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암과 가헌, 남송의 거장
주희, 신기질 (*신기질의 외관 묘사는 자체적 캐디를 활용했습니다.)
발할라에는 철학 폴리스 말고도 다른 폴리스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문학 폴리스, 과학 폴리스, 의학 폴리스, 그리고 미술과 음악 폴리스 말이다. 각각의 폴리스에서 거주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폴리스 내부에서 타인들과 교류를 하거나 대화, 또는 논쟁을 벌이지만, 가끔은 -이곳에서 새로이 생긴 인연이거나, 어쩌면… 생전에 이미 인연이 있었거나 하는 사유로- 타 폴리스의 사람들과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오래 전- 319년간 이어졌던 왕조, 문文이 지배하는 시대, 학술의 치세였던 송宋의 후기. 남송南宋에서 탄생한 두 거장이 다시 만난 이야기이다.
그래, 그때만 해도… 주희가 발할라의 철학 폴리스에 오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문학 폴리스에 누군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더랬다. 남송에서 사詞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금의 지배하에서 자라 후일에는 의병을 일으켜 금에 대항하고 이어서 남송에 귀의한 무인이자 시인, 신기질이 도착했다고. 기실, 신기질은 주희보다 7년을 더 살았으나 나이는 주희보다 10세 어렸다. 그리고 주희와 신기질은 이미 이전의 삶에서 만났던 일이 있었기에. 주희는 곧장 문학 폴리스로 향했다. 그는 발할라의 시간이 현세보다 20배 빠르게 간다는 것을 아직은 체감하지 못했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내가 올라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자네가 올라오나… 같은 생각을 하며, 막 올라온 새로운 모습의 친우를 보았다. 자신의 모습도 이곳에 올라온 후로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마치 자신처럼 젊어진 친우를 본 주희는 웃었다. 그 친우는 자신을 ‘아직은’ 알아보지 못했지만서도. 그건 크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짧은 검은색 머리에 강직해 보이는 눈썹, 맑은 흑빛의 눈동자, 과연 남송 호방파의 1인자다운 외모였으리라. 주희는 역시 자네는 자네야. 가헌. 이라는 생각을 삼킨 채로 생긋 미소를 띄우며 손을 건네었다.
“가헌稼軒. 자네도 이곳에 왔군. 어서 오게.”
“… 그런 일이 있었지요. 주 선생님, 기억나십니까? 그때는 제가 주 선생님을 못 알아뵈었지만 말입니다…. 하하.”
신가헌. 즉 신기질은 찻잔을 홀짝이며 입을 연다. 주희는 자신의 잔에 담긴 우롱차를 한 모금 마시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기억 못 할 리가 있겠나. 못 알아 볼 만도 하네. 나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스스로가 낯설었거든. 신통하지? 죽었는데 낯선 공간에서 눈을 뜨고 외모와 목소리 모두 새로운 모습이니 말이네.
주희는 가만히 생각에 잠겨 떠올렸다. 눈앞의 친우가 복건에 발령을 받아 처음 만났던 날을. 자신은 그때 받쳐오르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축하의 뜻을 전하는 편지 -신유안에게 답하여 올립니다- 를 써 건넸지 않은가. 그로부터 그 두 사람의 교류가 시작되었고, 복건에 부임한 신기질은 주희에게 지역의 정황과 행정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자네도 알까 싶은데, 내 친우 중에 상산이라는 자가 있거든. 학파는 나랑 다르지만. 내가 그 친우에게 쓴 편지에 자네가 부임한 후로 정치와 교화가 함께 흘러가 선비와 백성이 교화되어 매우 위안이 되었다고 전했었네. 일찍이 내가 자네에게 쓴 편지 내용은 기억하는가?”
“그분께도 제 이야기를 하셨군요. 이건 저도 방금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만… 과찬이십니다. 아, 제가 복건에 처음 부임하였을 때 주신 편지 말씀이시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분명히 탁월한 기재이며 원대한 식견을 소통하였다고 말씀하셨지요. 주 선생님의 그 말씀을 어찌 잊겠습니까?”
“하하, 너무 잘 기억하고 있군. 이제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나는 자네가 나와 성격이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네. 자네 성격이 참 강직하지 않나. 할 말은 당당히 하고, 어디 가서 잘 굽히지 않고 말이야. 자네가 업무에 관해 나에게 도움을 청했을 때 내가 기꺼이 수락한 이유도 자네는 좋은 관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네. 나중에 내가 지방 관리의 이익에 손해를 입혔다고 비방을 받았지만… 그게 어찌 비방을 받을 일이겠나. 관리는 자신의 이익보다 백성들의 삶과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은가.”
