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두지 않고(下)
사람은 죄 아래에 죄를 둔다
그리하여 기라바니아 산악지대.
알라기리에 도착한 일행을 제일 먼저 반긴 것은 자나이로였다. 그는 이제나 저제나 그들을 기다렸던 것처럼 에테라이트 근처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도착한 것은 닌자였고 낯선 이를 보자마자 자나이로는 그를 덥석 붙잡고 학자의 행방을 물었다.
“학자님 일행이시죠……! 학자님은요?”
“곧 오실겁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 그게…….”
양반은 못 되는지 자나이로가 설명을 시작하기도 전에 학자는 에테라이트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전 과로 탓인지 안그래도 피곤한 낯이 훨씬 그늘져 있었다. 뒤이어 짐을 들고 온 전사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무도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닌자님은 오기 전에 얘기한 대로 바로 알라기리 바깥에서 대기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근데 저 지도 놓고 왔어요.”
“…제가 출발 전에 가지고 오라고 했잖아요. 이거 여분이에요. 그리고 무도가님은 초코보 관리인에게 초코보 두 마리 빌려주세요. 넌 투사님들 도와서 마차 준비해.”
닌자는 여분 지도를 받자마자 빠르게 알라기리 바깥 경계로 사라졌고 전사는 가져온 짐을 바닥에 내려두고 이것저것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전에 왔을 때처럼 무겁진 않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필요한 물건들이 있긴 했다. 각자가 배분 받은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빠르게 흩어졌고 학자는 임무를 시작하기 전 의뢰서를 확인하려는 듯 전사가 가방에서 꺼낸 의뢰서를 받아들었다. 자나이로는 의뢰서를 훑어보고 있는 학자에게 머뭇거리면서 운을 뗐다.
“학자님… 그 포로 수송 말인데요.”
“말씀하세요.”
“포로 중 한 명이 원래 병을 앓고 있었는데 오늘 점심쯤부터 심하게 앓아서요…….”
“그래서요?”
대답은 차갑게 떨어졌다. 학자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자나이로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의뢰서를 훑었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손이 멈췄다. 전사는 그가 부러 심드렁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포로들이 랄거의 손길에 도착하기 전까지만이라도 의사가 돌봐줬으면 한다고 해서요.”
“아, 네…….”
의뢰서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질도 나쁜 낡은 종이 가장자리가 기어이 구겨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안 그래도 어두운 낯이 잔뜩 구겨졌다. 눈앞이 어지러운 듯 뱅글 돌았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는데 전신에 피로가 달라붙은 듯 몸이 묵직했다. 그는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그는 표정을 숨기는 것도 잘 못했고 기분이 언행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지만 일하는 자리에서 의뢰인에게 화를 낼 정도로 어리석진 않았다.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혀왔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 병사들이 원망스럽지 않아요? 저라면 그냥 병 나서 잘됐고 콱 뒤져버렸으면 할 것 같은데요.”
“물론 그렇지만… 제대로 심판 받았으면 해서요.”
학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을 깬 것은 전사였다. 그는 가방을 뒤적이다 말고 일어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건 우리가 의뢰받지 않은 내용이야. 그리고 이 녀석은……”
학자는 뭐라고 덧붙이려고 하는 전사를 막았다.
“알겠어요. 제가 마차에 같이 타면 되는거죠?”
“야!”
“내가 마차 준비 도와달라고 했잖아. 시간 없으니까 빨리 가서 해.”
