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카

마음짓기

공구이담공구

글러먹음 by 호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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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분이시구려.

머리에 붕대를 몇 바퀴나 감았는지 알고 하는 말인가. 이담은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이 자는 초면에 쉽게 귀인이라는 말을 꺼내는 성정이었다. 태생이 다정한 탓일지도 모르고, 그의 사상 자체가 인애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지금의 공구도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고목을 닮은 긴 머리칼이 물결져 선이 두꺼운 얼굴 위로 그늘을 드리웠다.

“…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울컥하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담은 겨우 질문을 짜냈다.

“송구하오. 내 기억력은 좋다고 자부했건만…. 귀하는 도통 기억나지 않소. 실례가 아니라면 귀하의 성함을 알려주지 않겠소?”

공구의 세계에 없는 이담. 이담은 피가 차게 식는 것 같았다.

공구는 정말 전부 다 잊은 것 같았다. 병실로 쳐들어오다시피 밀려들어오는 후학들의 면면을 보곤 혼란스러워하더니, 맹가가 반쯤 끌고 가며 데려다 준 -그만한 덩치를 어떻게 끌고 가는진 모르겠지만- 도서관에 몇날 며칠을 틀어박히더니, 아흐레 정도가 지나자 밖으로 나와서는 평소처럼 배시시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것 치고는 기억의 얼개를 그럭저럭 정확하게 맞춘 모양이었는지, 그는 걱정이 무색하게 발할라에서 누구보다도 잘 지냈다. 공구는 적응력이 좋군, 하고. 이담은 내심 생각했다. 어쨌든 그건 다행이었다. 혼자 겉도는 것보단 나을 테니까.

“선생님.”

그러나 공구가 웃으며 이담을 부르는 건 그에게 있어 불행이었다.

이담은 공구가 자신을 어떻게 부르는지 기억했다. 이름을 부르는 그 짧은 행위마저 조심스럽게, 몇 초의 간극을 두고 경애를 담뿍 담은 고목빛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면서, 못내 참을 수 없이 연모하는 이를 부르듯, “… 선생님.” 하고서는, 선하게 웃던 자다. 그는 언제 어디서든지 이담을 그리 불렀다.

공구는 감정을 잘 못 숨겼다. 존경하는 이가 있으면 그게 온몸에서 나타나는 치였다. 유교는 솔직함을 미덕으로 삼는 사상이었으니까. 천성이 -물론 이담은 이 단어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으나- 곧고 올바른 자라 감정이 곧게 나타나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것이 공자가 일생 주장하던 예일지도 모르고. 이담은 공구가 저와 이야기할 때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하던 얼굴을 기억했다. 존경합니다, 선생님. 존경하고 있어요. 이담은 그가 그럴 때마다 경애가 아니라? 라고 묻고 싶었다.

솔직함을 미덕으로 삼는 사상을 창시한 자라고 해서 그가 거짓말을 못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공구는 가끔 그에게 많은 것을 숨겼다. 대부분 그가 숨기는 것들은 존경으로 포장되곤 했다. 발할라에 있는 사상들 중에서도 드물게 사상과 사상가가 일치하는 이담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사랑을 논한다고 해서 이담이 그걸 거북해하지 않으리라는 건 공구가 가장 잘 알고 있을텐데도.

그럼 이담은 문득 생각하는 것이다. 제가 죽으면 공구가 슬퍼할까, 하고. 유학은 대부분 사상가와 사상의 성질이 닮았다지만 성인으로 추존된 이와 그 사상은 여러 면에서 많은 것이 달랐다. 발할라의 공구도, 그가 알던 공구도 그의 사람이 죽으면 울겠지만 그가 알던 공구처럼 몇날 며칠을 슬퍼하진 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구는 현명해서, 그가 노자에게 다가가는 일은 없었다. 그건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 공구 개인의 문제였을 것이다. 이담은 이따금 공구가 술에 취해 돌아왔던 때를 상기했다. 이담을 보곤 헤실헤실 풀린 낯으로 웃더니만은, 백구십이 넘는 몸이 취기에 녹아 이리저리 기울어 흔들렸다. 스승님, 하고 평소라면 절대 쓰지 않았을 말을 꺼내면서, 발갛게 물든 얼굴에 사랑이 깃든다. 이담은 그 말을 가만히 듣다가 “그래, 구야.” 하고 짧게 답해주었다. 공구는 무어가 그리 좋은지 그 짤막한 답변에도 웃었다. 그러면서도 이담이 부축하려 다가가면 한발짝 물러났다. 성인으로 추존된 이에게도 두려움이 있구나. 이담은 그리 생각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성인인 공자와 그의 사상은 다른 것일텐데. ‘성인’ 공자는 두려워할 것이 없을텐데.

“스승님.”

“그래.”

“경애합니다.”

“구야.”

“이 마음을 다해 경애하고 있습니다. 정말로요…. 믿지 않으시겠지만, 정말입니다….”

공구는 꼭 울 것처럼 굴었다. 이담은 그 격한 감정변화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진정했다. 사람의 감정이란 물보다도 더 탁한 것이었으므로…. 큰 갈빛 눈동자는 금방이라고 눈물이 흘러넘칠 것처럼 흐렸다.

그는 취기 어린 얼굴로 -어쩌면 다른 감정을 이유로- 이담을 바라봤다. 이담은 그 얼굴에서 체념을 읽었다. 칠십이 넘어 죽은 이가 이리 미련하고, 제 앞에만 서면 어린아이가 된다. 그는 손을 뻗어 발갛게 달아오른 공구의 손을 건드렸다. 손끝이 달궈진 것처럼 뜨거웠다. 그대로 공구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겨 제 품에 가두자, 몸이 화들짝 튀더니 뻣뻣하게 굳었다. 공구의 어깻죽지에선 오래된 서책의 향이 났다.