그 말대로였다. 일찍이 신기질이 복건에 도착하여 주희에게 자문을 구했을 때, 주희는 ‘백성에게 너그럽게 임하고, 선비를 예로써 대하고, 아전을 엄격히 다스리라’ 는 조언을 주었다. 신기질의 행정은 엄격했기에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는 약간의 부족함이 있었다. 신기질은 차를 마시며 옳은 말씀이십니다, 라고 답했다. 주희는 찻잔을 한 번 바라보더니 말을 이었다.
“단순히 엄격하게 법으로서만 다스리는 것보다는 사랑과 형벌을 겸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네. 즉 교화와 행정을 함께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었네. 어느 한 가지에만 치우치지 말고, 고르게 쓰라는 뜻이었지. 그런데 자네가 내 말을 모두 받아들여 올바르게 행정을 행했기에 나는 그것이 지금도 기쁜 일이야.”
“하하, 그때 주 선생님께서 그런 뜻깊은 조언을 주시지 않았다면 저는 복건의 행정을 항상 행하던 것처럼 엄격하게 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주 선생님께 자문을 받고 제 정치 기풍은 달라졌습니다. 주 선생님의 조언을 저는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속에 새기고 행한 이후로 조정에서도 칭찬하셔서 얼마나 황송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때 주 선생님께서는 정말 참된 성인이시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저는 선생님의 제자분께 백성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기풍을 행하신다고 말씀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저는 주 선생님의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으니까요.”
“이런. 어찌 내게 직접 말하지 않고?” 주희는 하하 웃었다. 신기질은 대답 대신 멋쩍게 웃는다. 그래도 직무에 있었을 때 유학 교육을 일으키고, 학풍을 정돈하는 데 관심을 둔 자네가 아닌가. 내 그때 별다른 말은 얹지 않았지만서도. 주희는 오랜만에 전생을 회상하는 것이 매우 즐거운 듯했다.
“가헌, 자네 그거 아는가? 그때 다른 선비들이 내가 자네와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고서는 내게 와서 추천서를 써 달라 한 적이 있었네. 내가 어떻게 했는 줄 아나?”
“주 선생님이시라면… 당연히 거절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 나는 추천서를 써 주지 않았네. 돌아가라고 했지. 명성을 추구하고 이익을 좇는 것이 눈에 보이기에. 내가 추천서를 써 준다면 자네의 업무는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자네의 업무가 흐트러지는 것을 원치 않았어. 자네와 나는 항상 남송을 생각했지 않은가. 그런데 남송을 위해 결정적으로 무언가를 해낼 기회는 잡지 못했지. 금이 조국의 재산을 수탈하고, 영토를 빼앗아 가고. 그런 상황에서 자네가 군을 일으켜 금에 대항하였으며, 내가 황제 폐하께 주전을 직언하였듯이… 그러나 그 뜻을 마음껏 펼칠 기회가 없었던 것이야. 그런 상황에서 내가 추천서를 써서, 자네의 업무가 흐트러진다면 어떻게 되겠나. 물론 나는 사사롭게 이익을 꾀하는 자들에게 추천서를 써 줄 생각은 원래 없었긴 했지만.”
“…… 그렇지요. 저도 문인이긴 하나 무인이기도 했으니 나름 군사전략을 논한 ‘미근십론’을 집필했지만 실제로 실현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쉽긴 합니다. 저도 북벌을 주장하였으니까요. 수차례에 걸쳐 결사항전을 건의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남송을 위협하는 금에 맞서 항전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요. …그래도 후일에는 ‘비호군’을 창설하는 데 허가를 받아서 군을 육성하였지만 탄핵을 당했습니다. 비록 완전히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저는 제 의지를 글에 담아내어 사詞로서 표현하였습니다.”