밑이 시커먼 눈이 초점 없이 서류를 훑었다. 더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전사는 괜스레 못마땅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다 결국 짐을 들고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안엔 함께 갈 해방군 투사들이 부지런히 수송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과연 결박된 포로들 중에서 얼굴이 새파랗게 된 휴런 한 명이 있었다. 그들은 며칠 전 왔을 때보다 초췌하고 파리해진 낯으로 문을 열고 들어 온 전사를 보고 있었다. 그 몇 쌍의 눈에 깃든 것은 여지 없는 고통과 끝없는 절망이었다. 명백하게 누군가를 기대한 듯한 눈은 실망으로 떨어졌다. 그야 그렇겠지. 그들이 기다린 건 제가 아니었을 테니까. 자나이로에게 의뢰서를 받을 때 전사는 그들이 알라기리를 습격하기 전 몇 차례나 알라기리에 식량과 약을 구걸하러 왔다는 것을 들었다. 특히 아픈 사람이 있다며 도와달라고 간절히 애원했던 적이 많았다던가. 그게 잘 되지 않자 처음엔 도둑질을 했고 경계가 강화되어서 절도가 어려워지자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폐허에 시체가 늘어나고 감금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 사람들을 인질로 수차례 약탈이 일어나다 기어이 이번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숙소 터에 있던 숱한 시체들을 알라기리로 직접 옮기며 생각했다. 그들은 항상 이 황량한 기라바니아 대지에 구세주처럼 나타 날 의사를 기다렸을 것이다. 모르는 이라도, 그것이 설령 적이나 죄인이라고 할 지라도 의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어주는 그런 살신성인을 바랐을테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의 벗은 군의일지언정 박애주의자는 아니었다. 살려야 할 사람들만 살리는 것만이 허락된 분수도 모르고 제 눈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려고 하는 바보같은 사람에게 더 이상 연민을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문득 짜증이 치밀었다. 가끔은 이 세계가 악의를 가지고 그를 이용하려 드는 듯 했다. 다 알면서도 스스로를 얽매는 것을 보다 못해 그 선을 잘라주려고 하면, 자존심에 못 이겨 기어이 목을 매달더랬다. 그것이 부아가 치밀어도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써 모른 척 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준비는 알라기리 측에서 대부분 마쳐둔 후였기에 전사가 할 일은 포로를 수송 차량에 싣는 일이었고 준비가 되는대로 마차는 해방군 투사 몇몇과 함께 알라기리를 떠나 험난한 산악지대를 달렸다. 초코보를 탄 전사가 가장 선두에서 길을 밝히고 그 뒤를 마차가 따라갔다. 그리고 무도가는 마찬가지로 초코보를 탄 채 주위를 넓게 돌며 이동했다. 그 행렬에서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움직이는 그림자가 닌자였다. 그는 미리 전달 받은 곳곳의 주요 지형지물들에 몸을 숨기며 일행을 미행했다. 마차 안에 학자가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모든 일이 전부 다 처음에 정해진 대로였다. 그는 물자 수송용 차량에 포박된 포로들과 함께 탑승하여 이동했다. 수송 과정은 순조로웠다. 수송 차량과 해방군 투사들은 비행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육지를 통해 빙 둘러 가야 했다. 마차는 예정했던 대로 알라기리를 떠나 백귀암 벌판을 달려 변방지대로 이동했다. 그리고 마차는 첫 번째 다리인 카스텔룸 벨로디나를 향해 비르잘라 건곡을 달렸다.
“전사님! 이대로 다리를 통과하면 될 거 같아요.”
“알겠어.”
“아르파 국경경비대에는 저희가 이미 얘기를 마쳐 두었으니 바로 지나가면 됩니다. 그곳에 문을 관리하는 위병이 있는데 얘기 하면 문을 열어줄겁니다.”
속도를 내려고 전사가 고삐를 다시 쥔 그때 사건은 일어났다. 공격대 공유 링크펄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마차에 있을 학자의 목소리였다.
“학자?!”
“학자님!”
그리고 뒤이어 잔뜩 갈라지고 쉬어버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너 때문에, 우리 모두의 희망이 짓밟혔어……. 그 가증스러운 새끼들을 전멸시키려고 했던 우리들의 계획이! 네가 이 땅에 오는 바람에!”
