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료

[화산귀환/당보드림] 암향화연(暗香花燕)

01. 연심

*매화연 1화 이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일한 자캐 및 조연 언급주의.

*당보가 약관(20세)의 나이입니다.

*적폐 / 날조 / 캐해석 주의.

*두 사람의 대화 + 당보 시점으로 이어집니다. (유료입장) (2/2 유료분량 수정)

스윽. 스윽.

공연을 끝마친 서월은 품에 가진 비도를 손질하고 있다. 처음 이걸 받을 때만 해도 사람에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호신용으로 쥐어졌다지만 실전에 써 볼 기회가 있길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안 쓸 수 있는 게 가장 좋지만 사람 일은 어찌 되는지 알 수 없다는 걸 서월은 악단 생활을 통해 배운 점 중 하나였다. 손질하는 건 귀찮지만 서월을 꼼꼼히 비도를 닦고 날을 갈아 손끝으로 살짝 베어낸다. 핏방울이 맺히는 것도 잠시 흔적도 없이 상처가 아무는 걸 확인한다.

‘좀 더 깊이 베어봐야 하나. 그렇지만..’

더 깊이 베어본다면 보다 날을 확인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시간은 부족했다. 서월은 비도를 내려두고 입을 열었다.

“들어와도 된단다.”

“실례하겠소, 누님.”

서월은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제 대기실에 들어온 한 사내를 바라봤다. 간소화된 검은 무복. 꽃과 나비가 그려진 녹색 장포. 장포 아래 얼핏 보이는 거무튀튀한 손 끝. 허리까지 내려온 갈색 머리카락 위로 붉은 비녀를 말아 올린 사내가 서월에게 다가온다. 곱상해 보이지만 불길해 보이는 검은 손 때문에 쉽사리 다가가기 쉽지 않은 분위기의 사내라 경계심을 보일 법 함에도 서월은 사내를 보며 반가운 듯이 부드러이 웃는다.

“어서 오렴, 당보야.”

독과 암기를 다루는 사천당가의 소공자, 당보가 웃으며 서월에게 다가와 술병을 흔들어 보인다.

“오늘 공연도 수고했소, 누님. 날이 갈수록 춤 선이 날카로워지십니다?”

“그거 칭찬이니? 오늘은 뭘 가져온 거니?”

서월은 피식이며 당보가 가져온 술에 시선을 준다. 당보는 넉살 좋게 웃으며 제 팔 안에 서월을 감싸 안아 그녀의 머리에 턱을 괸다.

“당연히 칭찬이지요! 월하가인(月下佳人)의 춤 선이 예쁜 건 중원인이면 다 알 텐데 뭐 하러 뻔한 사실을 칭찬합니까?”

서월은 익숙한 듯이 작게 피식이면서 제 머리에 턱을 올린 당보에게 손을 내저은다.

“말이라도 못하면. 무거우니 머리는 치워라.”

당보는 고개를 들어 보다 제 품에 쏙 들어있는 서월을 내려본다. 방금까지 공연했던 사람답게 앳되고 청아한 얼굴이 화장을 통해 훨씬 성숙하고 화려해져 있다. 항상 하나로 땋던 감색 머리가 빗질을 통해 장인이 다듬은 흑요석처럼 반질이다. 당보는 제 손끝 만큼이나 짙은 서월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감아본다.

“오늘은 이 당보가 특별히 당가의 술을 가져왔지요. 누님도 좋아하실 겁니다. 이거 어디 가서도 못 구합니다?”

서월은 눈을 깜박이며 당보를 보다가 고개 기울여 당보가 들고 있는 술을 받아들여 확인한다.

“당가에서 관리하는 걸 그렇게 가져와도 되는 거니?”

서월의 말에 재미가 없는지 당보의 표정이 심드렁해진다.

“안주면 뭐 어쩌겠습니까, 꼬우면 지들이 저보다 강하던가 해야죠.”

당보가 서월 너머로 그녀의 손을 겹쳐 잡아 술병의 마개를 딴다.

“그러지 말고 향 한번 맡아보시오, 누님. 마음에 들 거라니까요?”

뽁.

술을 막고 있는 마개가 열리면서 풍기는 과실향에 서월은 살짝 움찔거린다.

“..향미가 좋구나. 석류 향인가.”

당보는 히죽 웃으며 마개를 닫아낸다.

“바로 알아차리는군요. 안주가 있으면 좋은데, 누님 처소에 괜찮은 거 없소?”

