 그래도 정말 과합니다.”

“과한 겸손도 없느니만 못하다. 네가 그리 사양하면 네 후학들은 무얼 모시고 있단 말이냐?”

“그래도, 이담님. 유학이라는 이름 하에 치러진 수많은 분서와 사상 전쟁을 보다보면. 그들이 그렇게 된 원인 중 제가 있을 거란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습니다.”

“구야.”

공구가 나직하게 웃는다. 성인聖人이 된 그는 별하늘 아래에서 벌어진 모든 일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유학자의 나라임을 표방한 군주가 어떤 패도를 펼쳤는지, 난세에서 어떤 포악한 이가 유학의 탈을 쓰고 사람들을 해했는지, 또 어떤 유학자가 끝내 이상을 펼치지 못하고 죽었는지…. 이순의 나이를 지나서도 공자는 약자를 지나칠 수 없는 자였고 종심을 지나서는 세상의 패악에 슬퍼하던 자였다.

이담은 오래된 과거를 헤아리듯 시선을 내려 깐 공구를 가만 바라보았다. 짧은 침묵 끝에 고개를 들자 그는 여전히, 평소처럼 말간 웃음을 내걸고 있었다.

“그러니, 이담님. 제가 지옥에 가지 않는다면, 누가 그들을 대신해 지옥에 가겠습니까?”

“지옥이라.”

태상노군은 새삼스럽다는 낯으로 구가 입에 올린 단어를 곱씹었다. 유학 진영의 누군가가 지옥에 간다면, 그를 지옥에 가도록 만든 원인 제공자는 구였기 때문에, 그는 필연적으로 지옥에 가야만 했다. 옥청과 상청이 참작 사유를 부여해주지 않는다면 필히 그렇게 될 것이었다. 세상은 복잡하고 악의 뿌리는 단조로우면서도 엮인 것이 많아 명확한 판단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당장 여기서 내릴 순 없다. 유가타에 너보다 먼저 죽은 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 습니까.”

“뭐, 지옥에 가겠다는 이를 반기지 않을 수문장은 없지 않겠나? 가기 전에 끝마쳐두어야 할 일이라도 생각하지 그래.”

“…….”

구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끝마칠 일? 하고, 어리숙하게 되묻는 것이 정말 어린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태상노군은 손목을 붙잡은 손을 깍지 껴 잡아주고는 그를 다시 침대에 눕혀주었다. 열 오른 시야가 천장의 어딘가를 헤멨다.

“… 아, 마을 아이한테….”

“마을 아이에게?”

“조각을, 해주기로 했습니다.”

“그래.”

“풍년을 기원하는… 소 모양의 조각을 해주기로 했어요. 겨울엔 어렵고 봄에 해주겠다 약속했는데.”

“그리고?”

흐려진 갈색 시선이 이리저리 굴렀다. 태상노군은 어린 것이 기억을 짜내는 것을 가만 바라보았다.

“아주머니께도…. 꽃샘추위를 넘길 장작을 가져다드리겠다고 했습니다.”

“또.”

“해가 넘어가기 전에 가죽을 주기로 했어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사냥 방법을, 알려주기로….”

“봄까지 살아있어야겠구나.”

구가 탄식 같은 숨을 내뱉었다. 어렴풋이 맞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봄이, 제 숨을 거둬갈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상노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낯으로 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까만 눈에서는 감정을 읽을 수 없고 하얗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탓에 바로 옆에 있어도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 같았지만 지금이라면, 뭐든 들어주실 것만 같았다.

“제가, 살고 싶다 청하면.”

“글쎄.”

“그렇게 해주십니까?”

“죽음은 가변적인 것이니까, 구야. 삼청은 인간의 죽음에 간섭하지 않는단다. 사후에 어떻게 될 지 그 이치를 정하는 것 뿐이지.”

태상노군의 침묵이 종용했다. 구는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이불을 꾸욱 말아쥐었다. 태상노군- 노자, 이담이 겨우내 그를 살리려 애를 쓴 이유. 가을을 넘어 겨울로 들어오는 내내 제 체온이며 숙면 따위를 신경 쓴 이유. 그 모든 게 밤하늘같은 까만 눈에 들어있었다.

“봄까지, 살아있을 수 있게, 허해주십시오.”

그 거대한 자애를 받아들인 구는 끝내 울고야 말았다.

“그래.”

목적을 이룬 신선이 다정하게 웃는다.

“삼청은 본 청구를 인용한다.”

쓰면서 들은 노래를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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