“잘 알지. 어찌 모르겠는가? 자네의 ‘파진자’ 라는 사는 나도 이곳에 와서 읽은 적이 있지. 무어라 했나. 군악대가 변방의 노래를 연주하며 가을날 전장에서 열병한다, 말은 적로마처럼 나는 듯 달리고 활은 벽력 소리 내며 활줄을 놀라게 한다(파진자, 신기질) 는 구절이었나. 나도 황제 폐하께 금에 강화를 요청하는 것은 실정이며 직접 맞붙어 싸우지 않는다면 복수는 요원하다고 말씀드린 기억이 있군. 그때 공격과 수비를 잘 조화하여야 하며 군사적 문제는 규율과 제도에 있다고 했으니. 나도 그만큼 주전론을 지향했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렇게 많은 피해를 당했으면서도 주화론을 논하는 자들은 생각이 없지 않은가? 나는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신기질은 맞습니다, 그 사는 중원 수복에 대한 열망을 담은 사입니다. 주 선생님께서 알고 계시다니 기쁘군요. 라고 답하다가 주희의 마지막 말에서 웃었다. 역시 주 선생님께서는 정말 강직하신 분입니다. 주희는 같이 웃고 말았다. 하하. 뭐… 이미 이곳에서 새로 지내고 있으니 과거는 과거지만서도 잊을 수 없는 과거는 항상 있는 법이지. 이를테면 내가 극기복례와 숙흥야매를 액자에 써서 자네에게 준 일도 있고… 자네가 무이산에서 나에게 써 준 사도 있고. ‘무이를 노닐면서 도가를 지어 회옹에게 증정하다’ 라는 사 말이네. 자네가 나를 ‘제왕의 스승’이라고 칭송할 때는 조금 과찬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되거든.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주 선생님이시라면…
“그래도 세상사는 정말 앞을 알 수 없군 그래. 내가 장사의 수령으로 부임했을 때 헤어지게 되었지만 이렇게 이곳에서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이곳에 와서 알게 된 것이지만 자네, 내가 죽었을 때 제문도 썼다지? ‘불후의 공을 세운 사람은 만세에 이름을 남기며 정의를 위해 죽은 사람의 그 정신은 오히려 살아 있다’고.”
“아, 그 제문 말씀이십니까?” 신기질은 머쓱한 듯 뺨을 긁적인다.
“그것이, 말씀드려도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경원에 꽤 큰 어려움을 겪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만 주 선생님께서는 그 상황 속에서도 저술과 강학에 힘쓰셨던 분이시고 학문을 끝까지 계속하셨으니까요. 저는 주 선생님을 정말 존경했기에 서거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알고 계셨군요… 사실 제문 뿐 아니라 사도 지었습니다.”
“이곳이 꽤 특이한 곳이라, 어쩌다가 접하게 됐네. 아, 사 말이라면 ‘황은에 감격하다’ 의 제목을 가진 시 말인가? 그것도 읽었지. 물론 이곳에 와서.”
“진짜 다 읽으셨군요… 주 선생님께서는.”
“그럼, 친우가 사를 썼다는데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나. 읽고 자네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 그래서 자네가 이곳에 오면 꼭 말하고 싶었는데 말할 수 있게 되었군. 그때 나는 탄압 속에서 세상을 떠났는데도.”
주희와 신기질은 이야기를 계속하느라 이미 식은 각자의 찻잔을 비우는 것도 잊은 채 경원의 당금에 있던 편린을 꺼내었다. 그래도… 그래도, 지금 이렇게 잘 지내고 있고, 명예를 회복하였으니 된 일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남송의 두 거장들은 친구로서 다시 한 번, 이곳 발할라에서 우의를 돈독히 다질 수 있게 되었으니.
“아, 참. 사실 저는 불가와 도가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주 선생님의 책과 글을 읽고 유가로 전향했습니다.”
“하하, 그런가? 실은 철학 폴리스에 싯다르타 님도 계시고, 노자님과 장자님도 계셔서 내가 평소에는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지만… 유가로 전향했다니 좋군.”
fin.
파진자, 신기질
술 취해 등불 심지 돋우고 칼 바라보니
꿈속인 듯 호각 소리 군영을 휘감네.
팔백 리 소를 잡아 구워 휘하의 병사들 먹이고
군악대가 변방의 노래 연주하며
가을날 전장에서 열병한다.
말은 적로마처럼 나는 듯 달리고
활은 벽력 소리 내며 활줄을 놀라게 한다.
군왕의 천하사를 다 마쳐야
생전과 사후에 이름을 얻으련만.
가련토다, 백발 다 된 인생이여!
황은에 감격하다 -‘장자’를 읽다가 주회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기질
책상에 놓인 책 몇 편은 ‘장자’ 아니면 ‘노자’라네.
말을 잊어야 비로소 도를 안다고 하는데
만 마디 말, 천 마디 구절을 잊어버리고 웃을 수만은 없다네.
오늘 아침 장마가 개어 하늘이 푸르구나.
골짜기에 언덕에 단출한 적삼, 짧은 모자
백발은 성성하고 옛 친구는 적다.
그대는 어디에 있나
현묘한 경전과 초고만 남았네.
강과 냇물은 밤낮 흐르니 어느 때나 그치려나.
참고문헌
수징난, 주자평전 19장 -고정에 숨어 살다-
기누가와 쓰요시, 하늘 위에는 무엇이 있는가
신기질, 파진자
신기질, 황은에 감격하다 -‘장자’를 읽다가 주회암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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