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초청3

실버애쉬x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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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팬텀은 자신의 몸을 재고 있는 줄자가 뱀같다고 생각했다. 사르락사르락 움직이는 줄은 천천히 손목을 타고 팔 길이를 재더니 허벅지와 왜인지 알지모를 꼬리의 길이와 둘레까지 꼼꼼하게 재고 물러난다. 팬텀은 발목에 숨긴 나이프를 의식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요구받는데로 몸을 틀고 팔을 벌렸다. 재단사의 시선이 목에서 튀어나온 오리지늄 파편에 닿지만 아무런 말 없이 신체 사이즈를 제어간다.

등 뒤에 있는 실버애쉬는 재단사와 팬텀을 간간히 바라보면서 쥐어쥔 디자인 북을 하나하나 팔랑팔랑 짚어내고 있었다. 팬텀은 이 모든 과정이 익숙하면서도 어색했다. 극단에서는 옷을 담당하는 재단사가 상시 있었다. 유랑 극단에는 굳이 필요없는 사람일지도 모르나, 크림슨 극단은 비극과 암살을 이면에 숨겨둔 단체였고 옷이 망가지거나 피로 더럽혀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매번 도시로 가서 수선할 수 없으니 당연히 극단에는 재단사가 있었다. 배우들의 몸을 줄자로 조이고 때로는 억지로 굶겨가면서 사람을 자신이 만든 작품에 맞춰 끼워넣는 존재. 그에게 매번 나체로 몸을 전시하며 허리를 좀 더 가늘고 나긋하게 만들라는 지시를 듣던 팬텀은 아무런 말 없이 물러가는 재단사의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면서 속으로 당황한 감정을 갈무리 해서 닫았다.

“팬텀.”

“무슨일이지?”

“어떤 옷을 입고 싶지?”

팬텀은 실버애쉬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다시금 당황스러움이 닫은 감정 사이로 새어나오는 것을 맛봤다. 팬텀은 극단의 주연배우였다. 배우는 주어진 의상을 걸치는 존재지 스스로 의견을 피력하고 어떠한 디자인의 옷이 입고싶다고 주장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 극단장의 관심을 듬뿍 받는 입장에서는 더욱 더. 보석은 자신이 어떤 벨벳 천에 감싸이고 싶은지, 어떤 보석함에 들어가고 싶은지 어떤 악세사리가 되어 어떤 옷에 달릴지 주장할 수 없다. 팬텀은 스스로의 옷태와 옷가지를 바랬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가만히 실버애쉬의 질문을 듣고 귀를 살짝 눕혔다.

“파티라면 정해진 드레스 코드가 있겠지.”

“그건 나 같은 귀족에게나 해당되는 거다. 너는 뭘 입어도 좋아.”

실버애쉬는 책을 닫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팬텀에게 다가온다. 이미 한 벌을 쫙 빼입은 필라인의 청년은 천천히 팬텀이 서 있는 장소를 가볍게 돌면서 팬텀의 몸을 살펴보았다. 팬텀은 그 눈빛이 퍽 익숙했다. 지금 저 자는 자신을 감상하고 있는 거다. 팬텀은 실버애쉬의 태도에서 익숙한 극단의 파편을 맛봤다. 그리고 실버애쉬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언제나 그랬던것처럼 그가 좀더 자신을 편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순순히 자세를 고쳤다. 실버애쉬의 시선이 닿는 곳이 보기 쉽도록 팔을 들어올리거나 몸을 틀었고 발걸음에 맞춰서 아주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실버애쉬가 볼멘소리로 팬텀에게 이야기한다. 팬텀은 자연스럽게 실버애쉬의 명령을 받고 무동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팔을 살짝 들어올린 상태였기 때문에 지금 팬텀의 모습은 솜씨좋은 조각가가 심혈을 기울어 다듬고 조각한 작품 같았다. 실버애쉬는 그런 팬텀을 보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한껏 내려간 그의 눈썹이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표출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팬텀은 아주 가만히 실버애쉬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편하게 있어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팬텀은 자세를 고치지 않았다. 마치 그 자세가 침대에 누운 것 마냥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자세라고 주장하는 듯 했다. 결국 팬텀에게 바짝 다가온 실버애쉬가 그의 어깨를 쥐고 허공에 있는 손을 잡아 천천히 내렸다.