동시에 주파수를 잡은 링크펄은 한 번 지직거렸다. 전사는 다리로 가려던 초코보를 급히 돌려 세웠다. 마차에서 조금 떨어져 이동하던 전사보다 먼저 무도가가 도착했고, 무도가가 초코보를 세운 그 순간에 마차에서 학자가 굴러 떨어졌다. 빠르게 달리던 마차에서 떨어진 반동으로 황야를 한참 굴러가던 학자는 땅에 박힌 바위에 부딪히고 나서야 멈췄고 그가 지나간 자리마다 검붉은 혈흔이 떨어져 혈로(血路)를 만들었다. 다급히 그를 쫓아 달려가던 무도가를 잡아 세운 것은 학자였다. 굳이 링크펄로 듣지 않아도 충분히 큰 목소리로 그는 무도가를 향해 소리쳤다.
오지 마세요! 그 녀석들 도망치지 못하게 해요, 빨리!!
말마따나 마차 위엔 어떻게 한 것인지 포로 한 명이 손목의 결박을 풀고 무기를 손에 쥔 채였다. 무도가는 초코보를 탄 채로 차크람을 쥐어잡았다. 비대칭으로 날아간 차크람은 해골부대 병사의 손을 정확히 가격했고 그 무기가 날아가 땅바닥에 박힌 순간에 정확히 그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마차에 남아 있는 것은 병약한 휴런 한 명 뿐이었고 나머지 포로들은 마차가 멈추자마자 뛰쳐내려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전사님! 굽어보는 바위 쪽으로 포로들이 도망쳤어요……!”
“나도 알아!”
급하게 방향을 바꾼 초코보는 다리의 3시 방향에 있는 거대 에테라이트를 향해 도망치는 포로들을 맹렬하게 쫓아갔다. 초코보에 바짝 붙은 채 추격하던 전사는 거리가 좁혀지자 초코보 등에 발을 붙이고 선 채 낮게 몸을 숙였다. 포로들의 앞에 번개가 꽂힌 순간에, 전사는 도끼를 쥔 채 높게 도약해 공중을 빙글빙글 돌며 바닥을 쿵 찍어 내렸다. 달리 누군가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도끼가 박힌 바닥은 금을 내며 갈라졌고 이내 허연 연기가 조금씩 올라왔다. 삽시간에 사방이 조용해졌다. 근처 바위 근처에 있었던 닌자 역시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굽어보는 바위로 가는 길엔 수리검과 기묘한 보랏빛 불꽃으로 가는 경계가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 뒷편으로 기절한 채 묶여있는 두 휴런이 있었다. 뒤쫓아 온 전사와 닌자가 인으로 맺은 뇌둔술에 길이 막혀 멈춰 선 포로들은 두 사람을 알아 본 듯 이름을 불렀다.
“마르게티! 엘라…!”
“닌자. 그 사람들은 뭐야?”
“거수자요. 거동수상자.”
닌자는 거수자가 뭐냐는 질문을 듣고 싶진 않았는지 구태여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리고 이름을 부르며 아는 체 하는 포로들에게 한 번 눈길을 주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서로 아는 모양인데요. 역시 막길 잘했습니다.”
뒤따라 온 해방군 투사들이 망연자실한 표정의 죄인들을 다시 묶곤 마차로 옮겼다. 상황이 어느정도 정리되고 나서 전사는 닌자와 함께 마르게티, 엘라라고 불린 두 휴런을 마차에 함께 옮겼다.
“아무래도 저 포로들과 접선해서 굽어보는 바위 방향으로 달아날 계획을 세운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지형이 이런 모양이니 추격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지 비행 가능한 탈것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탈것은 어딨는데?”
“제가 풀어줬는데요?”
닌자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마차에 휴런 여성을 거칠게 밀어 넣었다. 그 짧은 사이에 마차 안은 누구 것인지 모를 피가 엉겨 붙어 난장을 이뤘다. 사실 그들은 그게 누구의 피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호위’였으므로 함부로 포로들의 몸에 손을 댈 순 없었다. 설령 적대적인 대치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전사는 어지러운 마차 안을 잠시 훑다 이어서 나머지 휴런을 마차 구석으로 실어 넣으며 링크펄을 울렸다. 어쨌든 다른 일보다도 걱정되는 게 있었다.
“무도가. 학자는? 괜찮아?”