“글쎄다. 시장에 가보면 괜찮은 게 있을 것도 같으니 화장만 지우고 같이 가볼래?”

서월의 제안에 당보의 입매가 진해진다. 서월의 머리카락을 손에 감으며 장난치던 기다란 손이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 맞추는 당보가 나직이 대답한다.

“물론 기다릴 수 있지요, 이따 뵙겠소 누님.”

**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언니들.”

“그래그래, 아쉽지만 우리끼리 연회에 갔다 오마. 선약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아 좋겠다. 나도 놀고 싶은데 일이나 해야 한다니.”

“단장님께 너도 허락받던가. 서월아, 정인이랑 노는 게 좋다고 너무 늦으면 안된다?”

서월은 뺨을 긁적이면서 머쓱인 미소를 짓는다. 당보와는 정인 사이라기보단 알고 가문 간의 교류로 알던 사이라 오래 봐왔을 뿐이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언니들이 못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가 제 공연에 찾아온 지도 그새 칠 년이 다 돼가고 있으니 말이다. 가문을 나오고 악단에 들어가 있다는 건 가족들 외엔 모를 텐데 어떻게 알고 왔는지 처음에 찾아왔을 땐 얼마나 놀랐던가. 그 뒤로 이렇게 당보가 찾아올 때면 언니들이 자리를 비켜줄 정도다. 서월은 웃으며 제 또 다른 가족에게 웃어 보인다.

“하핫, 너무 걱정 마세요. 다녀올 언니들을 위해 제가 술도 사놓을게요.”

“오, 그건 환영! 역시 우리 막내밖에 없다니까.”

“그럴 필요는 없지만... 신경 써줘서 고맙구나, 아쉬움은 덜어지겠어.”

“끝나면 단장님이 술을 사주겠지만 서월이가 사주는 거면 더 각별하지.”

제각기 미소를 띤 여인들이 서월을 향해 인사하고 발걸음을 돌리자 서월 역시 걸음을 뗀다. 화장을 지우고 피풍의로 머리까지 뒤집은 서월은 주변을 둘러본다.

‘이 주변 어딘가에 있을 텐데.’

서월이 두리번거리는 사이 제 뒤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니 서월은 몸을 돌려 제 등에 닿으려는 손을 잡는다.

“..기척은 내고 오래도.”

“이미 눈치채셨으면서 뭘 그리 놀라십니까?”

당보는 태연히 잡힌 손 그대로 서월의 손을 마주 잡는다. 서월은 작게 조소를 짓는다.

“일부러 연초냄새 풍기며 왔으면서. 뻔뻔하긴.”

당보는 서월의 옆에 걸으며 어깨를 으쓱인다.

“누님 앞에선 안 피우잖습니까. 같이 피워줄 꺼 아니면 잔소리는 넣어두시죠. 누님도 한번 어떻소?”

서월은 미간을 찌푸리며 작게 삐죽인다.

“맛없어서 싫어. 오래 맡으면 머리도 아프니까.”

악단에서는 의외로 연초를 피우는 이들은 없었지만 언니들과 연회에 따라갈 때면 좋든 싫든 연초냄새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높으신 분들은 식사자리에서 연초를 피우며 술을 기울이는 게 그들의 주도니까. 연회는 단순히 놀러 가는 게 아닌 일의 연장선이다. 그들의 호의와 협상을 통해 다음 악단의 공연 일정을 조율하고 후원을 받기 때문에 본래라면 서월도 가는 게 맞았다. 워낙 어릴 때부터 들어와서 이제까진 단장님이 연회에 데려가지 않았다.

방년이 되고 나선 연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연초를 오래 맡으면 두통이 오는 와중에 술도 잔뜩 먹어 숙취를 앓은 이후로는 서월은 자율적 참여가 되었다. 덕분에 이렇게 당보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생긴 거지만. 고생하는 언니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좋아하는 술을 사 가는 거다. 연회에서도 술을 드실 텐데, 술 사 간다고 좋아하는 걸 보면 참으로 음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단장님이 그들의 주량을 못 견디어 표사를 못 쓸 때도 있을 정도였으니. 저번 같은 일이 있는 이후 연회에 데려가 언니들의 주량을 조절하고 표사는 꼬박꼬박 쓰려하시니 좀 더 안전해질 거다. 자신도 방년이 지났으니 보다 일거리를 따기에 자신이 도움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서월은 제 옆에 걷는 당보를 바라본다. 얼굴을 보는 주기가 불규칙하다 보니 만날 때마다 달라지는 키가 신기했다. 처음 볼 때만 해도 자신보다 작은 동생이었는데 지금은 제 키보다 머리 하나는 차이 나서 고개를 올려다봐야 될 지경이다. 이제 약관이 된 사내가 저보다 훌쩍 커버리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시선을 느꼈는지 시장 구경을 하던 당보가 서월에게 고개를 돌린다.

