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잠 못 이루고
봄 롤스 x 겨울 노직
겨울의 눈가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왈처가 숨을 삼켰다. 푸른 눈꺼풀 위에 서리가 내려앉고, 좀체 붉어질 일이 없는 눈가가 더 창백하게 물든 것은 겨울이 심기가 불편함을 의미했다. 들고 있던 마른 나뭇가지가 얼어붙어 깨지려 들자 왈처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당신을 위해서도요!"
"… 그게 왜 날 위해서가 되는 건데."
"겨울이 오래 지속되어봐야 당신에게 도움 될 건 없지 않습니까. 이게 지금 몇백 년째에요."
"난 무리 안 해."
"무리 안 하신다는 분 손끝이 그렇게 피가 맺힙니까?"
겨울이 손을 말아쥐었다. 왈처가 한숨을 푹 내쉬고, 겨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말아쥔 손을 겹쳐 잡았다. "그러니까 얼른요, 찾아주세요. 네?"라고 애걸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절박한 탓에, 겨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의 대답을 들은 왈처가 환하게 웃으며 바람처럼 사라지자 겨울, 로버트 노직은 발갛게 달아오른 손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백 번째 겨울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페르세포네가 외면한 봄이라는 제목을 단 단편집이 냉풍에 끄트머리를 내어주고 있었다. 노직은 그 견해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봄은 지하에서 지상을 향해 움트는 것이었으므로 페르세포네가 정말로 지상에 질렸다면, 평생 지하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가 지금껏 본 봄은, 지상을 경멸하기엔 지나치게 지상을 사랑했다. 햇볕에 녹아 사라지는 눈 사이로 피어나는 새싹을, 새롭게 우짖는 새들의 목소리를 사랑해버리고야 만다던….
다 부질없는 회상이다. 노직은 느티나무를 깎아 만든 지팡이를 들고 숲 곳곳을 누볐다. 처음 겨울이 잠들지 않았을 때 아직도 토지신을 믿는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와 치성을 드리던, 오래된 제단이 있는 숲이었다. 그때 겨울은 직접 인간들 앞에 내려와서(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다가 한 노인의 말에 엉거주춤 모여들었다), 아직 봄이 준비가 덜 된 모양이라며 인간들을 달래어 돌려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봄이 늦어도 한 달 안에는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도 가을도, 전부 그리 생각했다.
어떻게든 버텨오던 인간들이 하나둘씩 스러지기 시작했을 때, 겨울은 들고 있던 느티나무 지팡이로 제단을 거세게 내리치며 노성을 터트렸다. 돌조각이 비산하며 얼굴에 긴 상처를 내고 푸른 피가 굳어 눈가에 서리로 내려앉던 날이었다. 생명체를 보호해야 할 계절이 어찌 감히 숨을 틀어막았냐며, 분노에 눈이 멀어 제단이 제 형체를 찾지 못하게 부수고 또 부수던 날이었다. 그해 겨울이 기거하는 숲의 마지막 숲지기가 숨을 거두던 날이기도 했다. 이내 노직이 다 부서진 제단 앞에 몸을 웅크리고 울었다. 분노가 울음에 뒤섞여 가라앉고, 뒤늦게 급히 달려온 여름과 가을이 노직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던 날.
봄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겨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내려오겠다 성화를 부리는 북풍을 바다 쪽으로 돌려보내고, 세상을 묻을 것처럼 내리는 눈의 양을 최대한 줄이는 것 뿐이었다. 인간들은 그런 것에마저 감사하다며 부서진 제단을 어설프게 복구해 무어라도 올려놓고 돌아가곤 했다. 냉기에 취약한 여름이 미안하다며 가장 남쪽의 땅에서 작은 이파리가 되어 잠들던 날 겨울의 눈가에서 피가 흘렀다. 오십 년 전 분노가 만든 서리에서 푸른 얼음이 흐르고 나면 한 달 정도는 초봄에 가까운 추위가 지상을 맴돌았다.
그러니까, 그건 겨울이 마지막까지 놓을 수 없는 미련이었다. 혹여나 지상이 아직도 너무 추워서, 봄이 감히 몸을 일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노직은 차가운 숨을 뭉턱 내뱉었다.
"가을 말이 하나 틀린 것이 없군." 그는 여전히 미련하다. 자조적인 말투가 전쟁의 잔해처럼 주변을 맴돌았다.
통상적인 관념으로 겨울은 지난한 편이었다. 겨울의 입장으로 봄을 찾는 것은 거진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초봄의 꽃샘추위는 겨울이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미처 거두지 못한 바람의 잔해였지. 그는 코트의 단추를 여몄다. 서리가 내려앉은 눈가가 발갛게 물들었다.
"겨울이시군요."
"…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겁니다."
"모든 계절 중 인간에게 가장 상냥한 계절은 겨울이지요. 아시지 않습니까."
"동사하는 사람들을 몰라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계절이기도 하지요."
눈 쌓인 벤치에 앉은 노인이 나직하게 웃는다. 목 끝까지 채운 남색 프렌치 코트 위로 하얀 눈이 쌓이는 것을 보던 노직은 하얀 입김을 내뱉곤 노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젠 언제였는지 정확하게 가늠하기도 어려운 오래 전, 사람들을 이끌고 돌로 만든 제단을 찾아오던 노인과 닮았다. 오랫동안 살아오며 한 시대의 존망을 살피는 이들은 다들 그런 얼굴일 거라고, 그는 막연하게 생각하며 노인의 어깨 위로 제 코트를 걸쳤다. 노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었다.
