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 국가의 규범에 관하여
동철! 서철! 크로스! 2 - 주자와 플라톤 국가관의 얕은 제시
24.09.05 백업
어쩌다 보니 동서양 철학 크로스오버를 또 하게 됐네요, 이번엔 플라톤과 주자입니다.
공부하다 이 점에서 또 이을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KCI에서 뒤적거린 결과 아주 근본 없는 생각은 아님을 알게 되어 다시 글로 옮겨 봅니다 ㅎㅎ
지난번 글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습니다… 겉핥기이기 때문에 디테일에서 틀린 면이 많을 거예요. 이해 부탁드립니다ㅠㅠ
+플라톤의 사상은 <국가>가 아닌, 그의 저작 중 더 이후의 것이자 잘 알려진 철인정치와 약간 의견이 달라진 <법률>을 기초로 하고 있기에 플라톤의 의견이 낯설 수 있습니다!
발할라 ‘도서관’의 공기는 별다르게 환기를 하지 않음에도 언제나 적당히 쿰쿰하고 적당히 습했다. 종이와 죽간, 양피지 등의 다양한 소재로 이루어진 서책들은 분명 관리 방법이 전부 다를 텐데도 이곳에서는 아무런 이상도 발생하지 않았다.
도서관에 들어온 플라톤은 새삼 이곳이 환상적인 어떠한 공간임을 체감했다. 이데아,는 아닌 것 같지만…….
조용히 서가를 돌아다니던 플라톤의 시선이 도서관 한구석에 꽂혔다. 많은 서가의 한 쪽 책장 앞에 팔짱 끼고 서서 생각에 잠겨 있는 사람이 있었다. 주희였다. 저 자가… 아마 12세기 중국이었나? 플라톤은 생각했다. 시대도 지역도 사상도 상이한 출신이지만 어쨌든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후학은 후학 아닌가. 그 점에서 미묘한 친밀감을 느끼고 있어서인지, 플라톤이 주희에게 말을 거는 것에 망설임의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말을 들은 주희는 문득 생각이 깨진 듯 아주 짧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다가, 시선을 돌려 플라톤을 마주 봤다.
“아, 플라톤 님이시군요. 서가에 보실 게 있으셔서 오신 것인가요?”
“그래. 그런데 네가 뭔가 생각하고 있길래. 혹시 방해였니?”
“아뇨,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조금 심란해서 말이죠.”
그제야 플라톤은 주희의 앞에 펴져 있던 책을 보았다. 아니, 책이 아니고. 신문이었잖아? 그것도 꽤 최근의 뉴스였다. 사회가 혼란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후세 사람들이 신경 쓰이는 거니?”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제 시대에서도 상대주의와 즉심즉불론이 성행해서 혼란이 왔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다원화되고 상대주의적인 현세의 상황이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는군요.”
“오, 그거 흥미로운데. 나 때도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인간척도설에 ‘정의란 강자의 편익’이라는 강자이익설이 성행했거든. 상대주의는 뭔지 알겠는데, 즉심즉불론은 뭐야?”
“내 마음이 곧 부처이기에 자기의 사사로움에 빠진 흐름입니다. 저도 이곳에 와서 싯다르타 님의 원류 불교에 대한 말씀을 듣고 불교에 대한 생각이 다소 바뀌긴 했습니다만, 제 시대에 살았던 불자들의 ‘자신의 마음을 진리의 척도로 삼는’ 헛짓을 지적한 것에는 후회가 없어요.”
하하하! 플라톤은 크게 웃었다. 이게 발할라의 재미있는 점이다. 전혀 연관 없는 두 시대와 두 지역의 유사점이, 대화하다 보면 가끔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인간사 참 돌고 도는 거지. 그는 생각하곤 대답을 이었다.
“진짜 흥미롭군. 그래서 너는 천리를 정하고 규범적 척도가 인간의 내부에 있지는 않음을 주창했나? 들어본 적은 있으려나 모르겠는데, 나는 이데아를 주장했어. 우리는 사람마다 다르고 수시로 변하는 자신의 마음을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되며, 이데아처럼 객관적인 척도를 공유해야 한다고 했지.”
주희 역시 제법 놀란 눈치였다. 지나가는 다른 분야 학자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이 도서관의 공간은 무한, 게다가 발할라의 학자들은 굳이 이 도서관에서 정숙해야 한단 생각은 안 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로부터 시작된 도서관에서의 논쟁들은 어느새 발할라의 도서관을 또 다른 ‘아고라’로 만들고 있었다.
“유사하군요. 혹시 올바른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나요? 저는 ‘꼭 알맞은 도리’를 실천하는 삶, 즉 자신의 처지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삶을 주장했습니다.”
“나는 정의로운 삶이란 ‘강자에게 이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본분(ergon)을 따르는 삶이라 했어. 어찌 이리 용어까지 비슷한지 모르겠네.”
“오, 신기합니다. 그런데 저희 이리 계속 서서 대화하기도 그렇죠. 잠시 제 처소로 모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차라도 한 잔 대접하죠.”
“아, 난 상관없긴 한데, 그래도 된다면 나야 좋지.”