“굳이 맞춰주지 마.”

팬텀은 실버애쉬를 바라봤다. 맞춰주지 말라는 요청을 받은 팬텀은 가만히 실버애쉬의 얼굴만 바라본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오히려 맞춰주지 말라는 요청에 맞춰주려는 팬텀의 모습을 보고 실버애쉬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한 번의 파티에서 입을 거라면 이렇게 맞춤으로 주문하지 않았을거다.”

“그렇다면?”

“내가 입었던 옷을 수선해서 입혔겠지.”

“그런가….”

귀족의 품위를 생각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팬텀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실버애쉬는 팬텀에게 귀족다운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 그다지 없었다. 실버애쉬는 자신이 앉아있던 소파로 돌아가 디자인 북을 들고 팬텀에게 내밀었다. 팬텀은 그걸 또 준다고 그대로 받았다.

“봐라. 그리고 마음에 드는 걸 이야기 해.”

“없다.”

팬텀은 책을 펼치지도 않고 즉답했다. 실버애쉬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 눈 앞의 배우를 나체로 벗겨서 파티로 입장하는 상상을 했고 단 1초만에 그 상상을 집어던졌다.

“다시 말하지만 굳이 한 번의 파티에서 입을 거라면 난 이렇게까지 하지 않는다.”

팬텀은 묵묵히 책을 들고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손에는 힘이 들어가는지 책의 표지가 살짝 구겨지고 있었다.

“네가 암살일을 하지 않을 때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는 옷을 주고 싶다.”

팬텀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책과 실버애쉬의 얼굴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그리고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고심하며 혀 안에서 단어를 골랐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할지 짚이는 게 없었다. 배우로 극단장을 포함한 여러 사람에게 옷을 받아 보았지만 그 옷들은 전부 노골적인 의미가 담긴 것들이었고 팬텀은 그저 군말 없이 그것을 걸치고 옷을 준 사람이 바라는 모습을 연기했다. 하지만 평상시에도 입을 수 있는 옷이라니? 팬텀은 자신의 일상과 평상이 어떤 형태어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했고 그 때문에 무엇을 골라 스스로에게 입혀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혼란에 빠졌다.

“어차피 내 옷을 수선하면 나는 입지 못해. 그렇다고 너에게 입으라고 줄 수도 없다.”

“왜지?”

“암살자가 내 옷을 입고 다닌다니, 만에 하나 네가 잡히는 순간 어떤 추궁을 받을지 두려워.”

전혀 두렵지 않은 말투와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투였지만 팬텀은 실버애쉬가 염려하는 말을 순순하게 받아들었다.

“애초에 옷을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내 옷장에 걸어두면서 공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냥 이 옷을 입고 가겠다.”

“암살하던 의상을 입고 간다고…?”

실버애쉬는 팬텀이 저 멀리 걸어둔 옷과 망토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암살 의뢰를 한 사람이 퍽도 눈치 차리지 못하고 얌전히 있겠군.”

팬텀은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물더니 그대로 책을 만지작 거린다.

“난 실용적인걸 추구한다. 한 번 입고 버리거나 다시는 입지 못할 옷으로 천을 낭비하기 싫다. 하물며 이런 비싼 맞춤 의상의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렇게나 입고 다니거나 억지로 입혀지는 것도 바라지 않아. 다시 말하지. 네가 입고 싶은 옷을 골라라.”

그제야 팬텀은 책을 펼쳐보았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천의 샘플과 디자인을 눈에 하나하나 담으면서 미간을 좁힌다. 미의식과 예술에 대한 감각은 예민하게 팬텀의 시신경을 지배하고 있었으나 ‘평상시에 입을 옷’이라는 단어 하나가 팬텀의 의식을 박박 긁어 놓고 있었다. 모든 것이 예술로 만들어졌고 예술로 행했고 예술로 이어졌었지만, 죽음 만큼은 예술로 받아들이지 못한 팬텀에게 예술과 관계없이 일상을 보내는 옷이라는 기준은 팬텀이 가진 미의식을 전부 맞추어서도 안될 것만 같았다. 일상조차 예술이 될 수 있지만 실버애쉬는 그런걸 바라는 게 아니다. 팬텀은 반쯤 책을 읽다가 덮어버렸다.