"무어가 그리 불안하셔서."
"눈이 그칠 때까지 노인께 코트를 덮어주는 젊은 청년을 연기 중입니다."
"봄이 그리우십니까?"
"저보다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 없을 텐데요."
지팡이의 손잡이를 매만지던 노인은 그가 익히 아는 설화를 꺼냈다. 페르세포네가 부유한 저승을 버리고 지상으로 올라오는 이유는 사람들의 그런 모습을 즐거워하기 때문일 거라고 대답했던가. 그는 동쪽을 가리켰다. 파란 시선이 동쪽을 향했다. 평소라면 믿지 않았을 것을 믿는 이유는, 노직 역시 지쳤기 때문이다. 설화를 이야기해준 답례로 노직은 노인에게 제 코트를 건네주었다. 몇백 년 간 지속되어온 냉기를 막아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봄이 자주 나타나던 동쪽 끝의 섬에 발을 디뎠다. 일전에는 바다가 얼어붙을 만큼 기록적인 한파가 몰아쳐도 홀로 새싹이 피어나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얼음에 바스러진 마른 흙에 나뭇가지 따위만 굴러다니고 있었다. 노직은 긴 숨을 내쉬다가, 구두 끝으로 땅을 헤집었다. 이내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아 손으로 땅을 긁었다. 차갑게 식어 딱딱해진 흙더미가 창백한 손끝에 얕은 실선을 죽죽 그어댔다.
"뭐해요? 여기서."
"죽은 땅이라길래."
"여기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늘기는 했죠. 봄에 가까워지고 싶다면서."
"겨울이 위로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왈처가 가볍게 바닥에 내리 앉았다. 가을이 걸친 옷깃에서는 언제나 바스락대는 낙엽 소리가 난다. 노직은 잠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이리 와 보라는 듯 왈처를 향해 손을 까닥였다. 왈처는 순순히 무릎을 굽혀 노직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여기를 가꿀까 해."
"지금까지 들은 모든 치성 중에 제일 허무맹랑한 소리였어요."
"꼭대기 산에서 물을 쏟아부어서 홍수를 일으키겠단 소리는?"
"노력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죠, 그건."
노직은 잠깐 시선을 굴렸다.
"눈구름을 여기만 치우면 돼."
"왜요?"
"섬이 작으니까."
"촉진제는 안 필요하세요?"
"그러니까 이리 부탁하고 있잖아."
"음."
다소 허무맹랑한 소리에도 불구하고 왈처는 기꺼이 그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꼭대기 산에서 얼어붙은 매화 한 가지를 주신다면야." 하고 덧붙이는 것에 노직은 짧게 욕심이 많다며 그를 타박했다.
그의 목표는 간소했다. "나비나 새만 오면 돼."
왈처가 응수했다. "꽃이 자라야겠네요."
그러나 노직은 왈처보다 생명을 가꾸는 것을 못했으므로, 흙을 몇 시간이나 뒤엎은 후에 얻은 것은 아주 약간의 생명의 기가 남아있는 씨앗 하나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왈처의 손으로 넘어갔다. 겨울은 씨앗을 싹트는 것엔 재주가 없었기 때문이다. 겨울의 권능 하에 섬을 되살리는 계획도 수정하고 수정해서 결국 그들은 작은 화분에 그 씨앗을 심기로 했다. 겨울이 기거하는 꼭대기 산의 가장 먼 곳, 여름이 잠든 그곳에 옮겨진 화분의 끝이 얼어붙어 갈라지고 있었다.
"이거 맞는 판단이라고 생각하세요?"
"몰라."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불리셨잖아요."
"그건 여름이 그런거고."
노직은 왈처의 품에 들린 화분에 짧게 눈길을 주었다. 시선을 눈치챈 왈처가 부드럽게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무엇이 그리 좋아 웃는지, 아니면 버릇인 건지 노직은 잠시간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겨울이 한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불렀던 이유는 추운 날씨가 사람의 감성을 얼게 만들고 이성을 굳히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은 사랑 없이 집행되는 철퇴가 지혜롭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겨울이 가장 혐오하는 것이 그런 것인 줄도 모르고.
가을은 제가 봄을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겨울과 봄은 그런 관계니까.
"마이클."
"… 갑자기 이름은 왜요?"
"봄, 못 찾았어."
그러니 그가 애타게 찾던 봄은 가을의 품 안에서, 여름의 열기 속에서 피어날 것이다. 눈가 아래에 맺힌 서리를 타고 붉은 피가 흘렀다. 백 년간 세계 전체를 덮고 있던 눈구름이 꼭대기 산으로 모여드는 것과 동시였다. 왈처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노직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탄신절이 끝나지 않은지 어언 오백 년이다. 이제 그들도 신의 생일을 보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피곤해서."
"이대로 주무시면 삼백 년은 못 일어나실 텐데요."
"봄이 깨우러 오면 일어나볼게."
"겨울!"
"쉬이, 가을. 잠들어있는 이들이 깨어나겠어."
겨울에게는 모든 일을 침묵하는 것으로 피하는 나쁜 버릇이 있다.
그래서 그는 저 스스로 입가 주변에 서리를 내려 숨을 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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