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XIV

이름

사무라이(Samurai)

폐허 by 필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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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DOES-Shura

성지 골모어 대산림을 지키는 숲의 수호자들이 있다. 그들은 라바 비에라라는 이름의 비에라 부족인데 으슥한 숲 속에 스며들어 그 어떤 자도 숲에 허락 없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든다. 라바 비에라 여성은 일반적으로 고향에서 전통을 지키며 지내지만 남성은 성인이 되었을 때 고향을 떠나 유랑한다. 소년은 그 밀림을 한참 전 떠나 작은 숲에 정착하여 홀로 지내는 라바 비에라 남성의 거주지에서 자랐다. 소년은 일찍이도 마을을 떠났고 성별이 확정되기도 전 그를 스승으로 삼아 섬기며 지냈다. 스승으로 삼았던 비에라는 레흐 질다 성씨를 가진 라바 비에라였다. 마을의 성씨도 버리고 부모가 준 이름 역시 싫었던 소년에게 그는 제 성씨를 내려주었다. 레흐 질다가 소년을 축복했던 말은 이제도록 그의 가슴에 박혀 있었다.

Rehw에 불Gilda이 일어나니 이는 곧 검이 된다.

그는 늙은 사무라이였는데 외날검 한 자루로 참으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그는 커다랗고 단단한 수박도 단칼에 잘라냈고 검기만으로 맹수를 쫓아낼 수도 있었다. 작은 들짐승들은 그를 잘 따르곤 했고 맹수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함부로 숲에서 함께 살아가는 자들을 해치지 않았다. 그가 검을 들면 함부로 그들의 영토를 침입하려고 했던 자들도 황급히 달아났고 검을 닦거나 갈고 있을 땐 아무도 그를 범접하지 못하는 아우라(Aura)가 일어났다. 소년은 그를 동경하여 검을 배우고 싶었으나, 스승은 살아 생전 소년이 검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고 당신이 죽을 적에도 소년에게 그 칼은 곧 죽을 자신과 함께 묻어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세상과 닿을 수 있었던 유일한 존재를 보낸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스승과의 약속을 어겼다. 소년은 매일매일 그 칼을 숫돌에 갈고 기름칠하며 고운 천으로 닦았다. 어깨 너머로 항상 지켜봤던 몸놀림을 따라하려고 해도 스승은 그에게 지침 하나 남기지 않았기에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제법 그 생활을 즐겼다. 스승과의 약속을 어겼다는 죄책감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았다. 그는 항상 칼을 차고 다녔고 보물처럼 여겼다. 스승은 이미 늙어 죽었지만 여전히 함께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칼에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소년이 마침내 성인이 될 무렵 고향에서 불순한 의도로 숲을 더럽혀 쫓겨난 이단자들이 그의 숲에 왔었다. 그와 스승이 생활했던 숲에 불이 일어났을 때 처음으로 그 검에 검기가 일었고 소년은 숲의 저 끝에 선 채 분노의 불길을 검에 실어 침입자들의 목을 남김없이 잘라냈다. 허나 그들이 죽었다고 할 지언정 이미 숲은 전부 타버렸고 소년과 레흐 질다가 생활했던 작은 오두막집 역시 재만 남은 채 사라졌다. 문득 소년은 그리도 아끼고 사랑했던 검이 참으로 미워졌다. 지켜내지 못한 것만이 발치에 맴돌고 베어낸 자들의 비명이 귓가에 메아리쳤다. 그는 홀로 딛고 있는 대지도, 사그라들지 않는 이 화염도, 스승의 검에 남의 혈흔을 묻힌 것도 싫었다. 생명력으로 가득했던 그 숲에 살아 있는 것은 소년 말곤 아무것도 없었다.

대화재가 일어나고 동족들이 사태를 살펴보러 몰려오는 것이 싫었던 소년은 하루 정도 레흐 질다의 무덤 곁을 지키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숲을 떠나며 스승이 축복했던 성씨를 버렸다.

소년은 부모에게 받은 이름을 버리면서 혈연을 끊었고 마을의 성씨를 버리며 동족을 떠났다. 그리고 유년기 동안 지냈던 숲을 떠나면서 소년으로서의 자신을 오사드 어딘가에 버렸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소년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쿠가네였다. 그곳은 폐쇄적인 동쪽 나라에서 유일하게 외부와 닿을 수 있는 항구 도시였다. 남들에게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 비에라 남성을 둘러싼 이상한 소문들이 한동안 시오카제 정에 오르내렸다. 그 도시에서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방식은 화차(火車)였다. 그것은 시오카제 정에서 그가 항상 마셨던 사케의 이름이었다. 그는 낮에는 방탕하게 생활하는 한편 밤에는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 다녔다. 진창에 들어가 구르기도 하고 때로는 중요한 물건을 훔쳐내기도 했다. 필요하다면 거리낌없이 사람도 베었다. 한 번 해내고 나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가 사람을 벨 때 일어나는 검기의 모습이 빛나는 초승달과 같았기에 그때 그를 부르는 이름은 월광(月光)이었다. 그리고 돌연듯 그는 쿠가네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질 때 동방 나라에 이전엔 오지 않았던 눈이 내렸고 때 아닌 겨울바람이 거세게 불었다는 설화가 몇 년이고 구전되었다. 그래서 그 후에 그를 부르는 이름은 설풍(雪風)이었다. 낮의 그는 화차였고, 밤의 그는 월광이었으며 떠났을 때 그는 설풍이었다. 사람들은 그 세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는 이미 이름을 몇 번이고 버렸기 때문에 저를 부르는 이름이 세 가지나 되더라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거리의 방탕아를 뒤에서 몰래 손가락질하고, 그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절명하고 들을 이도 없어진 이름을 불렀을 뿐이니까.