“뭘 그리 빤히 보십니까? 저한테 반하셨나?”

당보의 농담에 서월은 피식 웃으며 그의 뺨을 밀어낸다.

“농담도, 키가 더 자란 거 같아 신기해서 봤다.”

당보는 씩 웃으며 고개가 절로 올라간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지금을 충분히 즐기시지요, 누님. 이보다 더 크면 누님이 꼿발 들어도 안 닿아질지도 모르는데.”

서월은 얼씨구? 하는 반응과 함께 당보의 팔을 끌어 잡는다.

“닿지 않으면 굳이 내가 쓰다듬을 필요도 없겠지. 오히려 네가 쓰다듬어달라고 고개 숙이면 모를까.”

서월의 말에 당보 역시 허? 하며 어이가 없는지 서월을 본다.

“참 나, 제가 뭐가 아쉬워서 누님한테 고개를 숙입니까?”

“이젠 나에 대한 예의도 말아먹겠다? 배울 만큼 배운 애가 건방져서는.”

서월이 당보의 뺨을 꼬집어 당기니 서월 쪽으로 고개 숙여진 당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야야야, 누님 아픕니다. 아프다고요! 손은 매우셔선..”

꼬집혀진 뺨을 문지르는 당보가 투덜이니 서월은 콧방귀를 한번 뀌고 먹거리를 둘러본다.

“저거면 그 술에 어울릴 거 같은데.”

서월이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돌린 당보가 고개를 기울인다.

“기름 뺀 돼지 머리살(豬頭肉)입니까? 괜찮겠군요.”

당보의 긍정에 서월은 상인에게 다가가 음식을 주문한다. 당보는 주문하고 있는 서월을 뒤에서 바라보다 제 손을 잡고 있는 서월의 손을 내려본다. 당가는 독을 다루는 만큼 자체적으로 연구하고 누구라도 직접 임상시험을 한다. 다만 해독하기에 따라 부작용으로 손 끝이 검어지는 건 흔한 부작용이었다. 당가 내에선 제 손에 신경 쓰지 않지만 바깥에선 불쾌감을 줄 수 있어 장갑을 끼는 게 일반적이지만 당보는 잘 끼지 않았다. 비도를 쓰기 둔감해지고 장갑을 낀다는 건 손속을 두지 않겠다는 건데 쓸데없이 경계심을 줄 필요는 없으니까. 손을 감추고 싶으면 소매로 가리면 되는 일이었다. 당가가 아무리 음습하고 사파스럽다는 말을 들어도 독 묻은 손으로 타인과 함부로 접촉하지 않는다는 상식은 있건만 누구라도 제 손을 보면 불쾌해하거나 경계하는 게 우습다.

허나 이 누님은 망설임도 없이 잡는다. 그 뿐만 아니라 제 손을 잡으면서 기운이라도 불어넣은 건지 시간이 지나서인지 처음보다 손 끝의 색이 옅어져 있다. 이 누님과 있으면 제 손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이 편했다. 자신을 배려해주는 건지 챙겨주는 걸 좋아하는 건지 몰라도 적어도 제게는 다정한 이였다. 계산을 마치고 포장한 음식을 받아낸 서월이 당보를 돌아본다.

“샀으니 이제 돌아가 보자꾸나. 술 사는 건 네가 좀 도와줘야겠다.”

당보는 익숙한 듯이 웃으며 서월의 손을 깍지 껴 잡는다. 서월은 술을 사도 문제없는 나이지만, 나이에 비해 훨씬 앳된 얼굴 때문에 구매하는 데 다소 까다로운 편이었다. 화장이라도 하면 덜하지만 화장한 얼굴로는 악단의 얼굴인 그녀의 정체가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때문에 당보가 찾아올 때면 그가 대신 구매하고 대금은 서월이 처리하는 식으로 구매를 한다.

“네네, 연태주면 되겠지요?”

서월은 제 손을 깍지 낀 당보의 손을 보다 자신도 마주 껴 잡아 발걸음을 옮긴다.

