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초청2

실버애쉬x팬텀

by 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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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팬텀은 자신에게 암살을 의뢰한 자의 정보를 곧이곧대로 실버애쉬에게 고했다. 처음부터 제대로 받아들인 의뢰조차 아니었기에 죄책감이나 직업의 윤리의식 같은 건 전혀 의미가 없었다. 암살자에게 직업 윤리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기도 하다.

“놀라지 않는군.”

“예측했던 바다. 그저 증거가 없었을 뿐이지.”

실버애쉬는 팬텀의 손에서 자연스럽게 명함을 받아간다. 수상한 명함에 신비한 방식으로 적힌 연락처. 학종이 같은 모양새는 장난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실버애쉬는 그곳에 담긴 예술과 의미를 평가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여전히 예술은 수단이다.

“덕분에 일이 쉬워지겠어. 걱정마라, 나는 죽이는 방식으로 해결 하진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지. 실버애쉬는 먼 거리에 있는 곳에 시선을 두고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살육도 예술의 취급과 다를게 없다. 그저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다. 결코 목적이 될 수는 없었다. 복수도 쉐라그의 미래도 죽음으로 끝낼 순 없다. 그 과정에 피가 뿌려지는 한이 있다 한들 지금은 아니다. 기꺼이 피를 흘릴 생각도, 그로 인해서 죽음을 불사를 각오도 실버애쉬에게는 있었으나 지금은 그의 고향처럼 너무나 먼 이야기 였다. 멀게 닿는 시선 너머로 상념에 이성이 먹혀 버리듯 달이 구름에 가려진다. 실버애쉬는 시선을 다시 자신이 존재하는 복도로 돌렸다. 모험을 한 것 치고는 너무 싱겁게 끝나버릴 것 같은 협상 테이블이다. 팬텀은 지나치게 자신의 위치에 순응했고 어떠한 이득을 볼 생각도 없이 정보를 넘겼다. 실버애쉬는 그 정보를 분석하고 곧이어 있을 일과 배후를 처리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다가 얌전히 그림자 속에 서 있는 팬텀을 마주보았다.

가는 얼굴 선, 망토에 가려진 몸은 언뜻 보아도 우아하다. 주연 배우의 역할을 할 정도니 목소리도 더할나위 없겠지. 그리고 손쉽게 얻은 정보 하나로 이런 귀한 신분을 놓칠 순 없다. 정보의 가치가 보잘 것 없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얻어갈 것이 있다면 더 많이 얻어가야만 한다. 계산은 철저하게, 거래는 확실하게. 최대의 이익을 볼 수 있도록.

“팬텀.”

“왜 그러지?”

“이 명함은 네가 나를 염탐한 댓가로 받도록 하겠다.”

방금 전의 검을 든 댓가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팬텀은 실버애쉬의 말 속에서 뒷편의 의미를 읽었다.

“너는 나와 곧 있을 파티에 [크림슨 극단]의 주연 배우로 참석해 줘야겠어.”

팬텀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확장된다. 실버애쉬는 팬텀에게 있어서 그 극단이 일종의 역린이라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다시금 그 이야기를 꺼낸다. 팬텀이 이 거래를 거절 할 수도 있으나 실버애쉬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지금 이 곳은 무대가 아니고 협상을 위한 테이블이다. 그리고 실버애쉬는 테이블 위로 올라온 먹잇감을 순순히 놓아줄 성미의 사람은 아니었다.

실버애쉬는 이기기만 하는 승부를 즐기진 않는다. 질 수도 있고 어쩌면 아슬아슬하게 도박판처럼 흔들리는 순간을 즐기는 승부사의 기질도 있었다. 물론 그 끝은 언제나 실버애쉬의 승리로만 끝나야했으며 지금까지 그렇게 끝나는 결말 말고는 다른 결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분명 리스크와 실패라는 부분은 존재했고 그 부담을 실버애쉬는 언제나 짊어지곤 했다.

“그저 옆에만 서 있어주면 된다. 이목을 끌기 위함이니까. 그 이후로는 내가 네 신변의 보증인이 되어주도록 하지. 타인에게 너를 증명해주겠다거나, 너에게 필요도 없을 신분증을 만들어 주겠다는 건 아니야. 내가 접한 녹화본과 같은 [크림슨 극단]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고 또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도록 폐기하겠다는 의미다.”

넓어졌던 팬텀의 동공이 아주 천천히 좁아들기 시작했다. 보다 쉬운 일이라는 미끼, 그리고 약간의 이득을 쥐어준다. 그 속에 그가 극단의 존속을 바랬는지 아니면 극단의 와해를 바랬는지 확인을 위한 떠보기는 덤이다.

“…”

팬텀은 다시금 침묵한다. 하지만 깨어진 가면 아래에서 그 침묵을 해석하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실버애쉬는 가만히 팬텀의 눈동자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걱정 그리고 굳이 왜 자신을 지목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듯한 감정을 찾아냈다.

