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
공자, 맹자. 성인이라 추대받아도 그리움은 있지 않을까.
24.09.11 백업
그제부터 작가님이 올려주신 선진 유교+신유학 일러스트들이 너무 좋아서 글 내림이 왔네요ㅜㅜ
발할라 동양철학 폴리스의 한구석에는 활터가 있다.
활을 쏘는 처마 기준으로 꽤 먼 거리에 있는 과녁에는 별다른 무늬 없이 흰 바탕에 커다란 검은 원만 그려져 있었다. 과녁과 처마 사이에는 물이 흐르고 있어, 활에 조예가 없는 사람이라면 화살이 그대로 물속에 처박히기 일쑤였다. 그러나, 활을 몇 순을 쏘더라도 단 한 발도 물에 꽂히지 않는 자가 있었다.
오랜만에 활터에 온 맹자는 먼저 와 있는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활 끝에 온 집중을 쏟은 그는 몸에 미동조차 없었다. 살랑, 부는 바람이 지나가는 순간, 그는 활시위를 놓았다.
쐐액!
맹자의 시선은 화살 끝을 따라갔다. 먼 거리에 있으나, 과녁에 명중했음을 알아볼 정도의 시력은 되는 그였다. 과녁에는 이미 여럿의 화살들이 꽂혀 있었다.
“명중입니다, 선생님,” 맹자는 그제야 목소리를 냈다. “어찌 과녁을 빗나간 화살이 하나도 없으시단 말입니까.”
상대는 활을 천천히 내리고는, 맹자를 바라보며 사람 좋게 웃었다. “허허, 내 6예를 주장한 사람인데 활을 못 쏴서야 되겠나. 주기적으로 이곳에 오게 되네. 그나저나, 이곳의 경치가 퍽 아름답지 않은가?”
늘 보던 경치였고, 철학 폴리스는 언제나 가을이지만, 관리자의 관여인지는 몰라도 올 때마다 그곳의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나뭇잎이 떨어지다가도, 눈 감았다가 뜨면 어느 순간 다시 잎이 붙어서 살랑대기도 하고. 계절감을 알 수 없는 새소리가 갑자기 들리기도 하고. 지금은 단풍잎들이 떨어질 듯 바람에 휘날리며 사아아-소리를 내는 듯했다.
“그렇습니다. 헌데 오늘은 활을 좀 많이 쏘신 듯합니다.”
“옛 제자들이 생각나서 말이네. 물론, 자네와 순자가 함께해 주는 것만으로도 참으로 기쁜 일이네만…….”
“저의 스승님께서도 이곳에 계시지 않은 것이 퍽 아쉬웠습니다. 관리자의 재량이겠지만…… 선생님께는 손자분이시지요.”
“후세엔 자사,라고 알려졌더구나. 그래도 손주의 저서 <중용>이 중히 여겨지는 것은 주희라는 후학에게 듣긴 했다만. 유독 오늘따라 그들이 생각나는구나.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것이지.”
말하며, ‘공자’는 생각에 잠겼다.
-
처음 제자들을 받았을 때엔 좌충우돌 그 자체였다. 신념을 가지고 온갖 선진적 교육방식을 적용했으나, 무법지대나 다름없었던 그곳에서는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들도 적잖았다. 그런 공구에게 힘이 되어주었던 제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 유독 튀었던 자는, 속된 말로 전직 깡패였던 자로였다. 그를 얻은 뒤로부터 귀에 험담이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무뢰배를 제자로 들여 데리고 다니니 시비를 못 건 것에 가깝겠지만. 그렇게 힘이 된 제자이면서도, 그는 유일하게 공구에게 따지고 대드는 제자였다.
공자, 공구, 그 또한 사람이었기에 일자리에 대한 욕구가 있었고, 애초에 자신의 사상을 받아들여줄 군주를 찾기 위해 세상을 돌아다녔다. 인사가 없던 건 아니었다. 그는 자주 흔들렸다. 그러나, 자로는 그가 흔들릴 때마다 늘 공구에게 일침을 넣었다.
필힐이 불렀을 때였다. 그는 인사에 응하려 했다. 옷을 다 갖춰 입고 나가려던 차, 공구의 방 앞에 버티고 있던 거구를 마주했다.
“자로 아니더냐.” 말하며 언제나 사람 좋게 웃던 공구의 얼굴에는, 곧 당혹스러움이 비쳤다.
“예전에 저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나쁜 짓을 한 자에게 군자는 가지 않는다.’” 노골적으로 언짢다는 듯, 그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으며 얼굴은 찡그려져 있었다. 체격으로는 남에게 뒤지지 않는 그 공구보다도 더 큰 체격의 그가 불만을 내놓자, 주변의 다른 제자들은 주춤하면서도 섣불리 말을 막지 못했다. “필힐은 중모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생님은 가시려 하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공구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자로가 자신에게 대항하는 일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으나, 이번엔 자신의 말을 근거로 자신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공구는 말했다. “그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지. 그런데 견고한 것은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흰 것은 아무리 물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짐을 갑작스레 자각한 공구는, 아차, 생각하곤 목소리를 낮췄다.