“차도 하나 살 거야. 숙취하시면 차를 찾으시니까.”

“그 술고래들이 숙취하는걸 본 적이 없는데 그게 필요합니까?”

당보는 희한하다는 듯이 서월을 보지만 서월은 한숨 쉬며 걱정스레 답한다.

“...언니들 말고 단장님한테 필요해. 단장님은 술 즐기시는 분이 아니란 말이야.”

서월은 제 언니들에게 할 말버릇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걸 따지기엔 그간 봐 온 그녀들의 주량을 익히 아는 서월은 난감한 미소를 짓는다. 당보는 금방 납득했는지 별다른 대답 없이 서월을 따라간다. 차와 술까지 사간 둘의 발걸음은 악단이 머무는 객잔으로 들어선다.

**

“네가 선구안이 있긴 한 모양이더구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서월은 피풍의를 벗어두고 가벼운 침의와 당보의 장포를 어깨에 덮고 술을 따라 기울인다. 당보 역시 술을 따르며 제 옆에서 칭찬을 하는 서월의 반응에 고개를 기울여 시선을 맞춘다.

“일전에 네가 준 비도 말이다.”

서월은 협탁에 올려놔 둔 비도를 가져와 당보에게 보여준다. 당보는 서월의 손에 들린 비도를 가져간다. 방 안에 켜진 등불에 날을 비추어 살피는 눈이 예리하게 빛난다.

“깨끗이 손질해두셨군요. 이 사부가 가르친 걸 잘 지켜주고 계셔 뿌듯합니다? 혹시 사용해봤소?”

확인을 끝낸 당보가 뿌듯한 듯이 웃으며 서월에게 다시 비도를 돌려준다. 서월은 비도를 돌려받아 다탁에 올려둔 채 사 온 안주를 젓가락으로 오물거린다.

“실전에서 말이지.”

서월의 말에 술을 마시던 당보가 멈칫 인다.

“……사람에게 써봤다는 말이오?”

“오해할까 봐 얘기하는데 죽인 건 아니야. 비도 하나로 사람 죽일 실력도 안되고.”

서월은 당보에게 안주를 내밀자 굳은 얼굴의 당보가 서월의 손을 잡아 안주를 받아먹는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가볍고 장난스레 웃던 얼굴에서 진지하게 서월을 보는 당보의 시선에 서월은 평온하게 시선을 돌려 술을 따라 마신다.

“이동하던 중에 습격이 있었단다. 내가 식수를 뜨러 자리 비운 틈에 산적들이 언니들과 단장님을 납치했었지.”

“관에 신고했습니까?”

서월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피식 웃는다.

“신고했지. 바로 하기엔 상황이 녹록지 않아 산채에 급습했지만.”

당보의 안색이 굳다 못해 차갑게 식어갔다. 미성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혼자 산채에 갔단 겁니까?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소?”

서월은 자신의 잔에 술을 비우며 기억을 더듬는다.

화재사건이 난 이후로 육 년이 지났다. 당보를 마지막으로 본 지도 비슷하게 시간이 흘렀다. 아직 어린아이고 그는 엄연한 당가의 소공자니 저 나름대로 바쁠 시기라 이렇게 술을 기울이며 대화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당장 관을 부르기엔 마을에서 많이 벗어나 있던 거리였어. 갔다가 돌아왔으면 그들도 눈치챘을 거다. 노린 건 나였으니까.”

“그걸 알면서..!”

울컥한 당보가 소리치려다 뿌득 입술을 깨문다.

서월의 판단은 신속했다. 자기 때문에 납치된 인질이 있다면 가능한 빨리 협상을 해야 하는 게 순서니까. 그렇지만 무슨 위험이 있을 줄 알고 혼자 무모하게 산적을 상대하러 갔단 말인가. 당가 사람도 아니고, 하다못해 무인도 아닌 이가 혼자 사파소굴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그걸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 남일 얘기하는 듯한 태도는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감정을 삭히기 위한 탄식을 내뱉는 당보가 팔에 관자놀이를 괴어낸다.

“……누님, 제가 몇 번이고 얘기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누님의 안전입니다. 무뢰한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다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게 강호에요. 아시잖습니까.”

“알지. 그렇지만 너도 알지 않느냐.”

서월은 느릿하게 당보에게 고개를 기울인다. 제비꽃 눈동자가 느른히 웃으며 다탁에 올려진 비도를 당보에게 날린다.