“네가 마음에 들었다. 정도로는 부족한가?”

젊은 처자에게 했다면 아마 끔벅 넘어갔을지도 모를 정도로 달콤한 문장이다. 하지만 팬텀에게는 도리어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보였다. 환심을 사고 좋은 꼴은 본 적이 없는 듯한 태도다. 그런 반응을 보면서도 실버애쉬는 그저 팬텀을 관찰하고 이 자를 어디에 배치해야하는지, 어디에서 등장시켜서 판을 이끌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이 자를 거절하지 않고 붙잡을 수 있을지 냉정하게 판단한다.

“이유 없는 호감 만큼 비싼 건 없다.”

“그래, 무료야 말로 가장 비싼 비용인 것처럼 말이지.”

실버애쉬는 기분 좋게 웃는다. 역시 예술과 거래는 맞닿아 있는 부분이 크다.

“너에게 나의 암살을 의뢰한 자가 참석하는 파티가 있다. 그리고 그 주최자는 예술에 관심이 많지. 예술에 관심이 많은 귀족들 사이에서 [크림슨 극단]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없다고 봐도 좋아.”

“…그렇겠지.”

“거기서 네가 주연 배우였다는 것만 언급해주면 된다. 말은 하지 않아도 돼. 극단이 와해된 이후로 넌 요양하고 있다고 할테니. 그저 파티의 주최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줄 정도의 주목도만 있으면 될 일이다.”

팬텀은 바닥을 내려다 본다. 그 머리속에 어떤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을지 실버애쉬는 알 수가 없다.

“벽의 꽃처럼.”

‘벽의 꽃’ 무도회에서 춤 신청을 받지 못해 그저 벽 쪽에 기대 서 있는 아가씨를 칭하는 말이다. 성인 남자인 팬텀을 여자의 위치로 고정했다는 사실 보다도 팬텀은 조연이 되어야 한다는 자신의 상황을 더 어색하게 받아들었다.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한다면 되는 것일까? 정말로? 실버애쉬라는 자는 귀족이다.

“너는… 귀족이지 않나. 굳이 동행자를 구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푸흡.”

실버애쉬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아무래도 이 주연 배우는 좀처럼 귀족과의 접촉이 없는 모양이다. 귀족에도 수많은 계급이 존재하고 압박과 인력 그리고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평가와 가치가 매겨진다. 빅토리아 출신이 아닌 실버애쉬에게 있어서 언제나 귀족사회의 교류는 자신을 증명하고 연기하며 가치를 내세우고 몇 번이고 평가를 받아야 하는… 마치 무대와 같은 장소였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평판은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쑤고 자칫하다간 다시는 사교장에 얼굴을 내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극을 망친 배우가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것과 같이.

“팬텀.”

암살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유약하고 암울한 얼굴이 실버애쉬에게 닿는다. 실버애쉬는 팬텀이 지금 이 표정이야말로 진실된 그의 얼굴이라 판단했다.

“나는 변방에 있는 나라의 귀족이다. 파티에 참석할 자들은 아마 [크림슨 극단]보다도 내 나라의 이름을 모를 가능성이 높다.”

약점은 내보이지 않는게 좋다. 하지만 실버애쉬는 타인과 모든 걸 공유하지 않더라도, 필요하다면 기꺼이 카드패를 꺼내는 것처럼 자신의 일부를 전시할 수 있었다.

“나는 너의 입장을 팔아 그 파티의 초청될 생각이다. 난 네가 필요해.”

처음에는 빚을 지우고 그 다음에는 거래를 한다 마지막은 오히려 이쪽에서 자세를 낮추고 부탁을 권한다. 여기서 능수능란한 협상가라면 역으로 실버애쉬에게 거래를 다시금 걸고 본인에게 유리하게 판을 만들겠으나, 실버애쉬가 보는 팬텀은 그러한 성질을 가진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약한 입장의 부탁을 받는 걸 더 거절하기 어려워하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알겠다.”

분명 암살 대상과 암살자로 만났으나, 그 다음은 거래를 하는 협상가를 지나, 마지막은 파티의 초청된 귀족과 동행자의 위치로 변모되었다. 실버애쉬는 팬텀에게 우아하게 손을 내민다. 팬텀은 내밀어진 손을 다소곳하게 잡았다. 실버애쉬는 팬텀의 손등 위로 가볍게 키스했다. 이건 지금부터 새로운 연극을 이어나가자는 신호이자 동맹을 맺는 일종의 의례다.

팬텀의 손을 잡아끌어 그의 손목을 매만지면서 실버애쉬는 이 주연 배우에게 어떠한 의상을 입혀야 할지 상상했다. 그리고 옷의 치수를 재고 그를 꾸미는 행위가 상당히 즐거우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름다운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과연 팬텀은 아름답다. 실버애쉬는 팬텀을 보고 스스로의 예술에 관한 태도를 아주 조금 누그러트렸다. 예술은 그저 수단과 목적과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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