“그게… 피가 안 멈춰요…… 학자님, 괜찮으세요?”
“전…… 괜, 찮아요. 그냥 마차 출발 시켜요.”
“야, 너는. 그럼 여기 그냥 두고 가라고?”
“난 텔레포 타고 가면 돼. 그리고… 도착하면 입구에 기다리는 투사 분에게 인계하고… 메나고 씨한테 이 서류를 제출, 윽……!”
앓는 소리가 링크펄을 통해 잠깐 들렸다 이내 툭 끊어졌다. 전사는 저를 쫓아 온 초코보를 타고 혈로를 따라갔다. 멀리도 굴러갔는지 피로 된 길은 한참이고 이어졌다. 그 끝에 안절부절 못하는 무도가와 주변을 배회하는 노란빛 초코보, 그리고 바위에 기댄 채 앓는 학자가 있었다. 닌자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전사를 잠시 바라보다 도대체 어디서 데려 온 것인지 모를 가젤 위에 올라탔다.
“가죠. 저 분들은 곧 오실겁니다. 무도가님! 저 혼자선 힘드니까 같이 가주세요.”
그리고 그는 전사의 자리를 대신해 마차의 선두에 선 채 달려갔다. 처음보다 더 무거워진 마차는 마저 출발하여 카스텔룸 벨로디나를 향해 갔고, 다 구겨진 서류를 든 채 남겨질 두 사람과 떠나는 닌자를 번갈아 쳐다보던 무도가는 먼저 가라는 전사의 말에 곧장 초코보에 탄 채 뒤따라 출발했다. 아무것도 없는 비르잘라 건곡에 두 사람만이 우두커니 남겨졌다.
“뭐하냐. 빨리, 가라니까…….”
“허이구. 난 기라바니아 길바닥에 친구 팽개치고. 넌 환자 보려다 길에서 객사하고. 팔자 한 번 좋은데, 우리.”
“…난 텔레포로 가면 돼. 그리고 요정 부를 에테르만 돌아오면…….”
“평소에도 에테르 멀미하는 놈이 지금 상태에서 잘도 텔레포로 이동하겠다.”
전사는 몸을 비틀다 결국 바닥에 쓰러진 작은 라라펠 옆에 몸을 숙이고 앉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잔뜩 웅크린 몸을 천천히 젖히며 상태를 확인했다. 여전히 다 멎지 못한 피가 바닥으로 뚝 뚝 떨어졌다. 허리 부근을 찔렸는지 복부가 온통 만신창이였다. 학자는 원망 섞인 눈으로 전사를 쏘아봤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눈만큼은 잘도 움직였다.
“이럴 땐 지는 척이라도 좀 해라.”
전사는 그대로 학자를 두고 일어서더니, 도끼를 전방으로 몇 번 돌리곤 그 끝을 학자의 바로 앞에 쿡 박았다. 도끼 끝이 작은 소리를 내며 땅에 박혔을 때 녹색 빛이 학자를 감쌌다. 왠지 따듯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분노였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벗을 무자비하게 상처 입히는 세계의 적의에 대한 격노였다. 그는 그 분노를 치유의 힘으로 바꾸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학자를 둔 채 땅을 박차고 달려가 주변의 마물을 있는대로 사냥하고 다녔다. 그가 날뛰면 날뛸수록 신체에 스며드는 기묘한 기운이 있었다. 상처는 조금씩 아물었고 눅진하게 늘어진 몸에 기운이 돌아왔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도 생기가 돌아왔고 작게 앓으며 뱉었던 거친 호흡도 조용히 멎어갔다. 몸에 힘이 돌면 돌수록 반대로 의식은 멀거니 희미해져갔다. 그것은 분명,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감 때문이겠지. 그는 전사가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올 때까지 버티지 못하고 초코보 발치에 옆으로 쓰러진 채 잠들었다. 그 몸을 덮을 것 하나 없었는데도 따듯하고 포근했다. 그는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멀리 붉게 빛나는 어떤 궤적을 따라서, 이 몸에 스며들고 있는 다정함 때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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