콰득.

당보의 머리카락 몇 가락이 잘리면서 벽에 비도가 박힌다. 당보는 자세 그대로 제게 비도를 던진 서월을 바라본다. 당가 사람에게 비도를 날리는 건 목숨을 건 도발이나 다름없지만 이 누님은 알고 있다. 자신이 그녀를 절대 해칠 수 없다는 것을. 평범한 양민처럼 지내는 거 같아도 이 누님이 저와 같은 세가의 소공녀라는 걸 도도한 눈빛에서 잘 드러난다.

“이 당보의 제자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서월은 웃으며 흘러내린 당보의 머리카락을 쓸어 귀에 걸어준다. 귓바퀴에 작게 피가 묻어나 있자 손가락으로 훑어 기운을 불어넣자 서월의 손 끝에서 청아한 기운이 피어나다 상처가 깔끔히 사라졌다. 서월은 제 손가락에 묻은 피를 작게 핥아낸다.

“더군다나 너는 내 체질에 관해서도 알고 말이지. 아무리 내성을 기르는 훈련이라지만 독주 가져오는 너도 제정신이 아니라니까.”

서월은 이해가 안된단 듯이 고개를 저으며 독주를 잔에 쪼르륵 따라낸다. 백색 잔에 담긴 투명한 술에 달빛이 비추어 달을 담아낸 것만 같다. 서월은 잔에만 옅게 풍기는 과실향에 쑥 마시면서 혀에 남는 잔향을 느리게 코로 내쉬어본다.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과 별개로 감각이 몽롱해지고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제법 독한 독주인 모양이다. 당보는 술을 기울이는 서월의 손을 붙잡아 술잔에 물을 따라준다.

“…거 아무리 누님이 내공이 많아 회복이 빠르다고 계속 마시다간 몸에 무리갑니다. 혼자 다 마실 생각입니까? 저도 좀 주시죠.”

서월은 자기 잔에 물을 따라놓고 술을 달라는 당보의 반응에 허, 하면서 보다가도 순순히 당보의 잔에도 술을 따라준다.

“내 말 알아들었니? 술 가져올 거면 독 먹고 온 날엔 독주 말고 그냥 술이 낫다는 거다, 말 안 듣는 미친놈아. 차라리 차를 가져오거나.”

서월은 당보 이마를 주먹으로 콩 두드린다. 서월의 말에 당보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 독주를 집어 제 쪽으로 가져온다.

“…진짜 독주입니까?”

서월은 당보의 반응에 멈칫 이더니 곧 황당하단 얼굴을 짓는다.

“……그건 무슨 말이니, 너 몰랐어?”

“저도 이제 약관이 됐으니 장로 방에 있는 향이 좋고 하나밖에 없길래 챙겨온 건데 이게 내성을 기르기 위한 독주(毒酒)란 말입니까? 이 새끼들 독에 미쳤나?”

당보는 본인도 황당한 듯이 술병을 보고 있으니 서월은 기가 막힌단 듯이 당보를 본다.

“………가문 꼴 잘 돌아간다.”

서월은 흐린 눈으로 술을 기울이고 있으니 정신 차린 당보가 서월의 잔을 뺏어낸다.

“아니, 그럼 누님은 그걸 알고도 마신 겁니까? 지금 몇 잔을 드신 겁니까, 당장 내놔요.”

서월은 순식간에 잔을 뺏기자 깜박이며 손을 내려보다 고개를 돌려 당보를 바라본다. 당보는 서월의 희번득해진 눈빛에 흠칫인 순간, 서월은 당보에게 다가와 거칠게 잔을 뺏어내 당보의 멱살을 잡는다.

“..소공자란 새끼가 예의가 부족하구나. 감히 남의 잔을 뺏기도 하고. 우리 언니들도 안 하는 짓인데 배울 만큼 배운 새끼가 주도를 어겨?”

사근하던 목소리가 섬뜩하고 나직하게 귓가에 울린다. 술잔을 손에 쥐어 그를 바라보는 청초한 얼굴에 서린 미소가 고아하다. 당보는 서월의 시선을 회피하며 반항할 의지를 잃은 사람처럼 양손을 들고 식은땀을 흘린다. 당황한 마음에 손부터 나가서 막아냈지만 잊고 있었다. 이 누님은 평소엔 사근사근하지만 화나면 당가 어르신들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하…하... 제...제가 주제넘었습니다, 누님..…”

서월은 전혀 웃지 않는 눈으로 당보를 내려보다 손에 들린 술을 비워낸다. 다탁에 잔을 내려놓고 멱살을 쥐어낸 손이 느릿하게 풀린다. 기세가 누그러진 서월의 태도에 당보가 슬쩍 시선을 돌리니 제 품에 머리를 기대있다.

