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팬텀은 눈 앞에 놓인 기구들을 보고 저 멀리 등을 보이고 있는 실버애쉬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기구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긴 바늘 한 뭉치. 길이도 다양하고 끄트머리에 각기 다른 표식이 새겨져 있다. 그 음각을 손끝으로 매만지던 팬텀은 바늘의 생김새를 보고 바늘의 몸체를 조심스럽게 매만지기 시작했다. 일반 바늘과는 다르게 홈이 파여있다. 피가 흐
전편 몇 주간의 생활에서 실버애쉬가 팬텀에 대해 내린 관찰 결과는 생각보다도 간소했다. 이 청년은 절대로 먼저 발언하지 않으면서 또 절대로 먼저 몸을 보이지 않는다. 실버애쉬의 명령으로 팬텀의 방과 팬텀의 식사와 팬텀이 사용할 일상용품이 구비되었으나 식사는 언제나 버려지는 듯 했으며 일상용품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방에는 인기척이 없
전편 검은 고양이는 계속해서 실버애쉬를 따라다녔다. 그녀의 발끝에서 실버애쉬는 되도않는 경계심을 읽어냈지만 가볍게 무시하고 그녀가 발치에서 머물도록 하는 걸 허락했다. 노시스의 흰 옷에 털자국을 남기는 것을 보고 몇 번이나 내쫓김 당했지만 그녀는 기이할 정도로 다시 실버애쉬의 곁에 돌아왔다. 마치 지금의 주인은 팬텀이 아니라 실버애쉬라도 되는 것 마냥
전편 실버애쉬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려올라간다. 옆에 있는 사람도 동조하여 기뻐할 만큼의 감정을 드러내 보임에 팬텀도 덩달아 지금의 상황의 유쾌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도 같이 있어도 나는 좋다고 생각한다만.” “미안하지만, 파티 이후에는 해야할 일이 있다.” “암살인가?” “아니.” 실버애쉬는 그 이상으로 묻지 않았다. 그리고 팬텀의 거절에
전편 팬텀이 실버애쉬의 일처리에 대해서 관여할 부분은 하나도 없었다. 파티에서 입을 옷을 맞추고 기다리는 동안 실버애쉬는 당연하다는 듯이 초대장을 받아냈고 그 사실을 이야기 했으며 팬텀에게 그 어떠한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팬텀은 은신처에서 새로운 의상을 손끝으로 매만지면서 이대로 좋은지, 정말로 이렇게 지나가도 될 일인지 몇 번이고 반문했다. 자신이
전편 팬텀은 자신의 몸을 재고 있는 줄자가 뱀같다고 생각했다. 사르락사르락 움직이는 줄은 천천히 손목을 타고 팔 길이를 재더니 허벅지와 왜인지 알지모를 꼬리의 길이와 둘레까지 꼼꼼하게 재고 물러난다. 팬텀은 발목에 숨긴 나이프를 의식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요구받는데로 몸을 틀고 팔을 벌렸다. 재단사의 시선이 목에서 튀어나온 오리지늄 파편에 닿지만 아무런
전편 팬텀은 자신에게 암살을 의뢰한 자의 정보를 곧이곧대로 실버애쉬에게 고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받아들인 의뢰조차 아니었기에 죄책감이나 직업의 윤리의식 같은 건 전혀 의미가 없었다. 암살자에게 직업 윤리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놀라지 않는군.” “예측했던 바다. 그저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실버애쉬는 팬텀의 손에서 자
귀족사회에 있어서 예술은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아래 계급과 자신을 구분하기 위한 과시의 목적에서도, 귀족만의 은밀한 공통점을 공유하기 위한 수단의 목적에서도, 드물게 귀족이라는 위치에서 얻은 이익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지원의 목적에서도 그렇다. 그 때문에 실버애쉬는 귀족의 일원으로 빅토리아에서 유학을 할 당시부터 오랫동안 예술에 대한 관심을 아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