월광이라는 이름을 얻고 수십 년 간 그는 제법 부유해졌지만 어차피 그가 아는 것은 돈과 세월을 낭비하는 방법 뿐이었다. 그는 제 자신의 신변을 알아보는 이들을 입막음한 뒤 울다하로 떠났고 그곳에서도 비슷한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마흔이 넘는 나이에 모래늪에서 할 일 없이 죽치고 있든지 부유한 자들이 가는 오락 도시 골드 소서에서 술을 마시며 놀았다. 때론 광장에 앉아 춤추는 여인을 구경하거나 뒷골목에 앉아 노름을 했다. 검을 항상 차고 다닌 탓에 칼잡이라는 멸칭으로 불렸지만 검을 뽑는 일은 없었다. 그는 언젠가부터 검이 지긋지긋해졌다. 그의 스승은 검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그리도 많았다. 레흐 질다에게 검은 베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제 자신을 온전히 집중하는 밝은 거울(明鏡)이자 타인을 비춰볼 수 있는 고요한 물(止水)과도 같았다. 그는 그것으로 자신을 지키고 타자를 돌봤다. 그것이 레흐 질다가 숲을 수호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를 스승이랍시고 따랐던 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무언가를 베는 것 뿐이었다. 레흐 질다는 검으로 무언가를 베는 일이 없었는데 그가 해왔던 것은 그저 남을 베어 상처 입히고 생을 앗아가는 것 뿐이었다. 그는 제 자신에게 넌더리가 나서 용병 일도 그만두고 그저 몇 년 간 번 돈으로 세월을 죽이고 재산을 탕진했다. 그리고 울다하가 지겹다며 충동적으로 그리다니아로 떠났다.

그는 그리다니아에 오고 굽은가지 목장에 정착했다. 그는 여전히 술에 빠져 지내고 목장 사람들에게 이상한 노름을 가르치거나 농땡이를 치는 등 행실이 영 좋지 못했지만 울다하에 있었을 때보다는 훨씬 활기차게 생활했다. 그는 여전히 자연을 사랑했고 숲을 그리워했으며 삼림에서 난 무엇 하나 허투루 여기는 일 없이 성실하게 목장 일을 도왔다. 그때 그는 초코보 관리인 따위의 이름으로 불렸다. 여전히 검은 뽑지 않았지만 매일 밤이면 초코보 축사 뒤편에서 조용히 돌에 칼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탓에 그 검은 이미 제 주인을 잃은지 삼 십 년이 넘었는데도 새 것보다도 날카롭고 예리했다.

칼을 다시 뽑게 됐던 것은 굽은가지 목장에 자리를 잡고 5년 정도 흐른 때였다. 가을 밤이었고 먼 이국에서 온 무뢰한들이 초코보들을 훔쳐 달아나려고 굽은가지 목장에 쳐들어왔다. 그때 그는 축사 뒤에서 검을 관리하고 있었고 초코보들이 우는 소리에 곧장 뛰쳐 나왔다. 소중히 돌봤던 초코보가 줄에 묶여 끌려가는 것을 본 순간 그는 격노에 휩싸여 수 십년 동안 휘두르지 않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분노가 형상화된 것처럼 불길이 검에 일어나 맹렬하게 타올랐다. 무아지경으로 날뛰고 난 후에 검은가지 목장 주변엔 뎅겅 잘린 이방인들의 목이 굴러다녔고 누군지도 분간 못할 정도로 난도질 당한 시체가 조각나 흩어졌다. 목장 관리인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는 남의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 그를 쳐다봤다. 줄줄 흘러내리는 핏속에서 노랗게 빛나는 눈과 마주친 것이 명백한 공포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쿠가네에 있었을 적 저를 죽이러 온 것을 깨달은 사냥감과도 같은 눈빛이었다. 그는 칼을 몇 번 돌리다 검집에 넣었다. 그렇게 날뛰었는데도 초코보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멀쩡했다. 그는 각별히 아꼈던 초코보를 한 번 가볍게 안아준 뒤 그대로 목장을 떠났다.

사건이 수습되는 데에도 한참이나 걸렸다. 쌍사단이 한동안 목장을 오가고 그리다니아 전체가 떠들썩 했지만 초코보를 구해 준 답례인지, 5년이나 함께 지낸 정 때문인지 그에게 혐의가 걸리진 않았다. 그렇게 2주일 정도 그리다니아를 뒤집고 난 후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그는 목장을 떠나고 갈 곳을 잃어 한동안 칼라인 카페에 신세를 졌다. 칼라인 카페에선 술을 팔지 않았기에 그는 약한 마약 효과가 있는 연초를 몇 종류 얻어 피고 다녔다. 그리고 바쁘게 우편을 담고 있는 배달부 모그리 옆에서 연초를 피다 미 케토 야외음악당에 공연을 하러 온 어린 비나 비에라 여성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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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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