“...서월 누님?”

당보는 제게 기대있는 서월의 허리를 감싸 보다 편하게 기대게 하여 흘러 내려온 감색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제비꽃 눈동자가 몽롱해진 게 눈에 보였다. 잠에 취한 모습과도 비슷하지만 가느다란 목에 파란 핏줄이 턱까지 돋아진 중독 증상에 당보의 얼굴이 굳는다. 서월이 걸치고 있는 장포 소매에서 급히 해독약을 꺼내 서월의 턱을 잡는다.

“..실례하겠습니다, 누님.”

당보는 제 입에 해독제를 작게 씹어 서월과 입 맞춘다. 서월은 흠칫 이며 놀란 마음에 당보의 옷자락을 잡지만 기다란 손이 서월의 목덜미를 감싸낸다. 당보의 혀가 서월의 입에 비집어 해독제를 넘겨내 입이 떨어진다. 목덜미를 감싸던 손이 턱을 감싸 서월의 입술을 엄지로 지긋이 누른다. 이윽고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문질러 달래듯이 서월의 귓가에 속삭인다.

“삼켜드세요, 해독제니까.”

여전히 놀란 서월은 삼키도록 유도하는 손길에 목울대를 꿀꺽이며 삼킨다. 시선을 좁혀 목울대가 움직인 걸 확인한 당보는 문지르던 손을 멈추면서 그대로 서월을 품에 끌어안고 한숨을 내뱉는다.

“하아...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습니까. 제가 주도를 어긴 것보다 누님이 중독되는 게 더 큰 일이라고요.”

점차 정신이 돌아온 서월은 자신이 중독될 뻔한 사실에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당보를 다독인다.

“……미안, 걱정 끼쳤구나.”

당보는 제 품에 안정적으로 뛰고 있는 온기에 진정해가곤 서월의 팔을 붙잡는다.

“정말이지…안전에 얘기한 지 일 다경도 안됐는데 이리 심장 떨어지게 만드는 건 누님밖에 없을 겁니다. 독주인 거 아신 분이 왜 마신 겁니까? 죽고 싶어 환장했소?”

이건 짚고 가야겠는지 단호히 묻는 당보의 말에 서월은 시선을 내리 깐다.

"..넌 먹고 왔잖아."

“예?”

“이미 독 먹고 온 애한테 독주를 먹일 순 없잖아.”

서월의 대답에 당보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관자놀이를 짚는다. 언짢음이 가득한 목소리로 서월에게 확인차 묻는다.

“그러니까... 저한테 독 먹일 수 없으니까 독주를 누님이 다 드시려 했단 겁니까?”

서월은 자기가 말하면서도 민망한지 뺨을 긁적이며 당보 눈치를 본다.

"..다 먹으려던 건 아니었는데 향이 내 취향이라 좀 더 욕심냈지. 해독도 시간 지나면 될 거니…까."

당보는 열이 뻗치는지 표정이 험악해진 채 서월을 바라보다 머리를 벅벅 헝클어 잡는다.

“…절 말려 죽이실 건지 속 타게 죽이실 건지 하나만 고르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래서 걱정 끼쳐 미안하다니깐.”

당보의 한숨이 짙어지니 서월의 표정이 머쓱해진다. 그는 서월을 보다 그녀의 술잔을 잡아 물을 따라낸다. 당가가 독을 먹는 훈련을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 독 먹는걸 걱정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자신의 탓도 있었다. 그게 훈련용 독주일 거라곤 생각 못했으니까. 아무리 제 가문이라지만 독에 정도껏 미칠 것이지 자신마저 속을 만큼 향미 좋은 독주를 개발했을 줄은 예상외였다. 제 오판이 그녀까지 위험하게 했다는 사실에 이 이상 화내면 이 술자리가 엉망이 될 거다. 이제야 맘껏 그녀를 보러올 수 있게 됐는데 그래선 곤란했다. 당보는 물로 채워낸 술잔을 서월의 입가에 가까이 가져다준다.

“물이나 좀 드시죠. 잔에 향이 남아 희석해서 마신 기분은 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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