“…… 내가 무슨 조롱박이더냐? 어찌 매달아놓기만 하고 먹을 수도 없단 말이냐?”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드물게 애원하는 투였다.
“그래도 찬성할 수 없습니다. 선생님께서 그런 자에게 귀의하시는 것은, 제자로서 막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굳건히 앞에 버티고 선 자로가 말했다.
“잠깐 물러가 있거라. 생각을 좀 하마.” 공구는 잠깐 눈을 감고, 스스로를 진정시킨 후 모든 제자들에게 말했다. 싸해진 좌중은 금세 물러갔다.
아무리 애제자라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에 이리 반항하는 것은 못마땅한 게 사실이었다. 정말 대쪽같은 제자이기 때문에 공구 자신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적도 많았다. 이전에도 그랬다. 반란을 일으켰던 공산불요가 그를 불렀을 때 역시 자로가 반대했다. 그때는 화를 냈다. “그자가 어찌 헛되이 나를 불렀겠느냐? 만약 나를 써주는 사람만 있다면 나는 그곳을 동주로 만들 것이다!”라고 호통을 쳤으나, 자로는 입장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고, 결국 공자는 공산씨에게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 외에도… 수많았던, 자로가 자신에게 대항했던 일들. 되돌아 생각해 보면 자로의 선택은 옳았다. 하루에도 수백수천의 자가 죽어나가고 군주가 뒤바뀌는 난세에서 그는 대쪽같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 옳은 선택이었고.
여기까지 생각한 공구는 노함을 가라앉혔다. 눈을 뜨자 여전히 자로는 버티고 서 있었다. 자세는 좀 공손해졌지만.
“…자로, 고맙구나.”
“안 가시렵니까?”
“그래야겠구나.”
“그러셔야지요. 미련 없이 활이나 쏘러 가시는 게 어떠하겠습니까, 선생님.”
“좋다. 가지. 필힐에게는 거절의 연통을 넣겠다.”
투박한 손으로 공수하고 스승을 따르는 그는 든든했다. 언제나 그랬듯.
—
맹자는 선학의 사색을 방해할 생각이 없었다. 한참을 조용히 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공자는,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곤히 생각에 잠겨 계시더군요, 선생님.” 맹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그 딴에는 손자분이신 내 스승님이나, 안회 사형을 생각하시는 것인가,라는 짐작이 있었다.
“하하, 오랜만에 사색에 잠겼군그래. 어찌 아무 말도 없이 곁에 서 있는가. 자네도 한 순 쏘지 않겠나.” 말하는 공자의 얼굴엔,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맹자는 멈칫했다. 그에 홀린 듯, 맹자는 대답을 이었다.
“그러려 했는데, 오늘은 선생님과 함께 있어드리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거 고맙군. 그럼 같이 차라도 한잔하지 않겠나?”
“저도 오래간만에 스승님 이야기도 하고 싶습니다. 선학 사형분들도요.”
“급(공자의 손자 자사의 휘)이 말이더냐. 좋지……. 오랜만에 나누는 이야기가 되겠군그래.” 평소의 공손하면서도 강단 있는 표정으로 돌아온 공자는 속으로 다시금 웃었다. 이 후학은 내가 급이를 그리워한다 생각하는 모양이군.
급이도 물론 그립지만, 공자는 이곳의 후학들이 자신에게 마냥 깍듯하게 대하는 것이 다소 무료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북적북적 찾아와 문안인사 올리는 후학들을 따뜻하게 대하면서도, 누군가는 격하게 대항하고 대들어 주길 바랐다. 자로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은 네가 참 그리운 날이구나. 너도 여기에 올라왔으면 좋았을 것을.
활과 화살을 갈무리하며, 공자는 생각했다.
떨어질 듯 말 듯 하던 단풍잎이, 바람에 조용히 날아갔다.
—
개인적으로 공자가 자로와 안회와 있던 일화들이 재미있더라고요.
그중에서도 바락바락(ㅋㅋㅋㅋ)대든 자로는 발할라 공자도 떠올릴 여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선진 유교 옛날 옷 입고 있는 발할라 유학사상들을 보니 그들도 저런 거 입으면 옛날 생각하려나~라는 발상이 떠올라서 글로 옮겼어요.
부족한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가 코멘트.
공자가 자로에 대한 회상을 마친 후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자로의 최후를 자연스레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아무 설명 없이 디테일만 넣어놨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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