“인애한단다, 구야.”

그는 무어가 그렇게 서러웠는지 이담의 품안에서 한참동안 울음을 죽였다.

다음날 그는 부끄러운 얼굴로 이담의 집에 왔다. 과일 바구니를 껴안은 채로. 그건 또 뭐냐며 눈짓하니 그는 무안한 얼굴로 “다산에게 받았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담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어린 유학자를 떠올렸다. 기가 센 유학자들 사이에서 홀로 약한 인상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는 죄송했습니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고?”

“경애한다고 그랬지요.”

“자네 귀가 빨갛네만.”

“… 죄송합니다." 그리고 잠시 침묵.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이담은 그 목소리에서 절제와 체념을 찾았다. 감정을 억지로 억누른 것 같은 모양새다. 이담은 다만, 공구가 끌어안고 있는 바구니에서 실한 사과 하나만을 들고, 그의 가슴팍을 꾹 밀어 집 밖으로 밀어냈다.

“인애하고 있네. 몸조심하고.”

아주 약간의 간극 뒤에 공구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배경으로 이담은 목간을 집어 들었다.

경애하는 자와 인애하는 자. 그건… 꽤나 연인의 행세였다고, 이담은 회상했다. 공구의 감정 표현이 좀 더 깊어지고 이담이 공구를 기꺼워하는 횟수가 늘어난 것 뿐이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관념적인 연인의 행세가 맞았다. 그러나 이담의 마음 한구석에서 걸리는 것은, 공구가 이담을 경애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고에서 공구가 이담을 구했을 것이라는 가정이었다. 그는 타고나기를 건실하고, 다정하고 상냥한 청년이라 멋대로 몸을 내던졌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시야가 무너진 벽돌로 가려지기 직전에 읽은 입모양은 그랬다. 뭐가 다행이란건지 뻣뻣하게 굳은 뇌는 이해할 수 없었다. 발할라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일종의 불사를 부여받았다. 죽더라도 다음 날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하게 다니는 것이 그들이었다. 그러니 이담이 낙석에 맞아도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구태여 공구가 제 몸을 던져가며 그를 구할 필요가, …… 없었을텐데.

“사랑하고 계시는 게 아닐까요.”

“내가?”

“걱정하고 계시잖아요. 어디서 뭘 하는지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지만 아프지 않았으면 한다고.”

우리는 세간에서 말하는 사랑을 하고 있었나. 그것을 열애로 칭한다면야…. 사랑과 경애는 그 결이 달랐다. 공구는 존경 안에 사랑을 담아 이담에게 건넸을지도 모른다. 그는 많은 감정을 존경으로 포장하기를 잘하는 치였으니까. 사람은 쉬이 변하지 않아서, 마음 건네는 것을 두려워하던 공구가 그 사건 때 제 마음을 직접 닫아걸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이담은 문득, 사상은 철학자가 버린 감정의 집합체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면서, 공구가 기거하는 집으로 발을 옮겼다. 늦은 저녁이라 거리에 내걸은 등을 제외하고는 불이 켜진 집이 거의 없었다.

“… 선생님?”

“머리는 좀 괜찮은가. 네 제자 말로는 별다른 이상은 없다고 하던데.”

“예, 괜찮습니다…. 헌데 이런 늦은 시간에 무슨 일로,”

“우리 관계에 대해 정정할 것이 좀 있는 것 같아서.”

해가 산등성이 너머로 넘어간 탓에 그늘이 어둑했다. 이담은 구태여 공구의 현관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현관은 민감한 장소다. 이담이 공구의 경애를 허락하면서 끝내 그의 현관 안으로 들이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공구가 현관에 걸린 등불을 등진 탓에 그의 얼굴은 어두웠으나 이담은 그 얼굴에서 쉽게 당혹스러움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표정을 보자 그제야 머리 한 구석에 엉켜있던 실타래가 풀리는 것 같았다.

이담은 공구가 그를 오롯이 유일한 존재로 봐주었으면 했다. 사상가 노자의 일이 아닌, 사상가가 버린 감정과 사상이 뒤섞여있는 이담의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우스워 이담이 웃었다. 간단한 것을 여지껏 거부해 온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직도 나를 경애하나?”

“예?”

“네 경애가 존경과 같은 의미라면야.”

“아. … 예, 경애하고 있습니다.”

“존경이란 뜻인가?”

“글쎄요. 비슷하겠죠.”

“그런가.”

‘아직도’를 걸고 넘어지지 않았다는 건 감정이 남아있다는 의미로 봐도 되는 일일까. 공구는 기억이 없어도 그를 경애하던가…. 그러면 이런 사랑은 절대로 연인의 사랑이 아니었지만, 이담은 공구가 논하는 인애에 기꺼이 어울려줄 생각을 했다. 무어, 그것도 사랑의 일부가 아닌가.

이담은 그때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공구의 손끝을 건드리곤 제 손을 얽어 깍지 껴 잡았다. 그는 원체 체온이 낮았으므로 그의 손보다 더 큰 공구의 손이 지독히 뜨거웠다.

“내가 널 인애하고 있으니 말이다.”

“선생님.”

“그러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무엇을 말입니까.”

“연인을 말이다.”

이담은 비로소 마음을 맺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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