“나는 배우다. 배우는 배역에 맞는 옷을 입지, 스스로의 옷을 골라서 입지 않아. 네가 동행자에게 어울리는 옷을 골라 입혀라.”

실버애쉬는 팬텀의 말에도 눈썹만 까덕거리고 책을 다시 턱짓했다. 팬텀은 군말없이 다시 책을 펼치고 마저 남은 반절을 읽었다. 팬텀은 실버애쉬에 대해 작게 배웠다. 이 사람에게 변명과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잘 어울리는 군.”

팬텀은 어깨에 자리잡은 장식과 목에 자리잡은 장식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곰질거렸다. 사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화려하다. 특히 어깨를 감싸는 천의 붉은 안감은 팬텀이 지내던 극단의 선홍빛 커튼을 떠올리게 했다. 분명 자신이 달아달라고 한 장식인데도 어깨에서는 파멸과 광기가 만져진다.

옷을 완성하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팬텀은 그동안 본인의 은신처에서 숨어지냈다. 처음에는 같이 가자고 권유했던 실버애쉬는 팬텀의 거부를 순순히 받아들었고 대신 은신처에 대한 정보를 얻어갔다. 실버애쉬는 결코 손해보는 짓을 하진 않는다. 팬텀은 그의 행동에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편안함도 같이 느꼈다. 옷의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던 일만 제외한다면 팬텀에게 실버애쉬는 같이 있으면 익숙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통제와 명령 그리고 거래 이따금씩 닿는 감상하는 시선. 하지만 극단과는 묘하게 달랐다. 자신이 가진 광기와 어둠을 부풀리고 심연에 빠트리려는 극단과는 달리, 실버애쉬는 그런 부정적인 걸로는 해칠 수도 없고 도리어 그런 부분을 통제하고 압박하여 억누를 수 있는 눈부신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실버애쉬의 손아귀에 잡혀 휘둘리는 동안 팬텀은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좋았다. 이게 평상일까?

“만족하나?”

“만족한다. 너는 어떻지?”

“나도 만족한다.”

팬텀은 실버애쉬가 왜 이런 디자인을 골랐는지 아직도 의아했다. 양장점에서 실버애쉬는 팬텀에게 두 번 이상 몇 번이고 다시 다자인 북을 읽도록 시켰고 팬텀은 여전히 아무것도 고르지 못하며 책을 몇 번이고 정독했다. 그리고 그런 팬텀의 모습을 관찰하던 실버애쉬는 팬텀이 어느 한 페이지를 바라보고 있자 그대로 책을 뺏어들더니 재단사를 불러 팬텀에게 어울리도록 변형하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팬텀에게 마음에 드는 색을 고르고 어깨에 달 장식의 디자인을 그리라고 명했다. 당시에는 얼이 빠졌었으나 옷을 걸친 지금은 팬텀은 실버애쉬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역시나 자신보다 네가 고른게 좋은 것 같다고 언급하는 팬텀에게 실버애쉬는 그 옷은 자신의 미감을 떠나 팬텀 네가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라고 이야기 했다. 정확히는 네가 네 눈에 제일 오랫동안 담은 디자인이라고 했다. 실버애쉬는 본래 마음에 드는 건 더 오래 눈에 담는 법이라고 설명했고 굳이 얼마만큼 오래 팬텀이 그 디자인을 봤는지 설명까지 해주었다. 팬텀은 그제야 그렇군 나는 이런 디자인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그냥 받아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실버애쉬가 짧게 탄식하는 소리를 냈으나, 팬텀은 나는 이런 디자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막 배운 것처럼 뇌에 입력했을 뿐이었다.

“한 번 돌아보도록.”

팬텀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돌면서 실버애쉬가 자신을 감상하도록 두었다. 예술을 향한 실버애쉬의 시선을 날카롭지 않다. 그는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지 않는다. 좋은 부분만 보고 만족할 줄만 안다. 평가와 평론을 위해서는 그다지 좋은 시야는 아니겠지만 팬텀은 그게 무척이나 편안했다.


팬텀이 선물 받은 사복은 드리밍 나이트 메어 입니다.

솔직히 사복 치고는 너무 화려합니다. 그래서 이유를 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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