두 사람은 자연스레 대화하며 도서관에서 나왔다. 가을 정취를 느끼며 걸어오는 동안에야 대담에 푹 빠져서 보던 신문을 그대로 두고 왔음이 떠올랐지만, 주희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유교의 처소는 소박하면서도 절제된 미가 있었다. 이오니악 건축을 따르는 플라톤 자신의 처소와 비교해서 훨씬 단출했다. 아무래도 그리스와 중국의 건축양식은 많이 다르고, 아마 각자에게 편한 생활환경을 관리자가 제공해 주었겠거니. 나무로 된 마룻바닥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플라톤은 주희를 따라 그의 방에 들어왔다. 그의 방 역시 화려하지 않았으나, 은은한 난 향이 어려 있었다.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차는 금방 우려졌다. 우롱차입니다, 출신 지역의 특산물이에요. 주희가 설명했다.
“동양의 차는 참 아름답단 말이야. 향과 맛을 즐기는데, 취하지도 않는다니.”
“그리 봐주시니 기쁘군요. 입에는 맞으십니까?”
“응, 괜찮네. 그래서, 아까 물어보다 만 거. 아까 네가 공론을 제시했다고 했는데, 조금 더 설명해 줘. 너의 이상적인 국가는 단지 이데아,는 내 말이고, 천리를 따르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서.”
“네, 맞습니다. 일방적으로 천리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 요즘 후학들은 자유의지라고 하더군요. 그것을 함께 고려하는 것이 저의 계천입극론입니다. 객관적인 ‘자연의 이법’과 주관적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화시키자고 말했었죠.”
“나는 처음엔 그저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과 위치에 따라 알맞게 살며 통치자는 철인인 사회를 이상적으로 여겼지. 그러나 세월이 지나며 다소 의견이 바뀌었어. 철인왕은 이상적인 본(paradeigma)로 제시한 것이지, 실제로 내가 기획한 것은 군주의 지혜와 민중의 자유를 조화시키는 것이었다. 네 말로 요약하자면 이거지. ‘객관적인 자연의 이법과 주관적인 인간의 자유의지를 조화시키자. 도덕적 본성의 요소와 이기적 본능의 요소를 조화시키자.’”
주희는 웃어 보였다. 공통점을 찾은 사람이 예상조차 못 한 한참 앞 시대 서양철학자인가. 플라톤은 말을 이었다.
“한 사람의 지혜에 의존하는 군주정은 전제에 빠지기 쉽고, 다수의 자유에 의존하는 민주정은 방조에 빠지기 쉽다고 주장했었지…….”
“하하, 그거 저와 비슷하군요. 저도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약하다’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비슷하다고? 우리 진짜 같은 시대에 태어났으면 좋은 친우가 되었겠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 둘 다 ‘자연의 이법’만 강조하면 인간의 삶이 지나치게 구속되고, ‘인간의 자유의지’만 강조하면 인간의 삶이 방종에 빠지기 마련이라 주장했군요.”
“도덕적 본성만 강조하면 현실성이 떨어지고.”
“이기적 본능만 주목하면 속물주의에 빠지고요. 역시 조화와 균형이 중요한 듯하군요.”
“네 말을 듣다 보니 아까 신문 보면서 왜 그리 심란해했는지 알 만도 하네.”
“그렇죠. 공정성의 테두리 안에서 각자의 자유를 추구해야 하는데, 현세는 그렇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 느낌입니다…….” 한숨을 내쉬며, 주희는 차를 다시 한 잔 따랐다. 아까 정성껏 우린 게 무색하게도, 차는 이미 식어가고 있었다.
“차가 식어버렸네. 대화에 푹 빠졌어.” 짐짓 아쉬운 듯, 플라톤이 다 식어버린 자신의 잔을 비우고 입맛을 다셨다.
“괜찮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대화와 논쟁이 본능에 각인된 저희 아닙니까?”
“하하하, 그렇지!” 둘은 마주 보고 활짝 웃었다. “이런 대화는 역시 즐겁군. 앞으로 좀 친한 척해도 돼?” 말하는 플라톤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실려 있었다. 당연하죠, 주희는 대답하고 다시 웃었다.
“그래도 끓여둔 차는 다 마시고 가고 싶은데. 좀 더 이야기해도 될까?”
“얼마든지요.”
이미 해가 기울어져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지만, 둘에겐 신경 쓰일 일은 아니었다.
학문의 세계에서 내 편을 찾는다는 일은 즐거운 것이니.
——
이번엔 정말 대화가 잔뜩이군요….
짤막한 글이지만 철학적인 이야기가 본의 아니게 좀 많이 들어간 듯하기도 합니다. 꽉꽉 눌러 담았네요. 사실 발할라의 플라톤은 <법률>보다는 <국가>베이스이겠지만 따로 플라톤 관련해서 알아보다 보니 주자와 공통점을 찾았고, 이것이 제게 이 내용을 글로 옮기게 만들었습니다😂
지난번에 해 보니 동서양 철학 크로스오버가 제법 재밌더라고요. 저는 학술적으로는 아는 게 별로 없고 그저 논문으로 제 생각의 방향이 일리가 있는지만 알아볼 수 있을 뿐 학문적 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콜라보레이션을 한 번씩 함으로써 지적 유희를 누군가 느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해요.
부족한 글이나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고문헌)
플라톤, 박종현 역, <법률>, 서광사, 2009.
이상익, <이상 국가의 규범: 플라톤의 혼합정과 주자의 공론>, 한국철학사연구회, 2020.
이 글을 썼을 당시에 묘하게 체력이 많이 닳았는데, 다 쓰고나서 깨달았었습니다. 바로 전 글은 대문자 I들의 대화였던 반면 이들은 대문자 E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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